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 팔천송반야경 ⑧
중생의 고통-산란심 제거해야 대승禪
선(禪)은 불교수행을 대표한다. 고오타마 붓다 역시 선정(禪)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불교에 관심을 갖는 많은 사람들이 ‘선=부처님의 길’ 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물론, 『아함경』과 같은 초기경전을 통해서 본다면, 단연코 선이야말로 붓다의 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함경은 선경(禪經)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학술적인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선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 사회에 있어서 선은 대단히 보편적인 주제 같으면서도,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세간에 유행하는 선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 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유형은 ‘선=명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다. 하지만, 명상은 선의 속성 중의 하나인 사유에 중점을 둔 표현일 뿐이다. 더구나 명상은 불교가 아니더라도 이미 제반종교나 정신 수행단체에서 채용하고 있는 개념 중의 하나이다. 굳이 종교의 테두리가 아니더라도 이미 일상화된 표현이자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주된 경향이 있다면, ‘선=관찰’이라고 여기는 일이다. 곧, 특정 대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고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어떤 원리를 깨닫고자 하는 노력이다.
아마도 이 두 가지 형태가 대략 요즘의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일반적인 선의 경향일 것이다. 혹은 이 정도의 개념도 없이 막연히 선을 대하는 사람들도 많으리라. 어쨌든 선은 지금의 우리 실정에서 단연코 불교수행을 대표하는 용어임에는 틀림 없다. 대체로 팔천송반야와 같은 대승의 가르침에서는 소승의 협소한 수행주의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데, 특히 이 경우 선은 협소한 탈 것의 대표격이다.
팔천송반야 제5장 「복덕을 얻는 길」에서는 선을 뛰어 넘는 반야바라밀을 이야기 한다. 도대체 선에 어떤 결함이 있기에 뛰어 넘고 초월해야만 한다는 것일까?
대승보살의 수행은 두 가지 점에서 그 이전의 소승적 수행자와 뚜렷이 구분이 된다. 첫째는 혼자만 가거나 일부만 가는 게 아니고 많은 이들이 함께 갈 수 있느냐이다. 둘째는 그 길로 인해 과연 뭇 유정들의 손을 이끌고 갈 만한 에너지가 발생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 둘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최소한 대승의 수행관으로 보는 한, 제대로 된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 자신도 오랫동안 선을 동경하고 또한 선을 닦는 일에 적극 동참을 해 왔다. 그러다보니 언제부터인가 고요를 찾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려는 일이 자칫 현실에서 물러나는 습관성 도피가 될 수도 있음을 스스로의 모습을 통해 누누이 절감한 바이다.
그래서 자꾸 생각해 보는 것이다. 과연 고요함과 평온과 예리한 연기적 지혜가 오직 명상을 통해서만, 오직 선정을 통해서만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불교사에 있어서 그 대답을 시원스레 해주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팔천송반야와 같은 대승의 가르침이다.
팔천송의 입장에서 부정당하는 선은 어디까지나 홀로 가는 선이고, 맹목적인 선이고, 물러서는 선이다. 곧, 유정들이 일으키는 엄연한 통증을 무시한 채 홀로만 인내할 수 있는 그런 류의 능력을 선이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승에서 인정하는 선이란, 다름 아닌 유정의 통증과 산란심을 제거해 주려는 보살의 노력을 말한다. 왜냐하면, 보살은 그러한 노력을 통해 비로소 영원하고도 지속적인 마음의 평온을 만나기 때문이다.
선이란 마치 육체를 움직여 실컷 땀을 흘린 자가 지친 몸을 이끌고 나무 그늘 밑에 앉아 휴식을 취할 때 맛보는 그런 행복감이다. 그런데, 그 휴식의 느낌이 좋다고 해서 땀을 흘리는 행위는 생략하거나 줄인 채 자꾸만 나무 밑을 찾는다면 과연 그 휴식의 느낌은 어떠할까?
예나 지금이나 선정의 특별한 비법이 있다고 생각해 그 테크닉을 구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 나 역시 그런 류에 속했지만, 이는 마치 휴식의 비법이 있는지 찾아다니는 일과 하등 다름이 없다. 반야란 이렇듯 자칫 모순에 빠지기 쉬운 선을 인도하는 지혜의 등불인 것이다.
김형준 박사
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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