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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성한 인성으로부터 신적 무소불능의 힘을 가지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
속량(redemption, 구속)과 중재(mediation), 중보(intercession)
또 속죄(expiation)와 화해(propitiation)에 대하여 순정기독교에서 123 속량은 오직 신성한 존재(the Divine)만의 역사였다. .. 주님의 지옥에 대한 쟁투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지상 모든 야수들과의
쟁투에 비할 수 있겠으니
그 쟁투에서 그 중 어느 한 마리라도
감히 그 소굴에서 나와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을 공격할 수 없도록
살육하고 굴복시킨다.
만일 그것들 어느 한 마리라도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하게 되면
즉각 마치 그 심장을 꿰뚫으려고 하는
독수리를 가슴에 느끼듯 움츠러든다.
지옥의 영들에 대해서는 역시 성언에 들짐승들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들짐승들과 주님께서는 사십일 동안 같이 계셨는데
그 야수는 바로 지옥의 영들을 표의한다.(막1:13)
이것은 또 제방이 붕괴되어서
나라들과 도성들 위에 돌진해 들어오는
대양의 물길 전체에 대한 저항에도 비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주님께서 지옥을 정복하신 것은
주님이 “잠잠하라. 고요하라!”(막4:38,39 마8:26)는 말씀으로
바다를 잠잠케 하신 것으로 표의된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동일한 능력으로
중생 도상에 있는 사람 속에서 지옥을 대적해서 싸우신다.
그 까닭은 지옥이
그런 모든 사람들을 흉폭한 분노로써 공격하므로
만일 주님께서 그 분노에 저항하시고
그것을 진압하지 않으신다면
인간은 부득불 지옥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옥은 한 괴물 같거나 거대한 사자 같아서
성언은 지옥을 이렇게 비하고 있지만
주님께서 그 사자나 괴물의 손과 발을 묶어주지 않는 한에는
사람은 악에서 구출된다고 하더라도
필연 다른 악에 빠지고 계속 다른 악에 빠지기를
그치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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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량은 오로지
성육신 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본질로 계시기 때문에
지옥에 접근하실 수 없으며
더구나 거기 들어가실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일차적이고 가장 순수한 것들 안에 계시므로
만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 안에 계신다면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
입 기운을 불어대기만 해도 그것들은 즉각 파멸될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뵙고자 원했을 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으니라”
(출33:20)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모세가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면
지옥 즉 모든 것이 가장 낮고 조악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옥 안에 있는 자들은
더욱 그럴 것이니
이는 그들이 가장 낮은 자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 성정을 취하시고
가장 낮은 수준에 있는 몸을 입지 않으셨다면
속량의 역사에 들어오실 수 없으셨다.
2) 그러나 주님의 지옥과의 쟁투는
이론가나 논객들 사이에 있는 것 같은
말 뿐의 쟁투는 아니었으니
그런 쟁투라면 어떤 효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지옥과의 쟁투는
주님께 속한 생명 그 자체인 신성한 선에 결합된
신성한 진리를 수단삼은 쟁투이며
이 진리가 눈에 보이게 유입되면
지옥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항할 수 없다.
이 진리에는 대단한 힘이 있기에
지옥의 악귀들이 그것의 유입을 느끼자마자 도망쳐
아비소스에 뛰어들며
자기들 소굴 속으로 기어들어가 숨게 만든다.
이것에 관해서는 이사야서에 생생한 서술이 있다.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사2:19)
3) 1757년 주님께서 최후심판을 수행하셨을 때
신성한 선으로부터
얼마나 대단한 힘을 행사하셨는지는
최후심판 소책자에 묘사된 것으로 분명하다.
그 힘은 지옥의 영들이 영들의 세계에 있던 언덕들과 산들을
그 있던 자리에서 파괴시켜 멀리 내던지고
어떤 것은 땅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었고
또 그들의 도시와 촌 또 밭을 덮쳐서 전 구역을 뿌리 채 뽑아
거기 주민들과 함께
소용돌이와 늪 그리고 소택에 내던지는 힘이었다.
이 모든 것을 주님은 홀로 신성한 선에 결합된
신성한 진리의 힘을 수단으로 성취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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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 즉 속량과 십자가상의 고난은
구별되어 고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이
마치 모래 턱이나 바위 위에 좌초해서
선적한 모든 것들이 함께 침몰하는 배처럼 되어
주님에 의한 구원의 관계되는 모든 것들에 오류를 범하게 된다.
만일 이 둘이 구분되어져야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은 마치 꿈을 꾸고 있어서 현실이 아닌 것들을 보며
자신이 공상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추리하게 되지만
종국에 가서는 전혀 그 반대가 됨을 수긍하게 되는 것과 같다. ..
속량과 십자가상의 고난이 구별되어야 할 두 사물이지만
그럼에도 구원에 공헌하는 것에서는 하나가 된다.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상의 고난으로 완성한
아버지와의 합일에 의해서 영원히 속량주가 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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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중재(mediation), 중보(intercession)
또 속죄(expiation)와 화해(propitiation) 이 네 가지는
인성으로 계신 한 분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한 용어들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접근 되실 수 없으며
또 어떤 사람에게든 접근하실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여호와이신 그분 자신의
본질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본질로 사람에 접근하신다면
사람은 마치 불이 나무를 태워 재로 만들듯 되어버릴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을 때
그분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분명하다.
출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또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1:18 에 “아버지 품에 있는 아들 이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
요 5:37 “또 아버지의 음성을 듣거나 그 모습을 본 자가 없다.”
물론 성서에 모세가 여호와를 대면해 보았고
대화했다고 되어있으나(출 33:11)
그것은 아브라함과 기드온이 그랬던 것처럼
천사를 매개자로 한 만남이었다.
그러한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본성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형체(human manifestation) 취하기를 기뻐하셨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당신에게 나아올 수 있고
또 서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이 인간의 형체를 옷 입으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고
이분이 중재하고 중보하고 속죄하고 화해하신다.
5) 중재(mediation)는
주님의 인성이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또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가르치고 인도하여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중간 매체(intermediary)라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왜 하나님 아버지의 인성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구세주라고 불리는지,
또 그분이 세상에서 구원을 의미하는
예수라고 불리는지의 이유다.
중보(intercession)는
계속되는 중재를 말한다.
왜냐하면 자비, 용서, 은혜의 원천인 사랑 그 자체는
끊임없이 중보라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랑 자체는 계명을 행하는 사람들과 그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중간매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중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줄 중간매체로서의 역할,
곧 주님이 인성을 취하시고 굴욕의 상태에서 시험을 거치심으로
그 인성을 신성으로 만드신 일,
다시 말해
주님 자신 안에 이루어진
한 번의 위대한 과업을 가리킨다면
중보는
인류 구원을 위해 주께서 이루신 중재의 일,
곧 주님이 자신 안에 마련하신 신성한 인성을 통해
중재의 그 신성한 능력이
실제적,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결과되어 지는 것을 가리킨다.
중보가 그 본질에 있어서
주님의 자비 자체의 일을 가리키는데 비해
중재는 그 중보를 지속적으로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결론 중재가
세상에 오신 주님이 지옥정복을 통해 질서를 회복하신
영광의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중보는
중재를 위해 육을 입고 세상에 오신
주님의 굴욕의 상태를 뜻한다.
사실 중보는
그 본질에 있어서 자비 자체로,
인류 구원을 위해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모든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일단 중재에 의해 회복된 질서는
인성의 영화를 통해 주님 자신에 획득된 능력으로
계속 유지, 보존되는데
이처럼 중보는
주님 자비에 의한 지속적인 역사다.
주님은 마리아로부터 입은 인성으로
지옥을 정복하여 천국의 질서를 회복함은 물론
지옥을 영원히 정복하심으로
인류 구원을 위한 신적 무소불능을
당신의 인성에 가지게 되셨다.)
속죄(expiation)는 사람이 중재 없이(인간으로 옷 입지 않은
상태에 계신, not clothed with His Human)
여호와께 다가갈 경우
빠져들게(immersed) 될 죄들의 제거를 뜻한다.
화해(propitiation)는
사람이 죄로 인해 자신을 지옥에 빠뜨리는 것을 예방해주는
관용과 은혜의 행위를 뜻하고
또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성막의 언약궤 위에 있는
자비의 자리(시은좌, 속죄소)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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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 거기 모인 회중의 대부분은 그 구절을 문자적으로 읽어야 하며
아들은 아버지의 옆에 앉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왜 아들이 그렇게 했는가라고 질문을 받자
어떤 자는 주님께서 성취하신 속죄 때문에
아버지의 오른편에 올리우셨다고 대답했고,
또 어떤 자는 주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옆에 앉혀졌다고 했고 ,
또 어떤 자는 아버지의 상담자가 되어
천사들에게서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고,
또 다른 자는 주님께서는 아버지에 의해 아버지 대신
통치하게 하시려고 우편에 앉히우셨다고 했다. 그는 성서에 기록되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오른편에 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그들을 위해서 중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 까닭은 오늘날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은 아들을 보아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며
이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여서
아들의 중재를 허락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자는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그 신성을 세상에 태어나신 인자에게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듣고 그 많은 학식을 가진 사람들이
영계에서 한동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천계적인 사물에 대해
그리 무지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했다.
.. 나는 그들의 승낙을 얻어 이같이 말했다.
‘당신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고
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다는 것을
성언에서 읽어 알고 있지 않은가?
주님은 이것을 분명히 선언하셨다.(요 10:30, 14:10,11)
만일 당신들이 이 말씀들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이분(二分)하면
당신들은 하나님을
자연적, 감각적, 물질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잘못이 니케아 회의 때부터 저질러져서
영원부터 계신 세 신성한 인격들의 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오른 쪽에 앉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께서 세상에 계실 때 취하셨던 인성의 효력에 의한
하나님의 전능을 의미한다.
이 인성에 의해 주님은
처음부터 나중까지 모든 것들 안에 계신다.
이 인성에 의해 지옥에 들어가셔서
그것들을 파멸시키고 정복하셨다.
그리고 이 인성에 의해 천계를 질서에 맞게 배치하셨으며
결과적으로 사람들과 천사들을 영원토록 속량하셨다.
만일 당신들이 하나님의 성언을 상고하고 조요될 수 있다면
오른손이 전능을 의미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 48:13, 62:8, 시 18:35, 80:15,17, 110:1,2)
이 시편 전체는 주님의
지옥과의 쟁투, 지옥의 정복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전능을 의미하기 때문에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권능의 우편에 앉으리라 마:26:64,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눅 22:69 라고 하셨다.’
첨부)
주님은 마리아로부터 입은 인성으로 지옥정복과
천계의 질서회복은 물론 지옥을 영원히 정복하심으로
인류 구원을 위한
신적 무소불능을 당신의 인성에 가지게 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의미로
그리스도는 당신의 인간성정으로 천지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고,
당신의 인간성정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고,
당신의 인간성정으로 기도를 받으신다.
그러나 그 인성은 신성
곧 신성한 인성인 것이 여느 인간과 다른 점이다.
속량을 짧게 정리하자면
그것은 이 땅에 육을 입고 오신 주님이
그 당시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던 악한 영들을 물리치심으로
그들의 의지에 자유를 되찾아 주심이다.
그 당시의 악한 영들은
사람의 마음은 물론 육체까지 점령할 정도로
그 힘이 강하였으나
무한 신성의 여호와 하나님 그 자신으로서는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이에 주님이 마리아로부터
열악한 인간본성을 입고 오셔서 시험을 통해
인간을 지배하고 있던 지옥의 세력을 정복하심으로
선과 악 사이 자유로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를 되찾아 주시고 천계의 질서를 회복해주셨는데
이로써 이제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인류 전체를
지옥의 사로잡음에서 해방시킨 주님의 구속(속량)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속량의 성격은
어느 인간의 회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그야말로 하나의 전체적인
주님의 일방적 은혜의 죄 사함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는
인간의 죄 값을 대신 받는 형벌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서 마리아로부터 입었던
인간본성을 완전히 벗으심인데
이로써 주님의 인성은 신성에 하나로 합일하는
영광을 입게 되어 부활에 이르고
이로부터 신성한 인성이 되신 한 분 주님 안에서
신성이 열악한 인간본성의 자연적 측면에까지 내려오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신성한 인성의 이러한 중보를 통해 힘을 얻은 인간은
회개를 통해 자신이 지은 죄를 제거함으로 속죄되어
마침내 주님과의 결합과 화해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모두가 가능한 것은
주님의 인성이 영광을 입어 신성이 되신 것 때문이니
비록 기독교에는 낯설지만
이 진리가 실로 얼마나 귀한 것이던가..
주님은 영광을 입으신
당신의 신성한 자연성 안에서
심령이 실로
극악한 죄에 떨어진 자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죄를 사하실(제거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셨다.
아무리 죄성이 깊어도
주님은 이 땅에 육으로 계실 때 시험을 통해
먼저 그곳까지 내려가셔서
거기 역사하던 악한 영들을 물리치신 그 체험을
그대로 자연성에 간직한 채 일어나셨기에
주님은 그러한 상태에 빠진 자들까지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인간의 그러한 최악의 상태에까지 내려가
빛을 비추실 수 있는 힘을 신성한 자연성 안에 가지셨기에
이전처럼 육체로 오셔서
직접 우리를 구원하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신 이러한 은혜의 수용은
인간의 진실한 회개와
주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음이 깊은 죄성에 빠질수록 거기서 헤어 나오기 힘이 들지만
주님의 자연성은 거기까지 내려가셔서 도울 수 있는 힘을
비축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용기를 잃지 말고 회개하여 그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러한 회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주님이 고민과 갈등으로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연약한 우리를 돕기 위해 피땀으로 기도하며
어둠의 세력들과 힘겹게 싸우시던 주님이 계신
겟세마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도 주님처럼 자신을 버리는 내적 전투에 승리함으로
세상과 나 자신으로 향하던 마음을
주께로 확고히 돌이켜야 한다.
그래야 그 승리의 영광이
바깥 삶으로 나타내어지는 십자가를
우리도 짊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구원을 실제로 삶 속에 이루어주기 위해
오늘날 주님은 말씀의 내적 의미로 우리 가까이 와 계신다.
부활하신 예수의 영 곧 성령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속 신성한 진리로 인간 가까이 다가와
과거와는 전연 다른 밝고 순수한 진리의 빛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신다.
이를 위해 주님은
성경에 이른 당신에 관한 예언들을 다 이루어
말씀을 완전케 하셨고
이로써 말씀 안에 내재해있던
영적 의미를 교회에 열어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이
장로들의 유전 등으로
거룩한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훼손시킨 바
이에 주님은 악한 영들의 거짓에 의해 훼손된
말씀의 회복을 위해 순수 진리를 열어주심으로
인간이 말씀에 담긴
신성한 진리의 빛을 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셨는데
아직 그들의 이해의 상태가 그 빛을 감당하기 어려운 까닭에
초기 기독교에서는 그 빛을 조금만 열어주셨다가
주님의 재림을 통해 그 빛을 완전히 세상에 드러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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