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숙제의 절의와 사육신,생육신의 절의. 무엇이 다른가?
아들아, 함안에서 진주로 방어산 자락을 끼고 통하는 길에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고,
채미정(菜薇亭)이란 정자가 있다. 둘 모두 생육신 중 한분이신 어계 조려 선생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진 곳이란다.
채미정은 그 정자 자체도 아름답지만 바로 앞의 연못과 청풍대란 절벽이 어우러진
풍경도 제법 볼만하지.
채미정과 청풍대
채미정(함안군 군북면)
그 채미정 옆 청풍대에 올라 앞을 바라보면 벌판이 있고 그 너머에 산이 있는데
그 이름이 하나는 백이산(伯夷山)이고 또 하나는 숙제봉(叔齊峰)이란다.
채미정이란 이름은 菜는 나물, 薇는 고사리를 뜻하는데..옛 중국땅에 살던 백이와
숙제라는 사람이 절개를 지키고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나물과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굶주려 죽었다는 일화에서 나온 이름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어계 조려 선생이 세조의 찬탈에 반발하여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자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등진 것이 백이와 숙제의 절개에 비길만 하다는 말이겠지.
아들아, 백이와 숙제 그리고 어계 조려 선생이 절개를 지키려 했다는 것은 같지만
아빠가 보기엔 백이, 숙제와 어계 조려 선생의 절개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된다.
이들의 절의가 어떻게 다른지 아빠가 풀어볼테니 한번 고민해 볼까.
사람이 철이 들면서 세워놓은 주체의 자세를 바꾸는 것을 변절이라 하고, 그것을 지키려
애쓰는 것을 절의라고 한다. 이것은 아주 높은 정신적 경지가 받치는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의를 지키는 사람을 칭송하고 존경하는 것이란다.
백이와 숙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지금으로부터 약 3천년 전 중국땅을 다스리던 은(殷)나라
때의 사람이다.
이들은 은나라의 제후국 중 하나인 고죽국(孤竹國) 사람으로,고죽국을 다스리는 군주의
자제들로 백이는 장자, 숙제가 막내였단다.
고죽국 군주가 막내인 숙제를 사랑하여 그 자리를 숙제에게 넘기려하자 장자인 백이는
아비의 뜻을 받들고자 깨끗이 군주의 자리를 포기하고 미련없이 떠났고, 막내인 숙제는
군주의 자리는 마땅히 장자가 이어야 하는데..자신이 그 자리를 받을 수 없다하여 그도
군주의 자리를 버리고 백이를 따라 같이 고죽국을 떠나버렸단다.
그래서 결국 고죽국의 군주는 가운데 아들이 받게 되었지.
이런 일화로 볼때, 기본적으로 백이와 숙제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들인 것 같고,
군주의 자리도 미련없이 버릴 정도로 그 신념이 남다른 인물들인 것 같아.
군주의 자리를 버리고 떠돌던 이들은..서백 희창(西伯 姬昌,훗날의 주(周) 문왕)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다가, 서백 희창의 아들, 희발(姬發, 주(周) 무왕)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벌하러 가는 것을 보고..나서서 그를 말렸다고 해.
신하가 되어 군주를 몰아내는 것, 아버지의 상 중에 군사를 일으킨 것은 부자의 예와
군신간의 예에 어긋난다고 했지.
그러나 희발은 그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출전하여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대승하고
주왕을 몰아내면서..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의 천하를 열었지.
그리고 백이와 숙제는 주 무왕이 인의(仁義)를 무시했다하여,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주나라 땅에서 난 곡식을 먹지 않겠다 맹세하고
고사리와 나물을 캐어먹고 살다가 굶어죽었다고 전하는 구나.
그래서 백이와 숙제를 은나라에 대해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킨 인사라 하여 유가에서는
크게 평가되고 있는 인물이 되었단다.
어계 조려(漁溪 趙旅,1420~1489)선생은 생육신 중의 한분이시다.
생육신과 사육신에 대해선 이 앞에도 얘기했으니 생략하고..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많은 대신들을 살육하고 조카이자 국왕인 단종을 위협하여 1455년 수양대군은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했으니 그가 곧 세조였다.
이때 사대부들은 보한재 신숙주나 정인지, 정창손 같이 세조에게 협력하여 권력을
유지하고 일신상의 영달을 위해 사는 길을 선택한 자들이 있었고,
매죽헌 성삼문 선생을 포함해 여섯 신하같이 세조에게 죽음으로 맞서 저항한 자들이
있었고 또 어계 조려 선생처럼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여 세조가 있는 조정에 비협력하고
단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한 자들이 있었다.
사육신과 생육신은..세조의 부당한 왕위찬탈에 저항하고, 정당한 왕위에 있었던
단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절개를 지켜 역사에서 충의지사(忠義之士)로 평가받고 있다.
은의 마지막 임금, 주왕(紂王)
주왕은 그가 총애하던 여인, 달기(妲己)와 더불어 주지육림(酒池肉林), 포락지형(炮烙之刑)같은
말을 낳은 잔인무도한 정치와 형벌로 백성을 학대하고, 온갖 음란과 사치로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하였고, 거기에 그 잘못을 간하는 충신들을 잔인하게 죽여 민심을 잃었으니..국왕된 자로 백성을
위해야 하는 천명을 저버린 나쁜 지도자였단다.
이런 자는 백성을 지키고 대표하는 한 나라의 군주로서 그 자격을 잃었고, 그런 자는
마땅히 백성과 나라를 위해, 그리고 정의를 위해 군주의 자리에서 몰아냄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천명(天命)이 떠난 국왕과 왕조는 백성이 일어나 그를 벌하고 새로운 천명을 받은 자를 세울 수
있다는 말이다.
주왕의 총희 달기
그러나 사육신과 생육신이 충성을 바친 단종은 어떠하더냐.
단종은 세종과 문종대왕의 뒤를 이은 적장자이며, 정통성을 가진 임금이었다.
그리고 그가 어리긴 했지만 백성을 학대하고 충신을 죽였다거나, 나라를 잘못 다스려
나라에 큰 죄를 지은바 없는 국왕이었단다.
아들아, 생육신과 사육신이 현재의 권력인 세조가 아니라 쫓겨난 국왕인 단종에게 바친
충성은 어떻게 봐야 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단종이 어려서, 왕권이 약하여 여러 대신들에게 휘둘렸기에 세조가 나서 강한 왕권을
확립하였고,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할 그런 희생이었다고.
조선 제7대 왕, 세조 이유(世祖 李瑈,1417~1468, 재위1455~1468)
그러나, 세조는 정당성을 가진 국왕을 쿠데타라는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찬탈하였으니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지 못하였고, 그렇게 얻은 왕위로 강력한 국왕이긴 했지만..
그를 도왔던 인사를 중심으로 측근정치를 하면서..그들의 국권농단과 전횡을 방치하고
강력한 권세를 누리는 기득권층만 만들어 놓았으니 조선의 정치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조의 왕위등극이 백성들에게 그리고 나라에 과연 무슨 복이 되었겠느냐.
그러니 사육신과 생육신의 충성은 정당성 없는 국왕을 몰아내고 정당성 있는 국왕을
되돌리려는 노력이자 의지의 표현이었다 햐야 할 것이고, 실패했지만 역사의 평가는
세조보다 분명 이분들에게 더 호의적이지 않더냐.
아들아, 지금의 민주주의시대는 옛날 왕정시대와는 틀려서, 군주나 대통령에 대한
충성은 더이상 미덕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근본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 국민인 것이다.
옛날엔 임금을 하늘의 아들이자 하늘을 대신한 존재라 하여 천자(天子)라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대통령이나 군주가 천자라 친다면 그 하늘, 天이란 존재는 누구더냐.
바로 우리 국민인 것이다.
우리가 주인이고 대통령은 우리의 권능을 잠시 맡은 우리의 대리인에 불과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은..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잠시 속일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없이
현명한 존재가 또 백성이라 그들은 금방 안다.
자신들을 진실되게 위하는지 아닌지를. 그리고 백성은 정당성이 없는 권력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 글쓴이: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