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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게시판 스크랩 조령(문경새재)의 가을풍경
해당화 추천 0 조회 115 11.12.25 18: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언   제 : 2010년 10월 23일(토)

날   씨 : 맑음

누구와 : 고딩 동창생 한버스 만땅

어데에 : 문경새재(조령) 나들이(3관문~1관문)

<문경새재전시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유통과 군사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 하여 붙혀졌다고도 하며,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 새재라고도 하며, 하늘재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사이에 있다하여 새재, 새(新)로 만들어진 고개라 하여 '새재'라 불렀다는 다양한 설이 있다. 

<야외공연장>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비'가 남아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申砬) 장군, 동학(東學)과 의병(義兵)이 남긴 사담(史談)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이 일대를 1981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많은 탐방객이 찾는 곳이다.

오늘은 고딩 동창생들이 단체 나들이를 하는 날이다. 고향인 청주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조령나들이를 하는데, 제천에 사는 나는 청주와 제천의 중간에 있는 조령을 대리기사(마누라)를 모시고 직접 조령으로 향한다. 가을 단풍철이라 그런지, 조령은 오전부터 밀려드는 행락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경제가 어렵다느니 먹고 살기가 힘드니 하여도 밀려드는 행락객들과 주차전쟁을 보면 우리도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되었구나 하는 것을 전후 베이비붐시대의 선발주자로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드리고 살아온 세대로서 경쟁성장의 실감을 아니할 수가 없다.  

 

 <문경사과>

 

 

 <조령1관문>

 

 <타임켑슬>

 

 

 <성균관 스켄들 촬영현장>

 

 <KBS촬영장 입구>

 

 

 

 

<KBS촬영장 후문>

 

조산은 인위적으로 만든 산을 말한다. 풍수지리적으로 공허하거나 취약한 지점에 조산을 만들어 그곳을 보강하고자 하는 의식이 담겨 있다. 문경지역에서는 골맥이 서낭당으로 불리우며, 마을입구나 경계지역에 세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조산>

 

 

들머리가 다가오면 길옆으로 "지름틀바위"가 보인다. 삐죽하게 튀어 나온 것이 참깨나 들깨, 콩 등의 기름을 짜는 기름틀의 누름틀 같이 생겼다 해서 "기름"의 경상도 사투리인 "지름"을 붙혀 "지름틀바위" 라 부른다. 새재길을 계곡쪽으로 조금 벗어나면 "마당바위"가 나온다. 넓이가 20제곱미터쯤 되는 넓적한 바위로 몇명이 앉아서 여흥을 즐기기에 좋으나, 옛날에는 이곳에 도적들이 숨어 있다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덮치기도 했다고 한다. 영남에서 과거보러 한양으로 가다가 도적을 만나 몽딸 털리고 나면 과거도  

                                    <지름틀바위>

포기하여야 하고  그거야 말로 난감지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남지방에  사시는 분들은 잘 뚤린 도로에 절하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조금 더 오르면 작은 인공연못이 나온다. 조곡폭포에서 나무로 만들어 놓은 물 홈통을 타고 새재길을 따라 내려오던 물줄기가 중간에 물래방아를 한번 돌리고 나서 다시 길옆의 수로를 타고 내려오다 연못을 만들어 노았다. 이곳에 정자를 만들어 놓아 지나는 길손들이 앉아 쉴 수 있도록 하여 놓았다. 연못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몇마리 노닐고 있다.

 

                                              <마당바위>

옛날에는 신임사또가 임명되면 육방관속이 그 본가까지 모시고 왔었다. 서울 사는 가난한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고 얼마 후 달성 판관으로 임명된지라 달성의 육방관속은 관례대로 사또를 모시러 갔다. 신임 사또가 인물이 어떠하며 성격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한마음에 급히 사또 집을 물어 찾아가니 기대와는 딴판으로 사또의 키는 5척도 못되는 단구요 거기다 얼굴까지 빡빡 얽었고 나이도 겨우 스물이 넘을락 말락하는 애송이로 도무지 볼품이 없었다. 육방관속들은 별 것 아니구나 속으로 만만히 보며 함께 내려오는데 문경새재에서 쉬어가게 되었다. 그때 찢어진 갓을 쓰고 남루한 옷차림의 어린 상주가 사또에게 울면서 딱한 사정을 하소연하였다.  

내용인즉 가난한 살림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비용을 마련키 위해 상주의 몸인데도 닭 다섯 마리를 팔러 장에 나왔다. 평생 물건을 팔러 시장에 나온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파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한 장수가 가까이 와 자기가 맡아 있다가 팔아주겠다면서 상주의 닭 다섯 마리를 자기 닭장 속에 집어넣었다. 한나절을 지나 그 닭 장수에게 맡긴 닭을 달라니 맡은 일조차 없다고 잡아떼 본관사또에 이 사실을 알리고 닭을 찾아 달라했더니 "이놈 네 닭을 내가 어찌 안단 말이야" 고 호통만 칠 뿐 찾아줄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다. 얘기를 다 듣고 난 달성판관은 곧 사령을 보내 닭 장사를 잡아오게 했다. 

상주에게 자기 닭을 찾아라 하니 여러 마리 중에서 하나 하나 골라낸다. 사또가 먼저 닭 장수에게 물었다. "이놈 저 닭이 정녕 네 놈 것이 이라면 저 닭에게 아침에 뭘 먹였느냐" 닭 장수는 쌀, 보리 등 온갖 것을 주어 섬기며 횡설수설한다. 상주에게 다시 물으니 아무 것도 먹일만한 것이 없어 집에 있는 수수 한줌을 먹였다는 대답이다. 다섯 마리 중 한 마리를 잡으니 과연 수수가 나왔다. 닭 장수는 꼼짝못하고 백배 사죄한 후 그를 얼러 닭 값을 열배나 물게 하고 문경 본관사또에게 5백냥을 빌어 상주에게 장례비용으로 쓰도록 마련해 주었다.  교묘히 사건의 곡절을 가려내는 판관의 기질을 본 육방관속들은 혀를 내둘렀고 경멸이 여겼던 것을 뉘우쳤다.

 <조령원터>

달성판관이 부임한 후 여러 달이 지나도 문경사또에게 빌린 돈 5백냥을 갚지 않자 문경사또가 사람을 보내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달성판관은 심부름 온 사람을 불러 "돈을 벌써 갚았는데 네 고을사또가 그렇게 정신이 없으시냐"고 되려 나무란다. 심부름꾼이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자 사또에게 돌아가 대전통편 몇장 몇조를 보면 알 것이라 이르도록 했다.  대전통편 그 장은 본래 자기 고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본관사또가 처리 못했을 때는 사또가 벌금을 5백냥을 물도록 규정한 것이다. 달성판관은 그것을 이용, 5백냥을 빌린다고 받아 불쌍한 상주에게 도움을 베풀고 똑똑치 못한 사또를 그 나름대로 징벌한 것이다.

 조금 더 오르면 조령원터가 나온다. "원"은 옛날에 "역"의 "여관"과 같은 역할로, 이곳은 조선조에 공용으로 출장을 하던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던 곳이라 한다. 조령은 예로부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중요한 교통로로 "조령원"외에도 "동화원" "신혜원"등이 더 있었다고 한다. 조령3관문을 못미쳐, 부봉의 들머리에 있는 "동화원"터에는 지금은 아담한 휴게소가 자리하고 있다. 

<등룡정(登龍亭)-활터(불멸의 이순신 촬영장소)>

 

 

 

<무주암>

무주암이 나온다. 무주암이란 누구든지 올라가 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바위로 옛날에는  이 바위 아래 무인 주점이 있어 술과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여 두었으며, 지나는 길손이  이 바위에 올라 주변의 경관을 즐기면서 목을 축인 후에 마신만큼의 주대를 함에 넣고 갔다고 한다.   

 

 <휴게소>

 

조선 태종 때 처음으로 조령의 길을 개척할 때의 일이다. 문경현감이 긴급히 조정에 치계(馳啓)하여야 할 중대 안건이 있었다. 현감은 요성 역졸 중에 신체가 건강한 역졸을 골라서 조정에 상계(上啓) 할 장계를 가지고 급히 다음 역까지 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감의 명령을 받은 역졸은 다음 역을 향해 문경새재를 넘어가는데 새재의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호환(虎患)을 당하였다. 문경현감은 체송간 역졸이 호환 당한 줄도 모르고 조정에 상계하였으니 그 비답만 내릴 줄 알고 기다리고 있던 조정에서는 문경현감에게 관계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엄명이 내렸다.

문경현감은 깜짝 놀라 요성역으로 가서 체송한 역졸을 호출하였더니 그 역졸은 지금까지 귀임하지 않고 행방불명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을 안 현감은 즉시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호령하고 그 역졸의 행방을 탐색하기 위해 문경새재 일대를 수색한 결과 호랑이가 먹다 남은 신체 일부와 행장이 발견되었다. 현감은 또 다시 지연된 사유와 아울러 조정에 사건의 경위를 상보(上報)했다. 이 장계를 받은 태종은 대노하여 즉시 봉명사(奉命使)를 차원(差員)하던 차 여 문경새재 산신령을 잡아오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봉명사는 주야배도(晝夜倍道)하여 문경새재에 도착하여 산신령을 포착하려고 하나 산신령을 잡을 묘안이 나지 않았다.

<주막>

궁여일책으로 새재 산신사(山神祠)에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한 후 제문을 불사르고 혜국사에 머무르면서 하회(下廻)를 기다렸다. 그날 밤 만월로 월광이 교교하여 잠도 못 이루고 전전반측(轉轉反側)하고 있는데 삼경쯤 되어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호랑이 울부짖음이 일어나더니 잠잠해진다. 그 이튿날 새재 산신사 앞마당에 여산대호(如山大虎)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봉명사는 그 호랑이를 박피하여 태종대왕께 호피를 바치고 사실을 상주(上奏)하였다.그후부터 문경새재에는 호환이 사라졌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전진공(錢珍公 : 聞慶錢氏 2世祖)이 혜국사에 유숙하여 있는데 그의 꿈에 새재 산신령이 현몽하기를 '나는 새재 산신령이요 나라에 득제하여 아직 면죄를 못 받았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나라에 상소(上疏)하여 억울한 죄명을 씻어줄 수 없겠는가?'하고 간청했다. 그는 쾌락(快諾)하고 즉시 새재 산신령에 관한 사죄상소를 올렸더니 태종께서 친히 비답(批答)을 내리시어 새재 산신령의 죄를 사(赦)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교귀정>

교귀정은 조선시대에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 하는 교인처로 성종때 건립되어 폐허가 되어 유지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에 중창하였다고 한다.

조곡폭포를 지나면 새재길의 또하나의 명물인 용추가 나온다. 용추는 예로부터 시인이나 묵객들이 즐겨 찾는 경승지로 "동국여지승람"에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용이 오른 곳"라 전하며, 바위에는 1699년 숙종 25년에 "구지정"이라는 분이 "용추"라고 커다랗게 써서 음각을 하였다고 전한다.

 <용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꾸꾸리바위"가 있다. 바위 밑에 송아지를 잡아 먹을 정도로 커더란 꾸꾸리가 살고 있어서 물속의 꾸꾸리가 움직이면 바위가 움직였다 전하며,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들어 주었다고 한다.

 

 

하산길에 조곡폭포를 만나게 된다. 그 높이도 대단하고 수량도 풍부하니 조령에 또 하나의 볼거리를 만들어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니고 사진을 찍고자 대기를 하고 있다. 조령은 곳곳에 볼거리를 만들어 놓았다.  오늘 소개하지 않은 것 외에도 책바위, 산불됴심비, 예배굴, 등과 함께 대하드라마 "왕건"의 촬영지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으나 패하자 조령로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방비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명나라 측에서도 선조가 안주에 파천하여 있을 때 백상루에서 유원외가 선조에게 조령관 설비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전란에 따른 물자의 결핍으로 인해 중국 산해관처럼 하자느니 조령만이 천험은 아닌데 다른 곳은 설관하지 않아 되겠느냐는 등 논의만 거듭하게 되었다. 결국 평안감사 이원익, 병사 신집, 우승지 유몽정, 주서 김상설, 검열 조유한 등의 논의로 죽령과 조령에 설관하기 위한 자료수집차 화공 12인을 중국에 파견토록 선조의 지시가 있었으나 파견이 중지되었다.

선조 26년 12월 영의정 류성룡이 성에 의지하여 승전한 경험을 들어 조령 설관을 다시 주장하여 선조도 조령 설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류성룡은 수문장(守門將) 신충원(辛忠元)의 조령지세와 설관 및 설관 후 파수 계책에 대한 것을 듣고 선조 27년(1594) 2월에 상주(上奏)하게 하였다. 조령은 나라의 문과 같아 충주를 지키자면 조령에서 막아야 되고 충주가 함락되면 한강수백리(漢江數百里)를 자연히 잃게 된다. 충주 사는 수문장 신충원이 조령지세를 잘 알고 있다.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정면 3칸(間)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이다.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측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오르는 도중에 3관문에서 내려오는 동창들을 만나 같이 내려오다 KBS촬영장을 둘러본다. 드라마 '왕건'을 촬영하며 만들어진 셋트장은 그 이후로도 사극촬영장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두개의 드라마가 촬영중이라 한다.

 <애들이 늙다보니 때깔이 예전 같지 않아~ㅉㅉ>

 

KBS촬영장은 한국방송공사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사극 대하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하여 2000년 2월 23일 문경새재 제1관문 뒤 용사골에 건립하였던 곳이다. 당시 공사비는 32억원을 투입하여 65,755㎡의 부지에 왕궁2동, 기와집42동, 초가40동, 기타 13동으로 건립한 국내 최대 규모의 사극 촬영장이었다.촬영장을 문경새재에 설치하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조령산과 주흘산의 산세가 고려의 수도 개성의 송악산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어 사극 촬영장으로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KBS 대하드라마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대조영의 촬영 주무대가 되었고 영화는 스캔들, 낭만자객 등을 촬영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KBS 대왕세종 촬영장은 문경시의 제작지원으로 과거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트장을 허물고 새로운 조선시대 모습으로 2008년 4월 16일 준공한 것이다. 공사비는 75억원을 투입하였으며 규모는 70,000㎡ 부지에 광화문, 경복궁, 동궁, 서운관, 궐내각사, 양반집 등 103동을 건립 하였으며 기존 초가집 22동과 기와집 5동을 합하여 130동의 세트 건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임진왜란때 천하의 요새인 조령에서 왜군을 막지 못하고 무너지자, 밀려오는 왜군을 막기 위하여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전몰한 신립장군의 이야기등 많은 역사와 애환이 서린 조령을 돌아보며, 하늘재~문경새재~이화령~이화령터널~중부내륙고속도로 터널로 변모해 가면서 길 하나에도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흥망성세로 이어지는 역사를 느끼게 된다. 다행이 조령은 관광지의 면모를 살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다행인 듯하다. 

 

조령은 수려한 산맥 사이를 뚫고 나간다. 동으로는 주흘산, 부봉, 마패봉, 신선봉이 잠시 연어봉으로 여맥을 가라 앉혔다가 탄항산과 포함산, 덕주봉과 만수봉을 지나 월악으로 이어지고, 서로는 조령산, 신선암봉이 깃대봉으로 이어져 나가다 조령3관문으로 잠시 여맥을 내려 놓은 뒤 마패봉으로 이어진다. 조령을 찾는 분들은 조령의 명산을 함께 둘러 본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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