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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유괴 아닌가?
(민9:1-23)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민수기 9장 말씀 중심으로 <이거 유괴 아닌가> 하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이거 유괴 아닌가.
좀더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정녕 인도하심인가, 아니면 납치하거나 유괴하신 것인가 하는 제목으로 말씀 생각해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 않은 앞 부분에는 유월절에 관한 이야기가 또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 이야기와 오늘 우리가 읽은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도하시는 이야기가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유월절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량하시고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그런 사건입니다.
그래 오늘 보면 부정하게 된 자가 유월절 음식을 먹지 못해야 되느냐 먹을 수 있느냐 라는 문제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진영 속에서 시체를 만졌기 때문에 부정해진 자 일지라도 잠시 부정함의 규정에 의해서 제약을 받지만 이 부정함이고 하는 현실이 유월절의 어떤 약효를 무효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신 그 큰 테두리 안에서 부정함과 정결이 정해지기도 하고 지켜지기도 하는 것이지 그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사건이 더 근본적이라는 겁니다.
내가 내 아들이 내 뜻을 따르지 않아서 우리가 야단을 치기도 하고 하지마는 결국은 내 아들이라고 하는 근본적인 그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 관계 안에서 용서도 되 야단도 치기도 하지마는.
그래 부정과 정결에 관한 것이 결국은 유월절 사건보다 더 작은 거라는 거예요. 더 유월절 사건이 근본적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내 백성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정한 규정에 저촉이 된다고 해서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끊어지는 이유, 유월절 사건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사건이라면 그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는 일이 진짜로 어떻게 해서 일어나느냐?
물론 그 앞에도 내 백성 중에 끊어지리라 끊어지리라 하는 얘기가 계속 나왔습니다마는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 있느냐 라는 것을 오늘 구름기둥과 불기둥 사건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매일 반복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구름기둥이 떠서 움직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같이 움직였고 구름이 그대로 진영 위에 머물러 있으면 그대로 머물렀던 것이에요.
밤에는 구름 대신에 불이 나와서 그 추운 사막, 밤에는 영하로 떨어진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사막을 제가 못 가봐서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렇게 얘기하지요. 그렇게 불기둥으로 지켜주시고 그 다음에 낮에는 뜨거운 햇빛을 막기 위하여 구름이 진영 위에 이렇게 머물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 그게 머물러서 있으면 머물고 그게 떠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걸 보고 따라갔던 것이에요.
이렇게 움직였는데 여러분 오늘 기가 막힌 얘기가 나옵니다.
22절 보면 말이에요,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23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여호와의 명령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일까요?
지금 노약자를 포함한 이백오십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 한모금 안 나오는 광야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이제 출애굽 사건을 일으켜셔서 광야로 데리고 나오셨어요.
자, 2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길게 잡아 한달이라고 합시다. 한달에 걸쳐 갈 수 있는 그 길을 지금 보면 이틀이든 한 달이든 일 년이든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막에서 이게 뭡니까? 여러분 같으면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못 견뎌요. 이것은 인도하심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적어도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모세라고 하는 훌륭한 지도자를 통해 인도하신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지도력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2주일 안에 보통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거리를 10일 만에 갈 수 있게 하는 것 이게 지도력 아니겠습니까? 이게 뛰어난 지도력이지요.
그런데 2주일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1년 동안 광야에 머물게 하시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이건 인도하심이라고 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매일 먹는 것이라고는 맹물하고 만나 밖에 없어요. 하도 불평하니까 메추라기 고기를 옆구리 찔러 절 받기 식으로 하도 고기 좀 먹게 해달라고 난리를 치니까 메추라기 고기를 주셨습니다. 메추라기 고기가 맛이 있으면 얼마나 맛있겠습니까? 광야에서 그렇게 지내요.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이건 거의 유괴 수준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명령을 따랐다는 말은 좋게 해석하니까 명령을 따랐다지, 유괴범들이 유괴한 어린아이들을 강압적으로 아래라 저래라 해서 지배하는 거 이게 유괴에요.
유괴의 뜻 자체가 사람을 강제적으로 납치하든지 꼬여내어서 자기나 제 삼자의 지배력 아래에 두는 것이 유괴입니다.
근데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다 명령, 명령 명령 얘기가 우리가 읽은 부분에 몇 번 나오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이게 유괴와 똑같은 것이에요. 꼬여내어서 속여서 자기의 지배하에 두는 것.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광야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고기 먹고 잘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광야생활 보다는 낫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살살 꼬였습니다. 10가지 재앙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이 꼬이셨습니다. 그래가지고 홍해바다를 건너게 해서 광야로 끄집어낸 뒤에 지금 1년 2년 이렇게 끌고 다니고 계십니다. 2주일이면 갈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않으시고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에서 이렇게 꼬드겨내면서 끌고 다니고 계십니다. 이게 유괴가 아니면 뭡니까?
여러분, 세계적인 유괴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유괴당한 그 부모님들의 심정이야 똑같겠습니다마는 1932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유괴사건이 유명해진 이유는 린드버그(Lindbergh) 대령 -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공군대령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그 사람의 20개월 된 아들을 유괴한 유괴사건이 유명해졌지요. 결국은 독일계 미국인 하우프트만 이라는 사람이 유괴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동안 까지는 유괴라고 하는 것을 일반적인 범죄로 다루던 미국이 이번 린드버그 대령 사건에서는 아주 강하게 나와가지고 20개월 된 아들을 죽인 유괴범 하우프트만을 전기의자에 앉혀서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광야에 나와서 힘이 없습니다. 20개월짜리 어린아이와 똑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될 방법이 없는 이 사람들을 광야에서 끌고 다니시면서 최소한의 먹이를 주듯이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주시면서 이렇게 1년이고 2년이고 묶어두시는 이런 것을 하나님의 인도라고 믿는다면 누가 출애굽 때 하나님을 좇아 나왔겠습니까? 누가 우리 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겠습니까?
이 세상 살아갈 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인생의 목표들 2주면 이룰 수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40년 끌고 다니실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하나님께 우리를 인도해달라고 말을 하며 부탁을 드리며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무엇을 원하시기에 하나님이 이러고 계시는 걸까요?
우선 요즘 신앙과 비교해서 볼 때 하나님의 이러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한번 생각해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향해 나왔습니다. 문제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에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차단하십니다.
이것은 요즘 우리 말로 말하면 비전을 차단하신 거예요. 비전이 뭡니까?
보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의 성공과 우리 인생을 꽃 피우기 위해서 우리가 보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그 비전을 차단 시켜 버리는 것이에요. 비전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월절 사건을 통해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가나안을 보면서 갑니다. 그 가나안을 마음 속에서 완전히 차단시키십니다. 왜? 하나님을 보게 하시려고.
그래서 멀리 있는 가나안 땅을 못 보게 하시고 바로 앞에 있는 구름기둥만 보게 합니다.
구름기둥이 뭡니까?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고하는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사건이고 상징물이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이 자리에 계신다, 이 자리에 지금 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가나안이라는 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두 번째로,
요즘 신앙적으로 많이 이야기 되고 있는 거, 목적의식.
나를 드라이브해가는 나를 몰아가는 것이 무엇이냐? 목적이다.
여러분, 가나안 땅을 향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로 들어섰다면, 그 목적의식이 드라이브해갔다면 2주만에 주파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갖는 목적의식을 단절 시키십니다.
도대체 구름기둥으로 인도되어지고 1년 동안 진영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목적의식을 갖고 나를 드라이브 해 갈 수가 있겠습니까? 드라이브가 중단될 수 밖에 없는데. 중단 될 수밖에 없잖아요.
아니, 2주면 갈 거리를 지금 구름기둥이 1년 째 머물고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견뎠겠습니까?
그래 여러분, 유월절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은 사건아닙니까? 그런데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얘기가 나와요.
결국은 어디서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사건이 나옵니까?
이 광야의 인도하심, 유괴와 같아 보이는 이 광야의 인도하심을 견디지 못하고 다 끊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유월절은 우리가 세례 받는 사건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홍해를 지나가고 물로 세례를 받는 것처럼 속량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속량된 것이 세례 사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 뭘 얘기하냐? 비전을 얘기하고 목적의식을 얘기하고 내 인생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채우려고 하고 하나님을 채우려고 하는 이유조차도 내 인생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 이러한 목적의식 이러한 비전의식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차단되고 오직 지금 현재 여기에 계시는 구름기둥으로 상징되어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그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는 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다는 것이에요.
마음을 하나님께 붙여야 됩니다. 가나안에 붙이고 있는 한 안 되는 것이에요. 가나안에 붙이고 있던 60만명 장정만 60만명이 어떻게 됩니까?
가데스 바네아에서 “야 좋다. 이제 가나안을 정탐하게 되었으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겠네!” 하고 정탐했다가 그 가나안 사람들의 앞선 문명을 보고 다 놀래 자빠진 것 아닙니까? 결국은 가나안에 마음을 두었다가 다시 말해서 비전이라고 하는 것, 목적의식을 갖고 살다가 거기서 단절되어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서 40년 동안 배회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어버리고 맙니다.
도대체 요즘 교계가 무슨 배짱으로 비전을 떠들고 목적의식을 떠들고 있는지 난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에요. 어떡하자는 것입니까? 기독교인들이여 어떡하자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속량 받은 자들은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으로 변해가지 않는 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아세요?
속량 받은 60만명 장정 중에 2명만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이것을 우리가 천국으로 가나안 땅을 비유할 수 있다면 이 땅에 광야생활을 하다가 60만 명 중에 2명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이 숫자의 비율대로 하면.
그러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비율이 몇 대 몇? 30만 대 1입니다.
우리나라 개신교가 1200만 명이라면 40명이 들어가는 거예요. 1200만 명 중에 40명이 천국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왜? 왜? 모두가 가나안 땅에 대한 비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모두가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된다 라고 하는 목적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결국은 다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서 떨처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에요.
왜 사람들을 왜 교인들을 그렇게 재촉해가고 그러게 드라이브해가는 겁니까? 어떻게 책임을 지려고. 이게 보통 큰일이 아니에요.
내가 목적의식에 어쩌구 어쩌구 하는 이야기들을 비난하면 그 비난한다는 걸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지금 구름기둥을 보고 좇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목적의식이 마음 속에 있을 수가 있겠느냐는 거예요.내가 내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냥 뛰쳐나갈 수 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구름기둥을 보고 좇아가는 자들에게는 비전과 목적의식이 있을 수 없어요.
오직 구름기둥으로 상징되는 지금 내 옆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지 않는 한 견딜 수 없는 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이것과 다른 것이에요. 유괴에요. 이리저리 끌고 다니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만 되고.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 서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을 우리가 손가락질 할 수가 없어요. 우리도 이 입장이 되었다고 하면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을걸요?
그래도 이 사람들은 10가지 재앙의 기적을 보고 홍해를 건넜다고 하는 그런 어떤 기억의 잔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 정도라도 견뎠지 우리 같은 사람에게 광야생활? 여러분, 여름에 날씨가 조금 더워도 신경질이 빡빡 나는 판인데 이 광야에서 아니 왜 2주면 갈 거리를 1년 동안이나 머물고 있느냐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인도가 어디 있습니까? 이건 유괴지요. 살살 꼬여내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들어갈게. 젖과 꿀이 흐르거든?" 그래놓고 40년을 광야에서 돌리십니다.
이래도 하나님께 여러분의 생애와 여러분의 자녀를 인도해달라고 기도하고 맡기겠습니까?
여러분, 핵심을 못 보니까 그래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핵심을 못 보니까.
지금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뭡니까?
우리의 삶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사업과 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일이 안 됩니까?
그 인도하심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젖과 꿀 다시 말해 돈이 많이 벌리는 곳, 큰 아파트, 좋은 차 이런 상황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현재 너를 이끌고 있는 하나님인 내가 너와 함께 함으로 나를 바라보고 나로 만족해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되지 않는 한 내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내 백성의 권 안으로 들어왔지만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없는 심령이 될 때는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될 때는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끊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우리가 얘기했습니다. 몇 만 년 몇 십만 년 일지 모르는 긴긴 세월 동안을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실 때 이미 아담 안에서 내가 태어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몇 억년을 하나님 마음 속에 기억하시다가 이제 태어나서 길게 살아야 70~80년 살다가 수억만 년 영원한 세계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뭐겠는냐는 거예요.
이 땅에서 무슨 비전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무슨 세계를 위한 선교 이런 거겠습니까?
세계를 위한 선교는 누구를 시키느냐? 세계를 위한 선교를 전혀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지금 현재 하나님께 만족한 사람을 들어 세계 선교를 하게 하시지, 처음부터 세계선교! 세계선교! 내 인생을 위해서 내가 목적이 있을 것이다. 목적이 있음으로 해서 이 목적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고 하나님을 즐겨야 되고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까?그런 게 있습니까?
그러면 내 인생을 완성시키겠다는 의식이 앞서가고 있는데 그게 하나님 사랑입니까?
내 인생을 위해서는 목적이 완성돼야 된다, 목적을 알아야 된다. 그런데 그 목적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이게 어디 하나님 사랑입니까? 내 인생 사랑이지.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이거를 면도칼로 가르듯이 명확하게 갈라내지 않으면 정말 이단이 누군지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칼 바르트(Karl Barth)가 얘기한 게 그겁니다. 교회 밖에 있는 이단이 무서운 게 아니다. 정말 무서운 이단은 뭐냐?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이단이 라고 말씀을 했던 것이에요.
지금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는 사간은 하나님의 백성 권 안에 들어온 자들 중에서 진정한 백성을 가려내는 시금석과 같은 작업입니다.
그래서 내 경험과 내 지식과 내 비전과 내 인생의 목적 모든 것과 맞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서 철저하게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나를 죽이며 쫓아갈 수 없는 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열내고 얘기하니까 너무 비장해보여요. 여러분 그런 거 아니에요.
주님의 십지가 붙잡고 마음에서 내 비전을 죽여 버려요. 내 인생의 목적을 죽여 버려요. 다 죽여 버려요. 내 인생을 어떻게 하겠다, 내 인생이 목적으로 만들어졌냐 마냐 이런 생각 할 것 없다 이겁니다. 다 죽여 버려요. 죽은 자가 무슨 목적을 생각합니까?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십자가에 완전히 죽은 자가 하나님을 지금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목적을 갖고 계셔서 구름기둥으로 그 목적지를 향해 인도하십니다. 나는 그냥 하나님을 좋아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 기준을 매일매일 내 마음 속에 적용을 하셔야 되는 거예요. 십자가는 나로 하여금 모든 걸 죽게 만드는 거예요. 가나안 땅을 가고 싶어하는 마음, 내 인생을 어떻게 하면 잘 꾸려 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다 죽이게 만듭니다.
그리고 오직 마음을 누구에게만 향해 살아있는 마음으로? 하나님에게만, 지금 내 앞에 와 계신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두게 하고.
그러면 그 하나님이 내 인생을 위한 비전도 갖고 계시고 내 인생을 위한 목적도 갖고 계시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좋아하면 내가 걸어가는 걸음 걸음걸음 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시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시는 발자취가 될지언정 우리가 그것을 소원할 필요는 없고 소원해서도 안되고, 우리의 소원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로만 집중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사건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에서 인도하시는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의 구름기둥에 철저하게 복종하면서 기쁨으로 지금 내 옆에 계신 하나님으로 기뻐하시며 하루를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7.07.20)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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