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보다 더 큰 거인들
(신8:1-20)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신명기 8장 말씀 근거로 해서 <하나님보다 더 큰 거인들>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거인들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큰 자로 자처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불행한 인간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인간의 특권, 그게 뭡니까?
하나님보다 더 큰 자로 자처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에요. 우리 스스로 아주 분명하게 입으로 밝혀가면서 내가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지요. 없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말을 하지는 않지마는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람으로 자처한 것이 되어버리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을 허락하셨습니다. 광야생활을 허락하신 이유를 오늘 모세가 반복해서 ‘너희를 낮추시기 위해서다’ ‘너희의 마음이 어떠한지 보려고 하신다’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하나님께서 확인하고 싶어하셨다’. 마음이 어떠한지 보려 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이 지켜지는지 안 지켜지는지 보려 하셨다, 또 낮추려 하셨다, 이런 말로 계속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낮춘다고 하는 말이 여기서 뭘까요? 뭐가 낮추는 것일까요?
여러분 다 아시는 대로 고대 그리스에 견유학파[犬儒學派]라는 철학 학파가 있지 않았습니까? 디오게네스로 대표되는 견유학파.
개 견(犬)자를 씁니다. 개처럼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는데, 예를 들면 이 견유학파 어떻게 살아갑니까? 옷 한 벌, 지팡이 하나에 바랑을 걸치고 그리고 나무통 속에서 살면서 세상의 모든 지성들을 비웃고 조소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집 얻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구걸하듯이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낮추어진 모습이겠습니까? 여러분? 아니에요.
이처럼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풍자하고 조소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다 틀렸다 이거에요. 뭐 집 같은 거 얻으면 뭐하냐, 무슨 뭐 출세하기 위해서 애쓰면 뭐하냐... 출세하기 위해서 애쓰는 그 자체가 다 틀려 먹었다. 출세하기 위해서 애쓰는 게 틀려먹은 것과 그것이 틀려먹었다고 조소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것입니다. 야러분. 그만큼 마음이 높은 것이에요.
또 우리나라의 김삿갓. 나물먹고 물마시면서 구름을 지붕삼아 뭐 진짜 돌을 베게삼아 땅을 요삼아 누우면 그렇게 천하를 풍유하며 돌아다니면 그게 마음이 낮은 겁니까? 세상의 정말 정권 다툼에 당쟁을 일삼고 있는 모든 부패한 신하와 탐관오리들을 조소하면서 천하를 풍류하고 삿갓과 지팡이를 벗 삼아 돌아다니면 그러면 그 사람이 낮은 사람입니까? 아니라는 것이에요.
제가 독일에서 독일 교수님들을 보고 참으로 인상 깊게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 정말 전설 같은 학자들이 있어요. 아직도 살아 계신 전 세계에 뭐 신약에 아니면 구약에 아니면 역사신학에 조직신학에 각 신학에 분야마다 전설적인 인물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아직도 살아 계신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참 놀라워요. 그 분들이 자전거를 타요. 자전거도 어떤 자전거를 타냐? 녹이 다 슬고 바퀴가 굴러가면 s자 형으로 보이는 거 있죠? 너무 오래돼서 바퀴 휠이 휘어서 끼릭끼릭 소리가 나는 그런 자전거를 타고 다니세요. 그리고 어쩌다 차를 타고 오시는 것을 보면 차문을 이렇게 열면 차문 밑이 녹이 슬어서 다도해처럼 다 썩었어요. 그런 차를 타고 다니십니다.
그거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여러분? 그 분들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돈 많이 받아요. 미국에서 교수생활 하시는 분들보다 훨씬 많이 받으십니다. 미국은 정말 교수님들이 가난뱅이에요. 이과 교수님들이라고 프로젝트를 받으면 모를까 아니면 다 가난뱅이입니다. 근데 독일 교수님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도 그런 차를 타고 다니고 청바지 하나를 사면 진짜 평생을 입다시피 그렇게 검소하게 살아가십니다. 이것이 낮은 겁니까? 아니에요.
그 분들의 가치부여가 딴 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수염을 기르시고 낡디 낡은 바바리를 입고 자전거를 덜래덜래 타고 오시는 그 분 머릿속에 어마어마한 지식이 들어 있습니다. 낮은 사람들이 아니에요.
여기서 지금 낮추신다 라고 말할 때 이 낮추신다는 게 무슨 뜻일까?
먼저 우리가 그 뜻을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 너무 유명한 구절 한번 살펴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거라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광야생활을 하셨다. 말씀하시지 않아요?
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이 말씀이라는 것은 원어대로 그대로 직역을 하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로 산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떡 and 하나님의 말씀, 즉 떡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이렇게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근데 정학하게 이 뜻이 아니에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인용구라고 생각하세요.「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가 살려면 떡이 있어야만 된다고 그렇게들 생각을 한다, 떡이 제대로 갖추어져야만 살 수 있다고 그렇게들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아니다 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왜?
만나만 먹였어요. 40년 동안 만나만 먹였다는 것은 여러분, 전혀 제대로 된 음식이 공급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낮추시기 위해서 먹인 음식이 훌륭한 것이었겠어요? 아닙니다. 아니죠. 겨우 겨우 생명을 연명할 수 있는 정도의 음식이 만나였다는 것입니다.
근데 왜 만나를 주셨느냐? 이렇게 생각하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떡이 잘 갖추어지고 입을 옷이 충분히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너희는 음식 같지도 않은 만나를 40년 동안 먹으면서도 살지 않았느냐. 근데 살았던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뜻이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섭리와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모든 것들로부터 너희가 40년을 살게 되었다. 하나님 입에서 너희가 만나만 먹자만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으니까 산 것이고, 하나님 입에서 너희가 광야이지만 의복이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까 옷이 떨어지지 않고 살았다. 사람들은 음식이 제대로 갖추어져야만 산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부터는 이렇게 생각해라. 야, 우리가 지금 음식 걱정하게 생겼어?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 음식 같지도 않은 만나만 먹고도 살았어. 근데 우리가 음식 걱정하겠냐? 아니야.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해 신경을 쓰고 생각하도록 하자」이렇게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떡도 필요하고 and 하나님 말씀도 필요하다 이게 아니라 광야에서 그렇게 형편없는 떡을 먹으면서도 살았으니까 이제부터는 우리 떡 같은 것에 대해서는 이제 신경 쓰지 말자.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무엇인가만 신경 쓰며 살자. 그러면 살더라. 떡이 있어야 사는 것이 아니더라. 떡을 우리가 신경 써야만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게 아니더라」이러한 뜻으로 말씀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낮춘다는 말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 낮추신다는 게 하나님보다 더 큰 거인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신다 이런 뜻이거든요.
여러분, 오늘 보면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거 그리고 너희 마음이 어떠한지,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계속 반복되고 있는 말씀 속에 들어있는 이 핵심적인 의미가 뭡니까?
명령이라는 게 입에서 나와요. 그리고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산다. 너희 마음이 어떠한지. 이게 다 뭘 말하느냐? 여러분? 생각을 하지 않는 인간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생각이라고 하는 거 여러분, 생각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광야로 데리고 가시지 않습니까? 광야에서는 여러분, 생각할 게 없잖아요. 광야에서 내가 어디 가서 먹을 것을 구해올 것인가를 생각하겠습니까? 아예 포기.
광야에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는 무슨 베라도 농사를 지을 만한 무슨 땅을 생각하겠습니까? 생각이 나질 않아요.
그리고 내가 어떻게 걸어 갈 것이고 어떤 길을 향해서 가나안으로 갈 것인가 생각하겠습니까? 못해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는데 그것을 보고 가야 되는데 내가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생각할 수가 없어요. 어느 길로 가야 좋은지 무엇을 해야 좋은지. 내가 내 자식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나가서 벌어야 되는지 생각할 수 없어요.
광야라는 곳은 생각이 멈춰지는 곳이에요. 더군다나 혼자 광야에 떨어졌다면 어떻게 광야를 빨리 빠져나갈까 생각은 하겠지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앞에서 인도를 하시니까 그것만 바라보고 있어야지 뭘 생각할 수가 없는 곳이 광야라는 겁니다.
그럼,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왜 낮춰지는 것이냐?
여러분, 그렇잖아요. 어머니가 계시고 옛날에 식모가 있습니다. 그러면 식모가 높아요, 어머니가 높아요? 당연히 어머니가 높아요. 가정주부가 높아요. 그러면 높고 낮음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무엇을 해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 식모는 생각이 없어요. 그러면 생각을 하는 자는 누굽니까? 어머니에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식모가
“아유, 아주머니 오늘 이거 해먹어야 되겠습니다.”
“왜?”
“아니, 아저씨가 기침을 자꾸 하는데 기침에 좋다고 하는 토란국을 끓여 먹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누가 높은 겁니까? 여러분? 당연히 식모가 높은 거예요.
이 낮추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낮추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데 선악과를 따먹고 무엇이 옳고 그름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보다 더 큰 거인들이 되어버렸다는 거예요.
거인증이라고 하는 거 있죠? 여러분? K1 격투기 선수인 최홍만 선수가 거인증이라고 하는 게 밝혀졌다는 그런 기사가 나오고 그러는데 거인증이라는 게 뇌하수체에서 분비하는 성장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가 되면서 성장기 이전에 벌써 뼈가 쭉쭉 자라서 2m가 넘게 자라는 거 이런 걸 거인증이라고하지 않습니까? 나중에 성장판이 막혀버린 다음부터는 그 다음에 말단 비대증으로 바뀌죠. 성장 호르몬은 계속 나오는데 성장판이 막히니까 손발이 커지고 얼굴이 턱이 늘어나서 거인들 보면 이상한 형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어떤 일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본문을 계속 보면 하나님을 기억하라, 하나님을 잊지마라, 하나님을 생각하라 계속 나오잖아요? 낮추신다는 말과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리가 생각을 하잖아요. 이 생각이 뭐냐?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이 하나님보다 더 비대해지는 성장 호르몬이라는 거에요. 과다 분비되어지는 성장 호르몬이라는 겁니다. 이 생각을 멈추시게 하는 거에요.
결국 높다 낮다가 어디서 결정이 됩니까?
한 회사에서도 높다 낮다가 어디서 결정이 됩니까?
생각을 누가 하고 있느냐가 높은 거냐 낮은 거냐를 결정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생각하는 게 성장 호르몬이라는 것이에요. 하나님보다 더 큰 거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 생각 없이 살아갈까?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겁니다. 생각이 없이 살아간다고 내 삶에 필요한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생각을 안 할뿐이지 내 삶에 필요한 생각이 없다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갖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생각을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나보다 더 높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자식을 바라봅니다. 자식에 대해서 잠깐 하나님을 잊고 생각합니다. 아유, 우리 아이가 공부를 이렇게 하려면 저렇게 하려면, 우리 아이가 취직을 하려면 생각을 이렇게 합니다. 이게 벌써 성장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 그러세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이게 다 악에서 나느니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는 것은 지금 누구에게 말을 하면서 대화하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 이상의 생각들은 다 무엇이냐? 과다 분비된 성장 호르몬이라서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큰 자들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거인들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보다 더 큰 거인들을 하나님께서는 뭐라 그래요?
20절.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하나님보다 더 큰 비대증에 걸려서 하나님보다 더 큰 거인들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제 경험을 얘기하면 예를 들어, 제가 목욕탕을 간다 그러면 오늘은 목욕탕에 가서 좀 몸을 푹 담그고 좀 쉬어야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대화를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 저 지금 목욕탕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하나님 같이 가시겠습니까? 같이 안 가시겠습니까? 하나님, 좋아요, 싫어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제가 집사람에게 목욕탕 가면서“찜질방 같이 갈래?” 이렇게 물어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왜 하나님을 목욕탕에 갈 때는 잊어버리느냐 이겁니다.
시장가요. 왜 시장갑니까? 우유 살려고 가요. 우유 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내가 생각으로 결정한 거예요.
“마트에 가서 우유를 좀 사야겠는데 우유가 다 떨어졌네.” 왜 그러냔 말이에요.
제가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 우유가 없으면
“아이 이 사람아. 냉장고 안에 우유가 하나도 없잖아. 우유 좀 사러가야 되겠어.”
“그러면 차를 타고 갈까, 걸어갈까?”
“차를 타고 가.”
“그럼 같이 갈래요?”
대화하잖아요.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속으로 ‘하나님, 우유가 다 떨어졌는데요, 지금 갈까요? 아니면 조금 있다 갈까요? 하나님 지금 가실래요? 하나님 지금 안 가실래요?’이렇게 대화하라는 겁니다. 여보, 우유 사러 같이 갈래? 안 갈래?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왜 여보는 기억하면서 왜 하나님은 기억 안 합니까?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라는 얘기입니다.
자, 남편과 대화한다. 그럼 낮은 자가 되고 높은 자가 되는 것은 어떻게 결정이 됩니까?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생각이 돌아갑니다. 내 생각을 막 얘기해요. 높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있고 남편이 있는 이 상황에서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쉬 쉬” 이러는 거예요.
근데 여기 뭐라 그래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이 명령을 지킨다 안 지킨다 라는 말을 율법을 지킨다 안 지킨다 라는 말로만 보지 말고 오늘 본문 대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로 산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입을 보고 내 입은 다물고.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내가 생각하는 동안에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 쉬쉬. 아니 내가 얘기 하잖아요. 내가 생각 하잖아요. 하나님 쉬쉬.” 자꾸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막는 겁니다. 이게 뭐예요? 높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모든지 누구와 대화할 때든지 나는 속으로는 하나님과 먼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하나님, 이 분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나는 뭐라고 얘기하면 좋겠습니까?”이게 하나님의 입을 자꾸 하나님 말씀하세요, 입을 여세요 얘기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의 입이 뭐예요? 여러분? 금광이에요.
하나님의 입이 뭐에요? 다이아몬드 광이에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게 좋은 겁니다.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자꾸 우리 속에서 나오는 생각을 가지고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입에서 뭐가 나오는가를 자꾸 찾아내세요. 금광도 곡괭이로 파내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도 내가 자꾸 기다리고 그것을 간구할 때 하나님의 입에서 자꾸 나와요.
우유 하나 사러가는 것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뜻을 물으면서 하나님과 같이 가세요. “하나님 나 우유 사러 갑니다. 같이 가실래요, 안 가실래요? 안 가실래요? 그럼 나도 안 가요. 하나님 같이 가요.”이렇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들어야 돼요. 내가 생각하면 안 돼요.
가만히 저 자신을 보면 말입니다. 제가 뭘 생각하잖아요? 심지어 설교준비를 하는 것 조차도 내가 생각을 하면 하나님 잊어버려요. 이상해요.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진짜 내가 대화해야 될 실제 하나님은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내 생각 속에 하나님만 정말 내가 생각으로 다루고 있지 정말 이거는 다루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과 대화를 안 해요.
그럼,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냐?
“하나님, 내일 아침에는 신명기 8장을 갖고 말씀을 해야 되거든요. 근데 하나님 아시다시피 제게 맡겨주시면 제가 뭘 가지고 설교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제 입을 통해서 하실 말씀들을 저에게 생각을 주셔야지요.” 이렇게 계속 대화하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설교하는 것은 여러분, 적어도 하나님과 대화하는 중에 들은 것들을 전해 드리는 것이지 제가 혼자 생각해서 짜낸 것들을 설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너무 둔하고 제가 너무 죄악이 많아서 하나님의 생각을 명확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은 있더라도 기본적인 의도는 설교에 임하는 자세와 의도는 대화 중에 들은 것들을 전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생각을 해낸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생각이 성장 호르몬이다 이렇게 제가 오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짜낸 생각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러한비유적인 표현들을 부족하지만 제 나름대로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들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렇게 듣는 중에 설교를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입을 다문 자만이 입을 열어 설교 할 수 있다. 전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내 입은 쉬쉬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하나님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자만이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 생활 속에 적용합니다.
내가 자식에게 입을 열어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내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열린 입에서 나오는 그 모든 것들을 내가 받아들여야 된다. 이 세상에 대해서 세상 일에 대해서 무엇에 대해서든지 내가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자. 그래야 내가 낮아지는 것이다. 내가 생각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 쉿. 하나님 입 다무세요. 이러는 것과 똑같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하나님을 향해서 쉿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놔두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했으므로 너희도 멸망하리니...
오늘도 너무너무 행복한 삶을 사실 수 있어요. 여러분. 추석 때만 행복한 게 아니라 추석이 끝나도 여전히 행복할 수가 있거든요?
그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뭐예요? 오늘 말씀하잖아요. 너희가 배부르고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이 있으니 하나님의 입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하나님이 무어라 생각하시는것을 내게 들려주시는가, 그것만 신경 쓰면, 떡에 신경 쓰지 말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떡이 제대로 있어야 산다 이러고 살아요. 너희는 만나를 경험하지 않았냐. 그러니까 만나를 먹고도 음식 같지 않은 음식을 먹고도 40년을 살았는데 그 까짓것 신경쓰지 말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만 신경쓰고 살면 함포고복하게 될 것이다.
태목사가 배가 나온 게 그래서 그런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살다 보니까 하도 잘 먹여주셔서 이렇게 배가 나와서 배 두드리며 살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 함포고복하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7.09.27)
†기도
|
첫댓글 들리진 않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주님과의 사랑의 사귐을 통하여 나 아닌 타인의 입을 정확히 보며 서로를 교감하는 청각장애인들의 신앙을 가만히 되새겨 봅니다. 사랑의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동행의 삶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