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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집에 대한 집착이 강한 시대가 있었을까?
질문 같지않은 질문이다.
언제나 인간은 집에 집착해 왔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나오는 행랑아범도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거지 나사로도
집을 소유하고푼 심정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다만 정도의 차이와 품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내막은 마찬가지이다.
집은 인간의 소유욕구 중 세 번째에 해당한다고 얼마나 귀가 따갑게 들어왔는가.
의, 식, 주...문제...
그렇다.
집은 산자의 생리적 욕구인 것이다.
먹고, 싸고, 자고, 하고, 낳고, 죽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저질스런 집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타락의 농도가 어디까지 왔는가를 짐작케 한다.
집 없는 설움은 없는 사람 문제이고 있는 사람에겐 가벼운 현기증만도 못한 구질구질한 것이다.
나만 잘 살면되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의 꼭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집은 없는 자의 고통이자 있는 자의 오만한 자존심이 될 것이다.
그럼 너도 집이 없느냐?
있다.
그럼 너도 오만한 자존심을 소유한 자가 아니냐?
".......".
박완서의 그남자네 집에서 나온 한 구절이 생각난다.
'졸업식 날 서럽게 운다고 해서 계속 학교에 머물고 싶은 것은 아니다'.
집이라는게 그렇다.
없을 땐 한 없는 선망의 대상이고 가지면 없을 때의 설움을 기억 못하고 오만방자해지는...
평생을 살면서 집에 집착하면서 어떻게 하면 좀더 넓은 평수로 좀더 좋은 가격의 집으로 옮겨갈까
지지리 궁상을 떨며 세월을 낭비하기 보다는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얼마동안 살집 있으면 그걸로 족하고, 더 나은 고상한 인생의 질을 향해 방향을 선회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 아닌가?.
그것도 설계라고 그래 십여년 설계업에 종사하다보니 내 평생 내 손으로 집 한 채 지어보는게 소원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땅 한 백평 갖고 싶어 꿈에서도 땅주인과 실랑이를 한다.
바로 내 고향 집터 얘기다.
무지렁이 같이 사는데만 급급했지 자식을 위한 뭐하나 번듯한 상속물 없는 부모를 모신 나이다.
그러니 적어도 부모님 사시는 집터 만큼은 부모의 손으로 사 놓았을 것으로 알았는데 그 알량한 집터마저 남의 것이다. 기왕에 증조부 때부터 내리 터를 잡고 살아온 집이라 땅 주인도 내 땅 내놓아라 말 못하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생각은 과거에나 통하는 관습이다.
지금은 그 땅에 누가 살든지간에 외부인에게 땅을 얼마든지 팔고 그동안 살던 사람은 내쫒는 세상이다.
그래서 더욱 부모님 살아 생전 고향 집 터를 사고 싶었다.
기도하면 이루어질 것으로 알고 십년 넘게 기도해 왔지만 꿈쩍도 않는다.
기다리다 지쳐갈 무렵 그럼 방 한 칸이라도 지어 연로하신 보모님 뜨뜻한 아름묵에 주무시게 하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쓰레기로 처분할 폐와, 폐목을 고철상처럼 끌어모았다.
집안을 온통 쓰레기장으로 만들 작정이냐고 그런거 주어다 무엇에 쓴다고 법석을 떠냐고, 부모님은 못내 당신이 땅 한평 아들에게 물려주지 못한 것을 역정으로 때론 고지식한 비하의 발언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 내 계산대로라면 내가 상상하는 집을 지으려면 적어도 방 한 칸의 집이라 해도 오천만원은 넘어갈것이다. 그러니 돈은 없고 고집스럽게 때론 나도 나에게 트집을 잡고 울화통을 터트리며 내가 왜 지지리 궁상을 떠는가 싶었다.
생각은 밖으로 끄집어 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심지어 아내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혼자 꾸역꾸역 흙집을 짓기 시작했다.
한 여름 땡 볕 아래 낡고 퇴락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지는 기왓장을 들고 황토를 사들이고 친구놈 불러다 흙비빔 시키고 마치 미친놈처럼 그렇게 집을 지었다.
달포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듯 하늘은 무심한 장맛비를 쏟아부어 거짐거짐 지어가던 담벼락에 물벼락을 내렸다. 와르르...
난 울었다.
아마 자신의 생각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려는 사람들은 나의 이런 심정을 이해 할 것이다.
아들놈이 되먹지 않은 집을 짓는다고 굽은 허릴 휘적거리며 흙을 날라 주시던 부모님도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왜 늙으신 노부모를 이토록 고생을 시키는가... 나도 미친놈이지...
여기서 주저 앉으면 부모님 살아계실제 방한평 못해드린 죄책감으로 살아가야할 것 같았다.
심정은 절박했다. 생활비도 빠듯한 삶에 집지을 여력이 어딨냐며 아내와 말다툼을 했다.
결국 아낸 처음부터 신경을 쓰지 않고 내게 십원 한 푼 보태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일관해 왔다.
아내의 심정을 내 모르는 것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내게 힘이 되 주진 못할 망정 시기상조라며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며 아픈 내 가슴을 콕콕 찔렀다. 그 심정도 난 안다. 그저 침묵할 밖에...
그래서 더욱 나 혼자 고독하게 집을 짓고 싶었다.
무너진 흙담을 다시 정리하고 새로운 구상을 시작했다.
목조건물과 흙벽돌 집을 혼용한 기법으로 집을 짓자.
돈이 많이 들텐데... 그래 돈이야 하나님이 주시지 않겠는가?. 그 분이 내 물주이신데...
컴퓨터 앞에 앉아 새로운 구상을 한답시고 밤을 지샜다.
설계는 완성되고 다시 무너진 하부 구조를 보수하고 장작불로 때려던 폐목에서 쓸만한 나무를 골라냈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 아무개 산이 되어 버린 우리 집의 종산이었던 산에서 보와 도리감을 벌목하였다. 이런 짓이 불법이란 것을 알면서도 나의 집을 짓고 싶은 열망을 어그러뜨리진 못했다.
목수를 불러 치목을하고 난 그 옆에서 생목의 껍질을 벗기고 허드렛 일을 거들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내 맡은 본분인 현장 업무에 오점을 남겨선 안되겠기에 작업은 늦은 오후에 시작되어 어둑해질 무렵까지가 되었다. 그야말로 짬짬히 집을 지은 셈이다.
집이 돌아갔다.
목수는 제주도에 가고 없다.
그동안 연을 맺어온 목수에게 자문을 받고 드잡일 하였다.
서까래 위에 산자 엮고 왕겨와 황토를 섞어 보온재를 대신했다.
이런 방식은 아마 어디에서도 실행하지 않은 방식이다.
생각대로 지붕의 무개가 상당히 줄면서도 단열재로서의 역할에도 일조하게 된 셈이다.
합판을 깔고 시트지로 지붕 전면을 덮고 폐와에서 쓸만한 기와를 골랐다.
금가고 깨진 것은 기와지붕재로 전혀 쓸모가 없다.
오래되어 강도가 약해진 것도 못 쓴다.
고르고 골라보니 기와가 한 오백장 정도 모자란다.
내 가진 돈은 이미 고갈이 났다.
결국 어머님께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때가 절은 오래된 통장을 꺼내시면서 아버지 몰래 거금 삼백만원을 내 주신다.
자식들이 한 푼 두 푼 들인 돈을 알뜰하게 모아 놓은 피 같은 돈이다.
내가 이 돈을 어찌 쓴단 말인가?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고 은행에 갔다.
그래서 겨우 모자란 기와를 사오고 와공을 불러 기와를 이었다.
장변 방향의 평고대를 두 개를 사용하여 이었는데 상층 지붕에 기와 잇기를 마치자 그 이음새가 반푼정도 벌어졌다. 그 뿐 아니라 상층의 기둥이 벌써 기울기 시작했다. 원인은 기와집에 써야할 규격에 못미치는 부재의 크기와 오량도리 왕지맞춤 부위를 상층이 내리누르는 힘에 의해 사방의 추녀 뒤꼭지가 아래로 처지면서 추녀 마구리쪽이 상대적으로 하늘로 치솟게 되었다.
이로 인해 평고대가 건물 우주방향으로 잡아 당겨지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하층 지붕에 기와를 먼저 이었으면 이런 현상은 없었을텐데...
결국 내가 제대로 작업 순서를 정해 주지 못한 실책이었다.
할 수만 있으면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해 서두르기만 했지 기술적인 문제를 간과 한데서 온 결과였다.
결국 다시 목수를 불러 드잡일 하고 기와를 이었다. 벌어진 평고대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다.
평고대에 못을 박았기 때문에 뒤돌아 오는 탄성을 받아내지 못하게 하는 원인 때문인 것 같다.
기와를 잇고 작업이 중단된체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엔 중앙 보 위에 시오소처럼 걸쳐 있는 오량도리(중도리)가 양쪽으로 갈매기처럼 쳐짐 현상이 나타났다. 정말 큰일이다. 이대로 두었다간 도리가 부러져 집이 폭삭 주저앉을 수도 있는 문제다.
기둥도 기울어지고 있다. 이거 참! 허 허 이를 어쩌면 좋으냐!
그렇다고 목수를 불러다 기둥 드잡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선 가새를 사방에 다시 박고 청주에 계신 도편수에게 상담 전화를 급히 했다. 결론은 가운데 보가 건물의 하중에 비해 작고 양쪽으로 처지는 중도리를 받힐 우미량을 보강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한 대로의 답이었다. 전화를 끊고 우미량보단 충량을 대는게 어떨까 하고 다른 도편수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자신이 직접 보고 답을 내주겠다고 했다.
" 충량을 받으려면 충량에 힘을 내리는 중도리가 왕지맞춤에서 받을장 식이어야 하는데 이 건물은 엎을장으로 되어 있어 충량을 걸면 오히려 내리 누르는 힘에 의해 중도리가 윗쪽으로 탈락할 수가 있으니 우미량을 대시오" 과연 기술자구나 난 그정도까진 생각도 못했는데..
산에서 다시 나무를 베어 올 생각을 하니 끔찍 했다. 생목은 무게가 건조된 것에 비해 여덟배 이상 더 나가기 때문에 마른 나무의 것만 생각했다간 오산이다. 열두자 길이에 여덟치 굵기의 통나무도 장정 둘이서 간신이 들어 올린다. 더군다나 잡목이 우거진 산에서 직접 나무를 베고 운반하고 끌어 올려야 할 것을 생각하니 겁부터 났다. 결국 재제소를 찾아 굽은 소나무를 찾았다. 다행히 원하는 크기의 부재를 구하여 우미량을 보강했다.
보모님이 대 주신 돈에서 다시 흙별돌을 사고 황토에서 고운 흙을 채로 치고 벽을 쌓았다.
내벽에 두께 14cm의 황토벽돌을 한줄로 쌓고 외벽 하부에 폐와로 문양 쌓기를 적당히 하고 그 위에 흙벽돌을 한 줄 덧 붙여 벽을 쌓았다. 내벽에 붙여 쌓는 외부의 황토벽의 안정적인 결속을 위해 내벽에서 미리 철선을 관통해 흙벽돌을 중간 중간에서 잡아 매는 보강 작업을 했다.
하부의 와편 상부엔 담장기와의 한 면처럼 기와를 깔고 그 위에 흙벽돌을 쌓도록 구상하였다.
흙벽의 천적은 물이다. 물이 침투되면 흙벽돌은 이내 반죽된 흙으로 변해 푸슬푸슬 부저지고 심하면 붕괴 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하부에 와편을 쌓고자 한 것이다. 황토벽돌 값도 아끼고...
다음은 방바닥에 온돌을 깔아야 하는데 네평 남짓한 방에 들일 구들 값을 계산하니 적어도 오십만원은 들게 되었다. 돈이 바닥이 나서 걱정하고 있는데 아버님이 동네에 빈집이 있는데 다 허물어져가니 그 집에서 구들장을 해체해서 써보자는 것이었다. 내 친구가 살던 집인데 이미 서울사라람에게 팔려 흉가로 방치된지 몇 년 되어 이젠 집이 여기저기 무너지고 위험한 곳이 되었다.
"그럼 아버지 뜻때로 한번 해체나 해 보세요."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회사일을 마치고 오후에 집에 도착하고보니 정말이지 훌륭한 구들장이 마당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때의 심정이란 마치 보물을 캐 놓은 것만 같았다. 집 짓는데 일조를 했다는 자부심에 아버님도 흐믓한 얼굴에 취기가 얼근하게 올라 내게 "어떠냐 이만하면 훌륭하지 않느냐?" 며 아들에게서 칭찬을 듣고 싶어 하셨다. "그래유 고생하셨슈우. 정말 맘에 들어유 아부지이"
내가 옛날 집 고치러 다닌다고 동리 아주머님이 고물장사가 달라는 것 부득불 거절하고 나 준다고 커다란 마마솥을 갖다 주신 것이 오래 전 부터 뒤곁 한켠에 놓여 있었다. 지금은 시골도 다 입식으로 바뀌다 보니 옛날의 가마솥은 애물단지가 된지 오래다. 그러니 얼싸좋다하고 고물장수가 헐값에 사가버려 이젠 이만한 가마솥을 구경하기가 업렵다. 물론 철물점에 가면 요즘도 새 솥이 나온다. 대개 중국에서 천박하게 만든 제품이 차지하고 있고 어지간하면 이십만원을 호가한다.
내가 어렵게 한옥을 진다는 소문이 조그만 온 동네에 다 퍼졌다. 그래서 어떤 아주머니께선 소주 한 박스를 내기도 하시고 사위가 잡았다며 붕어 이삼십마리도 가져오시고 집을 구경하며 올 겨울 찜질방으로 쓰면 좋겠다며 이구동성 집이 이쁘게 잘 지어졌다고 칭찬을 하신다. 아직도 시골 인심은 남아 있구나 마음으로 고마워 했다.
굴뚝을 설치하기에 앞서 나는 건물에서 저만치 거리를 두고 쌓고 싶었는데 굴뚝이 집에서 멀면 연기가 잘 안빠진다고 말린다. 그럼 굴뚝 높이는 처마 밑에서 머물게 하라고 했더니 굴뚝이 낮아도 연기가 잘 안빠진다고 높이 쌓았다. 굴뚝의 꼭대기엔 아구가 깨진 항아리를 주어와 얹혀 놓으려 했는데 그 항아리의 몸뚱아리에 구멍을 뚤어 아예 연기 배출구가 되어 버렸다.
진천까지 가서 참숯을 사왔다. 진천 보탑사 가는 길목에 있는 곳인데 보탑사를 몇 범 오가며 눈여겨 둔 곳이다. 핑계로 이참에 보탑사 구경도 했다. 그동안 많이 증축이 이루어져 이젠 왠만한 거찰이 되어 있었다. 너무 기교적이고 실험적이어서 절간이라기보다는 건물 박물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너무 꼼꼼하게 가꾼 정원이 풋풋한 정이 가기보단 고급스런 저택에 울긋불긋 장식처럼 키워낸 화단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웠다. 그만큼 초연한 마음으로 허술한 것을 보존하기가 어려운가 보다. 각색하고,
숯가루는 방바닥에 황토와 섞어서 발랐다. 붉은 황토가 검은 숯가루와 섞이니 마치 논바닥 흙처럼 색깔이 거무스름하게 변했다. 그 위에 마감할 흙은 순 황토로만 하면 되니까 개의치 않았다. 숯덩이는 고창 창문 옆의 공간벽을 막을 생각이다. 집이 외부에선 중층형이고 내부에선 통층형이기 때문에 안에서 발생하는 오염된 공기를 24시간 배출할 수 있는 숨구멍으로 어떤 것이 좋을까 생각하다 숯을 쌓으면 되겠다 싶어 구해 왔다. 생각이 맞을지 그 결과는 추 후에 볼 일이다.
이제 남은 공정은 전등과 창호를 다는 일이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다며 어머님과 어버님께서 흐믓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이지 그동안 일하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시작은 유월초에 했는데 마감은 시월초가 될 듯싶다.
올 추석은 그 어느해 보다 가슴 뿌듯한 고향에서의 즐거운 며칠이 될 것 같아 벌써 가슴이 뛴다.
도산서원의 최초의 집은 퇴계 이황이 직접설계해서 지었다고 한다. 물론 목수와 필요한 일꾼들을 들여 일을 시켰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는 그 조그만 서당에 작고 아담한 못을 파고 연을 심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내가 지은 황토방이 그에 미칠 수는 없지만 난 이곳을 서실겸 연구실로 쓰고 싶다. 뭐 대단한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도 한 이십년 문화재 설계와 보수업에서 밥을 먹은 사람으로서 후학을 위한 작은 헌신은 해야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이곳에 묻혀 그동안 완성하지 못한 석사 논문을 필역하고 싶다. 그리고 조용히 내가 생각하는 글들을 묶음으로 내고 싶다. 여기에 전통건축에 대한 관심을 가진 동지들과 의견도 나누고 함께 고민도 하며 생산적인 것을 창출하고 싶다.
그런 동지들이 내게 없는게 현실이지만 앞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만나길 고대해 본다.
첫댓글 고생 많으셨군요. 고향댁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축하 합니다. 좋은 시기에 회원들끼리 입택 잔치라도 하시겠다면 성냥 사들고 가겠습니다.
그러고 싶습니다. 가을이 가기 전에 좋은 시간 가져보도록 날을 잡아보죠.
정말 대단하시네요. 글을 읽을면서 가슴한쪽이 찡해오네요..축하드리고요.이곳에서 항상 좋은일로만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구경한번 꼭가보고 싶네요...
누구나 꿈꾸어 보는 내집 짓기...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 지금쯤은 입택하셨겠군요...그안에서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지난번 흙벽 붕괴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소식이지만 좋은 소식이어서 기쁩니다.
수고하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