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열전 4-2
제4대 세종대왕(이도)의 여자들
세종이 즉위하자,
장인 심온이 영의정이 된다.
하긴 딸을 잘 두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심온과 그 동생 심정이
늙은 용 상왕 태종의 역린을 건드린다.
소헌왕후가 우려했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게 조심조심 조신하게 처신했건만..
첫째는 심온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출발하기 전
환송연을 열었는데 사람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완전 실세이니까..
그런데 상왕인 태종이 볼 때,
''야, 이놈 봐라!'
어디 감히 외척이 난리여~'' 했다.
심온, 그는 돌아오다가 국경선을 넘자
바로 체포되어 남산벙커(안기부)로,
아니 수원으로 유폐되고 곧 사약을 받는다.
두번째 역린을 건드린 건 심온의 동생 심정이다.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날 때 왕실 경호실 군사력을
둘로 나누어 수강궁에서 자신을 경호하라 시켰는데
심정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했단다.
그래서... 다 알 거니 생략한다.
심씨 두 형제가 상황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속담이 생긴 거다.
''잘 나갈 때 조심 ㅎㅑ~ !''
소헌왕후 심씨 집안이 다시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다.
풍비박산(風飛雹散)'은 바람이 널리 날리고
우박이 산지사방으로 떨어지듯 가정이나
어떤 집단이 패망하여 사방으로 날리어
사라지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상왕 태종에게 군사력! 이거 좋은 것이니
함부로 자식에게 빨리 주면 안 된다.
왕비의 친정 엄마도 관노로 추락했다.
왕비 엄마가 노예로... ㅠㅠ
소헌왕후 심씨, 죽을 맛이다.
심온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박은 일파들은
후환(後患은 글자 그대로 '뒤탈, 뒷근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소헌왕후도 폐위시키려고
하지만 상왕 태종이 ''No'' 한다.
이유는?
소헌왕후가 성품이 후덕하고..
집안을 잘 다스리며..
자기 마누라와 달리 질투심이 없고..
특히 자식을 많이 낳았기 때문이다.
소헌왕후 엄니, 세상을 떠나면서
후손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심씨는 앞으로 절대 박氏하고 결혼하지 마라."
겸손이 왜 이익이 되는지 알았을 것이다.
소헌왕후는 현모양처였다.
다음에 십만원권 화폐가 발행이 된다면
도안 인물로 소헌왕후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
만원권 세종대왕보다 더 고생했으니..
집안에 우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자 문제인데 나중에 문종이 되는
세자 향의 아내들 때문이었다.
세자비를 두 명이나 쫓아낸다.
첫째 세자비는 열여덟 살인 상호군 김오문 딸인데
열네 살 세자는 몸도 허약하고 어릴 때 같이 놀던
중전의 시비인 효동과 덕금이와 더 어울렸다.
물 오를 나이인 세자빈 김씨도 질투심이 대단했다.
남편 세자 사랑을 받겠다고 별 해괴한 짓을 다한다.
1.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잘라
불에 태워 술에 타서 마시게 한다.
2.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내어 먹게 한다.
3. 미초라는 풀을먹고 자란 나비를 말려 차고다닌다.
4. 붉은 박쥐를 가루로 만들어 써 보기도 한다.
.
별짓 다했는데 소용이 없다..
세자빈 김씨, 결국 들통이 나서 퇴출되고
친정 부모님과 함께 독약을 먹고 죽었다.
불쌍한 세자비여!
차라리 방중술이나 익혔더라면 좋았을 것을..
둘째 세자비는 세자와 동갑인 봉여의 여식이다.
이때 후사를 위해서 세자의 후궁도 들인다.
그것도 셋이나..훗날 단종의 어머니인 권전의 딸,
정갑손의 딸, 홍심의 딸.
질투심 많은 봉씨!
봉 쫓던 암탉이 되어 독수공방하는 신세가 된다.
정욕을 참지 못한 세자빈, 시비와 동성연애를 한다.
즉 레즈비언(lesbian)이 되었다.
조선왕조 최초로...
세종실록 75권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이 글이 선데이 서울처럼 될까봐 삼가한다.
세자빈 봉씨가 친정으로 돌아오자,
아버지인 봉여는 딸을 혁띠(허리띠겠지..)로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맨다.ㅠㅠㅏ주
나중에 문종의 아들 단종이
비참하게 죽은 것은 문종의 죽은 두 세자빈의
원귀가 씌여서 그런 것이 아닐까?
"으~윽 무섭다!"
같은 남자로서 볼 때,
세종이 부인을 여섯 둔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일주일은 7일이다.
하느님도 이 세상을 만들 때 6일 동안은 열심히
일하시고 마지막 칠일 째에는 안식일을 가지셨다.
세종대왕도 아주 현명한 분이어서
6일 동안 밤마다 후궁 방을 정찰하고
하루는 휴식을 취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비운이면서도 행운녀였던 소헌왕후, 56세로
둘째 아들 수양대군 집에서 먼길을 떠나셨다.
아이들을 많이 낳으니 그중 특출한 분도 생겼다.
안평대군...
몽유도원도에 글을 쓰신 조선의 명문장가!
세종대왕의 치적을 알아 보면?
집현전 설치, 훈민정음 창제.
최초의 여론조사, 실용위주의 인재등용.
의정부 서사제, 노비의 육아휴직 보장.
삼강행실도 편찬, 과학기술 발전.
칠정산 편찬, 음악정리, 대마도 정벌.등등
참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소헌왕후님도 참 고생을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