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5항, 24.7.14, 박홍섭 목사
신앙고백서 제3장은 하나님의 창조를 다루는 제4장과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는 제5장과 함께 하나님의 사역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제3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8항의 내용으로 정리하여 고백하는데 1항과 2항은 작정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 3항과 4항은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예정을 다루었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5항을 통해 선택의 대상과 시기와 기준, 선택의 목적과 원인을 공부하겠습니다.
5항. 하나님은 생명을 얻도록 예정된 사람들을 창세 전(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목적과 그 뜻의 은밀한 계획과 선하고 기쁘신 뜻을 따라 선택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다(엡 1:4, 9, 11, 롬 8:30, 딤후 1:9, 살전 5:9). 하나님은 사람에게 있는 믿음이나 선한 행위, 인내 또는 피조물 안에 있는 다른 어떤 요소를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의 조건이나 원인으로 삼지 않았다(롬 9:11, 13, 16 엡 1:4,9).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서 그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다(엡 1:6, 12).
해설
1. 3항과 4항이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구체적이고 확정적이라고 말했다면, 5항은 누가 선택된 사람이며 그 시기는 언제인가? 라는 물음에 선택의 대상은 생명으로 예정된 사람들이며, 선택의 시기는 창세 전(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이라고 분명하게 답을 합니다. 선택의 대상이 생명으로 예정된 사람들이라는 이 답은 생명으로 예정되지 못한 유기된 사람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유기에 대해서는 7항이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루므로 오늘은 넘어가겠습니다.
2. 선택의 시기는 창세 전입니다1).하나님은 창세 전에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선택하시고 나머지는 유기하셨습니다. 이 말은 논리적인 순서로2)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 속에 선택이 먼저인가? 아니면 창조와 타락이 먼저인가? 라는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은 창조와 타락을 먼저 작정하시고 그다음에 타락한 모든 인류 중에서 선택과 유기를 예정하셨다는 타락 후 선택설을 따르지만, 일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기 위해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3)
3.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누구는 영원한 생명으로 선택하고 누구는 영원한 멸망으로 유기하셨다면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후로 발생하는 일들을 통하여 인과관계와 논리를 얻지만, 시간과 공간과 논리 자체를 정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에는 어떤 의도나 이유나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의 영원하고도 불변한 목적과 하나님의 뜻의 비밀스러운 계획과 선하신 기쁘심과 절대적인 주권에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예정이 미리 예견된 믿음과 선행에 근거한다는 알미니안의 주장을 논박하면서 선택은 인간의 믿음이나 다른 조건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기쁘신 뜻4)에 의한다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4. 선택의 기준이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기쁘신 뜻이라는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은 성경에 근거합니다. 성경은 너무나 분명하게 선택의 기준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이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0-16) 5)
5. 알미니안들은 오늘 선택받은 자가 내일 유기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자가 불신자로 바뀌는 순간 그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도 바뀐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33:11),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딤후 2:19)라고 하나님의 계획이 불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뜻도 변하지 않고 숫자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변덕스럽거나 경솔하거나 터무니없는 공상이 아닙니다.
6. 선택의 기준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면 선택의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를 신앙고백서 제3장 5항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중보 사역이 선택의 원인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이 택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과 중보의 효력을 발생시켰다는 의미입니다. 6항에서 보겠지만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선택의 원인이 아니라 선택을 실행하는 수단입니다. 선택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과 은혜입니다.
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수단으로 해서 창세 전에 누군가를 생명을 얻도록 선택하셨다면 그 선택의 목적과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영원토록 찬송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나 선한 행위나 인내나 다른 어떤 것도 선택의 조건이나 원인으로 예견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주권적인 뜻으로 누군가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이유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예정의 교리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왜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택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분이 아닙니까?”라고 의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해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8. 또 다른 선택의 목적은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의 영원한 작정 속에서 타락한 인류 가운데 누군가를 택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것으로 실행됩니다. 그 수단이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아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백성들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져갑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이 지어져 가는 성화는 단지 도덕적인 면만 아니라 사랑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사랑하는 존재로 빚어져서 그렇게 사랑하는 모습으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 우리를 선택하신 선택의 목적입니다. 성도는 오늘도 그런 존재로 빚어져 가고 있습니다.
1)알미니안의 일부와 소시니우스주의자들은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작정, 곧 예정이 영원전이 아니라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믿은 후에 영생의 상속자로 선택되며 선택된 후에도 불 신앙과 강퍅함에 사로잡히면 구원의 결정이나 작정이 취소된다고 생각합니다(로버트 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해설, p. 105)
2)선택의 시기를 말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이루어진 논리적인 순서로 이해해야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전후의 인과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3)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중요 인물 중 하나인 윌리암 트윗스, 아르미니우스와의 논쟁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했던 16세기 신학자 베자, 17세기 신학자 고마루스가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신학자라면, 16세기의 칼빈, 19세기와 20세기 초 화란의 바빙크,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루이스 벌콥은 타락 후 선택설을 지지했습니다. 무엇보다 알미니안 신학의 항변으로 소집된 도르트총회(1618-1619)가 타락 후 선택설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타락 후 선택설이 주된 견해가 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반면에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 백스터는 “중도 예정론” (middle knowledge)을 통해 양측의 견해를 통합하려고 했습니다
4)선택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때 ‘엿장수 마음대로’를 떠올리면 안 됩니다. 타락한 인간의 죄 성을 가진 엿장수의 가위질과 선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5)아르미니우스는 이 구절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를 구체적인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에돔의 대표로 이해합니다. 그와 그를 따르는 알미니안들은 하나님은 예정의 일반적인 조건들만 정하시고 실제적인 선택과 유기는 개인들의 의지에 맡겨놓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되면 선택과 유기의 숫자는 확정되었다는 신앙고백서의 가르침과 달리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의 숫자는 매일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