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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잔잔한 은혜(2238.2024.2.25 사순절 둘째주)
사8:5-10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순절 2주째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된 것입니다. 과도한 즐거움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 죽음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순절 순례 기간 중에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기간을 통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로 인하여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절절히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중세 격언 중에 여행자는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행을 하는 사람은 늘 뭔가를 요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것들 때문에 원망하기도 하지만, 순례자는 그것이 고독이든, 아픔이든, 시련이든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의 중심에 다가서도록 만드는 길 안내인으로 삼기에 언제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순례란 거룩한 장소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모두가 그런 순례의 길에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의 순례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가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순례자라 말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길은 대개 낮은 곳을 향해 나 있습니다. 홀로 서기 어려운 사람들 곁에 다가서고, 그들 편에 서고, 부당한 힘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순례입니다.
사순절 순례 여행을 하면서 저는 예수님의 마음을 거울로 삼아 저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님의 손으로 세상을 어루만지고, 예수님의 심정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마7:21절‘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객관화시켜 놓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와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실 꿈을 꾸고 계신 데, 우리는 주님을 ‘저 곳’에 모셔놓고 자꾸 경배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라의 백성,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율법의 가치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율법은 본래 좋은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고, 더불어 살게 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율법은 오히려 사람을 죽이고, 얽어매고, 갈라놓는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율법 전문가들은 율법 조문을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그 율법 조문을 근거로 사람을 의인과 죄인으로 나누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나눴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래의 의도를 누구보다 깊이 통찰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자유롭게 풀어 설명하셨습니다. 그 자유로움이 율법 전문가들에게는 매우 불경하게 보였습니다. 예수는 율법을 도외시하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가슴에 명심하고 살던 말이 하나 있습니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인의 말을 풀어 설명하는 일은 할 수 있지만, 스스로 지어내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전을 인용하는 것이 선비들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뭔가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들은 선비답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조선 최대의 문장가라고 할 수 있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은 1792년에 정조에게 소환됩니다. 당시의 사대부들이 청나라에서 유입된 패관잡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들의 글쓰기가 술이부작 述而不作의 원리를 어기는 것은 전적으로 연암 박지원의 영향 때문이라는 정조의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정조는 연암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고,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고 고문을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문체반정 文體反正을 도모합니다. 조선판 율법주의가 자유로운 영혼을 질식시킨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후3:6절‘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문자에 얽매이는 이들은 문자의 이면을 살피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 속에 담겨 있는 속뜻을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마5:21-48절 사이에는 여섯 개의 율법 조문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여섯 가지의 가르침은 모두 ‘~~’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형식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 왕 아하스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아람) 북쪽에서 조금씩 세력을 키워온 앗시리아가 제국주의의 야욕을 품고 침략 전쟁을 벌이자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동맹을 맺어 대항하려 했습니다. 이것을 일러 시리아(아람)-에브라임 동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들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그들은 남왕국 유다도 동맹에 가담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앗시리아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던 유다는 앗시리아의 위협을 당장 피부로 느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북왕국 이스라엘과는 늘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남왕국 유다는 그 동맹에 가담하기를 거절하고, 오히려 사신을 보내 앗시리아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시리아-에브라임 동맹은 자기들의 배후에 있는 유다가 앗시리아의 손을 잡고 자기들을 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는 먼저 남왕국 유다를 치기로 작정하고 공격해왔습니다. 주전 734년의 일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왕과 백성의 마음은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치는 수풀처럼 흔들렸습니다(사7:2).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들의 계략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행동하라고 일렀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힌 왕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공포심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삼켜버렸던 것입니다.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은 타다만 부지깽이에 불과하고, 그들의 위협은 기껏해야 부지깽이에서 나오는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연기 때문에 눈이 맵기야 하겠지만 집을 다 태우지는 못한다고 일러주어도 소용없었습니다. 오히려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는 말로 거절합니다. 이 말은 믿음의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매우 불신앙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은 앗시리아에 의존해 난국을 돌파하려는 아하스의 계획을 비웃으십니다. 하나님은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빌려 온 면도칼 곧 앗시리아 왕을 시켜서 그들의 머리털과 발 털을 미시고, 수염도 밀어 버리실 것(사7:2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리털, 수염 이런 것들은 존엄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강대국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존엄이 제거되는 수모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힘을 숭상하는 나라의 행태를 하나님은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할 때는 친구처럼 대해주지만, 이익이 엇갈릴 때는 냉혹하게 변하는게 국제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니 앗시리아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번번이 말씀하시며, 임마누엘의 표징까지 보여주시지만, 왕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대가를 치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충실하지 않은 유다에 실망하셨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강대국을 더 신뢰했습니다. 그 그릇된 신뢰가 결국은 그들을 파국으로 이끌리라는 것을 그들은 짐작도 못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강물의 이미지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1.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감사하는 마음
6절‘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이 말씀 속에는 자기 백성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고요히 흐르는 실로아 물’보다 ‘유프라테스 강물’을 더 신뢰하는 이들에게 닥쳐올 것은 예기치 못한 파멸입니다. 실로아 물은 기드론 골짜기 비탈에 있는 기혼샘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실로암 샘으로 흐르는 수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임금의 동산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만 수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물줄기는 그리 세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실로아의 물처럼 고요하여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나고 보니, 아! 그때 그랬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등만 보여주시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이 구절에서 ‘실로아 물’은 우리가 흔히 실로암이라고 알고 있는 작은 샘물로, 바위틈에서 흘러나와 예루살렘 성의 동편을 끼고 흐르면서 예루살렘에 생명수를 공급해주는 젖줄입니다. 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하나님의 잔잔한 은혜와 잔잔한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 백성들은 이 실로아 물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아람 왕인 르신과 북 이스라엘의 왕인 르말리야의 아들(사 7:1)의 힘과 화려한 모습을 더 부러워했습니다. 그런 감사가 없는 태도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저주스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가 없는 마음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저주받는 것을 무서워하지만 사실 어떤 저주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사하는 삶만 있으면 어떤 저주도 결코 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마음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기도할 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능력 있는 기도, 응답 받는 기도로 만드는 데에는 얍복강의 야곱처럼 축복을 달라고 떼를 쓰고 몸부림치는 간절한 모습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감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가 있는 사람에게 더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도 감사가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되게 하는 관건도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 응답을 원하고, 더욱 큰 축복을 원하면 먼저 감사부터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감사하면서 계속 기도하면 기도 응답이 없는 것 같은 것이 가장 위대한 기도 응답이 됩니다. 반대로 감사가 없으면 기도 응답이 주어지고 축복이 주어진 것 같아도 그것은 ‘불행을 예고하는 성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축복은 ‘축복 자체’보다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하면 축복도 속히 오고, 받은 축복도 오래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으면 축복도 오기 힘들고, 가끔 축복받은 것 같아도 금방 허무하게 사라져버립니다. 기복주의가 무엇입니까? ‘복을 기원하는 것’이 기복주의가 아닙니다. ‘복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고 나누지 않는 것’이 기복주의입니다.
우리는 많이 구하고, 축복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축복받은 다음을 잘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축복받고 입을 딱 씻고, 안 받은 척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받은 것을 다 날아가게 하십니다. 반대로 어떤 분은 축복받고 그 받은 축복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열심히 바칩니다. 그렇게 축복받았지만 겸손함을 잃지 않습니다. 그렇게 일이 잘 풀리지만 기도의 줄을 놓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더욱 큰 축복을 구해도 결코 기복주의자가 아닙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기복주의자가 아니고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시면 큰 믿음을 가지고 크게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2. 주님 안에서 만족하는 마음
본문에서 유다 백성들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아의 아들을 부러워한 결과 어떻게 됩니까? 7절‘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했습니다.
‘고요히 흐르는 실로아 물’과 대비되는 것이 ‘유프라테스 강물’입니다. 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세계 최초의 문명이라 말합니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란 고대 그리스어로 ‘두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발원한 물이 서쪽으로 굽이쳐 흐르다가 메소포타미아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유프라테스강이고 동쪽으로 굽이쳐 메소포타미아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티그리스 강입니다. ‘큰 하천’이라는 뜻의 유프라테스 강은 장장 2,735킬로미터에 달하고, ‘급류’라는 뜻의 티그리스 강은 1,931킬로미터에 달합니다. 두 강은 평평한 지대를 지나 마침내 페르시아만에 이릅니다. 유프라테스 강은 자연제방이 비교적 낮고 홍수가 적어서 문명 발달과 산물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고, 티그리스 강 역시 그들에게 문명의 젖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거대한 강을 본 사람들은 요단강이나 실로아 수로가 초라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선진 문명을 경험한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땅 변방에 살고 있는 자기들의 문명을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규모에 대한 선망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저항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교회를 보면 주눅이 들기도 하고 우리가 초라해 보이기도 합니다.
왕하 5장에 보면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나병이 들어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엘리사는 나와보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말합니다. 화가 난 나아만은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요단 강에 비하면 아바나와 바르발 강은 큰 강입니다. 크기에 압도되어 자기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일종의 변방 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닙니다.
요단강은 작은 강에 불과하지만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탄생했기에 세상의 어떤 강보다 위대한 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겨 있는 정신입니다. 수량이 얼마나 많은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물이 얼마나 깨끗한가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큰 강이라 해도 오염된 물이면 사용할 수 없는 법입니다. 깨끗한 물이라야 마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크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맑아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커지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맑아짐을 익히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과정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하스 왕과 유다 왕실은 크기를 숭상했기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고 유프라테스 강으로 상징되는 큰 힘에 의지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범람한 그 물이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을 넘어 유다의 목까지 차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홍수가 나서 범람하는 물을 보셨습니까? 제방이 터지고 물이 밀려올 때는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절망입니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모래로 바다의 경계를 정해놓으신(렘5:22) 하나님은 제국들의 횡포를 마냥 두고 보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물을 작게 생각하고 세상의 큰물을 좋아하다가 결국 그 세상 물이 홍수가 되어 덮쳐 오히려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잔잔하고 무미건조한 것 같습니다. 반면에 세상은 힘이 있어 보이고, 세상의 무대는 화려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의 성공입니다. 그런 외적인 것에 이끌리면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눈앞의 성공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어떤 조치도 아멘이고, 어떤 상황도 아멘입니다’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성공과 응답이 없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사람이 성공과 응답을 얻고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불평과 불만에 빠져 사는 사람보다 훨씬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얻게 된 성공과 응답은 오히려 더 큰 불행의 씨앗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우리에게도 최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고, 기도제목을 허락하시는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선의 조치임을 믿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으로 기도 응답을 속단하고, 성공을 속단하고, 인생을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철저히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잠시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도 반드시 한꺼번에 미끄러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하나님께 떼를 썼습니다. 심지어는 위협까지 했습니다. ‘하나님! 일주일 내로 이 땅을 팔아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믿지 않을래요’그런데 정말 일주인 안에 땅이 팔렸습니다. 그래서 ‘할렐루야’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팔지 않는 것이 더 큰 이익이었습니다. 땅을 팔자마자 엄청나게 땅값이 오른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했으면 나았을 뻔했습니다. ‘하나님! 일주일 안에 이 땅을 팔아주세요. 그러나 팔리지 않아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할래요’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어떤 시련과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눈앞의 성공으로, 눈앞의 모습으로 축복과 응답과 성공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병에 걸리면 실패한 인생이고, 병이 나으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공식은 바르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아들이 중병에 걸려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교회생활과 기도생활과 물질생활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기적적으로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교회생활과 기도생활과 물질생활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의 아들은 건강한 몸으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 건강이 성공의 기준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물질도 성공의 기준이 아닙니다. 물질이 없을 때에는 부부가 서로 위해주며 살다가 로또에 당첨되어 가정이 깨지고 자녀가 망가지는 경우를 뉴스를 통해서 얼마나 많이 봅니까? 우리는 한 가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성공을 재고, 축복을 재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헌신하는 마음이 후퇴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있어야 합니다. 있지 않으면 이 사회에 얼마나 속상한 일이 많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작은 일에도 상처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물질도 있어야 하고,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땀과 열심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없어도 땀은 있어야 하고, 외모는 없어도 성실함은 있어야 하고, 실력은 부족해도 믿음은 풍족해야 합니다. 그처럼 주님은 주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마음에 찾아와 큰 축복과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기다릴 줄 아는 마음
6절‘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은 하나님의 잔잔한 말씀을 상징합니다. 말씀 중심적인 생활은 너무 단순한 것 같습니다. 반면에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신앙형태가 있으면 더 진짜 같고 더 잘 믿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 무속신앙에 빠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심한 배신감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무속신앙에 빠지는 분들에게는 시련의 사슬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단은 눈속임의 천재입니다. 사단의 3대 무기가 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먹게 하는 기적의 유혹,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 화려한 왕자병과 공주병의 유혹, 그리고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세상적 성공의 유혹이 사단의 3대 무기입니다. 그것들은 다 화려합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유혹과 연출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은 무미건조한 것 같지만 결국 사람들에게 깊은 믿음을 주고 사람의 영혼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낙심한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일어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강한 바람 가운데도 계시지 않고, 비람 후의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고, 지진 후에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 후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있었고, 그 세미한 음성이 결국 엘리야를 낙심과 두려움에서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좋아하지만 진짜 사람의 영혼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입니다.
요새 영어가 참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잘 들으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것입니다. 영어를 잘 들으면 출세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으면 후세까지 축복받고 내세의 큰 상급까지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가 열리면 축복의 문도 열립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너무 성급합니다. 그래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을 버리고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물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짜 은혜는 오래 걸려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넉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살면서 항상 ‘주는 것은 빨리 하되 받는 것은 늦게 받아도 좋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 관계에서도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하는 것은 제일 빨리 하겠다고 하되 은혜 받는 것은 천천히 받아도 좋습니다’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천천히 받아도 좋다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좋은 것, 더 훌륭하고 영속적인 것을 더 빨리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토머스 칼라일이 쓴 ‘프랑스 혁명사’라는 유명한 역작이 있습니다. 칼라일은 말했습니다. ‘길 가다가 돌부리를 만날 때 약자는 걸림돌로 생각하지만 강자는 디딤돌로 생각한다’우리는 영혼의 강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10년 수고가 물거품이 되고, 20년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고난을 만나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수고는 수고 자체로 하나님 앞에 기억된바 될 것이고,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면 하나님께서 더 위대한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사십시오.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구절에서 이사야는 임마누엘 예언을 통해서 우리의 희망은 주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시련을 당해도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면 궁극적으로 우리 성도는 반드시 승리의 역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 안에만 있고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깨끗해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순수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충성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은 결코 우리를 비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하지만,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 바로 이것이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제 힘만 믿고 날뛰는 민족들과 맞서십니다. 그들이 아무리 정교한 전략을 세운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결국 제 꾀에 넘어가 패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섭리입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삶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를 절감했습니다. 가장 작은 것(Virus)들이 우리 삶을 뒤흔들자 세계가 멈춰 선 것처럼 보입니다. 이 일순 정지는 우리 삶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오만하게, 방만하게 살지는 않았는지, 제 욕심을 추구하느라 사회적 약자들에게 너무 무정하지는 않았는지, 크기와 속도를 추구하느라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자꾸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바이러스의 역습은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개발과 파괴로 인해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들이 인간 사회 가까이 접근하면서, 동물들 속에 머물고 있던 바이러스가 인체로 건너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질병의 문제로도 봐야 하지만, 환경의 문제로도 보아야 합니다. 창조 질서가 파괴될 때 어떤 치명적 결과가 다가오는지를 이 코로나19 사태는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위기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동행이 되어 주시고, 날개를 펼쳐 우리를 감싸 안아 주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는 사람들이 설 땅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너져가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회복시키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과제입니다. 교회에 주어진 새로운 신학적 과제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쓸 때 하나님은 우리 곁을 지켜주실 것이고, 이 땅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지, 제아무리 비탄과 설움의 땅에 머물러 있다 해도 날개를 펴 우리를 안아 주시는 주님의 그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사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을 시작하십시오. 이번 사순절이 그런 것을 시작하고 훈련하는 순례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삶과 실천 위에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주님 외에 우리가 다른 곳에 눈을 돌리고 마음을 돌리면 우리는 영적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때 사단이 찾아와 같이 놀자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된 것을 청산하려고 결심하고 실천하면 그때부터 주님의 우리 마음에 찾아와주시고, 동시에 심령에 놀라운 자유와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사는 복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