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일촉즉발
“존. 나 엘리야. 후보 홍보 전단지 왔거든. 시간되는 대로 사무실에 들러. 바로 선거 운동에 들어가야지.”
민재가 오클랜드 최북단 오레와, 실버데일에 투석환자를 막 내려놓자, 휴대폰이 울렸다.
“응. 엘리. 고마워. 생각보다 빨리 됐네. 곧 내려갈게. 여긴 실버데일이야. ”
오레와, 실버데일에서 남쪽 시티를 향하는 모터웨이에 들어섰다. 고속도로 양쪽에서 녹 푸른 초원이 홍해 갈라지듯 길을 내주었다.
녹색 주단의 열병을 받는 기분이었다.
‘뉴질랜드의 자연 친화 정책으로 아직 이 지역까지는 건축 개발 붐이 미치지 못해서 좋은데.
지금 2001년 로드니 지역구 오레와는, 내가 살다 온 2021년에 오클랜드시티로 편입되어 엄청 활성화될 판인데.’
민재가 운전하며 내려오는데 앞으로의 장기 청사진이 눈에 그려졌다. 택시 사업과 버스 사업으로 가는 전초전, 경영수업의 경험 기회가 왔다.
보드 멤버. 향후 운수사업 준비 일환으로 큰 도움이 될 보드 멤버 선거를 택시회사에서 맞이했다.
내려가는 내내 보드 멤버 선거를 어떻게 치를까 생각하다 미래와 연결 다리가 이어졌다.
‘조금 전, 내려준 투석환자 일은 부가가치가 높잖아. 오클랜드 투석 환자 일 (Dialysis Job)을 대형 오클랜드 택시와 경쟁 관계로 운영하는 작은 회사.
그 회사가 어른거리네. 알짜 택시회사인 하우라키 택시 회사가 마음에 드는데. 여사장 다이애나가 경영 수완이 좋은 덕이지.‘
그 다음 일련의 일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2018년에는 실버데일 지역에 버스 회사 두 곳이 문을 열 텐데. T 버스와 G 버스회사.
먼저 할 일은 택시업계 현장경험을 더 쌓고 경영능력까지 확보한 뒤 잠재력 있는 택시회사를 만들자. 하우라키 택시 회사 같은.
더 먼 훗날엔 버스회사로도 확장해가자. T 버스와 G 버스회사 같은 데서 현장 경험도 쌓고서.’
민재의 상상은 벌써 미래 시대, 오레와 실버데일의 위상까지 그려졌다.
‘남태평양의 천연 해변을 낀 오레와는 세계적 휴양도시로 면모를 드러낼 거야.
오히려 오클랜드 지역보다 집 가격도 높은 상태로 선호하는 실버타운으로 될 테니까.’
이번 보드 멤버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면 바로 의장, 회장에 입성할 기회를 얻는다. 보드멤버만 돼도 2년간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살아있는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다음번 도전에서 의장으로 가도 크게 문제는 안 된다.
‘이제 나이 27세, 30세 안에 오클랜드 의장이 된다면 큰 출세지. 700명의 최대 택시 회사 경영자니까.
보드 멤버가 되면 계속 택시 운전은 하면서 경영에 참여하고. 의장이 되면 택시 운전에서 손을 떼어야지. 3회 연임도 가능하니.‘
임기 후 보드 멤버 재선에 당선되지 못하면 다시 평 운전사로 돌아와 택시 운전 하며 회사 창업 준비해도 된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회사에 도착했다.
“엘리. 홍보 전단지 멋지게 잘 만들었네. 역시 엘리의 손끝은 야무져.”
“7번 후보 존. 이제 실탄은 주어졌잖아. 멋진 선거전으로 우선 보드멤버에 입성하라고. 세 명 뽑는 보드멤버 후보 중 1번과 6번이 강세라고 하던데.
후발주자라 엄청 분발해야 할 거야. 저기 게시판에 홍보지 직접 붙여놓고.”
마치 후보자 민재의 선거 참모 같은 엘리가 고마웠다. 민재가 게시판에 홍보지를 부착했다. 그때 누군가 민재 등을 두드렸다. 저스틴이었다.
민재의 홍보물을 보더니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며 응원했다.
“존. 들고 있는 홍보물 나에게도 한 뭉치 줘봐. 약 100장 쯤 내가 뿌리며 홍보할 테니까. 만나는 운전사마다 돌릴게.”
민재로부터 건네받은 홍보 전단지를 들고, 저스틴이 민재 더러 따라오라고 했다. 이번에 자기가 출정식에 점심을 사겠다고 앞섰다.
이층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데, 필립이 올라오고 있었다.
“필립. 마침 잘 만났네. 일마치고 요 건너편 빅토리아 카페로 와. 존이 오늘 후보 선거운동 출정식을 할 거니까. 이 홍보지도 한 장 보라고.”
저스틴이 선거운동 본부장이라도 된 듯 흥이 넘쳤다. 민재가 흐뭇하게 웃으며 저스틴을 따라 빅토리아 카페로 갔다.
거기엔 벌써 6번 토니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민재가 다가가 홍보 전단지를 건네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어? 존도 후보로 나온 거야? 내 한 표 기대했더니만. 강력한 다크호스인데”
“응. 토니. 각자 따로 잘해서 보드멤버로 만나지. 서로 윈윈하면 될 거잖아.”
존이 토니와 승리를 다지자며 서로 어깨를 두드리고 악수했다. 토니는 인도 출신으로 인간미가 흐르는 운전사였다. 함께 가도 좋을 동료였다.
예전에 토니와 깊은 대화까지 한 게 생각났다. 토니는 인도에서 가장 힘든 하층민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천신만고 끝에 뉴질랜드 땅을 밟은 거였다.
부모님으로부터 이어 내려온 하층민 수드라 생활을 청산하려고 왔다고 했다. 자기 자식 대부터는 제대로 된 인간다운 생활을 하도록 자기 몸을 던진다고.
그 결의에 찬 포부가 민재의 가슴을 울렸던 게 생생했다. 민재도 허락하는 한 최대로 도우며 살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토니가 카페를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이어 필립이 들어왔다. 어디서 만났는지 제니도 따라 들어왔다. 존. 저스틴. 필립. 제니. 네 명이 모였다.
“이렇게 모여서 얼굴 맞대니 선거캠프를 만드는 느낌이네. 일단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이상, 좋은 성적으로 올인 해야겠지. 각자 의견도 들어봐야겠어.”
“응. 일단은 알리는 게 급선무야. 난 주로 공항에 머무르니까 그곳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에게 홍보지 전달하고 지지를 부탁할게.
이 저스틴 말이라면 신뢰하는 이들이 많거든.”
먼저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저스틴에 이어 필립도 거들었다.
“난 중국 친구들과 아시안을 상대로 지지를 부탁할게. 나머지는 만나는 대로 전달하고.”
“난 여성들 표심 잡아야겠네. 우리 회사 여성 운전자도 50여 명 되잖아. 내가 볼 때, 7명이 700명 표를 기본으로 나눠 가지면 100표지.
그에 두 배 200표 이상 가지면 세 명 뽑는 보드 멤버에 당선되지 않을까.”
분석적인 제니의 말에 저스틴이 맞장구쳤다.
“700명 중 예년에 보면 100명 정도는 투표에 참석 못하더라고. 통상 600여 명 참가하거든. 그래 200표 받으면 보드멤버 당선 안정권이지.”
넷이서 오가는 의견이 신선하고 진지했다. 흥미도 있었다. 선거캠프 이름도 피닉스 팀으로 지었다.
각자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해 서로 정보도 공유하기로 했다.
한껏 고조된 피닉스 팀의 응원 열기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민재가 각자 원하는 음식을 시켰다. 빅토리아 카페 창가 쪽 테이블의 열기가 끓어올랐다.
그때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여러 명이 카페에 들어왔다. 1번 브라이언 무리였다. 창가의 민재 쪽을 바라보며 툭툭 쉽게들 말을 던졌다.
“야! 저기 뭐야? 존이 7번으로 나왔다고? 선거 참모진이 다 모였나 본데. 이제 해서 제대로 되겠나?
이번 선거에 첫 번째 도전한 거잖아. 만만치 않을걸. 나야 한번 해본 경험도 있으니까 이번도 쉽게 미리부터 다져오는 중인데.”
“그러게. 청문회로 좀 알려졌다고 너무 과신한 것 아냐? 별꼴이야. 어중이떠중이 다 나섰구먼. 그래봤자. 개박살 날 텐데. 쯧쯧!”
듣자듣자 하니 못 할 말이 없어 보였다. 앞에다 사람을 두고 저런 예의 없는 말들을 지껄일까. 결국 혈기 왕성한 저스틴이 한마디 쏘았다.
“어이! 거기, 말이 좀 지나친 것 아냐? 그런 무례한 태도로 보드멤버가 되겠다고? 되어도 문제겠다.”
“뭣이 어째? 되어도 문제라고? 네가 뭔데, 재수 없는 말을 그리도 심하게 하냐?”
저스틴의 한방에 브라이언이 대뜸 항의 조로 공격을 해왔다. 언제 다시 들어왔는지 맞은 편 구석에 앉아있던 6번 토니가 일어났다.
토니가 1번과 7번 싸움을 말리려 애를 썼다. 7번을 두둔하는 토니를 보더니, 브라이언이 벌떡 일어나 백인인 저스틴에게서 토니로 공격 대상을 바꿨다.
브라이언이 평소 만만하게 보아온 듯한 토니를 가리키며 벌컥 화를 냈다.
“야, 토니! 너 하층 수드라 청소부 신분에 감히 바이샤 신분에 대드는 거야? 너 정신 나갔어? 여기가 인도 아니라고 네 신분 망각하고 끼어들어?
재수 없게! 넌 누가 뭐래도 하층민 노예 신분 수드라야. 여기서 나랑 똑같이 운전하고 보드 멤버 후보 됐다고 맞먹으려드는데. 분수를 모르는 소리지.
꺼져! 꺼지라고! 인도 같았으면 내 앞에서 얼굴도 제대로 못 들판인데. 세상 좋다. “
이에 카페 분위기가 험악하게 흘렀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같은 인도인인 브라이언과 토니가 인도말로 목청을 돋워 피 터지게 싸웠다.
급기야 브라이언이 왼손을 뻗어 토니를 향해 올라갈 때였다. 그때 민재가 민첩하게 뛰어들었다. 비호같이 브라이언 왼팔을 확 꺾어 눌러 주저앉혔다.
민재가 자세를 숙이며 브라이언 귀에 대고 단호한 음성으로 한 방 먹였다. 불의를 보면 결정적 순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민재를 몰라봤던 브라이언.
그에게 민재의 해병대 시절 기운이 철퇴를 가한 상황이었다.
“브라이언! 이제 보니 완전 바닥이네. 자질이 의심스럽구먼. 이게 후보 맞아? 그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이런 자질로 보드 멤버 입후보 자격도 안 되겠다.
후보 자격 재심사해야겠는데. 바로 취소해야 할 텐데.”
민재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브라이언의 팔이 힘차게 민재 얼굴로 올라왔다. 민재가 재빨리 비켜서며 브라이언 등 뒤에서 어깨 급소를 그대로 눌렀다.
브라이언이 신음을 내며 깨갱하고 주저앉았다. 그를 날카로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민재가 다시 나직이 말했다.
“브라이언! 너 청문회 받아야겠어. 내가 컴플레인 해도 되겠어?”
“무슨 소리야? 재수 없게.”
브라이언이 수세에 몰린 듯 눈을 내리 깔았다. 민재가 단호하게 외쳤다.
“내 말 끝까지 들어. 내 말 안 끝났다고.”
카페 문 쪽으로 빠져 나가려던 브라이언이 주춤했다.
“브라이언! 네가 여기서 한 폭언! 다 내가 녹취해놨어. 이거면 넌 청문회 감이야.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라고. 다시 들려줄까?
넌 사람을 차별하고 모욕했어. 여긴 뉴질랜드에서도 오클랜드 택시 소속인데. 그런 마인드로 어떻게 우리 회사에 발붙이고 있는지 황당하다.
우리 회사 인도 출신 중 하층의 어려운 여건을 타개하려고 운전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야. 현재 의장도 그중 한 명이야. 여긴 인도가 아니야. 뉴질랜드라고.
자유와 행복을 위해 어렵사리 이민 온 나라라고. 그럼 뉴질랜드 법에 따라야지. 알량한 완장하나 찼다고 갑질하냐? 명심해라.
너 이거 오픈하면 우리 회사에서 택시운전 생명줄 끝이야. 알아들었어?”
민재가 꺼내든 소형 녹음기에 브라이언 동공이 흔들렸다. 기선이 완전히 제압당한 패잔병 얼굴이었다. 민재가 녹음기를 흔들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너 앞으로 행동에 따라 이 녹취록, 바로 오픈할 거야. 의장실이나 공청회장에서. 명심해. 분수를 알라고. 다른 사람도 너만큼 귀히 여기라고! 알았냐?”
민재가 브라이언과 토니 두 사람의 몸싸움 일촉즉발에서 떼어놓고, 브라이언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으며 제압했다.
재빠르고 단호한 민재의 기세에 깜짝 놀란 브라이언이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카페에 다른 손님이 별로 없어서 망정이지, 그렇잖았으면 벌써 경찰에 신고했을 뻔한 일이었다.
기가 죽었는지 다시 대들지 못하면서도 분이 안 풀린 모양이었다. 멍하니 앉아서 씩씩거리던 브라이언이 민재를 째려보다 슬그머니 카페를 빠져나갔다.*
9화 끝(5,442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