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7. 석두보택
번뇌 망상 끊어지면 생사도 끊어지는 것이다
올해 탄신 120주년을 맞이하는 효봉(曉峰,1888~1966)스님은 일제 강점기 판사직을 던지고 도인(道人)을 찾아 나섰다가 금강산 법기암에 스승을 만난다. “호랑이 눈에는 호랑이만 보인다”고 했다. 시대를 풍미하며 수행의 기준을 몸소 보이며 불법을 널리 편 효봉스님이 가능했던 것은 은사 석두보택(石頭寶澤, 1882~1954)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석두스님 제자인 석정(石鼎)스님의 생생한 증언으로 선지식의 삶을 복원했다.
“번뇌 망상 끊어지면 생사도 끊어지는 것이다”
효봉.향봉.석정 스님 등 ‘한국불교 동량’ 길러
참선 수행과 검소한 생활로 후학들에게 귀감 돼
<사진설명>석두스님은 효봉스님 은사로 한국불교 중흥의 토대를 마련한 선지식이다. 사진제공=석정스님
“화상은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1909년 동안거 해제 전날 해인사. 친일 주지 이회광(李晦光,1862~1933)이 법문을 했다. “삼세제불(三世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와 금일(今日) 시회대중(時會大衆)이 모두 산승(山僧)의 입에서 나왔다.”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 그리고 오늘 법회에 참석한 대중이 ‘이회광’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회광은 친일 성향의 불교연구회와 원종종무원을 만들어 종정으로 추대될 만큼 당시엔 ‘실력자’였다. 20대 초반의 석두스님은 ‘오만한 법문’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화상(和尙)은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이회광은 아무 말도 못했다. 스님은 “범부에게 법문을 들을 수 없다”면서 법당 밖으로 나왔다.
“개구리도 소중한 생명” 천도
○…금강산 보운암으로 온 어느 날 밤. 경내에 있는 연못의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었다. 얼마나 요란하게 울던지 스님은 “공부를 제대로 하기 어렵겠다. 날이 새면 이곳을 떠나 조용한 도량에 가서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동 틀 무렵 까마귀 떼가 연못에 있는 개구리를 모두 죽였다. 광경을 목격한 스님은 “나의 부질없는 한 생각으로 많은 살생을 저질렀구나”라며 보운암을 떠나지 않았다. 그 뒤로 스님은 개구리 영가를 천도하기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고행 정진했다. 하루 한 끼를 송죽(松粥)과 된장으로 공양을 대신했다. 송죽은 솔잎 그대로 찧어 만든 것으로 제자 가운데 몇몇은 견디지 못하고 떠날 정도로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된장으로 간장 손수 만들어
○…일제 강점기 사찰 토지를 소작 붙였던 대처승들은 절에 머물지 않고 마을에 사는 경우가 많았다. 법회나 불공이 있을 때만 절에 왔다. ‘명자(名字) 주지’였다. 금강산 보운암 역시 마찬가지. 평소 검소한 생활을 했던 스님은 비록 주지가 없었지만 사중 물건을 헤프게 사용하지 않았다. 불 밝히는 석유도 한 병 두병 사다 썼다. 그 마저 예불 모실 때와 해진 뒤 물건 찾을 경우에만 사용했다. 말린 된장에 팔팔 끓인 소금물을 채를 통해 부어 누르스름하게 우러나게 하여 간장을 만들어 썼다.
“속이지 않으니 용서해 준다”
○…상좌 종남(宗南)이 스님을 시봉할 때였다. 옛날에는 방에서 부엌을 내다보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창문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손님이 찾아와 공양을 차려야 했다. 준비가 잘 되는지 스님은 창문으로 부엌을 보았다. 그런데 종남이 침을 ‘탁’ 뱉은 뒤 행주로 밥상을 닦는 것을 목격했다. 손님이 돌아간 뒤 상좌를 불렀다. “너는 상을 어떻게 닦았느냐.” “제가 하도 급해 침으로 닦았습니다.” 스님은 야단치지 않고 이렇게 타일렀다. “네가 잘못은 했지만, 속이지 않으니 용서해 준다.”
“금강산 미륵불 글씨= 쌀600섬”
○…금강산 구룡폭포 옆에는 길이 19m, 폭 3.6m나 되는 거대한 글씨 彌勒佛(미륵불)이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석두스님이 김규진에게 글씨를 부탁한 것이다. 한 글자에 100원씩 모두 300원을 지불하기로 했다. 당시 쌀 한 섬이 50전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쌀 600섬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이다.
1년 뒤 완성됐다는 연락을 받고 만났는데 ‘海岡 金圭鎭 書’(해강 김규진 서)는 글씨가 추가되어 있었다. “저는 이것을 안 가져가겠습니다.” 스님이 난색을 표하자, 해강은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에 내 이름 석 자를 새기는 것이 원(願)이니, 300원을 받지 않을 테니 새겨 주십시오.” 글씨를 새길 무렵 금강산에 비가 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명산에 구멍을 뚫으니 하늘이 노해 가물다”면서 공사 중지를 요구했다. 스님은 “회향하고 나면 비가 올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은근히 걱정 했다고 한다. 회향 전날 밤 많은 비가 내려 돌가루까지 깔끔하게 씻겨 나갔고, 환희심이 난 주민들이 회향 당일 찰밥과 떡을 마련해 찾아왔다.
효심 깊은 상좌들
○…석두스님은 상좌인 효봉스님과 불과 6살 차이였다. 외모로 보면 효봉스님이 더욱 나이 들어 보였다고 한다. 객(客)이 찾아와 인사를 할 때면 석두스님보다 먼저 효봉스님에게 “큰스님께 인사드립니다”라며 절을 했다는 것이다. 석두스님과 효봉스님은 그저 미소만 보였다. 상좌들은 은사스님을 깍듯하게 모셨다. 효봉스님은 송광사 주지 임석진 스님에게 부탁해 은사를 큰절로 모셔왔으며, 말년에는 통영 미래사에서 극진하게 간병했다. 상좌인 계봉스님은 대변을 맛보아 차도를 살필 만큼 효심이 깊었다.
참선.도솔발원.준제기도
○…스님은 후학들에게 참선 정진을 강조했다. “다른 복을 짓는다 해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너희들은 참선을 해라.” 또한 보조국사의 가르침을 모범으로 삼아 정진했다. 때문에 돈오돈수(頓悟頓修) 보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입장을 가졌다.
은사 백하(白荷)스님과 해인사 제산(霽山)스님의 영향을 받아 스님은 도솔발원(兜率發願)을 참선과 병행했다. 금강산 상운암 뒤에 마애미륵불상을 모셨으며, 세존봉 중턱에는 도솔암도 지었다.
또한 준제기도(准提祈禱)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았다. <준제경>에 나오는 ‘좋은 향’을 구하려고 중국과 러시아도 다녀왔다. 결국 그 향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향’임을 깨닫고 돌아왔다. 일곱 차례의 100일 준제기도를 통해 수마를 항복 받은 스님은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에 들었다.
부산=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