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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8> 김재성 “사성제를 체험적으로 아는것이 곧 깨달음”
불교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논의의 핵심에 서지 못했던 것이 ‘깨달음과 수행’이었다. 불교가 ‘깨달음을 추구하는 가르침’이라면 이 문제에 대한 바른 인식이야 말로 불교수행의 전부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이 문제를 논하지 않고 ‘침묵’속에 놔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깨달음과 수행’ 기획토론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자 시도된 토론의 광장이다. 이번호에는 경전연구소 김재성 소장의 주장을 소개한다.
초기불교에서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깨달음에 대한 교학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이미 혜원스님은 동아시아의 선불교의 입장에서 글을 정리하였고, 각묵스님은 초기불교 및 남방상좌 아비담마(논서)의 입장에서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를 정리해주었다. 필자의 기본적인 논지는 각묵스님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미리 밝히고 이 글에서 깨달음에 대한 초기경전의 내용을 살펴본 후, 좀더 쉽게 필자가 이해하고 생각하는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최상의 바른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anuttara-sammaasambodhi)이라고 한다. 여기서 공통되는 깨달음(bodhi)는 무엇일까 경전을 통해 살펴보고, 그 과정에 이르는 수행을 정리해본다.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如實知見)’이 나에게 아주 분명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천신, 마라(魔), 범천(梵天), 사문과 바라문, 인간, 천인(天人)의 세계에서,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無上正等覺]을 깨달았다고 공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이 나에게 아주 분명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천신(天神), 마라(魔), 범천(梵天), 사문과 바라문, 인간, 천인(天人)의 세계에서,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깨달았다고 나는 공언했다. (〈여래의 말씀〉 SN V, 422-3)”
“심오하며,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며, 수승하며, 단순한 논리적 사유로는 얻을 수 없는, 현자들에 의해서 이해되는 이 법을 나는 증득하였다. 하지만 세간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에 머물러 감각적 욕망에 집착하고,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있다.
감각적 욕망에 머물러 감각적 욕망에 집착하고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있는 이러한 세간 사람들은 이 법, 즉 ‘이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음(此緣性)’ ‘조건에 의존된 발생(緣起)의 법’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법, 즉 모든 지음(行)의 소멸, 모든 윤회의 뿌리(upadhi)를 끊어버리는 것, 갈애(渴愛)의 소멸, 이욕(離欲), 멸(滅), 열반을 이해하기 어렵다.(〈성스러움을 찾아서(聖求經)〉 MN I, 167-168)”
“비구들이여, 청정한 범행(梵行)의 목적은 재물, 명예,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며, 계(戒), 정(定), 지견(知見)을 얻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흔들림이 없는 마음의 자유[不動의 心解脫]가 청정한 범행의 목적이며, 핵심이며, 궁극의 도달점이다. (〈핵심의 비유라는 큰 경(心材喩大經)〉MA I, 197)”
이 외에도 깨달음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체험적인 이해가 곧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이며, 제자들에게 지도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如實知見)’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부족한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관심사는 괴로움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 해결에 있었고, 스스로 이룬 그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어 제자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초기불교에서 사성제가 지니는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면, 탐진치라는 근본번뇌가 완전히 사라진다. 이 경지에 도달한 이를 초기경전에서 아라한이라 한다. 부처님도 아라한이며, 제자들도 아라한이 되는 것을 최상의 목적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수행했다. 부처님 당시 수 많은 제자들이 법을 듣고 수행을 해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한 깨달음에 도달하였다.
실제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팔정도는 계정혜(戒定慧)라는 세 가지 수행(三學)으로 분류되며, 이 수행은 다름 아닌 몸과 입과 마음(身口意)에서 피어나는 탐진치라는 번뇌를 제거하는 일일 뿐이다. 이렇게 깨달음과 수행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몸과 입과 마음으로 끊임없이 탐진치를 제거하는 계정혜 삼학의 수행을 언제나 실천하는 길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며, 이렇게 이 길을 따라간다면, 부처님이 보증한 괴로움의 소멸, 번뇌의 소멸, 흔들림없는 해탈이라는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수행도 지금 여기 깨어있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며, 그 결과인 깨달음도 바로 이 삶에서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체험되는 법(dhamma)이다.
[불교신문 2041호/ 6월22일자] |
첫댓글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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