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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
봄이 오면
심영의
사흘 전
나라를 잃고 나서 봄가을이 몇 번이나 지났을까. 내 고향 이천 백사면에는 아마 지금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새빨간 열매 위에 작고 노란 산수유꽃이 활짝 피었겠다. 사람들은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을 따뜻한 바람에 녹여내고 화사한 꽃구경을 다녀오겠지. 겨울철 묵은 밭을 갈아 흙을 부드럽게 하고, 이랑을 만들어 작물 심을 준비를 할까. 내 고향 이천은 도자기가 널리 알려졌지만 기름진 땅에서 수확한 맛 좋은 쌀이 무엇보다 으뜸이지. 물론 그래도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배가 고팠지만, 나라는 잃었어도 백성들의 삶은 그렇게 이어지기는 하는 걸까. 풀렸다가 다시 언 땅을 무연히 바라보던 그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의 심문을 견뎌내는 게 점점 힘이 들었다. 체포되고 난 후 벌써 3년 가깝게 이어지는 심문과 모진 고문에 지친 것일까. 달라붙은 폐병이 얼음장처럼 시린 겨울 감옥에서 다시 도진 듯싶었다. 해방은커녕 전쟁의 광기 속으로 모든 게 빨려 들어가는 정세가, 그래서 정말 도무지 희망은 없는 것일까 행여 그런 마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어서 견뎌내는 일이 더 어려운 것일지도 몰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먼 친척이라고 해도 그래도 남이 아닌데, 하물며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고 나선 걸 돕지는 못할망정, 그깟 현상금에 눈멀어 밀고한 사람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다. 하긴 힘든 세월을 살아내자면 누구에게라도 그깟 돈 몇 푼은 아니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돌아누우면 마음 한쪽이 잠시 너그러워질 것도 같았다. 그는 돌아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또 불러내는구나, 또 잠깐의 편안한 잠에 들지 못하도록, 하긴 편안한 잠이라니 언감생심이지, 당치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겨우 잠이 들었다 싶으면 다시 취조실로 불러내는 저들이 징글징글했다. 그냥 죽여라, 죽이라고, 아무리 대들고 여러 날 곡기를 끊어도 소용없었다. 이미 사형선고를 내려놓고도 저들은 매일 같이 괴롭히기로 작정한 듯싶었다. 죽어도 곱게 죽는 것을 봐줄 수 없다는 것인지, 오랜 기간 그를 맡아 심문하고 고문하던 일본인 경부가 그를 또 불러냈다. 이름도 희미한, 하긴 그 이름이 무엇이든 하등 관심 없고 똑같이 고약한 일본 경부가 수십 번 묻던 것을 거듭 질문하는 것이었다.
이봐, 조센징, 내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다. 어차피 죽게 되어있는 거니까 솔직하게 말해 주면 좋겠다. 그래 너 자신을 애국자라고 생각하느냐? 무엄하게도 총리대신 각하를 향해 권총을 쏜 무뢰배 안중근처럼 되고 싶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냐? 나라를 구하려다 안타깝게 실패한 영웅의 이미지를 너는 원하는 것이냐? 일본인 경부는 조선인 독립투사를 비웃고 있었다.
하긴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과 조선인을 비웃고 있었다. 오랫동안 청의 속국 그러니까 노예와 다를 것 없던 야만 상태의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근대문명 국가, 개화로 나아가게 도와주고 있는 대일본을 향해 고마워할 줄 모르는, 고마워하기는커녕 틈만 나면 여기저기서 독립운동이랍시고 소란을 피우는 게 가소로웠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미개한 자들을, 더구나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에 붙잡혀 온 불량 조선인, 만주와 상하이를 거쳐 고향 이천에 들어와 군자금 마련을 위한답시고 사람 여럿을 죽인 이 새파란 아이는 얼마든지 비웃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경부가 그냥 저 혼자 말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너 같은 프롤레타리아,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게 달랑 몸 하나뿐인, 배운 것도 없고, 너는 보통학교를 이년 만, 겨우 이년만 다니다, 말았다지? 너처럼 가진 것도 아예 없는, 그래서 사회에 불만만 가득한 자들이 할 수 있는 그나마 그럴듯한 명분 있어 뵈는 사업은 소위 독립운동이다, 그렇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처럼 어엿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 전혀 안 되고, 너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아름다운 처녀 곁에 가서 손 한번 잡아본 적도 없을 거야 아마도, 그렇지? 그렇다니까. 그나마 인정받을 수 있는 쉬운 길이 독립운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네 마음도 그런 것 아닌가? 솔직하게 진술하면 네 죄는 훨씬 가벼워졌을 텐데. 몰랐으니까, 대일본제국의 은혜를, 그 깊은 뜻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죄로 그런 망나니짓을 한 거니까 정상 참작의 여지가 충분했을 텐데. 이미 늦었으나 본심을 털어놓으면 마음은 편한 법, 어떤가?
그는 부풀어 오른 오른쪽 뺨을, 짭조름한 피가 흘러나오는 터진 입술을, 찢어져 사물이 흐릿해 보이는 왼쪽 눈두덩을 그냥 내버려 둔 채 눈앞의 일본인 경부를 한껏 노려보았다. 하, 이 새끼. 복부를 발로 가격당한 뒤 그는 뒤로 벌렁 쓰러졌다. 잃은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하는 까닭을 되물을 필요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어서 저들의 되풀이되는 심문이 부질없었다. 너희들이라면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그의 답은 저들 스스로 부끄러웠을 터였다. 나라를 되찾는 일은 잃어버린 고향과 빼앗긴 땅과 면면히 이어져 온 조선의 삶을 다시 잇는 것이었다. 내가 가진 것 없이 태어났고, 많이 배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라를 되찾는 일에 그것이 무슨 흠이 될 일인가.
내 고향 이천에서도 기미년에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운동이 있었다. 마장면 오천장터에 모인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나라의 독립을 한목소리로 염원할 때 남자나 여자의 구분이 없었고 노인과 어린아이의 구분도 없었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이 없었고 많이 배운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인정받는 사업은 무슨, 헛소리인가. 더구나 사회주의든 아나키즘이든 해방된 나라의 모습을 꿈꾸는 것 또한 독한 고문 앞에 무릎 꿇을 까닭일 것도 없었다. 인간의 본성과 순리에 따르는 삶을 꿈꾸었다는 게 죄가 될 것 없다고 그는 거듭 생각했다. 한 개의 별을 노래해야지, 꼭 한 개의 별을. 십이성좌 그 숱한 별을 어찌나 노래하겠나. 그는 비슷한 해에 태어난 독립투사 시인의 시를 나직하게 읊조렸다. 다만 그 자신의 욕됨이야 조만간 끝나겠지만, 독립을 이루기는커녕 저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는 듯싶어 그것만이 아득하고 두려운 마음이었다. 그는 까무룩 하게 의식을 잃었다.
이틀 전
열아홉 나이 때 만주로 갔었다. 사실을 말하면, 그가 처음부터 독립투쟁을 하겠다는 목표나 결심이 섰던 건 아니다. 일본인 경부는 그럼, 그렇지, 어린 나이에 네가 뭘 안다고 그랬겠어, 쾌재를 부를 듯 좋아했다. 저들은 주의자를 박멸해야 할 벌레나 되는 것처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들을 존중하는 듯한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그들이 대체로 일본 유학을 통해 주의자가 된 것을, 그러니까 학벌 따위를 높이 평가하는 노예근성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끌려와 오랫동안 감금되고 갖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조선의 청년 독립투사는 아예 대놓고 무시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경부가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그대로 감추지 않으면서 덧붙였다. 왜냐하면, 너처럼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조센징들이란 다만 불만만 가득 쌓인 나머지 무엇엔가 그러니까 국가나 유력자나 하다못해 마을의 작은 부자나 그런 대상에 대한 증오심 적개심만 가득하거든. 너는 진즉에 우리 일본 제국에 병합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조선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고 해도 너는 사회 불만 세력의 일원 그대로 일 걸. 꼭 목숨을 빼앗아야 할 필연적 이유도 없는 사람을 둘이나 죽인 걸 보면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너도 마음속으론 인정할걸, 아마. 너와 함께 일을 꾸미다 먼저 체포된 네 친구는 진즉에 그렇게 자백했다. 늦었지만 너도 그러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의식이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거듭하는 순간마다 생각했다. 정말 그 일인 경부의 말처럼, 조국을 일제에 빼앗기지 않았더라도, 나는 사회에 불만 가득한 불량한 청년이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라도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부도 많이 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해서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도 못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 없었을까, 아니, 원망이야 많았지. 세상을 버리려고도 했고, 속세를 떠나려고도 했으니까. 그래서 고향 이천의 백사면 원적산에 있는 영원사에서 2년 동안 승려 생활을 한 적이 있었네.
아, 그러고 보니 백사면과는 여러 인연이 있네. 내가 태어난 마을에서 가까운 곳이지. 중국에서 귀국해서 어떻게든 독립투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마련하려고 백방으로 애쓰다가 백사면 사무소 면서기 송 아무개를 사살하기도 했으니까. 그때는 꼭 그렇게 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말이야. 그런데 거사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하니까,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죽이지 않았으면 곧바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을 테고, 또 그가 훼방하지 않았으면 부족한 대로 필요한 자금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으니까. 아, 그런데 나는 정말 세상에 그다지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나.
방황하던 어린 시절 사찰에서 2년여를 보낼 때 그는 많은 공부를 하고 세상에 대한 깊은 눈을 갖게 되었다. 주지 스님은 그에게 불경에 앞서 조선어와 조선 역사를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문자를 알아야 진리를 익히고 세상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제 나라 역사를 알아야 비로소 주체적 삶이 가능하다는 것도 배웠다. 존재의 뿌리는 나를 낳고 길러준 부모에게만이 아니라 서로 이웃하며 살아가는 마을공동체에 있다는 것도, 그것이 사회요 국가라는 점도 배워 알았다. 여러 시련이 있었으나 면면히 이어지던 나라를 외부 세력에게 통째 빼앗겨 본 역사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모름지기 부모가 있고 이웃이 있고 나라가 있어야 부족한 내가 성장하고 행복한 삶을 가꾸어 나갈 수 있다는 점도 배웠다. 인간 그 자체는 생로병사와 탐욕과 집착으로 인한 고통의 바다를 떠도는 것과 다를 것 없다는 가르침에 이르러 그는 부모에 대한 원망을 비로소 버렸다고 생각한다. 누구라도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꾸리고 싶지 않았을까. 마음대로만 되지 않는 삶에 대해서 원망과 슬픔이 왜 없었을까.
그런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평안해졌었다. 아버지와 이혼한 뒤로 어머니의 소식은 영영 끊겼지만, 그립다가 미워지다가 그만 잊히고 말았지만, 어디서나 평온하기를 빌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서도 원망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길지 않은 그의 생이 애처로웠다. 그랬으니 무슨 사회 부적응자, 불만 세력으로 남았겠는가. 저 일본인 경부는 그렇게 몰아가고 기록에 남기고 재판에 넘겼다. 마침내 그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제 그들은 조선을 빼앗고 조선인들을 착취하고 생명을 앗아간 데 대한 책임과 죄의식을 갖지 않을 것인가. 그들의 은혜를 총으로 되갚은 무지와 불충의 대가일 뿐이라고 마음 편히 잠들까.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때를 떠올리며 그는 맑은 얼굴로 작은 미소를 짓는다. 스님이 그립다. 방황하던 어린 시절 올곧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무엇보다 부모에게서 받지 못했던 따뜻한 정을 아낌없이 주신 분이었다. 귀국해서 찾았을 때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뵐 수가 없었다.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고 자금을 지원하고 나아가 신도들에게 사회주의 교육을 하는 등 반체제 운동을 했다고 연전에 잡혀갔다는데, 누구도 그 후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사찰에서 나와 3년여를 만주와 중국 땅에서 지낼 때 만났던 사람들도 여전히 그립다. 좁고 낡은 숙소와 거칠고 부실한 식사에도 웃음을 잃지 않은 동지들이었다. 굶주림과 추위와 적의 끊임없는 감시와 체포의 위험을 견디며, 그리고 동지들 사이에 껴있는 첩자가 누구인지 극도의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항일 조직 어느 곳에나 밀정이 숨어들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동지였던 김재진도 밀정이 된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비서였던 이정, 심지어 안중근과 함께 이토를 암살하는 데 나섰다 붙잡혀 3년 형을 살았던 우덕순도 나중에는 모두 밀정이 되었다. 일본과 중국의 기밀문서에서 895명의 밀정 명단이 확인될 만큼 독립운동 조직에 스며든 밀정의 수가 적지 않았다. 나라를 잃었어도 왕족과 권문세가 일족들 일흔여섯 명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서 남작이나 백작 같은 작위를 받고 여전히 호의호식으로 생을 연명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너나없이 목숨을 내놓고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기도 했다. 사회주의자이든 아나키스트이든 그것을 따질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맞서고 있는 동지들은 누구라도 자랑스러웠다. 다만 너무 많은 희생이 안쓰러웠다. 목이 말라왔다. 밖에서는 기회가 있으면 가끔 막걸리를 마시곤 했는데, 탁자 한 사발을 했으면 좋으련만 하다가 스스로 욕되다 싶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하루도 위태롭지 않은 날이 없었으나 조국에 남겨진 가족을 걱정하면서도 오로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견디던 동지들이 그리웠다. 먼 이국땅에서 죽은 이들도 그리웠다. 그들 중에는 자신처럼 많은 것을 갖지 못했거나 많은 공부를 하지 못했던 이들이 많았다. 그래도 젊었으므로 다만 평온한 일상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꿈을 꾸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도 그랬다. 그는 자칫 행복할 뻔했던 때도 있었다. 어느 따뜻한 봄날 마침 그의 스무 번째 생일이었을 때, 비슷한 나이의 동지들 여럿과 조촐한 생일 파티를 했다. 그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던 여성 동지가 건너편에 앉아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고 고운 목소리에 담아 정성껏 노래를 불러주던 그이는 공작에 나갔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녀를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들 듯 아프다.
그래, 루쉰 선생의 소설 「고향」에서도 그래. 소설의 인물은 신해혁명 직후 몰락한 가족을 타향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들른 고향을 다시 떠나게 돼. 황폐해진 고향에서 더는 삶을 꾸려갈 수 없었던 까닭이지. 그러한 괴로운 방랑의 생활 가운데서도 그는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지. 그는 이렇게 말해. “생각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대체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또는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상에 있는 길과 같은 것이다. 길은 본래부터 지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때 길은 스스로 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니 우리 흔들리지 말고 함께 가자.”
그가 중국에 있을 때 곧잘 루쉰의 말을 새겼던 까닭은 기실 그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런데 공작에 나갔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던 남몰래 사모하던 그 여인은 살이 타고 찢기는 고문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가 알고 있던 내용을 토설하자 동지들 여럿이 체포되고 가혹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그는 그녀를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이제 와 돌아보면 그 일이 가장 마음 아프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겨나가는 일경의 고문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 더구나 남은 가족의 안위가 위협받을 때 마침내 애원한다. 나는 죽여도 좋다. 그러나 내 가족만은 건드리지 말아다오. 가여운 일이다. 그는 조국을 빼앗겨 정처 없이 떠돌아야 하는 동포들과 나라를 되찾는 길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동지들과 적들에게 붙잡혀 독한 고문 끝에 자신을 지키지 못한 이들 모두가 가여웠다. 그때는 동지들을 배신했다는 분노의 감정만이 자신을 사로잡았다. 옳고 그름만이 그 분노의 원천이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돌이켜보니 모두가 가엾게만 생각되는 것이었다.
아, 그렇지. 나와 함께 하다가 나보다 2주 전에 체포된 친구도 사형선고를 받았다.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그가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지 않아도 될 텐데, 미안하고 참담했다. 나와 함께 했던 일에 대해 후회와 원망은 없을까.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정월 초라 날씨가 찬데 감옥 안은 냉기가 심해서 그동안 받은 고문에 더해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었다. 무명 저고리는 붉은 피에 흠뻑 젖었는데 마르기도 전에 다시 흘러내린 피가 겹쳐 검붉었다. 일경은 시멘트 바닥에 짚단을 깔고 거적때기 하나를 던져주어 추위를 견디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었다. 하루걸러 한 번씩 취조실로 불러내 비슷한 질문을 수십 차례 반복하면서 몸을 짓이겼다.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숨이 끊어질 듯한 비명이 그의 마음을 자주 헤집었다. 친구의 비명 같기도 모르는 일의 단말마 같기도 했으나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몸은 괜찮을까, 걱정이 오래갔다.
살아서는 다시는 그들을 만나보지 못할 것이었다. 대나무 살로 떠낸 허벅지 위에 피고름이 흘러내리고 아물지 않은 상처에 굵은소금을 뿌려대는 바람에 그는 견딜 수 없게 피폐해졌고, 마음은 어릴 적 고향 마을 동촌 언저리에 자꾸만 머물렀다. 한갓 짐승도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제 태어난 고장을 향해 머리를 숙인다더니 그 말이 정녕 헛된 게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영원사 대웅전 앞뜰에 천년의 세월을 지기며 서 있는 은행나무를 스치던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자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으나 그가 목숨을 빼앗은 두엇을 생각했다. 늦었지만 명복을 빌었다.
마지막 날
희미하게 날이 밝아왔다. 그는 간밤에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고 생각했다. 살을 에는 추위도 너덜너덜해진 상처의 고통도 별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새삼스럽게 목이 마르고 허기가 졌다. 마른침을 삼키고 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무릎이 꺾여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잠깐 꿈을 꾸었다. 옥문을 열고 맑고 투명한 세상으로 나가는 꿈,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활짝 웃는 꿈, 함께 도모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친구와 마주 앉아 탁주 한 사발을 마시는 꿈, 나서 자란 고향 이천의 마을 골목길을 천천히 걷는 꿈, 해방된 나라에서 손에 손잡고 모두 모여 덩실덩실 춤을 추는 꿈을 꾸었다. 그러다 흠칫 놀랐다. 독사보다 더 징그럽게 생긴 일경 경부가 대꼬챙이로 허벅지살을 떠내며 심문하는 꿈을 꾸다가 그는 그만 자지러졌다. 검붉은 피를 한 대접이나 토했다.
그는, 자신이 독립운동이라는 고난의 길에 망설임 없이 나섰던 것에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 나라를 잃고 난 후 제대로 된 조선인들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죽음으로 항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망명을 통해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다.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20년대 만주는 뜻있는 이들이 일가 모두를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만주로 향한 까닭은 그곳이 우리 옛 영토라는 민족의식이 작용한 까닭이었고, 가족 모두를 데리고 간 것은 이제는 적의 수중에 떨어진 땅에 가족들을 버려두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난의 길에서 수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추위와 현지인들의 핍박, 그리고 일본 제국군의 총칼에 희생되었다. 그도 1923년 열아홉의 나이 때 만주로 갔다. 김좌진 장군이 운영하던 신명 학교에 입학해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만주 지역의 통합 독립운동 단체 대한통의부에서,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부대인 육군 주만 참의부에서 특무정사로 활동했다.
만주 일대에서 힘을 기른 조선의 독립군은 일본 제국군을 상대로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는 홍범도가, 같은 해 10월에는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가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 전투로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패전의 분풀이로 일본군은 조선인 마을마다 불을 지르고 살아 있는 이들은 어린이나 노인을 가리지 않고 칼로 목을 베는 학살을 자행했다. 젊은 여인은 윤간한 후 죽이고 그 머리를 나무 시렁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다. 나중에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만주 거주 조선인은 3,469명이다. 붙잡혀 끌려간 이가 170명, 능욕을 당한 여인이 71명, 불에 완전히 타버린 민가 3,209채, 학교 36곳, 교회당 39곳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5만 4,045석의 곡물도 모두 불에 탔다. 참혹했다.
김좌진 장군은 신명 학교를 세워 후일을 도모했고, 젊은 그는 애국심에 불탔다. 시대와 역사의 흐름이 민족자결과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진보적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국내의 일부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패배 의식에 빠져 절망하고 있었다. 만주와 상하이에는 독립지사들만 있는 게 아니라 거간꾼과 밀정들도 활개 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우리의 목숨을 건 저항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 언젠가는 조국의 해방을 맞이할 것이라는 희망, 그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그는 자주 생각했다.
그는 귀국해서 군자금을 마련하려고 백방으로 애쓰다 결국 체포되고 사형선고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후회는커녕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가 항소하지 않은 까닭은 나라를 강제로 빼앗아 간 자들의 법정을 용인할 수 없었고, 자신의 행위를 그들의 판단에 맡길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만주와 상하이에서 만난 동지들을 통해 고향을 잃고 떠도는 고독한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참된 용기를 배웠다. 몸은 말할 것 없고 정신이 무너지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캄캄하고 차디찬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나의 이 투쟁이 누군가에게 알려져서 그가 또 나라를 되찾는 항일 전선에 기꺼이 나서리라는 희망, 그 투쟁이 이어지고 이어져 그리하여 마침내 해방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버틸 수 있었다. 비단 그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감당할 세계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고 그는 느꼈다.
매일 같이 불러내 험하고 독한 심문을 하던 일경이 하루 전부터는 흘끔 들여다보기만 하고 그를 불러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저놈 죽었나, 아니, 아직은 숨이 붙어 있는 것 같아. 저희끼리 주고받는 말이 꿈인 듯 생시인 듯 어지럽다.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꿈을 꾸었다. 집행이 언제 있을지 모르지만, 사형선고를 받은 벗이 탁주 한 사발을 들고 찾아왔다. 어이, 이 친구야. 두 사람은 얼싸안고 빙글빙글 춤을 추다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사람아, 왜 얼굴이 그리 생겼는가? 왜 얼굴 반쪽이 사라졌는가? 그대 눈에서는 웬 핏물이 흘러내리는가?
지난밤에 늙은 한의가 다녀간 후 푸른 눈의 프랑스인 신부가 잠시 들려다 갔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오만. 무슨 상관있겠소. 나는 하느님을 믿는 자로서 누구라도 청이 있으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오. 나는 청을 한 적이 없는데, 내가 곧 죽는다고 합디까? 두 사람은 낮게 웃었다. 쓸쓸했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끊어졌다가 이어졌다가 다시 끊어지는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프랑스인 신부는 선교사업을 하러 서울에 들어온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여서 조선어가 유창했다. 누구라도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니…, 당신이 곧 죽는다는 뜻은 아니오만. 아무려나 신부님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겠구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조선은 머지않아 독립이 되리라 믿었소? 그래서 당신들은 부나비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고된 독립운동을 하는 거요? 당신들은 겨우 총 한 자루를 구하려고 때론 목숨을 내놓아야 하지만 일본은 항공모함에 전투기까지 가공할 현대식 무기가 있소. 그 힘이 너무나 강성해서 중국도 유럽 여러 나라도 하물며 미국마저도 힘에 겨워하는데 말이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게 아니오. 사실은 몹시 두렵소. 나는 할 수만 있으면 살고 싶소. 그러나 죽지 않고서야 우리의 뜻이 만방에 전해질 길이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는 게지요. 당신은 아나키스트요? 무슨 상관이겠소. 누구라도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꿈꾸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일이 아니오. 그렇긴 하오만, 조선의 시인이 쓴 시 중에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의 내용이 무척 인상 깊었소. 그 시를 알고 있소? 프랑스인 신부가 어둠 속에서 빙그레 웃었다.
그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우연한 기회에 그 시를 읽었소.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 개의 별을 십이성좌 그 숱한 별을 어찌나 노래하겠니,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를 갖는 것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한 개의 새로운 지구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 안에 핏대를 울려가며 마음껏 불러보자. 아,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림이 무척 컸소. 조선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독립운동을 하는구나 싶었소. 그랬구려. 고마운 일이오. 한 개의 별 한 개의 지구 단단히 다져진 그 땅 위에 모든 생산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뿌려보자는 것은 그러니까 무엇에도 억압받지 않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으로 읽었소. 그게 꼭 아나키즘만은 아니오. 내 조국, 내 고향 사람들의 삶이 그러했소. 그러한 삶을 빼앗겼으니 그러한 세상을 되찾자는 뜻이 컸소. 당신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 살고 있구려. 사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러한 모습이기는 하오만. 그렇다면 신부님이야말로 아나키스트요.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으니 어쩌면 일본 제국도 머지않아 기울고 말 것이오. 지금은 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 보이오만. 다만 일본 제국의 패배 이후엔 지금은 동맹인 듯 보이나 미국과 소련이 결국 대립하고 말 것이니 그것이 조선에 또 다른 비극이 될 것 같긴 하오만.
아무려나 찾아와 주어 고맙소. 청하지 않은 손님치고는 내 뜻을 알아주어 반가웠소. 당신을 고문한 자들, 당신의 고향과 나라를 빼앗아 간 자들을 너무 미워하지 마시오. 그들에 대한 분노가 당신의 마음과 몸을 해치는 독이 되었을게요. 아니오. 나는 그들에 대한 분노와 원한만으로 독립운동을 한 건 아니오. 믿기 어려우시겠으나 나는 내 생의 원동력은 사랑에 있다고 믿었소. 내가 낳고 자란 고향마을과 동포와 벗들과 가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 거요. 오오, 그렇구려. 아름다운 말이오. 그런데 슬프오? 네, 슬프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스러져 가는 것이 못내 슬프오. 부디 슬퍼하지 마시오. 슬프고 외로운 자 곁에 하느님이 함께하신다고 했으니. …
에필로그(epilogue)
이수흥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열아홉 살이던 1923년 만주 간도로 망명, 독립운동을 했다. 1926년 5월 국내에 잠입, 군자금 확보를 위하여 고군분투하다가 체포되어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1929년 2월 27일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그의 친구 유택수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안타깝게도 살아서는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했다. 붙잡힌 것도 수치스러운데 어찌 목숨을 구걸하겠는가 하고 항소하지 않을 만큼 강직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지사의 헌신이 있어 마침내 1945년 8월 일본 제국으로부터 한국은 독립하게 된다. 이천에서도 기미년 독립 만세운동에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3월 30일 마장면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이천 전 지역으로 확산했다.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고문받고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수흥은 어린 나이에 온 마을 사람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광경에 전율했다. 그가 열아홉의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 독립투쟁에 나선 데에는 고향 마을 이천의 그러한 분위기가 큰 역할을 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이천시 창전동 이천초등학교 앞에 주먹을 불끈 쥔 그의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다. 봄이 오면 산과 들에 꽃 피고 새 울어 가혹한 계절을 견뎌낸 이 땅 모든 이에게 따뜻하고 훈훈한 마음을 전해줄 것을, 그는 염원했을까. 평소 그는 육사의 시를 좋아했다. 만나본 적은 없었으나 비슷한 시기에 나라 잃은 땅에서 태어나 중국을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동지였다.
이수흥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자유와 평화를 빼앗긴 채 고향마을을 떠나 이국에서 스러져 간 숱한 동지들을 떠올렸다. 실로 가진 것 모두를 바쳐 나라를 되찾는데 헌신했던 이들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나 또한 그들 곁으로 간다, 그리 생각하니 조금도 두렵거나 아쉽지 않았다. 그들이 꽃이었다. 절망하지 않는, 언젠가 반드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한 채 죽어간 숱한 이들. 아니,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아득하여 절망하고 있을 동지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이수흥은 육사의 시 ‘꽃’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망울이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야,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 교수형을 집행하던 일인 경찰이 저자가 이제 미쳐 버렸구나 하고 혀를 끌끌, 찼다. 이수흥은 그자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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