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6:1-7:2, 거룩하신 하나님, 24.1.31, 박홍섭 목사
사무엘이 이스라엘 역사 전면에 등장하여 본격적으로 사역하는 내용은 7:3부터 나옵니다. 그전에 4장부터 7:2까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언약궤를 빼앗긴 사건을 다룸으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십니다. 일련의 사태에서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이해하는 수준은 이방 블레셋의 이해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신앙이 거의 미신적인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의 영적 우매를 깨우치기 위하여 스스로 당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는 수치를 감당하십니다. 그렇게 적진에 홀로 들어가시어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다곤 신상의 목과 팔다리를 자르시고 그 몸체가 언약궤 앞에 엎드러져서 절하는 장면을 만드시고 언약궤가 가는 블레셋의 도시마다 독종과 재앙으로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어떻게 그들이 섬기는 우상 잡신과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반복되는 재앙과 독종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3-5이죠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이들은 금 쥐와 금 독종을 제물로 하는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하나님이 진노를 거둔다는 뜻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이방인들의 신관이 이러합니다. 재앙을 피하거나 복을 불러들이려고 신에게 제사합니다. 전형적인 무속신앙의 사고들이죠. 그러면서도 9절을 보면 자기들에게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언약궤를 막 새끼를 떼었고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본 적이 없는 암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실어 벧세메스로 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끼 뗀 두 암소를 주관하사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로 도착하게 하시어 블레셋에 임한 재앙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분명하게 나타내십니다.
문제는 언약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한 이후입니다. 언약궤가 수레에 실려 돌아오는 모습을 본 벧세메스 주민들은 기뻐하며 수레의 나무를 패고 암소를 번제물로 잡아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립니다. 벧세메스는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국경지대에 있습니다. 여기는 레위 지파 가문으로 언약궤를 운반할 책임을 졌던 고핫 족속을 위해 따로 구별된 레위 지파의 성읍이므로 다수의 주민이 레위 인입니다. 이들이 언약궤의 귀환을 기념하는 제사 준비를 할 때 여호수아의 밭에 있는 큰 바위 꼭대기에 번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드렸는데 겉으로는 경건한 제사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제사와는 거리가 먼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소를 번제로 드릴 때는 수컷으로 드리라고 했는데(레 1:3) 이들은 블레셋이 보낸 암소를 잡았습니다. 민 4:5-6에 따르면 언약궤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 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었으며 만져서도 안 됩니다. 심지어 언약궤를 운반하는 고핫 자손들도 이 궤를 만지거나 볼 수 없도록 휘장으로 언약궤를 싸서 운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렇게 거룩한 언약궤를 여호수아의 밭에 있는 큰 바위 위에 드러내놓고 호기심으로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이 백성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이 죽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하면서 슬피 울면서 이 궤를 기럇여아림에게 보냅니다(19-21). 하나님이 왜 이렇게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진노하십니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죄가 희생의 피로 인해서 용서되는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언약궤 앞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봅니다.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어야 하고 피를 흘려야 했던 제물을 보면서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한다면 언약궤를 호기심이나 구경거리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대신 죽임을 당한 희생제물과 죽어 마땅한 자신을 살려서 다시 주의 백성으로 살 수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엄위를 확인하고 경외심과 겸손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그런 의식이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이야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약궤를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블레셋 진영보다 더 큰 피해와 죽음으로 그 엄중함을 경고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오만 칠십 명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로 죽은 후에야 하나님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신이라는 사실을 겨우 인식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으로 여호와의 언약궤와 그 앞에서 드리는 제사를 승리를 위한 부적처럼 이용해서도 안 되고 이방 블레셋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없애는 수단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요즘 학자들은 벧세메스 주민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하면서 여기 5만 70명을 괄호 안의 5만 명을 빼고 70명이라고 주장하여 하나님의 엄중한 교훈의 무게를 경감시킵니다. 이런 학자들의 주장으로 많은 사본도 칠십 명으로 고치고 있는 추세이지만, 마소라 본문과 70인 역에는 오만 칠십 명이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블레셋과의 두 번에 걸친 싸움에서 패하여 죽은 이스라엘의 수가 삼만 사천 명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훼방해서 죽은 수가 오만 칠십 명입니다. 블레셋의 군사보다 여호와 하나님이 훨씬 두려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함부로 다룰 때 내린 재앙보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함부로 대한 것에 더 심한 심판을 내려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를 이방인들처럼 생각해서는 안 됨을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합니다. 19절에 슬피 울었다고 했는데 이 울음은 죄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그냥 많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울면서 이들은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으로 옮기고 거기서 이십 년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 사무엘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방 신처럼 대해서는 안 됩니다. 15절에 번제와 더불어 다른 제사를 드렸다고 했는데 어떤 주석은 이 제사가 먹고 기뻐 뛰노는 제사였다고 해석합니다. 바른 제사가 아닌 이방 제의에 속한 제사였다는 뜻입니다. 이들을 여호와의 언약궤가 돌아왔음을 기념하면서 자신들의 기쁨을 위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그 중심에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경에서 사랑하라, 주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라고 해도 흘려듣다가 T.V에 의학박사가 나와서 사랑을 베풀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면 몸에 엔돌핀이 생겨서 건강에 좋다고 말하면 ‘앞으로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야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 신앙의 중심도 자신의 유익 아닙니까? 유익이 되지 않는 일에는 마음을 쏟지 않고 손해가 되면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오늘 본문은 혹시나 우리의 신앙이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합니다. 그렇게 미신적으로 우상숭배 하듯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교회만 다니면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런 요소가 없는지 돌아보면서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저녁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