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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선교사는 미국 오하이오 주(Ohio) "애쉬타뷸라"(Ashutabula)市에서 출생하여
오하이오 주 오벌린대학(Oberlin College)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이 무렵 "조미통상조약"(朝美通商條約 : 1882년)이 체결된 후여서
구 한말 조선정부는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재단을 설립하고 필요한 교사를 미국에 요청했다.
고종(高宗)이 젊은 교사 세 사람을 미국에서 구하여 주기를 미국 공사에게 청하매,
1884년 9월 10일부로 "푸트"(L.H. Foote)공사는
본국 국무장관에게 이 사실을 통고함과 아울러 그 인선을 의뢰하게 되었다.
"보빙사"(報聘使) 민영익이 워싱턴에 갔을 때 교육국으로 그를 방문하여 여러 가지 의견을 교환한 바 있었고,
한편 그는 미국의 교육 제도에 관한 자료를 입수코자하는 민영익에게 "교육국 역사"와 "연보"를 기증한 일이 있었다.
이제 한국에서 교사를 보내 줄 것을 청하매 그는 즉각적으로 행동을 개시하였다.
외국에 파송될 교사는 신앙이 두터운 신학생이 적당하리라 생각하고
외국 선교부 직원과 협의 끝에 뉴욕 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발탁되어 오게 된 세 명의 교사는
"벙커"(DalZell A Bunker), "헐버트"(Homer B. Hulbert), "길모어"(G.W Gilmore)다.
이들은 모두 미국의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을 전공한 유능한 청년들로서
"길모어"(G.W Gilmore)는 1883년 프린스톤 대학을 졸업하고
"벙커"(DalZell A Bunker)는 1883년 오벌린 대학을 졸업한 뒤
모두가 유니온 신학교에 들어가 당시 졸업반에 있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는 1884년 다트마운트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이들 세 명의 교사는 미국 북 장로회 교육 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했다.
일행 중에는 "엘러스"(A. Ellers, 나중에 벙커와 결혼함)와 "길모어" 부인이 포함되어 일행은 5명이었다.
"벙커"가 가르치던 "육영공원"(育英公院)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관립 근대 교육 기관이었다.
1886년부터 1896년 "육영공원"이 폐교될 때까지 "벙커"는 그곳에서 9년 간 영어 교사로 지냈다.
"애니 엘러스"와 "달젤 벙커"의 결혼식은 1887년 7월 초순 화요일 저녁에 "알렌"의 집에서 거행되었다.
주례는 육영공원의 교사 "길모어" 목사가 맡았다.
약 50장의 초대장이 당시의 모든 주한 외국인들과 조선인 귀족들에게 배부되었다.
이 결혼식은 서울에서 열린 첫 외국인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많았다.
초대한 사람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다.
공간이 협소했기 때문에 결혼식은 간략하게 진행되었다.
왕실에서 보내주고자 했던 악단은 정중하게 사양했고 결혼잔치는 생략했다.
보름달이 비추이는 서늘한 여름밤의 결혼식이었다.
예식장의 중심에는 임시로 설치한 분수가 꽃들 가운데 있어서
주변의 청사초롱들과 어울려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러시아 공사의 아들과 세관 직원의 딸이 신랑신부가 행진하는 길 위에 꽃을 뿌려주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과 신부는 가마를 타고 새롭게 마련된 신혼집으로 향했다.
신혼집은 조선 왕실에서 금팔찌 금반지 세트와 더불어 선물로 준 것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비단, 식기, 차 세트, 커피 세트 등 다양한 선물들을 보내왔다.
모두가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두 사람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새 출발을 시작하였다.
그 뒤 "벙커"는 감리교선교부의 요청에 따라 "배재학당" 교사가 되면서 그 학당의 학감(學監)이 되었다.
학감(學監)으로 있을 때, 그는 종래의 암기식,주입식 교육방법을 폐지하고
공개식 고시 방법으로 새 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고대사,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 교육 과정을 많이 채용하였다.
1892년 3월에는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에 올랐다.
더욱이 정부 당국은 육영공원이 폐교되기 1년 전인 1895년부터
2백여 명의 의탁생을 배재학당에 의뢰해 오기 시작했는데,
"벙커"는 배재학당에 적을 옮긴 후에도 많은 정부 의탁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애니 엘러스"(Annie Ellers)의 명성왕후 진찰기
엘러스는 약 8년 동안 명성황후의 "시의"(侍醫) 역할을 맡았다.
"벙커"가 육영공원을 나온 뒤 "엘러스"와 함께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줄곧 명성황후를 돌보았던 셈이다.
1895년 10월 8일의 을미사변이 나기 2주전인 9월 25일 "명성황후"를 본 것이 그의 마지막 알현이었다.
"엘러스"는 사변 후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며 황후의 빈전을 지켰으며 홀튼과 함께 국장에도 참례하였다.
이 사건은 평생 그녀의 기억에 남아 조선을 향한 긍정적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을미사변 직후 고종(高宗)은 심각한 불안에 시달렸다.
그 역시 언제 시해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고종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선교사들이 나섰다.
"벙커"를 포함한 선교사들은 불침번을 서며 고종(高宗)의 침소를 지켰다.
"애니 엘러스"는 독살의 위협 때문에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못하던
조선의 왕을 위해 "홀튼"과 함께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선교사들은 불안에 떠는 고종(高宗)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자 했다.
11월 28일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이어하려고 했던 이른바 "춘생문 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선교사들이 왕을 보호하고자 노력한다는 진심은 조선 사람들에게 전달됐다.
"엘러스"는 궁중에 들어가 황후 민 씨를 처음으로 진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엘러스"는 그 최초의 진찰기를 지상에 발표했다.
그 진찰기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밝게 갠 가을 청명한 날씨였다.
오정을 조금 넘어서 우리 일행은 궁궐을 향해 떠났다.
호위병들이 앞장서서 길을 열어 주고 우리를 태운 사인교는 그 뒤를 따랐다.
사인교는 몹시 흔들렸기 때문에 현기증이 나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황후 폐하 앞에서 또 가슴이 울렁거리면 어찌나 무척 걱정이 되었다.
대궐 앞의 큰 대문 앞에 당도하자
우리 일행은 사인교에서 내려 한참 걸어서 어떤 응접실 같은 데로 안내되었다.
그곳에 가보니 내가 전부터 안면이 있는 민영익 공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민 공은 외국에 가 본 일이 있었고 외국풍속을 조금 아는 분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내원을 몇 곳 구경시키고 다시 연못가를 산책시킨 다음
귀빈실에 들어가 서양 음식과 조선 과일을 권했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관복차림의 양반 하나가 나타나더니 우리를 내실로 인도했다.
우리는 먼저 넓은 내원을 지나 큰 전당 안으로 인도되었다.
그 전 속에 들어가니 한쪽에는 각색 화초가 만발하고 다른 한쪽에는 사람들이 차려 자세로 서 있었다.
우리는 머리를 수그리고 조심조심 걸어 들어가 세 번 큰절을 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그 많던 사람들이 어딘가로 다 사라져 버리고
우리만이 한 귀부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위 진찰기는 1895년 명성황후가 암살된 뒤에 지상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황후를 처음 진찰한 것은 그로부터 9년 전인 1886년에 있었던 일인데
어째서 이처럼 늦게야 발표되었을까?
그 이유는 첫째로 당시 황후의 몸에다 손을 대고 진맥도 못하던 때에
황후의 가슴을 헤치고 진찰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황후 민 씨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를 당하자 애도의 정을 표하기 위한 것임에 분명하다.
"벙커" 부인은 과거 명성황후의 시의(侍醫)였다는 인연으로 누구보다도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고종 황제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사력을 다했다.
민권운동에 참여하다.
"벙커" 부부 내외는 파란 많은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살아온 선교사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1894-1895년의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고종의 아관파천" 등
이루다 헤아리기 어려운 한민족의 고난상을 목격해 왔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하여 시해되고 고종 황제는 극도의 불안 상태에 있을 때,
"벙커", "게일", "언더우드", "에비슨" 선교사가 번갈아 왕실에 들어가
고종 황제를 호위하며 왕의 신변 보호에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그는 1896년 독립문(獨立門) 정초식(定礎式)이 거행될 때
"윤치호"가 작사한 국가(國歌)를 스코틀랜드 민요에 맞춰
학생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는 등 한국 최초의 애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1896년 11월 21일 5000여명의 인파가 모인 독립문 정초식(定礎式)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은 애국가를 크게 불렀다.
이 날 불린 애국가는 모두 네 가지로 윤치호가 쓴 것이었다.
“우리황상폐하 천지일월같이 만수무강
산높고 물고은 우리 대한제국 하나님 도우사
독립부강 길고 긴 왕업은 용흥강 푸른물 쉬지않듯
금강 천만봉에 날빛 찬란함은 태극기 영광이 비치는 듯
비단같은 강산 봄꽃 가을달도 곱거니와
오곡풍등하고 금옥구비하니 아세아 낙토가 이 아닌가
이천만동포는 한맘한 뜻으로 직분하세 사욕은 버리고
충의만 앞세워 님군과 나라를 보답하세.”
이 가사에 곡을 붙인 사람은 다름 아닌 "벙커"였다.
그리고 1896년의 독립협회운동, 독립문 건립, 순 한글로 된 "독립신문" 창간 등 근대식 민권운동도 직접 목격했다.
그는 단순 목격자가 아니라 그 민권운동의 동역자이며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 운동의 주역을 맡았던 "서재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등은 모두 "벙커"와 동지이고,
배재학당의 강사들이었으며, 그 학당 학생들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제자들이 학생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한편 독립협회는 강제로 해산되는 동시에 그 주동 인물들은 일망타진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상재"(李商在), "홍정후"(洪正厚), "남궁억"(南宮憶), "정교"(鄭喬)등 독립협회지도자들과
"이승만"(李承晩), "양홍묵"(梁鴻默), "신흥우"(申興雨)등 제자들도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운동을 하다가 모조리 수감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한성감옥서"(漢城 監獄署)는 그의 친지들로 만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벙커"는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 감옥에 무상출입하면서
차입도 하고 위로도 하고 예배도 드려 주었다.
누구보다도 "벙커"는 가장 열성적으로, 가장 번번하게 이를 계속 추진했다.
그 결과 "이상재"(李商在), "이원긍"(李源兢), "김정식"(金廷湜), "유성준"(兪星濬), "안국선" (安國善)둥이 감옥 안에서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이에 대하여 역사가 "이능화"(李能和)는 "조선 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에서 "지옥과 천당"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三個星霜 鐵室生活에 幽蠻慘億하야 苦惱畢備러니
幸而獄法에 許看宗敎書籍하고
亦許洋人入獄布敎라 時米國人宣敎師房巨氏 入獄傳道矣라
於是에 同監諸公이 相與硏究新約全書하야 警心決志하야 領洗守戒하니
是爲官神社會信敎之始라.
(3년 간의 감옥생활 중 고독하고 울적한 마음 이를 데가 없었는데,
다행하게도 새로운 법이 생겨서 감옥 안에서도 종교 서적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또 서양사람들이 감옥 안에 들어와서 전도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때 마침 "A. D. 벙커"씨가 감옥 안에 들어와 전도를 했다.
이에 옥중에 있는 여러 사람이 서양의 경서를 서로 읽고 연구하여 신자가 되기를 결심하니
이것이 곧 우리나라 역사상 고관 출신의 양반과 선비들이 기독교 신자가 된 최초의 역사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상재"(李商在)등 전직 고관들과 지성인들이 "벙커"의 전도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승만"(李承晩)의 유명한 저서 "독립정신"도 그 때 이 감옥 안에서 쓰였다.
또한 그들의 감화로 감옥 안에 학교가 개설되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 감옥에 있던 "신흥우"(申興雨)의 부친
"신면휴"(申冕休)가 쓴 "옥중개학전말"(獄中開學顚末)중의 일절을 소개한다.
"옥중에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는 일이다.
죄를 범하고 오랫동안 갇혀 있을 때에 울적함을 견디기가 어려워 책이나 읽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내 아들 흥우가 잘못하여 남에게 시기와 미움을 받아 혐의를 입어서
한 번 옥에 갇히자 몇 해가 되도록 풀려 나오지 못하고 미결수로 있어서
마땅히 징역을 치를 것이지만 감옥서 관리들이 그 약한 몸에 병들어 있음을 가없게 여겨서인지
좀 편안하게 지내도록 해 주기 위하여 제 힘에 겨운 일을 시키지 아니하고
다른 죄수들과 같이 책을 읽게 하고 글도 쓰게 하였던 것이다‥‥‥.
본 감옥 서장 김영선 씨가 그들이 배움에 힘쓰는 것을 가상히 여겨서 특별히 긍휼을 베풀었으니,
동료 관리끼리 의논을 거듭한 끝에 옥중에 학교를 세우게 하고, ‥‥‥
며칠 전에는 외국 사람들이 옥중에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하면서
서양의 개명한 나라에도 그러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서적과 식품을 많이 가지고 들어가서 여러 학생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갔느니‥‥‥.
이 일은 1902년부터 1904년 사이에 있었다. 그때 "벙커"는 배재학당의 제3대 교장이었다.
"벙커"가 배재학당의 교장으로 취임한 뒤 1912년 "신흥우"(申興雨)에게
교장 자리를 넘겨주기까지 6년 간 열성을 다해 봉직했다.
이 6년간은 한국이 완전히 국권을 빼앗기는 기간으로서 학교 운영이 가장 곤란한 시기였다.
그러나 "벙커"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많은 인재를 길러 냈다.
그 뒤 "벙커"는 감리교선교부 소속 선교사로서 만년을 조용히
전도와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26년 7월 4일 75세의 노령으로 은퇴했다.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30년 한국을 잠시 방문했으나
1932년 11월 26일 80세 때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시에서 별세했다.
묘비 뒤.
房巨先生
1053년 8월 10일 ~ 1932년 11월 28일
同夫人 合葬
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 갈때까지
그가 숨을 거둘 때 남긴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에 따라
그의 부인 "엘러스"가 남편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한국으로 왔다.
그리하여 1933년 4월 8일 정동교회에서 고별예배를 드리고 양화진 외인묘지에 모셨다.
그 뒤 부인 '엘러스"가 세상을 떠나 합장하였는데 "벙커 부부"가 합장된 묘비에는
“UNTILL THE DAY DAWN THE SHADOWS FLEE AWAY.
“날이 새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라는 의미심장한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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