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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박씨-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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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찾아 스크랩 성씨의 뿌리
박종주 추천 0 조회 31 08.05.26 17: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씨의 뿌리

 

성씨의 뿌리와 발달은 신화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성씨는 초기에 왕실이나 귀족에서만 사용되다가 국가에 공이 큰 사람, 또는 외국에서 귀화해 온 사람들에게 임금이 특별히 성을 지어 내려주면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의 성씨는 과거 제도가 발달된 고려 문종(1046-1083)때부터 갖기 시작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양반 계급의 사람들은 지금으로부터 950여년전 비로소 성씨를 가졌다. 그때부터 본관이 생기고 시조가 생겼다. 그러나 신분이 좀더 낮은 상민과 노비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성씨를 갖게 된 것은 조선 말기에 개혁 정치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200여년 아니면 300여 년 전부터 성씨를 가진 것이다.

 

우리의 성씨는 신화 속에 있는 성씨와는 좀 거리가 있다. 핏줄(혈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우리 민족은 어느 누구나 아버지 계통의 부계 중심으로 하여 제각기 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각 성마다 씨족의 역사를 가지고 서로 협조하며 발전하고, 또 후세로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성씨는 성씨마다 조상을 숭배하는 사상과 정신이 강하고, 또 겨레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성씨를 통해 조상을 받들고, 가족의 전통을 이어가며, 조상의 얼과 발자취를 더듬어가면서 하나의 가보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긍지와 명예를 자랑하게 되고 성씨의 보존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성씨는 신화 속에 있는 성씨와는 좀 거리가 있다. 핏줄(혈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우리 민족은 어느 누구나 아버지 계통의 부계 중심으로 하여 제각기 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각 성마다 씨족의 역사를 가지고 서로 협조하며 발전하고, 또 후세로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성씨는 성씨마다 조상을 숭배하는 사상과 정신이 강하고, 또 겨레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성씨를 통해 조상을 받들고, 가족의 전통을 이어가며, 조상의 얼과 발자취를 더듬어가면서 하나의 가보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긍지와 명예를 자랑하게 되고 성씨의 보존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성씨를 갖기까지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 본기편을 보면 옛날에 성씨를 갖게 된 과정들이 재미있게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를 세운 사람은 주몽인데, 주몽은 나라를 세운 뒤 고(高)자를 자기 성씨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주몽은 고구려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건국 공신인 재사에게 극씨라는 성을 주었고, 무골에게는 중실(仲室)이라는 성씨를 내렸으며, 묵거에게는 산실(山室)이라는 성씨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제23권 백제 본기편을 보면 백제의 시조 온조는 부여 계통의 자손이라 하여 부여씨로 하였다. 또 신라 본기편에 보면 시조 혁거세는 커다란 알에서 나왔다하여 표주박 박씨를 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금성 서쪽 숲 속에서 금상사 속에서 나왔으므로 김씨라고 하였으며, 가야국의 시조인 수로왕도 금관국 북쪽 귀지봉에서 떨어진 6개의 황금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역시 김씨가 되었다.

신라 3대 유리왕 때인 32년에 6부를 고쳐 알천 양산촌의 우두머리인 알평에게는 이씨를 주었고, 돌산 고허촌의 소별도리에게는 최씨를, 무산 대수촌 촌장인 구례마에게는 손씨를, 취산 진지촌 우두머리인 지백호에게는 정씨를, 금산 가리촌 우두머리 기타에게는 배씨를, 명월산 고야촌 촌장 호진에게는 설씨를 주었다.

 

김수로 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아버지 성을 따라 김씨가 되고, 한 아들은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개국공신인 홍술에게는 홍씨를, 백옥에게는 배씨를, 삼능에게는 신씨를, 복사귀에게는 복씨를 주어 이름 앞에 붙이도록 하였다. 그러니까 홍씨의 시조는 홍유, 배씨의 시조는 배현경, 신씨의 시조는 신숭겸, 복씨의 시조는 복지겸인 셈이다.

 

그 당시는 외국 사람들이 종교를 널리 보급하고자 우리 나라에 와 머물고 있거나, 문화적 관계로 외국 사람들이 들어와 아예 한국인으로 국적을 바꾼 귀화인들이 많았다. 이들에게도 임금은 성을 내려주었는데, 주로 중국 계통의 성씨가 많이 생겼다.

 

예를 들면 괴산 점씨, 김해 김씨, 화산 이씨, 연안 인씨, 덕수 장씨, 임선 이씨, 경주 설씨 등이 있다.

 

더욱 흥미있는 일은 충주 어씨의 시조는 원래 지씨였다고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몸에 털이 기이하고, 겨드랑 밑에 비늘 셋이 있어 고려 태조가 직접 그 사람을 불러 사실을 확인하고 성씨를 어씨로 바꾸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을 보면 태조가 고려를 세운 뒤에 목천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미워한 나머지 성씨들을 소라는 뜻의 우씨, 말이라는 뜻의 마씨, 코끼리라는 의미의 상씨, 노루라는 의미의 장씨, 돼지라는 의미의 돈씨 등으로 짐승 이름을 붙여 주었다.

 

성씨가 지닌 뜻

 

중세사회에 이르기까지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지배 계급에서만 사용했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성씨를 갖고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신분을 보장받는 것이고 인격적으로 존중을 받으며, 사회의 한 사람으로써 소속감을 갖게 하는 등 여러 가지 뜻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성씨를 가지고 있으므로 성씨 문중의 한 사람으로, 자기 조상과 문중에 대한 긍지와 안정감을 갖게 하며 민족의 한 사람으로 열심히 일하도록 이끌어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예를 들면 같은 성씨 중의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훌륭하게 성공하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 출세하기 되면 그 성씨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반대로 어떤 성씨의 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나쁜 일을 하여 죄를 받게 된다면, 그 성씨를 지닌 사람들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처럼 어떤 성씨에 대한 소속감이나 긍지, 사명감 같은 것이 강하게 나타난다.

 

성씨는 그 누구도, 또 어떤 신이나 종교도 지배하거나 침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꼽고 있다. 개인의 업적이나 명예, 영광이 결국은 성씨에게 되돌아가고, 성씨를 통해 계승된다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성씨에 대한 중요성이 있고, 성씨를 중심으로 자신의 모든 활동을 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성씨가 많고, 같은 성씨라도 그 자손(후예)들이 많아지면서 종파라고 하는 파벌이 생겼다. 예를 들어 같은 김씨라고 해도 어느 할아버지의 몇 대 자손이라는 식으로 파벌이 생겨나면서부터 족벌주의가 나타났다.

 

성씨의 발달 과정

 

성씨의 종류와 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성씨의 발달 과정은 우리 나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왔다.

 

조선 세종실록지리지라는 책에는 당시에 성씨가 265성이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고, 조선 영조 때 나온 도곡총설 책에는 298성씨가 있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조선 정조 때인 1776년에 이르러서는 성씨가 486성으로 두배 가까이 늘어났고, 다시 6년 뒤인 1782년에는 성씨가 무려 10배 가까이 되는 4296성씨로 크게 늘어났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는 갑자기 289성씨로 줄어들었다. 이처럼 우리 나라 성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볼 때, 성씨의 발달 과정은 정치의 흐름에 따라 역사의 변천에 따라 시대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30년 일제 시대 때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성씨 조사에서 250성씨로 나타났고, 1934년 중추원에서 펴낸 '조선의 성명 씨족에 대한 연구 조사'에는 326성씨로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60년 국세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성씨 11성씨를 포함해 258성씨였고, 1975년 국세 조사에서는 249성씨로 밝혀졌다. 그러다가 1985년 경제 기획원에서 본관별로 분류하여 실시한 결과 274성씨로 확인되었다. 이 조사에 따르면 1975년부터 1985년 사이에 25개 성씨가 새로 생겼으며, 성씨의 본관은 모두 3435개에 이르렀다.

 

이들 성씨 가운데서 김씨가 전체 인구의 21.7%로 가장 맣고, 이씨가 14.9%, 박씨가 8.5%, 최씨가 4.8%나 되며, 김·이·박·최씨 등이 45%를 차지했다. 이와 함께 우리 나라의 10대 성씨는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윤, 장, 임씨로서 전체 인구의 64.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관 수로 으뜸인 것은 김해 김씨가 9.8%, 밀약 박씨가 6.7%, 전주 이씨가 5.9%, 경주 김씨가 3.8%, 경주 이씨가 3% 순으로 되어 있다. 새로 생겨난 성씨로는 후, 제, 두, 환, 명, 교, 저, 학, 습, 난, 루, 강전, 소봉, 망절, 장곡, 비, 춘, 흥, 초, 애, 운씨 등인데, 이 가운데 루, 저, 강전, 소봉, 장곡, 초씨는 일본, 중국, 베트남에서 귀화한 사람으로 단 1명씩 뿐이다.

 

성씨가 없이 이름만 있는 사람도 전국에 180명이나 되고, 본관을 마음대로 정해 쓴 경우도 있는데, 이런 사람은 부모가 없는 고아 출신으로 법원에서 성씨를 받을 때 본관도 함께 받은 것이다.

 

인구별로 볼 때, 500만 명 이상인 성씨는 김씨와 이씨 둘 뿐이고, 500만 명 미만 100만 명 이상인 성씨는 박씨, 최씨, 정(鄭)씨 등 3개이며, 100만 명 미만 50만 명 이상이 14개, 50만 명 미만 10만 명 이상이 32개, 10만 명 미만 1만 명 이상이 53개의 성씨로 나타나, 실제적으로 인구수가 많은 성씨는 90여 성씨에 지나지 ?는 것으로 밝혀졌다.

 

성씨와 본관

 

성씨마다 본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본관은 바로 시조가 탄생한 땅으로 성씨의 고향인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씨가 점차적으로 확대되면서 같은 성씨라고 해도 계통이 달라, 그 근본을 명확하게 밝히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래서 같은 한자는 쓰는 성씨 가운데서도 한 할아버지 자손이냐, 조상이 다르냐를 구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 고향을 따지는 본관이 생겨난 것이다.

 

본관은 본 또는 관향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관은 돈을 가리키는 뜻으로, 옛날 돈은 구멍이 뚫린 동전이었다. 이 돈을 한줄에 꿰어 묶어 가지고 다니는 것처럼, 친족이라는 사람들은 하나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선조의 고향을 따져 본관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그러나 큰 공을 세워 임금님이 특별히 성을 내린 일이 있는데, 이런 경우는 사관이라고 하여, 그 사람이 태어난 땅과는 관계없이 활동하는 지역을 본관으로 쓴 일이 있다. 예를 들면, 고려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워 성씨를 임금으로부터 받은 신숭겸은 곡성 사람이었으나, 고려 태조와 함께 평산으로 놀러갔다가 그곳의 경치가 너무 좋아서 평산을 신씨의 본관으로 삼았다. 때문에 같은 글자를 쓴다고 하여 모두 같은 할아버지 자손이라고 행각해서는 잘못이며, 본관까지 같아야만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동성동본이 된다. 동성동본이라는 말은 같은 성씨에 같은 본관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 사이에는 결혼을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성씨와 본관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대개 성씨의 시조와 본관이 같은 것을 기본 바탕으로 한 동족동본과, 성과 본관은 같으나 혈통이 다른 이족동성동본 관계, 성은 같으나 시조도 본관도 다른 경우, 시조의 고향은 같은데 성씨가 다른 경우 등이 있다. 흔히 동성동본이라고 하는 같은 성씨에 같은 본관은 가장 이상적인 혈통의 성씨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어느 곳에 살고 있던 모두 한 할아버지 자손이라는 것이 적용된다. 한 핏줄을 타고난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나 전통적으로 따져 절대 혼인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조상과 본관은 같은 뿐, 나고 자란 환경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결혼을 하는 일이 생겨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성씨와 본관이 같지만 그 근원이 다른 이족동성동본의 경우는 사실상 혈통 문제가 전혀 없다. 예를 들면, 남양 홍씨는 당나라로부터 귀화한 홍은열을 시조로 삼은 당홍 홍씨와 홍선행을 시조로 한 토홍 홍씨로 구분되어 공통점이 전혀 없이, 홍씨 성만 같다는 경우이다. 시조와 본관은 틀리지만 같은 계통의 성씨가 있다. 강릉 김씨와 광주 김씨는 시조와 본관이 다르나, 같은 김알지 계통이며, 고부 최씨와 경주 최씨도 마찬가지로 본관은 서로 다르지만 같은 최치원 계통이다. 같은 성씨이면서 시조와 본관이 다른 경우도 있다.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 등과 같이 같은 성을 쓰고 있으나, 조상이 달라 아무런 계통 관계가 없는 경우이다. 성씨는 다르면서도 조상과 본관이 같아 하나의 성씨처럼 관계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경우인데, 모두 김수로 왕의 후손으로 성만 다른 것이다. 인동 장씨와 인동 유씨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이런 성씨 사이에서도 결혼을 하지 않는다. 시조와 성씨는 다른데 본관은 같은 혈통들이 있다. 예를 들면 안동 김씨, 안동 강씨 등이 그런 경우이다.

 

본래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같은 조상, 같은 본관을 중심으로 한 동족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은 가문의 문벌을 소중히 여기고 자치적으로 서로 협력하고 협동하면서 집안 일을 해결해 나가는 특이한 사회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하나의 혈통으로 5천년 역사를 이끌고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족보와 촌수

 

성씨마다 시조, 본관, 계보의 흐름을 기록해 놓은 족보를 가지고 있다. 성씨의 발달과 변천 과정을 기록한 성씨의 역사인 셈이다. 족보는 계보, 보첩, 세보, 세계, 가첩, 가보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상을 존경하고 같은 성씨의 단합과 발전의 바탕이 되도록 하며 후손에게는 자기 성씨의 내력과 촌수를 이해하도록 하는데 근본이 되는 책이다.

 

본래 족보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인데, 후한시대부터 기록으로 남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1476년에 안동 권씨의 족보인 '선화보'가 처음 나왔으며, 그 뒤 1562년 문화 유씨의 '문화류보'가 족보의 모습을 갖추었다.

 

족보는 성씨의 시조부터 현재 살고 있는 자손들까지 모두 실려 있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문중이 번창하고 자손이 많은 성씨는 그 많은 사람들의 기록을 하나하나 모두 한 권의 족보에 실을 수 없기 때문에 몇 권 또는 몇 십 권으로 나누어 족보를 꾸미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아예 촌수를 따지거나 파벌을 따져 자기 직계만 따로 꾸미는 계보로 발전된 것도 있다.

 

족보는 대개 족보의 일반적 의의, 성씨의 근원, 시조의 내력 등을 기록하는 서문과, 시조나 중시조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문장이 들어가고, 시조의 묘소, 시조의 탄생을 알리는 본관 향리 지도, 내용을 일러주는 범례, 족보의 중심인 계보표 등을 배열하고, 그 뒤에 각 파별로 기록해 나간다. 기재된 사람마다 이름, 호, 시호, 출생 및 사망 연월일, 관적, 봉호, 업적, 덕행, 충효, 문장, 저술 등을 요약하여 기록한다.

 

자녀에 관해서는 아들 딸 차례대로 쓰되,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이는 경우는 입양 사실을 바르게 쓰고 있다.

 

성씨에서는 족보와 함께 촌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촌수는 바로 친족의 개념을 분명히 해주는 기본 바탕이기 때문이다. 법률상으로 친족이라 함은 혼인과 혈연을 기초로 하여 서로간의 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친족의 범위는 법률상으로 8촌 이내의 아버지 계통인 부계 혈족과, 4촌 이내의 어머니 계통인 모계 혈족, 그리고 배우자와 그 부모로 제한하고 있다.

 

촌수를 따짐에 있어서는 부모와 같은 이름 돌림자의 항렬과 자기를 중심으로 이름의 돌림자를 기준으로 삼아 자기와 직계 혈족간의 관계를 수로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부부 사이에는 촌수가 없어서 무촌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지간은 1촌이며, 형제 사이는 2촌이 된다. 그러나 보통 무촌과 1촌, 2촌은 촌수를 따져 부르지 않는다. 촌수를 부르는 경우는 대개 3촌부터 시작된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3촌인데, 아버지의 형님은 큰아버지 또는 백부, 중부라고 하며 이들 모두 함께 부를 때는 종부라고 한다. 따라서 백부의 부인은 백모, 숙부의 부인은 숙모라고 하다.

 

아버지의 누나나 여동생은 고모이고, 고모의 남편은 고모부 또는 고숙주라고 하며, 자기의 형제 나매가 낳은 아이들은 조카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형제가 sg은 자녀들은 4촌이라 하고, 종형제간이라고도 표현하며, 4촌형은 종형, 4촌동생은 종제라고 한다.

 

고모의 아들딸은 내종 4촌 또는 고종 4촌이라고 하고, 내종 형제들이 자기를 부를 때는 외종이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조부이고, 할아버지의 형제는 종조부, 그의 아들은 5촌으로서 종숙 또는 당숙이라고 하며, 5촌의 부인을 종숙모 또는 당숙모라고 부른다.

5촌의 아들은 6촌 형제로 재종형제가 되는데, 윗사람은 재종형, 아랫사람은 재종 종생이라고 부른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증조부이고, 그 형제는 종증조부이며, 그 아들과는 8촌이 되는데 삼종 형제라고 한다.

 

10촌 이상의 할아버지 항렬은 흔히 대부님이라고 부른다.

 

어머니의 남자 형제들은 외3촌 또는 외숙이고, 그의 부인은 외숙모이며, 외삼촌의 자녀들은 외4촌 또는 외종 형제라고 한다. 외숙은 자기를 생질이라고 부른다.

 

어머니의 여자 형제들은 이모 또는 종모라고 하고, 이모의 남편은 이모부 또는 이숙이라고 하며, 그 자녀들은 이종4촌으로 이종 남매가 된다.

 

이 밖에도 부인의 오빠나 남동생은 처남이고, 그 부인은 처남댁이며, 그 자매는 처형 또는 처제라 하며, 자매의 남편과는 동서간, 누님의 남편은 매형이며, 여동생의 남편은 매제가 된다.

 

촌수를 가려주는 기본인 항렬은 같은 핏줄을 타고난 자손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다. 항렬은 나타낼 때는 반드시 항령의 돌림자를 쓰게 된다. 항렬자는 같은 혈족에서 한 항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름자 가운데 한 글자를 공통으로 쓰도록 한 것이다.

 

항렬은 종파마다 다르나 그 뜻은 대개 이러한 원칙으로 정하여진다.

 

첫째, 글자의 풀이가 갑, 을, 병, 정처럼 무궁무진하게 순환하게 된다.

 

둘째, 자손의 번영과 부귀영화를 뜻하는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삼는다.

 

셋째, 숫자적으로 一, 二, 三, 四의 순서로 포함시킨다.

 

이런 것들은 하나같이 자손들이 발전하고 번성하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살라는 부모의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한 자녀 낳기가 이루어지면서 항렬자를 무시하고, 좋은 글자를 선택하여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이름의 경우 족보에 올릴 때는 족보용 항렬자에 따라 이름을 따로 지어야만 촌수를 따지게 된다.

 

賈 - 소주 가씨

 

본래 중국 성씨로 가후의 후손인 가유약이 명나라 신종 때 추밀원사, 변부상서, 태자소부 등 벼슬을 지내다가 조선 선조 임금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원 안찰사로 우리 나라에 왔다.

안주 싸움에서는 왜군들을 물리치는 큰 성과를 올렸다.

또, 정유재란 때 다시 아들 상과 손자 창을 이끌고 우리 나라에 와서 큰 공을 세우고 귀화하여 부산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 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그의 고향인 소주를 본관으로 하여 성씨를 이어 나갔다. 따라서 가씨는 본관이 하나인 단본 성씨가 되었다. 그의 묘는 경남 울산에 있다.

 

簡 - 가평 간씨

 

시조는 간균인데, 호는 문산, 시호는 상절이다.

고려 의종 임금 때인 1164년에 문과 시험에 합격하여 시중평장사라는 벼슬을 지냈다. 그 뒤 명종 17년인 1187년에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풍덕 백후동(지금의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글을 짓고 시를 읊으며 여생을 보냈다.

후손들이 백후동을 중심으로 정착해 살면서 차차로 번창하여 가자, 그를 시조로 삼고 본관을 가평으로 정하였다.

간씨의 시조 묘소도 이곳에 있다.

지금 살고 있는 후손들은 26세 489가구에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항렬자로는 배, 창, 엽, 명, 식, 영, 능, 학 등으로 되어 있다.

 

葛 - 남양 갈씨

 

본래 갈씨는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아버지인 제갈규라는 사람이 그 시조이다.

그의 20대손인 제갈공순이 신라 흥덕왕 때 귀화하여 제갈씨로 내려오다가 고려 고종 때인 1213년 두 자 성씨를 한 자로 고치게 하여 형인 제갈홍은 제자를 성으로 삼고, 동생 제갈영은 갈자를 성으로 삼았다. 그래서 형제가 따로따로 시조가 된 셈인데, 이런 경우를 중시조라고 한다.

갈씨는 본관이 양주, 청주로 되어 있었으나 그 뒤에 다시 양근, 양성, 충주, 청풍, 청산, 청안, 청당, 육창, 해남, 황원, 화원, 가조, 죽장, 평양, 하원, 대원 등 무려 22본으로 나뉘어졌다. 이들 본관의 중시조들은 열려지지 않고 있다.

 

甘 - 회산 감씨

 

감씨는 본래 중국 성씨로, 중왕이 그의 셋째 아들 숙대를 감후에 임명하자, 나라 이름을 감국이라고 정하였다.

나라 이름의 감자를 따서 감씨 성이 생겨났는데, 우리 나라에 감씨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때 감계가 문하시랑평장사라는 벼슬을 지내다가 회산 땅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손들이 감계를 시조로 삼고 회산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감씨의 후손들은 지금 44대손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항렬자로는 현, 태, 상, 경, 병, 동, 채, 호, 석, 근 등으로 되어 있다.

 

姜, 康 씨

 

강씨는 진주 강(姜)씨, 신천 강(康)씨, 충주 강(强)씨 등이 있다.

진주 강씨는 고구려에서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 장군이 시조로 되어 있고, 신천 강씨, 충주 강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이 시조로 되어 있다.

 

姜 -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은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내면서 많은 전공을 세운 장군이다.

597년 수 나라가 침략의 야욕을 품고 엉뚱한 요구를 해오자 임금이 신하들과 이 문제를 토의하였다. 그때 강이식은 "수나라의 야욕은 붓으로 대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베어버려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왕이 그의 뜻을 받아들여 싸울 것을 명령하자 강이식은 도원수가 되어 군사 5만명을 거느리고, 수 나라 군사 30만 명을 단번에 내쫓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묘소는 만주 원수림에 있으며, 진주 봉산사에서 해마다 4월 10일 제사를 올린다.

그의 후손인 강진이 진주를 다스릴 때 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박사공, 후사평공, 소감공, 은열공, 인헌공 등 5개파로 나뉘어졌다.

 

康 - 신천 강씨

 

시조 강후는 중국 주 나라 무왕의 동생 강숙봉의 둘째 아들이다.

기원전 198년 기자와 함께 평양으로 건너와 왕실의 교화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고 관정대훈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 강숙봉의 강자를 따서 강씨 성을 얻고, 시조가 되었다.

그의 67대손인 호경은 고려를 세운 태조의 외할아버지로, 개국 공신이 된 뒤 국조 대왕에 올라 가문을 번창시켰다.

또 그의 80대손인 지연은 신천 땅에 머물면서 고려 명종 때 신성부원군을 지냈다.

그 뒤 후손들이 본관을 신천으로 삼고, 강후를 강씨의 시조로, 호경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북제주 조천 서원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强 - 청주 강씨

 

중국 성씨로서 진 나라 때 대부 강일의 자손이 시조가 되었다고 하나 분명한 기록은 없다.

청주를 중심으로 괴산, 음성, 상주, 연기, 예산, 통영, 평원 등에서 수십 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주 강씨와는 다르지만 본관을 알 수 없는 강(剛)씨도 있는데, 청주 강씨를 잘못 기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慶 - 청주 경씨

 

시조는 경진. 고려 명종(1170-1197년) 때에 벼슬에 올라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 뒤의 자손들이 대를 이은 기록이 분명하지 않아, 경번을 다시 1세 시조로 하고 있다.

경번은 고려 시대 호부상서를 지낸 뒤 청주 땅으로 내려가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4대 후손인 복홍이 진충동덕협보라는 공신이 되어 청주 부원군에 오르게 되자, 후손들이 청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그의 묘소는 청주 서산에 있으며, 해마다 10월 10일에 시향을 지낸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 30대에 이르고 있는데, 항렬자로는 문, 규, 윤, 준, 식, 익 등으로 되어 있다.

 

景 - 해주 경씨

 

해주 경씨 또는 태인 경씨라고 하며 시조인 경선계는 기자를 따라 평양에 들어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자손들의 행적이 분명하지 못해 한 동안 경씨 가문이 이어지지 않다가 고려 시대에 이르러 벼슬을 한 경차가 나라에 공을 세우고 태산군을 다스리게 되면서 다시 가문이 일어났다.

그의 후손들은 고려 때 나라의 요직을 맡고 가문이 번성하자, 경상조와 경상록 형제를 중시조로 받들었다.

형은 태인으로 본관을 정하고 동생은 해주로 본관을 정해 본관이 따로따로 갈라졌다.

경씨의 후손들은 지금 21대에 이르고 있는데, 항렬자로는 국, 석, 장, 수, 언, 인으로 되어 있다.

 

高 - 제주 고씨

 

고씨는 양씨, 부씨와 함께 제주의 삼성으로 유명하다.

삼성 가운데 한사람인 고을라가 고씨의 시조라 하여 후손들이 제주를 본관으로 정하였다.

고을라의 45대손 자견왕의 큰아들 말로는 제주 고씨, 말로의 손자 공익은 청주 고씨, 말로의 증손자 영신은 개성 고씨, 말로의 10대손 복림은 장흥 고씨, 말로의 후손 종필은 연안 고씨, 말로의 16대손 용섭은 안동 고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그 뒤 고씨는 모두 고을라의 후예라 하여 후손들이 시조를 고을라로 고치고 본관도 제주도로 통일하였다.

고씨의 후계는 지금 45대에 이르고 있다.


公, 孔씨

 

공씨는 기록에 8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김포 공씨와 문천 공씨 2본을 제외하고 나머지 6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公 - 김포 공씨

 

당 나라 18학사의 한 사람인 공윤보의 후손 공명례를 시조로 하고 있다.

안록산의 난을 피해 우리 나라로 망명한 뒤 김포에 자리잡고 살았다.

그러다가 그의 후손인 공명례가 조선 성종 때 계공랑 벼슬을 지내던 중 김포천농 사건으로 평안북도 벽동으로 쫓겨났다.

그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김포를 본관으로 정하여 19대에 이르렀다.

 

公 - 문천 공씨

 

김포 공씨와 마찬가지로 당 나라 공윤보의 후손인 공보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공보원은 고려 때 정승을 지냈다.

그의 후손들이 본관으 문천으로 삼고 공보원을 시조로 정하였다.

 

孔 - 곡부 공씨

 

공씨는 중국 산동성을 본관으로 삼고, 공자 탄생 이래 2528년간을 그를 시조로 섬기며 단일본의 성씨로 이어져 왔다.

공자는 세계 3대 성인의 한 사람이다. 공자의 제 53대손인 공완의 큰아들 사회가 중국 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 공소가 원 나라 순제 때 한림학사로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로 회원군에 임명된 뒤, 공씨 성을 받고 우리 나라에서의 공씨 중시조가 되었다.

그 뒤 1794년에 노 나라의 공씨와 같다고 하여 곡부로 본관을 바꾸었다.

중시조의 묘소는 경남 창원 두척산에 있으며, 해마다 10월 1일 제사를 모신다. 그의 후손은 지금 88대에 이르고 있다.

 

곽(郭)씨

 

곽씨는 청주 곽씨와 현풍 곽씨로 나뉜다.

청주 곽씨는 신라의 곽상을 시조로, 현풍 곽씨는 송 나라 곽경을 시조고 하고 있다.

 

郭 - 청주 곽씨

 

신라 헌강왕 때 시중을 지낸 곽상을 시조로 삼고, 고려 성종 때의 학자 곽원을 중시조로 삼았다.

곽상을 시조로 삼은 이래 후손들의 기록이 없다가 고려 성종 때 곽원이 과거에 합격하여 우산기상시, 중추원사, 형부상서 등을 지내면서 자손들이 다시 일어났다.

그 뒤 그의 10대 손인 곽연준이 통원 전법판사를 거쳐 청원군에 봉해진 뒤 청주에서 여생을 보내 청주 곽씨로 본관을 정하여 46대에 이르렀다.

 

郭 - 현풍 곽씨

 

시조 곽경은 송 나라 관서 사람으로 1133년 고려 인종 때 우리 나라에 와 벼슬하여 평장사문하시중에 이르렀다.

그 뒤 금자광록대부의 작위와 포산군에 봉해져 본관을 포산으로 정했는데, 포산이 현풍으로 개편됨에 따라 본관도 바뀌었다.

현풍 곽씨는 전리공, 우장군, 교리공, 주보공, 현령공, 목사공, 구거단공, 충익공 등 8개 파로 갈라져 있다.

본관도 포산과 현풍의 두 가지를 함께 쓰다가 1976년부터 현풍으로 통일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에 있으며 해마다 11월 둘째 일요일 시향을 올린다.

 

구(具, 丘)씨

 

구씨는 기록에 32본으로 되어 있으나 능성, 창원 두 본을 제외하고는 미약하다.

능성 구씨는 구존유를 시조로, 창원 구씨는 임금님이 내려준 성씨이다.

 

具 - 능성 구씨

 

시조 구존유의 장인인 청계가 송 나라 한림학사로 있을 때 송 나라가 몽고와의 싸움에서 지자 1224년 7학사와 함께 떠나 전남나주로 망명하였다.

몽고는 원 나라로 이름을 고친 뒤 우리 나라로 망명한 8학사를 추적, 탐색하자 능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2남 1녀를 낳았는데, 딸이 능성 구씨 시조인 존유에게 시집을 갔다.

검포장 장군이 된 뒤 능성 구씨로 바뀌었다.

 

具 - 창원 구씨

 

원래는 창원 구(仇)씨였는데, 구(具)씨로 바뀌었다.

송 나라 대부 구목의 후예인 구성길이 우리 나라로 건너와 945년 공을 세우고 의창군에 봉해진 뒤 가문을 일으켰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시조로 받들고 창원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그 뒤 조선 세종 때 홍문관 직제학을 지낸 후손 구종길을 중시조로 하고 가문을 이어 오다가 1791년 정조 임금이 구(具)씨로 고쳐 주었다.

 

丘 - 평해 구씨

 

시조는 구대림. 원래 당 나라 사람으로 663년에 사신으로 일본에 가다가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 월송정에 머물렀고, 고구려에 귀화하여 자복사상서 벼슬을 지냈다.

 

권(權)씨

 

권씨는 문헌에 56본이나 되지만 안동, 예천 2본을 제외하고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안동 권씨는 신라의 김씨 성에서 바뀐 것이고, 예천 권씨는 흔씨였으나 고려 때 바뀌었다.

 

權 - 안동 권씨

 

안동 권씨의 시조는 신라의 기본 성씨로 알려진 김씨였는데, 고려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김행에게 임금이 '농병기달권'하다는 뜻으로 권씨 성을 내려주어 권씨로 성씨를 바꾸었다.

권행은 신라 왕실의 후손인 김행인데, 경애왕을 살해한 후 백제의 견훤을 내쫓는데 공을 세우고, 왕건을 도와 고려가 세워지는 데 큰 몫을 하였다.

고려 태조는 김행에게 삼중대광태사라는 벼슬과 함께 권씨 성을 내렸다.

권행은 그 이전에 신라 경애왕 때 안동군별장 벼슬을 지내며 안동 땅을 다스렸기 때문에 후손드이 안동을 본관으로 삼았다.

권행의 묘소는 안동 천등산에 있으며, 46대손까지 이르렀다. 항렬자로는 백, 완, 집, 택, 서, 태 등으로 이어진다.

 

權 - 예천 권씨

 

예천 권씨도 임금이 내려준 성이다.

본래 성은 흔(昕)씨였는데, 고려 충목왕의 휘가 흔이어서 국휘를 범하였다 하여 나라에서 외가의 성씨를 따르도록 하였다.

시조 권명종은 흔적신의 후손으로 외가 성씨를 따라 예천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선조들이 예천 지방에서 호장을 지냈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예천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예천 권씨의 시조인 권명종의 아버지인 흔승단은 안동 권씨인 권백서의 사위였으므로 어머니 성씨를 따르라는 임금의 뜻에 따라 권씨로 바꾼 것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25대에 이르고 있으며, 항렬로는 식, 광, 수, 진, 구로 이어진다.

 

琴 - 봉화 금씨

 

봉화 금씨의 시조는 중국의 금웅이다.

기자와 함께 중국에서 건너와 시조가 되었다.

금웅으로부터 삼한 고인 태사를 지낸 6대손 금용식까지는 모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7대손인 금의를 중시조로 다시 삼아 후계를 이어오고 있다.

금의는 고려 명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의 신하로 문장이 뛰어나고 시를 잘 지어 금학사라는 별칭이 붙었다.

시관 벼슬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르 길러냈고, 평장사 벼슬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지금까지 40대손으로 내려오며, 항렬자로는 병, 천, 종, 영, 상, 영으로 이어진다.

 

奇·箕 - 행주 기씨

 

행주 기씨는 본은 같으나 시조와 성씨가 다른 성씨이다.

기(奇)시의 시조는 기우성으로 기자 조선의 시조왕 기자의 49대손으로 백제 온조왕 때 시중으로 일하였다.

기자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준왕의 후손인 마한원 왕에게는 아들 3형제가 있었다. 이 아들 3형제에게 한 가지씩 성씨를 내렸는데 우평은 선우씨, 우성은 기씨, 우경은 한씨로 성씨를 가졌다. 우성의 후손들은 본관을 행주로 삼아 성씨의 계통을 이어갔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95대째 내려오고 있다.

기(箕)씨의 시조도 기(奇)씨와 마찬가지로 전해진다. 영일, 인계, 덕천 등지에 한 가구씩 살고 있다.

 

김(金)씨

 

우리 나라 274개의 성씨 가운데 가장 많은 성씨가 김씨이다.

김씨는 본관만 623개에 이르지만 대체로 112본까지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나머지 본관에 대해서는 상세하지 못하다.

김씨 성은 가야국의 김수로 왕을 시조로 하는 수로왕계와 신라 왕실의 박, 석, 김 3성 가운데 하나인 김알지계로 나눈다.

김알지계에서 다른 성이 된 경우가 있는데 감행은 안동 권씨로, 김순식은 강릉 왕씨로, 순백은 광산 이씨로, 세광은 김천 문씨로, 영규는 수성 최씨로 각각 성을 바꾸었다.

신라 역대 임금 56명 가운데 박씨 임금이 10, 석씨 임금이 8, 김씨 임금이 38명이나 된다. 그리고 623개 본관 중에서도 광산 김씨가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金 - 강릉 김씨

 

시조 김주원은 신라 무열왕의 5대손으로 785년 선덕왕이 세상을 떠나고 대를 이을 사람이 없자 신하들이 회의를 열어 김주원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큰 비가 쏟아져 알천을 건너갈 수가 없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임금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였다. 비가 개인 뒤에 궁궐에 들어가자 원성왕은 김주원에게 임금 자리에 오르라고 권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강릉으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원성왕은 강릉 군왕으로 임명했다.

그 때부터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강릉으로 정하였다. 그로부터 61대에 이르고 있다.

 

金 - 개성 김씨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석이 의성군에 봉해져 본관을 의성으로 하다가 김석의 8대손인 공우의 셋째 아들 용주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우고 개성군에 봉해져 본관을 개성으로 옮겼다.

 

金 - 경산 김씨

 

신라 김알지의 28대손이며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은설의 후손인 김유화를 시조로 하고, 경산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金 - 경주 김씨

 

신라 왕실의 김, 박, 석의 3씨성 가운데 하나이다.

시조 김알지는 65년 금성 서쪽 계림의 나뭇가지 끝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임금은 하늘이 내린 아이라고 생각하며 김씨 성을 내렸다.

그의 7대손인 미추가 왕이 되자, 그로부터 신라 마지막 경순왕까지 38명의 왕이 모두 김알지의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경순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9명 가운데 큰 아들은 절로 들어가고, 둘째 아들부터 차례로 나주 김씨, 경주 김씨 영분공파, 경주김씨 은설공파, 의성 김씨, 강릉 김씨, 언양 김씨, 삼척 김씨, 울산 김씨로 갈라섰다.

 

金 - 고령 김씨

 

시조 김남득의 의성 김씨 시조 김석의 11대손으로 1340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고령 부원군을 지냈다.

후손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金 - 김해 김씨

 

가야국 김수로 왕의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정하였다.

김해는 본래 가야 땅이었는데 고려 충선왕 때에 이르러 김해부가 설치되자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그 뒤 그 후손들이 널리 번창하자 금령군파를 비롯하여 142개 파로 갈라졌다.

그 가운데 목경계의 경4파, 익경계의 4군파, 관계의 3현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金 - 대구 김씨

 

시조 김달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설의 후손으로 대구에 살면서 함경도 길주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본관을 대구로 정하였다.

 

金 - 안동 김씨

 

안동 김씨는 김알지의 28대손인 경순왕의 손자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옛날 인동 김씨와, 고려의 개국공신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새 안동 김씨의 신·구파로 갈라져 있다.

 

金 - 진주 김씨

 

진주 김씨는 김수로 왕의 28대손인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인 김춘추를 시조로 하는 것과, 김유신 장군의 둘째 아들 원술을 시조로 하는 두 계통이 있다.

원술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던 장군이다.

이 밖에도 김씨의 본관 가운데 강화 김씨, 경산 김씨, 고산 김씨, 고성 김씨, 공주 김씨, 광산 김씨, 광주 김씨, 교하 김씨, 금명 김씨, 국산 김씨, 김제 김씨, 금화 김씨, 나주 김씨, 낙안 김씨, 남양 김씨, 남포 김씨, 해남 김씨, 당악 김씨, 덕수 김씨, 도강 김씨, 동래 김씨, 등주 김씨, 무장 김씨, 문화 김씨, 밀양 김씨, 백천 김씨, 보령 김씨, 부안 김씨, 삼척 김씨, 선산 김씨, 수원 김씨, 순천 김씨, 신천 김씨, 안산 김씨, 안성 김씨, 야성 김씨, 알산 김씨, 양주 김씨, 연안 김씨, 영광 김씨, 영동 김씨, 영양 김씨, 연천 김씨, 용궁 김씨, 울산 김씨, 월성 김씨, 의성 김씨, 전주 김씨, 진천 김씨, 창원 김씨, 청주 김씨, 춘양 김씨, 좌평 김씨, 풍산 김씨, 해주 김씨, 화순 김씨 등이 번창하고 있다.

 

羅 씨

 

나씨는 문헌에 46본으로 되어 있으나 금성 나씨와 나주 나씨를 제외한 44개본에 대해서는 그 후예들이 크게 번창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성 나씨는 나충례를 시조로, 나주 나씨는 나부를 시조로 하여 성씨를 이어가고 있다.

 

羅 - 금성 나씨

 

금성 나씨는 본래 중국 축용 후예로, 주공이 한 나라 고조에게 공을 세워 예장군이 되었다.

그때부터 예장 나씨가 되었다가 당나라 태종 때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데 반대하고 고구려로 망명해 나주에 정착한 뒤 시조가 되었다.

그 뒤 신라 때 좌승상 벼슬에 올랐고, 효공왕 때 나주사손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자료가 없어져 한 동안 기록이 없어졌다가 고려 초기 삼한벽상 일등공신인 나충례를 중시조로 다시 금성 나씨의 계통을 잡았다.

 

羅 - 나주 나씨

 

본래 중국 백익의 후예로, 우리 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주나라 때 대나씨가 되었으며, 성와 때 국가에 공훈을 세워 나주 땅에 봉해짐으로써 나주 나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뒤 굴씨에게 밀려 예장 나씨가 되었다가 당 태종 때 수선관을 지낸 나부가 우리 나라에 와 나주에 살면서 자손들을 번창시켰다.

후손들이 나부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나주로 정하였다.

또 한동안 기록이 없어져 나득규를 중시조로 하여 계보를 이어왔으며 지금 38대에 이르고 있다.

 

南 씨

 

남씨 본으로는 고성 남씨, 영양 남씨, 의령 남씨의 3본이 있다.

 

南 - 고성 남씨

 

본래 시조는 남민이나, 후손인 남광보를 중시조로 삼아 계보를 이어간다.

남민의 후예로 홍보, 군보, 광보의 3형제가 고려 충렬왕 때 모두 나라에 공을 세웠다.

홍보는 영양군, 군보는 의령군, 광보는 고성군에 봉해져 3형제가 모두 3본의 중시조가 되었다.

고성 남씨의 후손들은 고성부원군인 광보를 중시조로 하고 고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 뒤로 50대손까지 이르렀다.

 

南 - 영양 남씨

 

남씨 시조의 본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충이었는데, 중국에서 일본을 다녀오다가 태풍을 만났으나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영덕군 축산도에 상륙하였다.

그 뒤 신라에 귀화하였는데, 임금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그의 성을 남씨로 고쳐주고, 또한 영양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南 - 의령 남씨

 

의령 남씨의 중시조인 군보는 시조 남민의 후손으로 고려 충렬왕 때 홍보, 관보와 함께 3형제로 나라에 공을 세운 뒤 의령군에 봉해져 의령 남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후손들은 밀직 부사인 남군보를 중시조로 정하고, 의령을 본관을 삼아 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 후손이 50대에 이르렀다.

 

南宮 - 함열 남궁씨

 

남궁씨는 본래 중국 주 나라 문왕 때 남궁자의 후예가 우리 나라로 들어와 시조가 된 성씨이다.

991년 고려 성종 때 남궁원청이 대장군으로서 여진족을 백두산 이북까지 쫓아내는 공을 세운 뒤 함열백에 봉해져 남궁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뒤 계보가 이어지지 않다가 그의 후손인 독회를 중시조로 다시 이어가기 시작하였다.

 

乃 - 개성 내씨

 

본래 개성 왕씨로 고려 왕족이었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뒤, 왕족들을 모조리 잡아죽일 때 살아남기 위해 왕씨를 버리고 임진강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그 때에 검문하는 포졸들이 "너는 성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겁에 질려 당황한 끝에 "네?" 라고 반문했더니, 그 포졸이 성씨가 내씨인 줄 알고 그대로 적어 내씨가 되었다.

개성 내씨는 전국에 50세대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盧 씨

 

노씨는 문헌에 137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10여본이 번창하였을 뿐 나머지 본관은 미세한 형편이다.

노씨 성도 본래 주나라 건국 공신인 강태공의 후예가 제나라 노현에 봉해지면서 노씨가 생겨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 나라 노씨는 중국 범양 사람 노수가 755년 안록산의 난을 피해 아들 9형제를 데리고 들어와 동래 땅에서 살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 9형제가 차례로 광산, 교하, 풍천, 장연, 안동, 안강, 연일, 평양, 곡산으로 가서 노씨의 본관을 삼고 중시조가 되었다.

 

盧 - 곡산 노씨

 

노수의 막내 아들 원이 신라 때 공을 세우고 곡산백이 되면서 본관을 정하였다.

그 뒤 원의 후손인 조가 고려 충숙왕 때 영동전판도서판사 벼슬을 지내고 문경 시호를 받았는데, 후손들이 그를 제1세조로 하여 계승하고 있다.

 

盧 - 광산 노씨

 

시조 노수의 아홉 아들 중 큰 아들인 노해가 신라 때 벼슬을 얻어 광산백이 되면서 본관을 광산으로 정하였다.

노해의 여덟 동생들도 교하 노씨, 풍천 노씨, 장연 노씨, 안동 노씨, 안강 노씨, 연일 노씨, 평양 노씨, 곡산 노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이 밖에도 만경 노씨, 해주 노씨가 같은 글자의 성씨이나 시조가 다르다.

노수의 후예가 만경군이 되면서 만경 노씨가 생겨났다. 또 그의 후예가 해주에 살면서 본관이 해주로 된 노씨도 있다.

 

魯 씨

 

문헌에는 64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강화, 광주, 함평, 밀양 노씨를 제외하면 별로 그 힘이 약하다.

이 성씨도 중국 주나라 때 백리가 노에 봉해지면서 생겨난 성씨이다.

 

魯 - 강화 노씨

 

고려 명종 때 이부상서 벼슬을 지낸 노용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주나라 노용신의 원손으로 고려 고종 때 강화 현령으로 있으면서 몽고군 침략 방어와 고려의 강화 천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강화에 정착하면서 본관을 강화로 삼았다.

 

魯 - 광주 노씨

 

시조는 필상. 광주에 머물면서 통정대부 벼슬을 지냈다.

그의 후손들이 광주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본관을 광주로 정하였다.

 

魯 - 밀양 노씨

 

시조 조중연의 후손인 노형권이 공민왕 때 공조판서라는 벼슬 자리에 있으면서 홍건적을 토별한 공로로 밀양군이 되어 중시조가 되었다.

 

魯 - 함평 노씨

 

시조는 목. 고려 인조 때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문하시중 벼슬에 오르고 함평군에 봉해져 본관을 함평으로 삼았다.

 

魯 - 개성 노씨

 

중국 성씨로 언제부터 우리 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시조는 노은경으로 고려 공민왕 때 노국 공주를 따라 왔다.

 

雷 - 교동 뇌씨

 

교동은 강화도에 딸린 섬으로 연산군이 귀양살이를 하던 곳이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옛날 귀양갔던 선비의 후예가 시조가 된 것 같다.

본관은 교동이나 시조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전국에 50여 명이 있다.

 

段, 單, 端 씨

 

단씨는 강음 단씨, 연안 단씨, 한산 단씨 등이 있으며, 전국에 350여명이 살고 있다.

 

段 - 강음 단씨

 

시조는 회상, 본래 중국 강음 땅에서 살았다.

1598년 선조 때 명 나라의 구원병으로 처음 우리 나라에 들어와 큰 공을 세우고 그대로 귀화하여 단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본관은 그의 고향인 중국 강음을 그대로 쓰고 있다.

 

段 - 연안 단씨

 

시조는 단유인. 조선 시대 현감을 지냈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백제 때 유학자 단양이 오경 박사로 있었다는 기록만 있다.

 

單 - 연안 단씨

 

우리 나라는 물론 중국에도 없던 성씨로 밝혀져 화제가 된 성씨이다.

연안을 본관으로 한 단(心 + 單)씨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잘못 기재된 것으로 보이는데, 경기도 부천에 단 1가구가 살고 있다.

 

端 - 한산 단씨

 

본관은 한산이나 시조는 알 수 없다.

옛날 문헌에는 나타나 있는데, 국세청 조사 결과 부산 동래에 단 1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관은 역시 한산 한 곳 뿐이다.

 

唐 - 밀양 당씨

 

시조는 역시 중국 사람. 송 나라 때 승상각의 6대손이 시조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에는 원 나라 말기에 귀화한 승상각이 고려 때 사평순위평사 벼슬을 지내고 조선 건국에 개국 공신이 되어 밀양백이 되면서 본관을 밀양으로 삼았다.

 

大 - 밀양 대씨

 

중국 당나라 때 장군 중상이 시조이고, 그의 아들 대조영이 발해를 세워 태조가 되었다.

그의 17대손인 대탁이 자녀들을 데리고 밀양으로 내려와 본관을 정하였다.

 

都 씨

 

도씨는 문헌에 15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서제, 성주, 전주의 3본이 번창하였고, 나머지 본은 미세하다.

 

都 - 서제 도씨

 

서제 도씨는 문헌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경북 달성에 25세대가 살고 있다.

그러나 시조는 알려져 있지 않다.

 

都 - 성주 도씨

 

시조는 도순. 중국 한 나라 무제 때 도시가 원 시조이며, 고구려 유리왕 때 도조가 공헌했고 백제 때는 도미가 정승을 지냈으며 고려 때는 도진이 정승을 지냈다.

 

都 - 전주 도씨

 

국세청 조사로 강원도 홍천 땅에 25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본관이 전주라는 것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다.

그 밖에도 고성 도(道)씨, 풍양 도(陶)씨가 있다.

 

獨孤 - 남원 독고씨

 

중국 하남에서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 와 고려 충숙왕 때 공주를 모신 독고신이 시조이다.

 

董 - 광천 동씨

 

시조 동중서는 한나라 무왕 때의 학자로 그의 앞을 지날 때는 누구나 '하마'라고 하여 유명해진 사람이다.

그의 후손 승선이 조선 태종 때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이부상서 벼슬을 지냈다.

 

杜 - 두릉 두씨

 

시조 경령은 중국 송나라 두릉 사람. 송 태종 때 진종을 받들려다가 실패하여 쫓겨나자 아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으나 고려 목종이 구출하여 벼슬을 내렸다.

그 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두릉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東方 - 진주 동방씨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동방숙이 시조.

본래 동방씨는 중국 고대의 동방복의가 시조이다.

 

柳 씨

 

유씨는 문헌에 131본이나 되는데, 문화 유씨와 진주 유씨, 고흥 유씨가 번창했고 다른 유씨는 정확한 기록이 별로 없다.

문화 유씨는 연안 차씨와 성씨는 달라도 혈통이 같다 하여 같은 성씨처럼 지낸다. 오늘날의 유씨와 차씨, 두 성씨는 같은 형제에서 갈라졌기 때문이다.

유씨는 교육부에 류씨로 성씨 표기 신청을 내 한글 표기법과 관계없이 류씨로 쓰고 있다.

 

柳 - 고흥 류씨

 

시조는 영. 신라의 귀족으로 신라 말기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고흥으로 내려갔다가 고려가 세워지자, 효장을 지냈다.

 

柳 - 문화 류씨

 

시조는 류차달. 본래 차무일의 38대손인데, 왕의 삼촌인 언승이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이 되자 신하의 도리를 찾자며 아들 공숙과 함께 헌덕왕을 시해하려다가 탄로가 나서 체포령이 내려지므로, 문화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성씨를 할머니 성씨인 양(楊)씨를 본따 류(柳)로 고쳤다.

그 뒤 왕건이 고려 개국 당시 견훤을 공격할 때 군량미가 부족했는데 유차달의 아들들이 이를 도와주었다.

뒤에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공을 높이 치하하는 자리에서 성씨를 바꾼 것을 알고 큰아들에게는 본관을 연안 차씨로, 둘째 아들에게는 문화 류씨로 제성을 되찾게 해주었다.

 

柳 - 진주 류씨

 

시조는 정. 본래 진주에서 터전을 잡고 살던 씨족인데, 고려 때 좌우위상장군에 이르러 진강부원군이 되자, 후손들이 진주를 본관으로 정하였다.

문화 류씨에게서 갈라졌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분명한 기록은 없다.

 

馬 - 목천 마씨

 

시조 마려는 온조왕의 보좌관으로서 온조왕을 따라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위례성에 도착해 백제를 세웠다.

그의 형 마신은 고구려에 남아서 동명왕을 보필하였으니 형제가 모두 임금을 모신 사람들이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여러 대에 걸쳐 계통을 밝혀놓은 기록이 없어 중단되었다가,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망한 뒤에 마육황을 중시조로 다시 계통을 찾았다.

그 뒤 고려 정종 때 8대손인 순흥이 벼슬하여 목천군에 봉해지면서 목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순홍의 아들 점중에게 현과 혁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현은 목천 마씨의 1세가 되고 혁은 장흥 마씨의 1세가 되어 본이 둘로 갈라졌다.

 

麻 - 영평 마씨

 

영평 마씨와 열산 마씨의 2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두 본 다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고려를 세울 때 공을 세운 개국 공신 마난이 영광을 본으로 삼고 시조가 되었다.

열산 마씨는 조선 선조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 명 나라 제독으로 우리 나라에 왔던 마관 장군의 증손자 마순상이 귀화하여 열산을 본으로 삼고 시조가 되었다.

 

萬 - 강화 만씨

 

신라 진평왕 때 대나마 벼슬을 지낸 만세, 경덕왕 때 상대등 벼슬에 오른 만종, 고려 태조 때 노예 해방을 외쳤던 만적 등의 이름이 있으나 분명한 기록은 없다.

다만 중국 명 나라의 만세덕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梅 - 충주 매씨

 

중국 산동성으로부터 와서 매씨로 성을 얻은 사람이 충주에 살면서 충주를 본관으로 하고 매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중종 때 아버지 병환에 지극한 효성을 보여 나중에 정문이 세워진 매한손이 있다.

 

孟 - 신창 맹씨

 

신창 맹씨는 중국의 대학자 맹자의 후손이다.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맹자의 50대손인 맹우현이 고려 원종 때 국자감을 지냈고, 그의 셋째 아들 맹리가 시중을 지냈으며 신창백에 봉해져 신창을 본관으로 삼고 시조가 되었다.

맹리의 제사는 해마다 10월 1일 신창에서 지낸다.

 

明 - 서촉 명씨

 

시조 옥진은 중국 원 나라 말기 촉 땅에 살다가 1363년 대하국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다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새롭게 세워진 명 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1372년 고려로 건너와 귀화하여 왕을 돕다가 조선이 세워진 뒤 화촉군에 봉해졌다.

본관은 그의 고향으로 삼았다.

 

牟 - 함평 모씨

 

시조 모경은 중국 송 나라 흠종 때 어부상서를 지내고 대사마 대장군이 되었다.

고려 17대 인종 4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난을 가라앉히고 일등 공신이 되었으나 귀국 길이 막혀 고려에 머물다가 평장사 벼슬을 맡아 함평군에 봉하여졌다.

그의 후손들이 함평을 본관으로 삼아 계통을 이어간다.

 

睦 - 사천 목씨

 

시조 목효기는 고려 시대 때 광장동정 벼슬을 지냈으며, 그 조상 때부터 사천 땅에서 살고 있었다.

목효기는 형제간의 우애가 얼마나 다정하였던지 성을 화목하다는 뜻의 목씨라고 정하고 사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33대까지 내려오면서 항렬로는 희, 재, 호, 용, 태, 순, 병, 식으로 정해 계통을 이어간다.

 

文 씨

 

문씨는 문헌에 131본으로 되어 있으나 남평 문씨, 감천 문씨, 정선 문씨가 크게 번창하였을 뿐 다른 문씨는 번성하지 못하였다.

 

文 - 감천 문씨

 

본래 경주 김씨였으나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왕으로부터 문씨 성을 하사받아 문씨가 되었다.

그러나 문씨의 시조는 문원길로 되어 있다.

중국에 들어가 이름을 떨쳤다는 사람은 문원길보다 훨씬 앞 시대의 사람으로 여겨진다.

 

文 - 남평 문씨

 

신라 20대 자비왕 때의 사람인 문다성이 시조로 되어 있다.

문다성은 재미있는 출생 전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신라 자비왕 15년인 472년 2월 남평현 동쪽에서 자색의 광채가 빛나자 왕이 신하를 시켜 가보게 하였더니 큰 바위 위에 커다란 돌 상자가 있었다. 이상히 여긴 신하가 돌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 아기가 있었다. 그리고 '文'이라는 글자가 씌어진 쪽지가 있었다. 그래서 문씨로 성을 붙여주었다.

다성은 그 뒤 지증왕 때 중시아랑 벼슬을 하고 진흥왕 때 대국사를, 진지왕 때 대아랑 대국사가 되는 등 세 임금 밑에서 벼슬을 하고 남평백이 되었다.

 

文 - 정선 문씨

 

정선 문씨의 시조는 문임간으로 본래 전씨였으나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임금으로부터 문씨 성을 받았다.

 

閔 - 여흥 민씨

 

민씨는 본래 공자의 제자 중 유명한 10철 가운데 한 사람인 민자건의 후예이다.

자건의 후손이 고려 때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가 여흥에 정착하여 여흥을 본관으로 삼고 민씨 시조가 되었다.

민씨는 단 하나의 본관을 가진 성씨로, 고려 충숙왕 때에 대제학을 지낸 민적을 시조로 하는 문순공파와 수정승을 지낸 학자 민지를 시조로 하는 문인공파의 두 파로 나뉘어져 있다.

민씨는 우리 역사상 세 차례 크게 나타났으니 첫 번째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이고, 두 번째는 조선 숙종에서 영조에 이르는 100년간이며, 세 번째는 조선 말기 고종 때이다.

이 밖에도 광녕 묵(墨)씨와 요동 묵씨, 광주, 공산, 서산, 김해 모(毛)씨, 인천, 송림, 일동 문(門)씨, 재령 미(米)씨 등이 있으나 그 시조나 후예들의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朴 씨

 

박씨는 우리 나라 성씨 가운데 김씨, 이씨 다음으로 많다.

문헌에 보면 314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강릉 박씨를 비롯해서 44본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살며 나머지 270본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박씨는 모두 신라 박혁거세를 시조로 한 후계 혈손이다.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신화로 전해진다. 혁거세가 신라를 세우고 첫 임금이 된 이래 그의 아들이 2대 남해왕이 되고, 남해왕의 아들 유리왕이 3대를 지냈으며, 4대왕 석탈해 왕은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고 5대 파사왕은 그의 아들이다.

이렇게 하여 8대 임금까지가 혁거세의 후손으로 이어졌으며,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에 이르기까지 10명이 임금을 지냈다.

 

朴 - 강릉 박씨

 

혁거세의 24대손인 박순을 중시조로 강릉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고려 명종 때 박순이 과거에 급제하여 남경 유수 등 벼슬을 지내고 계림군에 봉해졌으나 관직을 떠나 강릉에 내려가 인재를 양성하였다.

 

朴 - 고령 박씨

 

박혁거세의 29대손인 경명왕의 아들 박언성을 중시조로 하였다.

본래 고양과 영천 두 지방을 본관으로 하다가 두 지명을 합쳐 고령으로 본관을 삼았다.

고양 대군의 후손인 섬, 환, 연을 중심으로 한 세파로 다시 갈렸다.

 

朴 - 고성 박씨

 

박호를 중시조로, 고성을 본관으로 삼고 지금 33대에 이르렀다.

신라 박혁거세의 29대손 경명왕의 8아들 중 넷째인 죽성대군 언립의 1대손이 박호이다.

고려 고종 때 문하평장사로 있다가 몽고군이 침입하자 구주에서 싸워 큰 공을 세우고 고성백이 되어 중시조가 되었다.

 

朴 - 광주 박씨

 

고려 때 전서를 지낸 명훈을 중시조로 광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朴 - 군위 박씨

 

신라 경명왕의 16대손인 박헌을 중시조로, 군위를 본관으로 삼았다.

박헌은 이 태조를 도와 조선을 세우는데 큰 공을 쌓고 가선대부 공조전서가 되었다.

 

朴 - 구산 박씨

 

고려 말기의 정승 박천을 중시조로 구산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박천은 조정에서 공을 쌓고 구산군에 봉해져 구산에서 후손들을 번창시켰다.

 

朴 - 나주 박씨

 

시조는 박병묵. 시호는 충무. 고려 때 평장사를 지냈고 나주로 옮긴 뒤 후계의 기록이 끊겼다.

조선 왕조 때 나주 목사가 된 박치생을 중시조로 하여 성씨의 계통을 이었다.

 

朴 - 밀양 박씨

 

박씨의 원조인 신라 박혁거세의 29대손인 경명왕은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모두가 본관을 정해 중시조가 되었다.

경명왕의 큰아들 언침이 밀양대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언침을 중시조로 하고 본관을 밀양으로 정하였다.

따라서 밀양 박씨가 경명왕의 아홉 아들이 본관을 정하고 갈라진 박씨 가운데 제일 큰집인 종가가 되어 있다.

그러다가 16대손 현을 중시조로 하여 다시 12개파로 나뉘어졌고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또다시 여러 파로 갈라졌다.

이 밖에도 면천 박씨, 무안 박씨, 문의 박씨, 문주 박씨, 번남 박씨, 비안 박씨, 사천 박씨, 삼척 박씨, 상산 박씨, 상주 박씨, 선산 박씨, 순창 박씨, 순천 박씨, 여주 박씨, 영암 박씨, 영해 박씨, 운봉 박씨, 울산 박씨, 월성 박씨, 경주 박씨, 은풍 박씨, 음성 박씨, 의홍 박씨, 인제 박씨, 전주 박씨, 죽산 박씨, 진원 박씨, 창원 박씨, 춘천 박씨, 충주 박씨, 태안 박씨, 태인 박씨, 평산 박씨, 평주 박씨, 평택 박씨, 함양 박씨 등이 전국 곳곳에서 살고 있다. 다만 박씨의 본은 이렇게 많지만 모두가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潘 - 거세 반씨

 

반씨는 중국 주 나라 문왕의 넷째 아들 반계손이 번 땅에 봉해져 아버지로부터 하사받은 성씨로 알려지고 있다.

거제 반씨는 고려 때 사람인 반부가 세조로 되어 있다.

반부는 1265년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는데, 원 나라 임금이 그의 뛰어난 글재주와 훌륭한 장군의 솜씨에 감탄한 나머지 신하로 삼고자 갖은 유혹을 다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원 나라 세조는 이에 감탄하여 반부를 고려로 돌려 보냈다. 고려 충렬왕도 반부의 사람됨을 크게 칭찬하며 거제 부원군으로 임명하였는데, 그 때 관리의 성을 거제 반씨라고 정해주었다.

반부는 일본을 두 차례 다녀왔고, 고려-몽고 연합군을 조직하여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김방경을 따라 삼별초를 토벌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方 - 온양 방씨

 

염제 신농씨의 13대손인 뢰가 중국 하남 방산 지방에서 살다가 방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뢰의 134대손인 지는 당 나라에서 한림학사로서 황제의 명에 따라 669년 신라 문무왕 때 신라로 와 설총과 함께 백성들을 일깨우며 빛을 밝힌 동방 유학의 한 사람이다.

그 뒤 상주로 옮겨 상주를 본관으로 삼다가 운이 온양군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온양으로 옮겼다.

시조 지로부터 운까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운을 다시 제1대로 정하여 지금 50대손까지 이르렀다. 방씨는 상주, 신창, 군위 방씨가 있으나 모두 온양으로 합본되어 내려오고 있다.

이 밖에도 20본으로 나타나 있는 방(房)씨가 있는데, 이 방씨 중에는 남양 방씨, 수원 방씨가 조금 번창했을 뿐이다.

또 개성 방(龐)씨와 태원방씨가 있으나 모두 중국 사람의 후예로 여겨진다.

 

裵 - 경주 배씨

 

배씨의 시조는 신라가 세워지기 전에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김산가리촌 촌장 지타라는 사람이다.

다른 5부 촌장과 함께 양산 암라 정방림 사이에서 수양한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 임금으로 추대하고 신라 개국 일등 공신이 되어 총재대사가 된 뒤, 유리왕 9년에 김산사리촌을 한지부로 고치고 배씨라는 성을 임금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연대가 오래되고 초기의 기록이 분명하지 않아, 그 뒤에 후손인 배현경을 중시조로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본관은 처음에 조상의 고향인 한지부였는데, 한지부가 경주로 이름이 바뀌면서 본관도 자연히 경주로 바뀌어졌다.

중시조인 배현경은 담력이 좋고, 용맹과 지모가 뛰어나서 장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白 - 수원 백씨

 

시조는 우경, 시호는 문경인데, 본래 중국 소주 사람 황제 헌원의 후손이다.

780년에 중국에서 우리 나라로 들어와 신라에서 벼슬을 얻어 좌복사공대사도라는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기록이 이어지지 않아 그 후손으로 경명왕 때 중랑장을 지낸 백창직을 중시조로 삼았다.

그리고 중시조의 증손인 백휘가 고려 때 대나마 대장군으로 수원군이 되자 수원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한편 중시조의 9대손인 백천장이 중국에서 이부상서를 거쳐 우승상으로 수원백이 되어 수원을 본관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밖에도 염포 백씨, 부여 백씨, 대흥 백씨가 있으나 모두 수원 백씨에서 갈라져 나간 후손들이다.

 

范 - 금성 범씨

 

시조는 승조. 원 나라의 예부시랑으로 노국 공주를 모셨으며, 우리 나라에 와서 귀화하여 금성 범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유수가 문하시랑 벼슬자리에 있을 때 여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금성군이 되었다 하여 금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邊 - 변씨

 

변씨는 문헌에 67본으로 되어 있으나, 변안열을 시조로 한 원주 변씨와 변경을 시조로 한 장연 변씨, 그리고 변여를 시조로 한 황주 변씨가 중심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원주 변씨가 거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邊 - 원주 변씨

 

시조 변안열은 송 나라 말기 고려로 귀화하여 상장군으로 태천백에 봉해졌다. 그러나 변안열은 황주 변씨 시조인 변여의 후손이다.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조상이 중국 심양으로 들어가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351년 수장으로 노국 공주를 모신 공로가 인정되어 원주 부원군에 봉해졌다.

원주 땅을 다스리면서 그 곳에 머물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원주를 본관으로 정하였다.

 

邊 - 장연 변씨

 

시조는 백경. 신라 때 아손을 지냈고, 고려 때 문하시중 벼슬을 지냈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그의 증손인 변유녕이 고려 인종 때 연성 부원군을 지냈고, 후손 백영인은 판전의사를 지냈다.

 

邊 - 황주 변씨

 

시조는 변여. 중국 옹서 사람으로 송 나라가 망하자 우리 나라로 망명하여 황해도 황주에서 처음으로 정착하여 자리를 잡았다.

고려 고종 때 상장군으로 태천백에 봉해졌는데, 후손들이 그가 살던 황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邊 - 초계 변씨

 

시조는 변정실. 주 나라 문왕의 제6대손으로 그 뒤에 노라라 변읍에 봉해졌으므로 변씨가 되었다.

그의 후손인 변원이 신라에 들어왔으나, 임금과 뜻이 통할 수 없어 외롭게 지내다가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지냈고, 초계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정하였다.

이와는 다르지만 밀양에 살다가 세상을 떠난 고려 때 국자진사를 지낸 변고적이 밀양에서 살았다 하여 밀양 변씨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卜 - 면천 복씨

 

시조는 복지겸. 태봉의 마군 장군으로 있다가 궁예가 폭군이 되자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떠받들어 고려를 세우는데 1등 공신이 된 대장군이다.

본래는 당 나라 때 학사로 있었으나 난리가 일어나자 신라로 피신하였다가 귀화하였다.

충남 당진군 면천에 정착한 그는 서해안으로 침범하는 해적들을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奉 씨

 

봉씨는 문헌에 19본으로 되어 있으나, 봉우를시조로 한 하음 봉씨, 시조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 강화 봉씨와 경주 봉씨가 있을 뿐 그 외의 봉씨는 기록이 별로 없다.

 

奉 - 강화 봉씨

 

시조는 정확하지 안흥며 강화 지방의 하음 봉씨가 갈라져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강화 봉씨 이외에도 광주 봉씨, 안산 봉씨 등 18본이 있는데, 모두 시조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奉 - 하음 봉씨

 

시조는 봉우. 고려 인종 때 위위소랑, 정당 문학, 좌복사 등으로 공을 세운 봉우가 하음백에 봉해져 본관이 되었다.

고려 예종 때인 1107년 한 노파가 강화의 하음면 바닷가에 큰 함지가 떠 있는 것을 보고 건져내어 보니 그 속에 범상하지 않은 듯한 아기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 아기를 임금에게 바쳤더니 임금이 이상하게 여기며 궁궐에서 길러 봉우라고 이름붙였다.

시조의 묘소는 강화 마니산에 있다.

 

夫 - 제주 부씨

 

시조 부을라는 양을라, 고을라와 함께 제주도 한라산 북쪽 기슭의 모홍혈에서 솟아오른 삼신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들은 동쪽으로 떠내려오는 상자를 건져 세 미녀와 오곡의 씨앗과 망아지, 송아지를 얻었다.

상자에서 나온 세 미녀와 결혼하여 제주 일도, 이도, 삼도의 세 곳으로 나뉘어 살았다.

그로부터 부씨의 시초가 이루어졌으나, 기록이 한동안 없어 대를 이어 나가지 못하다가 부득시를 중시조로 하고, 본관을 제주로 하여 부씨 가문을 이어오고 있다.

이 밖에도 용서 비(丕)씨, 빈(彬)씨, 빈(賓)씨, 빙(氷)씨 등이 있으나 중국인을 시조로 우리 나라에 귀화한 사람들을 중시조로 여기지만 분명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다.

방씨는 경주를 본관으로 빙여경을 시조로 한 기록이 있으나 그 기록도 분명하지 못하다.

 

史 씨

 

문헌에는 16본으로 되어 있으나 사요를 중시조로 한 청주 사씨와, 시조가 분명하지 않은 거창 사씨가 알려져 있다.

 

史 - 거창 사씨

 

우리 나라에 오래 전부터 살고 있던 토착 성씨로 고려 말기에 명 나라로부터 귀화한 청주 사씨와 구별된다.

옛날 문헌에는 거창 사씨만 있었으나, 시조를 알 수 없어서 청주 사씨와 구별되기도 한다.

원래 사씨는 중국 성으로 주 나라 때 사일이라는 벼슬이 있었는데, 그 벼슬에 있던 사람이 사씨로 성을 삼았다고 전해진다.

역사에 나타난 인물을 보면, 고려 예종 때 이부상서를 지낸 사영, 명종 때 좌복사 참지정사를 지낸 사정유, 고종 때 삼지정사를 지낸 사홍기, 병부상서를 지낸 사광필, 안무사를 지낸 사정기 등이 있다.

이들 사람들이 청주 사씨가 본관을 정하기 이전에 벼슬을 하였으므로 거창 사씨로 짐작이 된다.

이들이 지낸 벼슬도 그 당시로서는 지체가 높은 상당한 벼슬이었다.

 

史 - 청주 사씨

 

시조는 사요. 중국 산동성 사람으로 명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 공신이 되었다.

예부상서에 오르자 다른 사람들이 모함하여 고려 공민왕 때 우리 나라로 망명하였고, 명 나라 태조의 조서로 파주에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후손들이 사씨의 발상지인 중국 산동성의 청주를 그리워하며 본관을 청주로 정하고 대를 이어왔다.

지금 후손은 38대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본관과 시조가 분명하지 않은 사(舍)씨, 사(謝)씨가 있으나, 두 서 모두 합하여 전국에 다섯 가구 뿐이다.

 

사공(司空) - 효령 사공씨

 

사공씨는 진 나라 때 가행이라는 사람이 사공이라는 벼슬을 지내고 그 이름을 성으로 받았다는 데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뒤 후손인 사공동가 당나라 애제 임금 때 한림 학사로 예부상서 벼슬에 올랐는데, 신라 효공왕 때 동료 학사 7명과 함께 우리 나라로 귀화하여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이나 문헌이 없어서 계통을 이어오지 못하다가 그의 후손인 중상이 고려 충숙왕 때 벼슬을 하여 효령군에 오르자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삼고 본관을 효령이라고 정하였다.

 

尙 - 목천 상씨

 

시조는 국진. 원래 백제 유민으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이에 따르지 않고 당시 목천현 상왕산(지금 확성산) 아래 모여 살면서 백제를 다시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미워하여 성을 빼앗았다.

그 뒤 국진의 아들 득유가 문종 14년 때인 1060년에 최충이 설치한 시빙제의 학사가 되었다.

그때야 비로소 본래의 성을 되찾았다.

후손들은 선조들이 살아온 목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지금 38대에 이르고 있다.

 

徐 씨

 

문헌에 나타나 있는 서씨는 165본이나 된다. 그러나 11본은 분명하지만, 나머지 서씨는 분명하지 않다.

서씨는 본래 이천 서씨가 원조로 알려져 있고 그 밖의 서씨들은 이천 서씨의 후손인 것으로 짐작이 될 뿐 정확한 기록은 없다.

전설에 따르면 먼 옛날 기자 조선 때 마지막 임금인 기준이 위만에게 쫓기어 지금의 이천 땅 서아성으로 내려와 자리잡고 살기 시작한 것이 서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성씨 가운데 기자에 근본을 두고 있는 성씨로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행주 기씨 등이 있다.

서씨의 바탕은 이천 서씨이나,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나온 집안은 대구 서씨이다.

서씨 가운데 삼대 정승과 삼대 대제학을 지낸 집안은 대구 서씨를 비롯하여 청풍 심씨, 청송 김씨가 있을 뿐이며, 그 가운데서 6대에 걸쳐 삼정승 삼대제학을 낸 집안은 대구 서씨 하나 뿐이다.

 

徐 - 남양 서씨

 

시조는 중국인 서간. 8학사의 한 사람으로서 정관연간 때(627-647년) 우리 나라에 와서 남양 땅에 정착해 살다가 태서 벼슬을 얻어 남양군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 후후가 고려 현종 때 좌정승으로 계단의 침입을 물리친 공으로 남양군에 다시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남양으로 하였다. 지금 42대 손까지 내려왔다.

 

徐 - 남평 서씨

 

시조는 호. 신일의 후손으로 남평에 자리를 잡고, 그의 손자인 지는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종 때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천 서씨에서 갈라져 나와 호와 지둥 선대들이 살던 남평을 본관으로 하여 뿌리를 이루었다. 그러니까 남평 서씨의 큰 집은 이천 서씨집인 셈이 된다.

 

徐 - 달성 서씨

 

시조는 진. 고려 봉익대부, 판도판서 등을 지낸 공이 있어 달성군에 봉해졌고, 달성을 다스리도록 임금의 명을 받았다.

그 곳에서 집안의 뿌리를 내리고 자손들이 번창하자, 후손들이 달성을 본관으로 삼고 대를 이어오기 시작하였다.

지금 30대손까지 이르렀다.

 

徐 - 당성 서씨

 

시조는 득부. 본래 남양에 토착한 남양 서씨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13대손이며 중종 때 유명한 경덕이 벼슬을 하자, 후손들이 득부를 중시조로 하고 당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徐 - 대구 서씨

 

시조는 한. 고려 시대 때 조봉대부군기소윤을 지냈으며, 그 뒤 6대까지는 기록이 없어 계통을 알 수 없다.

후손으로 서거정 등 많은 인물이 나와 명문 씨족의 하나로 꼽히자, 선조들이 뿌리를 내리고 벼슬을 한 대구를 본관으로 삼았다. 지금 42대까지 번창하고 있다.

 

徐 - 부여 서씨

 

시조는 여륭. 백제 의자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여륭은 본래 성이 부여씨였다고 한다.

백제가 망하자 당 나라로 망명하였는데, 당 나라 고종이 여(餘)자를 서(徐)자로 고쳐 농진도층 벼슬을 주었다.

그 뒤 다시 우리 나라로 돌아와 살았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1세조 신밀의 6대손인 존은 고려에서 병부상서를 지냈고 태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본래의 성인 부여를 본관으로 삼고 대를 이어 지금 43대에 이르렀다.

 

徐 - 연산 서씨

 

시조는 준영. 신일의 후손으로 여러 대를 이어 오면서 연산에서 뿌리를 내렸다.

준영의 아들 서보가 있었으나 기록이 없자 후손들이 의민을 1세조로 삼아 이천 서씨에게 갈라져 나와 연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徐 - 이천 서씨

 

시조는 기준. 기자의 42대손인 기준이 이천 서하성에 머물면서 그 후손이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전설에는 여수기가 예 나라 추장으로 아홉 아들으 fendjTsmsep, rm 아들들이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들이 백성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여 백성들이 나와 너를 하나로 묶는다며 서(徐)자 성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또 어떤 전설에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여륭이 전쟁에서 지고 당 나라로 망명하였을 때 당 나라에서 여륭의 여(餘)자를 서(徐)자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기준의 후손인 신일은 신라 효공왕 때 벼슬을 지내다가 나라의 운명이 쇠퇴하였음을 깨닫고 의천 효양산 기슭에 복성당을 짓고 들어가 세상 출입을 하지 않으면서 지내, 처사라는 별명이 붙은 채 일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시조가 머물러 살던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가장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묘소는 이천 효양산에 있으며 해마다 10월 1일 제사를 모신다.

 

徐 -장성 서씨

 

이천 서씨의 시조 신일의 11대손인 서릉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서릉은 고려 고종 때 시중 벼슬을 지내고 장성으로 내려가 장성 땅을 다스렸다.

그래서 후손들이 이천 서씨에서 본관을 장성으로 고치고 대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徐 - 절강 서씨

 

시조는 해룡. 중국 절강성 사람인 해룡은 중손 학이 도총관으로 선조 30년인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우리 나라에 와서 난을 평정하고 공을 세운 뒤 성주 대동방에 정착하였다.

후손들이 시조의 고향을 그리며 중국 절강 땅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徐 - 평당 서씨

 

시조는 준방. 신일의 후소으로 고려 때 형부상서로 있으면서 나라에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큰 공을 세워 평당군에 봉하여 졌다.

그 때부터 후손들이 평당을 본관으로 삼았다.

 

石, 昔 씨

 

석씨는 石씨, 昔시, 碩씨의 세 가지 성씨가 있다.

石씨는 문헌에 85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충주(또는 홍주) 석씨, 해주 석씨가 알려져 있으며, 昔씨는 월성 석씨 단본이 있고, 碩씨는 단 1가구 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石 - 충주 석씨

 

시조는 석린. 고려 의종 때 랑장으로 있던 두경승과 함께 조위 총관을 평정한 공으로 삼장군이 되었고, 이어 서북병마사를 지냈다.

그 뒤 충주군에 봉해져 충주가 본관이 되었다.

그의 7대손 천을에 이르러 아들 둘이 있었는데 큰 아들 수명은 본관을 홍주라 하고 중시조가 되었으며, 작은 아들 여명은 본관을 충주라 하여 중시조가 되었다.

그러다가 후손들이 다시 충주 석씨로 본관을 통일하여 지금 31대에 이르렀다.

 

石 - 해주 석씨

 

시조는 석성. 중국 동명 사람으로 1559년에 진사 이과에 급제하고 명 나라 목종의 잘모승鱁 아뢰다가 벼슬에 쫓겨났으나 다시 등용되어 병무상서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돕는데 공이 컸으나, 심유경으로 인하여 감옥에 들어가는 운명이 되었다.

감옥에서 나와 다시 벼슬을 한 뒤 아들 담이 우리 나라에 와 해주에서 살면서 수양군에 봉해져 땅을 하사받고 본관을 해주로 삼았다.

 

昔 - 월성 석씨

 

시조는 석재흥. 신라 4대 임금인 석탈해니사금의 23대손이다.

석씨는 신라 56명의 임금 가운데 8명이 왕으로 즉위하였으니, 그 왕은 곧 석탈해, 벌휴황, 나해왕, 조세왕, 첨해왕, 유례왕, 기임왕, 흘해왕이다.

재홍은 고려 시대 시랑 벼슬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재홍을 중시조로 하고, 경주의 옛 이름인 월성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碩 씨

 

시조나 본관은 분명하지 않으나, 1960년 국세 조사 통계에 단 1명이 경기도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宣 - 보성 선씨

 

시조는 선윤지. 중국 노 나라 대부 선백의 후예로 명 나라 때 문연각 학사로서 1382년 고려 우왕 때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안염사가 되었다.

그 당시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오랑캐들을 내쫓고 민심을 바로 잡아 안정시켰으며, 유교의 양성과 인재 교육에도 힘썼다.

그 뒤 조선이 건국되었으나 고려에 대한 충성심과 의지를 지켜 보성에 눌러 앉아 인재를 양성하는데만 전념하였다.

그 후손들이 보성을 본관으로 하여 대를 이어오기 시작, 지금 30대에 이르렀다.

고려 말기 예의판서, 우문각, 대제학 등을 지냈고 조선이 건국되자 보성 백이산으로 내려온 선원지를 시조로 하는 계통도 있었으나, 같은 혈손이라 하나로 합쳤다.

 

先 씨

 

시조나 본관은 알 수 없는 성씨인데, 전국에 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鮮于 - 태원 선우씨

 

우리 나라 선우씨의 내력은 기자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자가 기자 조선을 세우고 그의 큰아들손이 2o 장혜왕으로 즉위하면서 동생인 증을 우산국에 봉하여 나라를 세우게 하였으므로 조선과 우산국에 있는 자손들을 이어주고자 조선의 선자와 우산국의 우자를 하나씩 따서 선우라는 성씨를 만들고 본관을 태원이라고 정하였다.

그 뒤 41대 왕인 애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피신하여 금산 땅에서 마한을 세웠는데, 이 나라도 10대 계왕에 이르러 백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 때 원왕에게 아들 3형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양이 용강 오석산으로 들어가 황용국을 세우고 왕이 되어 선우씨의 계통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들 한 명은 청주 한씨, 다른 아들은 행주 기씨가 되었다.

그 뒤 양의 10대손 병에 이르러 나라를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서민으로 태원 선우씨의 계통을 이어왔으나 문헌이나 기록이 없어 계통을 밝히지 못하고, 고려 문종 때 중서주서를 지낸 정을 1세로하여 계통이 내려오고 있다.

 

薛, (人 + 契) 씨

 

설씨는 薛씨가 문헌에 23본이 나타나 있으나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 2본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설(人 + 契)씨는 경주 설씨 단본으로 되어 있다.

 

薛 - 경주 설씨

 

순창 설씨와 같다. 시조 지덕의 후손으로 습비부가 경주에 속하므로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가 자승이 순화백에 봉해져 본관을 순창으로 하였으나, 종전대로 경주를 본관으로 이어가고 있다.

 

薛 - 순창 설씨

 

설씨의 시작은 신라가 세워지기 이전인 기원전 57년 6부 촌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명활산 고야 촌장 호진이 다른 5부 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여 개국 공신이 되었다.

그 뒤 유리왕 9년에 왕이 6촌을 부로 바꾸면서부터 촌장들에게 성을 내리게 되는데 고야촌 촌장에게는 설씨 성을 주었다.

그러다가 36대손 자승이 고려 인종 때 예부시랑으로 순창백에 봉해져 자승이 중시조가 되어 순창 설씨가 생겨났다.

그러나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계통이 설씨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

 

(人 + 契) - 경주 설씨

 

시조는 손. 경주 설씨의 선조는 회골 사람으로 설연 땅에 살면서 성씨를 설씨라고 하였다.

그 뒤 원 나라에 들어가 귀화하여 대대로 벼슬을 지낸 가문으로 태전 극직의 8대손이 경주 설씨의 시조 손이다.

손은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난 시인으로서 공민왕 7년 때인 1358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망명하자, 그를 부원후에 봉하고 부원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의 아들 장수가 경주로 옮겨가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成 - 창녕 성씨

 

시조는 인보. 중국 성씨로서 주나라 문왕의 일곱째 아들 성숙부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 자손이 나라 이름을 그대로 성씨로 삼았다.

그 뒤 당 나라 때 학사 경이가 우리 나라로 건너왔으며, 뒤에 백제에는 충이, 신라에는 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인품이 뛰어나고 벼슬이 당당하여 임금님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창녕 성씨의 시조 인보는 신라 대관저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 인보는 창녕에서 뿌리를 내리고 그 후손들이 세력을 얻어 호장을 지냈다.

고려 태조는 사람을 보내 창녕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인보의 후예들이 호장이 되어 다스렸다.

 

蘇 - 진주 소씨

 

시조는 소벌. 중시조는 경이다. 진주 소씨의 전설은 요 나라 임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요임금은 구이중의 하나인 풍이의 후손으로, 그의 선대 할아버지인 기곤오를 소성의 하백으로 임명하였다.

기원전 2266년 소성은 단군 조선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때 기성을 소성이라 하면서 기곤오가 소곤오로 바뀌고 소씨가 생겼다.

어느 날 경이 꾸었던 꿈대로 진주 도사곡으로 이사해 아홉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들이 모두 큰 벼슬을 하였다. 후손들은 소벌을 시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자손들이 번창하여 오늘날에는 68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蘇 - 평산 소씨

 

시조는 소웅. 주 나라 소공의 후손이라고 한다. 연추관으로 신안백에 봉해졌다.

그 후손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큰 활약을 하였는데, 두드러진 인물로는 경상도 안찰사를지낸 광빈을 비롯해 문종 때부터 숙종 때에 이르는 동안 문하시중, 수태사 등을 지낸 태조가 있다.

 

孫 씨

 

손씨는 문헌에 118본이나 된다. 그러나 밀양, 비안, 안동, 월성, 청주 등 7본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가 국가로 성립되기 전의 원시 부족국가 사회인 사로(서라벌)에는 6촌이 있었고, 6촌에는 촌장이 있었다.

그 촌장들은 각각 손, 이, 최, 정, 배, 설씨라는 성을 받았다.

이 때가 신라 제3대 임금인 유리왕 9년이었다. 여기서 손씨가 생겨난 것이며 손씨 성을 받은 촌장은 무산 대수촌의 촌장인 구례마였다.

 

孫 - 경주 손씨

 

시조 구례마의 후손으로 중시조 순을 모시는 손씨 계파이다.

순은 효성이 지극하여 흥덕왕 때인 853년에 경주의 옛 이름인 월성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경주라 하였으나, 뒤의 후손 기록이 없어 이어오지 못하다가 경원을 1세로 하여 계통을 이어왔다.

 

孫 - 밀양 손씨

 

구례마의 후손 손순의 큰손자인 익감이 신라에 공헌하고 흥덕왕 때 밀양군에 임명되면서 본관이 밀양으로 되었다.

익감은 익담과 익원 등 두 동생이 있었는데 3형제가 모두 효성이 지극해 칭찬을 받았다.

밀양 손씨는 진사공파, 명천공파, 청파공파, 오곡공파, 봉호공파, 팔용파 등으로 나뉘어졌으며, 그 후손들이 모두 50대 이상으로 번창하고 있다.

 

孫 - 비안 손씨

 

중시조는 을구. 자세한 기록은 없다. 문과에 급제하고 절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 계통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가 조선 초기 도총제사를 지내고 비안으로 내려간 연을 1세로 하고 본관을 비안으로 정하였다.

 

孫 - 안동 손씨

 

중시조는 손웅. 본래 성이 순이었으나, 고려 현종 임금의 이름이 순이어서 발음이 같다하여 손씨 성을 임금으로부터 받았다.

중간 기록이 없어 끊어지다가 8대손인 원유가 안동군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안동으로 바꾸었다.

 

孫 - 월성 손씨

 

월성 손씨는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무산 대수촌장에 구례마가 신라 개국 공신이 되면서 임금으로부터 손씨 성을 하사받은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후손 순이 효행으로 흥덕왕 10년인 835년에 월성군에 봉해졌고 그의 손자 익원이 또 월성군에 봉해지면서 순을 중시조로, 월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孫 - 청주 손씨

 

시조는 필영. 신라 6부 촌장인 구례마의 후손이다.

고려 때 개성군에 봉해졌다가 청주군으로 옮겼다. 후손靪이 그를 시조로 섬기고 본관을 청주로 삼아 계통을 이어가고 있다.

 

孫 - 평해 손씨

 

시조는 역시 월성. 밀양 손씨와 같다. 손자 익담이 평해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평해로 삼아 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로부터 자손들이 번창하여 지금 45대손으로 이어졌다.

 

宋 씨

 

송씨는 문헌에 172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15본을 제외하고는 그 기록이 거의 없다.

우리 나라의 모든 송씨는 중국 경조 충신으로 당 나라에서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의 후손들이다.

우리 나라에 귀화한 내력은 분명하지 않다. 송주은의 7대손인 손순공의 후손 자연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유익은 여산 송씨로, 둘째 아들 천익은 은진 송씨로, 셋째 아들 문익은 서산 송씨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자손이 번창하면서 이 3본에서 점차 갈라져 나갔다.

 

宋 - 김해 송씨

 

중시조는 천봉. 시호는 문정공. 고려 충렬왕 때인 1330년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장병, 광양 군수, 대사헌 등의 벼슬을 지냈다.

김해군에 봉해져 김해 송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후손의 기록이 없어 중간이 끊어졌으므로, 후손인 길정을 1세로 하여 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宋 - 남양 송씨

 

시조 공절은 고려 말기에 진사를 지내고 문하시랑이 되었고, 그의 아들 침은 문과에 급제한 후 감사를 거쳐 온청광록대부문하시중에 이르러 남양군에 봉해져 본관이 남양으로 되었다.

 

宋 - 덕산 송씨

 

시조 곤산은 고려 시대 찬성사를 지내고, 그의 손자 문이 호조판서를 지내며 공을 세워 덕산군에 봉해져 본관이 덕산으로 되었다.

 

宋 - 문경 송씨

 

시조 신경은 고려 때 선덕랑으로 조정에 들어가 공부, 아부의 전서가 된 뒤, 고려 말기 정국의 문란함을 수습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문경으로 내려갔다.

후손들이 문경을 본관으로 삼았다.

 

宋 - 신평 송씨

 

여산 송씨에서 갈려나갔다. 여산 송씨의 12대손인 알선이 신평에서 살았기 때문에 신평 송씨로 된 것 같으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 확실한 것은 밝히지 못하고 있다.

 

宋 - 여산 송씨

 

시조 유익은 고려 시대 진사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 부사 등을 지냈다.

그이 4대손인 송례가 중시조로 되어 계통을 이어오며 지금 29대손까지 내려왔다.

 

宋 - 연안 송씨

 

시조는 송경. 시호는 숙의. 고려 공민왕 때 찬성사가 되고, 1359년 홍건적 모지경을 토벌한 공로로 지밀직사에 올랐으며, 연안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연안을 본관으로 삼아 32대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신라 박혁거세 때에 전고관을 지낸 지겸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뒤 고려 태조때 개국원훈으로 소부소감을 지냈으며, 연안군에 봉해진 위를 시조로, 연안을 본관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宋 - 용성 송씨

 

용성 송씨도 송씨의 시조인 중국 경조 출신으로 당 나라에서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계파의 하나이다.

엄경을 시조로, 용성을 본관으로 하여 26대에 이르렀다.

 

宋 - 은진 송씨

 

시조 대원은 여산 송씨의 시조인 유익의 동생 천익의 후손. 여러 대가 은진에서 살았기 때문에 은진이 본관으로 되었다.

이 밖에도 야성 송씨, 양주 송씨, 진천 송씨, 철원 송씨, 청주 송씨, 홍주 송씨 등이 송주은의 후예로서 20대에서 30대까지 계통을 이어오고 있다.

송씨이긴 하나 한자로 松씨인 성씨가 있는데, 어려서 일본에서 고아가 된 송길만이 어머니를 찾겠다며 귀환선을 타고 부산항에 돌아온 것이 1946년이었다. 부모의 성을 몰라 일본에서 부르던 송본을 그대로 신고하여 충무시에서 송씨로 하여준 것이 시조가 된 경우이다.

水씨, 洙씨, 舜씨, 淳씨, 順씨, 筍씨 등 매우 드문 희성도 있다. 그러나 이들 성씨는 전국에 2-3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承 - 연일 승씨

 

시조는 개다. 연일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 연일이 본관이 되었다.

고려 고종 때 대장군을 지내고 가문을 일으켰으므로 그를 시조로, 연일을 본관으로 삼았다.

승씨는 이 밖에도 광산 승씨가 있는데 연일 승씨에서 갈라진 것으로 본다.

 

昇 씨

 

시조는 명승. 중국 황족의 후예로 고려 공민왕 때 어머니와 함께 우리 나라로 망명하여 귀화하였다.

황족의 자손으로 망명하였다 하여 그는 물론 자손들에게도 일체 벼슬하지 말도록 일렀다.

그의 어머니 옥경화는 신라 예복인 원삼 족두리를 보급하였다. 본관은 창평, 남원의 두 본이 있다.

 

施 - 절강 시씨

 

원래 중국 성씨로 춘추 시대의 시백으로 시작하여 중국의 유명한 명문 가문으로 이끈 집안이다.

우리 나라에는 1592녀 명 나라 장군으로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온 시문용이 전공을 세운 뒤 귀국하지 못하고 성주에 머물러 시조가 되었다.

 

申 씨

 

신씨는 문헌에 155본으로 되어 있으나 고령, 아주, 평산 신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씨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문벌의 하나로, 고령 신씨는 조선 전반기에 세력을 떨쳤고, 평산 신씨는 후반기에 세력을 떨쳤다.

 

申 - 고령 신씨

 

시조는 성용.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검포군기감을 지냈으며, 여러 대에 걸쳐 고려의 호장으로 고령에서 살았다. 후손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삼고 계통을 이어왔다.

 

申 - 아주 신씨

 

시조는 영미. 고려 말기 아주현의 권지 호장이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아주를 본관으로 계통을 이어간다.

 

申 - 평산 신씨

 

시조는 신숭겸.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나 배현경, 홍유, 복지겸과 함께 궁예를 내쫓고 왕건을 왕으로 삼아 개국 공신 대장군이 되었다.

왕건 태조의 익재 공신으로 공산동수에서 태조가 견훤에게 포위되자 대신 전사하여, 왕건이 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달성군 공산면에 지묘사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51대에 이르고 있다.

 

辛 - 염산 신씨

 

신씨의 시조는 중국 저성으로, 당 나라 때 천보연간(742-755년)에 신시랑이 엄시랑과 함께 사신으로 신라에 들어와서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시작되었다.

벼슬도 파락사에 오르고 나라에 충성도 하였는데, 그 뒤 계통의 기록이 없어 밝히지 못하다가, 고려 인종 때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신경을 중시조로 계통을 잇기 시작해 지금 60대손까지 이르렀다.

본관은 영산, 영월로 되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찾지 못하고 있다.

 

愼 - 거창 신씨

 

시조는 수. 중국 개봉 부인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 문종 때 아들 안지와 함께 우리 나라에 와서 귀화하여 수사도, 좌복사,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그 후손들이 거창에 살아 거창이 본관이 되었다.

 

沈 씨

 

심씨는 문헌이 63본으로 되어 있으나, 4본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심씨는 조선 500년 동안 정계를 주름잡던 10대 문벌의 하나이다.

청송 심씨는 영의정이 9명이나 되어 전주 이씨의 영의정 11명과 버금가는 세력을 떨쳤다.

역사상 3대가 나란히 높은 벼슬을 지낸 가문은 대구 서씨, 청풍 김씨, 청송 심씨의 세 가문 뿐이다.

 

沈 - 삼척 심씨

 

시조는 동노. 고려 숙종 때 좌승선과 군기소감을 지냈고, 삼척에 내려가 정착하였다.

그는 삼척 심씨로 유언을 남겨 후손들이 그대로 따르고 있다.

 

沈 - 청송 심씨

 

시조는 홍부. 고려 시대 문림랑 위위사승을 지냈으며 4대손인 덕부가 고려 충숙왕 때 왜구의 침략을 막아 공을 세웠고, 공민왕 때에는 중흥 9공신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왔다.

청송군 충의백으로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청송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35대를 이어가고 있다.

 

沈 - 풍산 심씨

 

시조는 만승. 본래 중국 오흥 사람으로 천성이 곱고 예민하며 지식이 풍부하였다.

1110년 동료 복주인 호종단, 유재, 안신지 등과 함께 우리 나라에 와 풍산에 살았다.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태자첨사부첨사 벼슬을 지냈다.

 

阿 씨

 

삼국유사에 보면 역사적인 인물이 있다.

백제 사람으로 신라에 가서 황룡사 9층탑을 세운 아비지와,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 나라의 한학을 전해준 아직기 등이 바로 그 사람이다.

본관과 시조는 분명하지 않으며 전국에 20여 가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安 씨

 

문헌에는 109본이나 되는데, 광주 안씨, 순흥 안씨 등 6본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안씨의 본성은 이씨였는데 신라 애장왕 7년인 806년에 당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들어와 개성 송악산 기슭에 정착한 이원의 아들 3형제가 왜구를 무찌른 공을 인정받아 임금으로부터 안씨 성을 받았다.

큰아들 지춘을 방준으로, 둘째 아들 엽춘은 방걸로, 셋째 아들 화춘은 방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방준은 묵산 안씨로, 방걸은 광주 안씨가 되었으며, 순흥 안씨는 자미를 시조로 삼고 있다.

 

安 - 광주 안씨

 

시조는 방걸. 고려 고종 때 광주 사람들이 광주 성주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의병을 모아 이들을 토벌한 공을 인정받아 광주군에 봉해져 광주 안씨의 시조가 되고, 광주가 본관이 되었다.

한편으로 신라 애장왕 때 당 나라로부터 들어온 이원의 아들 삼형제로서, 삼형제가 함께 용감하게 왜구를 무찌르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임금으로부터 직접 안씨 성을 받았다고 전하여진다.

 

安 - 순흥 안씨

 

시조는 자미. 고려 시대 보승별장을 지냈고, 순흥에 내려가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순흥을 본관으로 삼았다.

자미 이후의 기록이 없어 자미의 큰 아들 영유의 후손을 제1파, 둘째 아들 영인의 후손을 제2파, 셋째 아들 영화의 후손을 제3파로 나누어 대를 이었다.

 

安 - 죽산 안씨

 

중국 용서 사람인 이원이 신라 애장왕 때인 806년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세 아들 지춘, 엽춘, 화춘과 함께 의적의 난을 평정한 공로를 인정받아 안씨 성을 임금으로부터 받았다.

지춘은 죽산 안씨, 엽춘은 광주 안씨, 화춘은 죽성 안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로부터 55대손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한쪽으로는 둘째 아들인 엽춘의 17대손인 원형을 1세로 하고 본관을 죽산으로 삼은 계파가 있다.

 

安 - 탐진 안씨

 

고려시대 검교충주원사를 지내고 탐진군에 봉해진 원린을 시조로 삼고 탐진을 본관으로 정했다.

순흥 안씨 시조인 자미의 7대손 3형제 원숭, 원형, 원린 가운데 원숭은 순흥 안씨를 이었고, 원형은 신죽산 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원린은 탐진 안씨의 시조가 되었다.

 

安 - 태원 안씨

 

시조는 만세. 원 나라 태원 사람으로 노국 공주가 우리 나라에 올 때 수행원으로 따라왔다가 정착하여 고려 공민왕 때 예부상서를 지냈다. 후손들이 만세의 고향 태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夜 - 원평 야씨

 

시조는 선조. 기록에 보면 석잔, 봉성, 개성, 원평 야씨가 있으나 석잔, 봉성, 개성 야씨의 시조는 분명하지 않다.

원평 야씨의 시조인 야선조는 고려 충렬왕 때 하정사로 원나라를 다녀왔고, 좌부승지를 지냈다.

 

梁 씨

 

탐라국 삼성씨의 하나인 양을라를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 양을라는 먼 옛날, 한라산의 모홍혈(삼성혈이라고도 함)이 터지면서 그 곳에서 솟아올라 모라천에서 인간으로 변했다는 전설의 신이다.

그가 신으로 솟아올라 사람이 되었다는 시기는 역사가 기록된 유사시대 이전이므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벽랑 왕국의 임금이 서해 가운데서 신인이 나타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예측하며 공주를 보냈는데, 양을라가 이 공주를 아내로 삼고 탐라국을 세우니, 양을라는 임금이 되고 공주는 왕비가 되었다.

그로부터 그 후손들이 900대에 이르며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탐라국의 귀족인 양탕이 광순사의 벼슬로 신라에 들어가니, 신라 국왕이 예절을 갖추어 국빈 대우를 하고 성주 왕자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렇게 하여 왕탕은 신라에서 벼슬을 지냈다.

그 때 양(良)은 양(梁)으로 기록한 것이 양씨로 된 연유로 여겨지고 있다. 그 뒤 양탕의 후손 순이 제주도, 우경이 남원으로 내려가 본관을 다시 정해 2계파로 나뉘었다.

 

梁 - 남원 양씨

 

시조는 양을라의 후손 양우경. 양탕의 후손으로 신라 경덕왕 때 큰 공을 세워 남원백이 되면서 남원을 본관으로 삼고 남원 양씨의 시조가 되었다.

남원 양씨는 양능량, 양능길, 양성준, 양수정, 양주윤, 양윤위 등을 각각 중심으로 하는 계파로 갈라졌다.

 

梁 - 제주 양씨

 

중시조 양순은 신라 신문왕 때인 682년에 한림학사로 신라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탐라국 사람이라 하여 벼슬이 더 이상 올라가지 않자, 탐라군으로 제주도에 와서 본관을 삼았다.

그 뒤 장군파, 사직공파, 장공파, 봉관파, 천호공파 등 5개 파로 나뉘었다.

 

楊 씨

 

기록에는 47본으로 되어 있으나 남원, 밀양 등 6본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소상하지 못하다.

양씨는 중국 원 나라에서 도첨의시중을 지내다가 고려 공민왕 때인 1352년 노국 공주를 수행하여 우리 나라에 온 양기가 청주백에 봉해지면서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고려 고종 때 정승으 지내고 중화백이 된 양포를 시조로 하는 계파가 있다.

기록에는 양포의 큰아들 동요가 김방경 장군 부하로 진도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한다면 노국 공주를 따라온 양기의 1352년보다 82년이나 앞서는 1270년이 되어 양씨는 중화 양씨가 청주 양씨보다 먼저라는 이야기도 있다.

 

- 남원 양씨

 

시조는 경문. 고려 때 지영월군사로 있었다는 기록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다.

후손들이 남원에 계속 살았으므로, 남원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 밀양 양씨

 

시조는 양근. 청주 양씨의 시조인 양기의 후손으로, 고려 말기에 밀양군 벼슬을 하여 밀양이 본관이 되었다.

 

- 안악 양씨

 

시조는 만수. 고려 때 전서를 지내고 많은 공을 쌓아 안악군에 봉해지자 그 때부터 그의 후손들이 안악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 중화 양씨

 

시조는 양포. 고려 고종 때 정승을 지냈으며 중화군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중화를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 중국 원 나라의 도첨의 정승으로 고려 충선왕 때 제국 공주를 모시고 우리 나라에 온 양기의 제 6대손 양포가 중화 양씨의 시조라는 이야기도 있다.

 

- 청주 양씨

 

양씨는 원래 중국 성씨로, 당숙주의 후손 백교가 진 나라에서 주 나라로 건너가 양후에 봉해진 후부터 양씨가 되었다고 한다.

청주 양씨의 시조인 양기는 그의 후손. 고려 공민왕 때 우리 나라에 와 벼슬을 지내다가 다시 원 나라로 돌아가 사신으로 공을 세웠다.

그 후에 청주 관적을 하사받게 되자 그 때부터 청주 양씨의 시조가 되었다.

 

- 통주 양씨

 

시조는 복길. 이 사람도 중구 통주 사람이다. 명 나라 9의사의 한 사람으로 나라가 망하자 소현세자를 따라 북쪽 경계선遁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우리 나라에 귀화하였다.

후손들이 그의 고향 통주를 본관으로 정하였다.

 

魚 씨

 

문헌에 보면 19본이 있으나 충주, 함종 어씨를 제외하고는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충주 어씨는 본래 지씨였으나 시조 어중익의 겨드랑 밑에 비늘이 있다고 하여 임금이 이를 어씨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함종 어씨는 원래 중국인으로 남송 때 난을 피하여 우리 나라로 들어온 화민을 시조로 한 성씨이다.

 

魚 - 청주 어씨

 

시조는 중익. 본래는 지씨였으나 고려 태조가 그의 겨드랑 밑에 붙어 있는 비늘을 보고 깜짝 놀라, "그대 몸에 인감이 있으니 이는 물고기가 아닌가?" 하며 어씨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그 뒤 기록이 없다가 성균 진사를 지낸 숭진의 증손 유소가 좌대장으로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충주군에 봉해져 숭진을 1세로 하고 충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魚 - 함종 어씨

 

시조는 화인. 고려 명종 때 인장동정 벼슬을 지내고 강를에 살다가 함종으로 이사하여 함종이 본관이 되었다.

화인은 본래 중국 사람으로, 남송 때 난리가 일어나자 우리 나라에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嚴 - 영월 엄씨

 

시조는 임의. 당 나라 사람으로 신시랑과 함께 파락사라는 사신 임무를 맡고 신라로 들어와 그대로 머물러 살았다.

임의가 고려 시대 호부원의랑 벼슬을 지내고, 큰아들 태인이 군기감을 지낸 뒤, 영월군에 봉해져 영월이 본관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엄씨와 신씨가 모두 영월을 본관으로 삼고 있으므로 성씨는 달라도 한 본이라 종씨라고 여기면서 혼인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엄임의와 신시랑이 함께 우리 나라에 왔다는 시기는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呂 - 성주 여씨

 

본래 중국 성씨로, 주 나라 무왕이 강태공망을 여에 봉하고 호를 여상이라고 한 것이 여씨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후손인 여불위와 아들 영이 중국을 통일하여 진시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후손 어매가 황소의 난을 만나 신라 헌강왕 때인 877년 신라로 피신하여 전서를 지내고 성주에 머물러 살아 여씨의 기원을 이루었다.

그의 후손에 임청, 광유 형제가 있었고, 임청의 아들로 양유, 자열, 자장, 자혁의 네 형제가 있었는데 양유, 자열 계통은 성주로, 자장, 자혁 계통은 함양으로 내려가 본관을 삼아 성주 여씨와 함양 여씨로 갈라졌다고 한다.

 

余 - 의령 여씨

 

시조는 선재. 중국 송 나라 때 사람으로 간의대부를 지내다가 고려로 귀환하여 의령 땅을 하사받아 정착했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의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汝 씨

 

시조나 본관은 분명하지 않아도, 전국에 2가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延 - 곡산 연씨

 

시조는 계령. 중국 홍능 사람으로 고려 때 귀화하여 신호위 상장군 벼슬을 지냈다.

그의 7대손 수창이 고려 때 사신으로 왔다가 곡산에 살면서 여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11대손인 연주가 고려 말기에 벼슬을 하다가 조선이 건국되지 곡산에 내려간 뒤, 조선에서 벼슬을 주어도 응하지 않아 곡산부원군에 봉했다고 한다. 후손들이 곡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連 - 전주 연씨

 

본래는 중국 성씨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전주와 곡산 두 본이 있다.

전주 연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때 이등 공신인 연주이며, 곡산 연씨는 시조가 분명하지 않다.

 

燕 씨

 

문헌에는 나와 있으나 중국 성씨로만 알려져 있을 뿐 시조나 본관이 분명하지 않다.

백제 시대 8대 성씨의 하나였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 보면 성왕 때의 병조판서 연실 등이 있다.

연씨 성은 지금 북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廉 - 파주 염씨

 

염씨는 중국 황제의 후손으로 성씨가 여러 차례 바뀐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공손씨였으나 희씨, 대염씨, 왕보씨가 되었다가 그의 후손들이 중국 하동에 옮겨 살면서 염씨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뒤 삼한 공신으로 대사도 벼슬을 지낸 교명이 후당 때 난리르 만나 신라로 피신, 우리 나라에 머물면서 염씨의 시조가 되었다.

처음 본관은 봉성이었으나, 중시조인 제신이 곡성부원군이 되어 곡성을 본관으로 바꾸었는데, 연산군 때인 1504년에 곡성이 파주로 이름이 바뀌면서 본관도 파주가 된 것이다.

파주 염씨 이외에도 담양, 용담, 개성, 순창 등 70여본이 있으나 모두 파주 염씨의 후손들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파주 염씨 단본으로 내려온다.

 

芮 - 부계 예씨

 

시조는 악전. 고려 인종 때 문하찬성사로 부계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부계로 삼았다.

문헌에는 본관이 의홍으로 되어 있으나, 족보에는 본관이 부계이다. 부계는 의홍의 옛날 이름이다.

 

吳 씨

 

오씨는 문헌에 164본 또는 210본이라고 나타나 있으나 나주, 보성, 해주 오씨 등 16본을 제외하고는 그 기록이 졍확하지 못하다.

오씨의 원시조는 신라 22대 지증왕 때 중국으로부터 우리 나라에 건너온 오첨이며, 그의 후손 오연총이 중시조라고 한다.

오첨은 신라 지증왕 때 신라에 와서 살다가 두 아들 가운데 둘째인 오웅을 함양에 남겨두고 나머지 가족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오웅의 12대손 오광우가 다시 중국에 들어갔는데, 그의 손자 오연총이 고려 문종 30년에 다시 우리 나라로 들어와 정착, 중시조가 된 것이다.

오연총의 6대손인 수전이 아들 셋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해주 오시, 둘째 아들은 동복 오씨, 막내 아들은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吳 - 고창 오씨

 

오첨의 17대손 학인이 중시조로 103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압록강에서 오랑캐를 토벌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자 고창백이 되어 그 때부터 본관을 고창으로 삼았다.

 

吳 - 군위 오씨

 

오첨의 24대손 오숙귀가 고려 시대 벼슬을 하여 비안군을 지내고, 그의 6대손 인철이 고려 때 사복 벼슬을 지낸 뒤 군위에서 살아 후손들이 군위를 본관으로 삼았다.

 

吳 - 나주 오시

 

신라 지증왕 때인 500년에 오첨의 24대손 현보의 아들 5형제 중에 막내인 숙규가 나주에 정착하여 나주 오씨가 되었다.

 

吳 - 낙만 오씨

 

오첨의 32대 손 오사용이 시조이다. 그는 고려 때 북쪽 국경을 자주 침략하는 오랑캐와 남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들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낙만군에 봉해졌다.

 

吳 - 동복 오씨

 

고려 고종 때 공을 세워 동복군에 봉해진 오현좌를 시조로, 동복을 본관으로 정해 37대손까지 이르렀다.

 

吳 - 보성 오씨

 

먼 옛날 중국 양자강 부근에 오왕부차가 있었는데, 그의 손자 유양이 천자로부터 오씨 성을 받았으며, 뒤에 오나라 임금이 되었다.

유왕의 46대손이며 오첨의 24대손인 현필이 보성군에 봉해져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되어, 보성이 본관이 된 것이다.

 

吳 - 울산 오씨

 

시조는 오성지. 오첨의 24대손 때 해주, 동복, 보성 오씨로 갈라졌고, 해주 오씨의 시조인 현보의 8대손인 연지가 고려 말기에 평장사로 울산을 맡아 울산 오씨의 시조가 되고 울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吳 - 해주 오씨

 

시조는 오현보. 연총의 세 아들 중 큰 아들로 계단을 토벌한 공로로 임금으로부터 해주군에 봉해져 해주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밖에도 연일 오씨, 장흥 오씨, 전주 오씨, 평해 오씨, 함양 오시, 함평 오시, 화순 오씨, 흥양 오씨가 있다.

 

玉 - 의령 옥씨

 

시조는 옥진서. 고려의 요청으로 당 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 중의 한 사람이다.

국학의 교수가 된 뒤, 의령군에 봉해져 의령 옥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뒤 기록이 없어 참정 벼슬을 지낸 온종을 1세로 삼았다.

 

溫 - 봉성 온씨

 

시조는 온달. 당 나라 때 진 나라를 통합한 숙우의 12대손 소후가 동생 수를 온에 봉하니 국호를 온이라 하고 서울을 평원에 정하였다.

그 뒤 온 나라의 공자장이 나라 이름을 따서 성씨를 온씨로 정하였으나, 자세한 기록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구려 평창왕 때 온달이 평강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그로부터 온씨 혈통이 이어졌다.

후손 중에 고려 충목왕 때 회양부사를 지낸 선과 신 형제가 봉성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아 후손들이 그를 1세로 삼고 봉성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王 씨

 

문헌에 15본으로 되어 있으나,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와, 성은 같으나 본이 다른 제남 왕씨로 크게 나뉘어진다. 그 외에는 별로 알려지고 있지 않다.

고려 500년 동안 번영을 누려온 왕씨는 조선에 세워지면서 여러 가지 수난을 당해 비극 속의 왕족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본래 개성 왕씨들이 성을 숨기고 다른 성씨로 바꾸어 살다가 몇 대가 지나 다시 왕씨로 찾은 사람도 있으나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 때 왕씨를 찾지 못한 성씨들은 다른 성씨로 뿌리를 내렸다.

 

王 - 개성 왕씨

 

중국 황제 현원의 17대손 조명은 유누와 함께 우리 나라로 와서 정착하였다.

그 뒤 조명의 후손 수곡은 기자가 왕국의 왕이 되었을 때 그의 스승이 되었으며, 기자로부터 왕씨 성을 받았다.

그 뒤 45대손인 염의 13대손 몽 때에 이르렀으나 일토초가 위왕의 후손이라는 소문에 휘말려 지리산으로 숨었다.

지리산에서 몽의 세 아들은 수도사의 가르침을 따라 전씨, 신씨, 차씨로 성씨를 바꾸었다.

차씨의 셋째 아들이 왕씨인데, 그의 후손이 고려를 세운 왕건이다.

이로부터 왕씨 일가는 고려의 왕족이 되면서 500년 동안 영화와 번영을 누렸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뒤, 왕시를 박해하기 시작하더니, 살아남기 위해 玉씨, 琴씨, 馬씨, 田씨, 金씨 등 왕(王)자를 고칠 수 있는 성씨로 바꾸었다.

 

王 - 제남 왕씨

 

시조는 이문. 중국에서는 왕후 장상과 문장 호걸을 많이 내 가문 좋은 성씨로 불린다.

그 뒤, 후손들이 번창하자, 청 나라 태조가 왕시르 없애고자 왕봉강을 심양 포로소로 보내고 압박하자 이문이 봉림대군(뒤에 효종)을 따라 우리 나라로 피신, 벼슬을 지내다가 제남 왕씨의 시조가 되었다.

 

龍 - 홍천 용씨

 

시조는 득의. 고려 희종 때인 1208년 시어사를 지내고, 그 뒤 문하시중과 통어사 등 벼슬을 지냈고 홍천으로 내려가 용씨의 시조가 되었다.

 

愚 - 단양 우씨

 

시조는 알려지지 않고, 중국 하 나라 우왕의 후예인 우예가 우리 나라에 와 처음으로 단양에 정착하여 단양 우씨가 되었다.

그의 10대손 현보가 공양왕 때 삼사사 벼슬을 하여 단양 부원군이 된 후에 후손들이 단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元 - 원주 원씨

 

시조는 응암. 본래 중국 주 나라 성왕의 본성은 희씨였으나 원씨로 고쳤다.

그 뒤 당 나라 8학사의 한 사람인 원경이 우리 나라로 파견되어 원씨의 시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 원씨는 본관이 원주 하나로 되어 있으나, 응암 원곡계, 원성백계, 시중공계, 충숙공계의 4파로 갈라져 있다.

지금 그 후손은 56대에 이르고 있다.

 

韋 - 강화 위씨

 

시조는 수여. 중국 팽씨의 후예로서 당 나라 때 세력을 떨쳤던 성씨이다.

수여는 고려 광종 때인 960년 우리 나라에 와서 문하시랑평장사 등 벼슬을 지내고 강화로 내려가 강화 위씨의 시조가 되었다.

 

魏 - 장흥 위씨

 

시조는 경. 당 나라 출신으로 신라 선덕여왕 때 파견되어 아량상서시중 벼슬을 지내고 장흥으로 가서 장흥 위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그 뒤 기록이 없어 신라 말기의 대각관시중을 지낸 창주를 중시조로 하여 대를 이어온다.

 

兪 씨

 

문헌에 97본으로 되어 있으나 기계 유씨, 인동 유씨, 무안 유씨, 창원 유씨가 번성했고 나머니즌 자세한 기록이 없다.

유씨는 모두 신라 때 벼슬을 지낸 유상재를 원조로 하는 같은 혈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 장군을 비롯해 조선 시대 충신들을 배출하였다.

 

兪 - 기계 유씨

 

시조는 삼재. 신라 때 아손을 지냈으며, 그 뒤 신라를 무너뜨린 고려에 반대하므로 고려 태조가 기계 호장으로 보내 그곳에서 살았다.

후손들이 기계를 본관으로 삼고 대를 이어 지금 37대손에 이르렀다.

 

兪 - 무안 유씨

 

시조는 순직. 고려 예종 때 공을 세우고 장사군에 봉해졌다.

그의 증손자 천우는 원종 때 최의를 내쫓는데 공을 세웠으나 삼별초의 난 때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큰 인물임이 인정되어 벼슬을 지냈고, 충렬왕 때는 한성사로 승진되었다. 그가 죽자 무안부원군으로 삼으니, 무안이 본관이 되었다.

 

兪 - 인동 유씨

 

시조는 승단. 고려 고종 15년인 1228년 추밀원부사가 된 뒤, 참지정사, 집현전 대학사, 수국사 판례부사 등 높은 벼슬을 지내고 인동백에 봉해졌다.

임금의 스승이었던 승단은 글이 뛰어나 원순문이라고 일컬어졌으며, 고종의 강화 천도를 혼자 반대하였다.

그 뒤 기록이 끊겨 예부시랑을 지낸 승석을 1세로 삼았다.

조선 시대 성종 때 후손 유진이 통정대부에 올라 홍문관 부제학과 춘추관 수찬관을 지내며 문중을 일으켜 지금 30대에 이르고 있다.

 

兪 - 창원 유씨

 

시조는 섭. 고려 시대 정순대부, 보문각직제학을 지냈으며 창원에 정착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창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기계, 인동 유씨와 함께 원조는 신라 때 유삼재로 보고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劉 - 거창 유씨

 

원래 중국 제모의 후손인 유 땅에 봉해지면서 유씨 성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 한 나라 고조 때 중국을 통일하고 한제국을 건설하면서 유씨의 공적이 나타났다.

우리 나라 유씨는 한 나라 고조의 41대손인 전이다. 고려 문종 때인 1082년 고려에 들어온 8학사중 한 사람으로 병부상서 등을 지냈다.

유씨는 거창 유씨, 강릉 유씨, 백천 유씨 등이 있으나 모두 전을 시조로 갈라졌다.

 

庾 - 무송 유씨

 

시조는 검필. 중국 한 나라 말기와 진 나라 초기에 유순유가 중국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가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머물러 살면서 벼슬을 지냈고, 평산 유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5대손 녹승이 문종, 숙종 때 벼슬하고 정승을 지낸 뒤, 무송부원군에 봉해져 본관을 무송으로 바꾸었다.

 

陸 - 옥천 육씨

 

시조는 보. 중국 절강 사람으로 927년 신라 경순왕 때 홍은설, 정간과 함께 당 나라의 선교사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문학을 선교하였다.

경순왕은 육보의 문장이 뛰어남에 감탄, 부마로 삼고 옥천군에 봉해 옥천 육씨의 시조가 되고, 옥천이 본관으로 정해졌다.

 

尹 씨

 

윤씨는 문헌상에 149본으로 나와 있으나 10본을 제외하고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윤씨는 조서 시대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 가운데서도 파평 윤씨는 왕비, 학자, 장군 등을 배출하며 세력을 떨쳤다.

해평, 무송, 칠원, 해남 윤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평 윤씨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보는 주장이 있다.

 

尹 - 남원 윤씨

 

시조는 신달의 8대손인 위.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국자 박사, 기거랑, 예빈소경 등 벼슬을 지냈다.

1200년 신종 때 안염사로 호남에 갔다가 남원에서 복기남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남원백에 봉해지자 그 때부터 남원 윤씨의 시조가 되었다.

 

尹 - 무송 윤씨

 

본래 소호씨였으나 소호금천의 아들 반이 궁정이 되고 옹주외 윤성에 봉해지자 윤씨로 바뀌었다.

그의 후손 윤경이 난리를 피해 우리 나라로 와서 정착한 곳이 무송이라, 무송을 본관으로 한 무송 윤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尹 - 파평 윤씨

 

시조는 신달.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1107년 여진을 평정한 공로로 공신이 되어 파평현 개국백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그를 시조로 삼아 40대에 이르렀다.

함안파, 남원파, 덕산군파, 문정공파, 신령파 등 무려 22개 파로 갈라져 있다.

이 밖에도 양주 윤씨, 영천 윤씨, 예천 윤씨, 칠원 윤씨, 함안 윤씨, 해남 윤씨, 해평 윤씨 등이 있다.

 

殷 -- 행주 은씨

 

시조는 홍열. 신라 때 벼슬을 하여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다.

그의 선조는 당 나라 학사로 우리 나라에 와 행주에 정착하여 행주를 본관으로 한 행주 은씨의 시조가 되었다.

 

陰 - 죽산 음씨

 

시조는 음준. 원 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예부시랑을 지냈고 고려 때 노국 공주를 수행한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와 벼슬을 지낸 뒤, 죽산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으로, 그를 시조로 삼아 지금 31대에 이르고 있다.

 

李 씨

 

이씨는 문헌상 546본으로 나타나 있으며 김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이다.

많은 본과 가운데 100여본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이씨는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이 유리왕 때인 32년 이씨 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고 이씨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하사받은 이씨와 중국에서 건너온 이씨로 크게 나뉜다.

이씨도 유씨처럼 리씨로 표기하는 성씨가 있다. 전주 이씨가 대개 전주 리씨로 쓰고 있다.

 

李 - 전주 이씨

 

시조는 이한. 덕망이 높고 문장이 뛰어나 신라 문성왕 때 사공 벼슬을 지냈으며, 그 뒤 후손들이 신라 시대 벼슬자리에 많이 올랐다.

시조 한의 22대손인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임금이 되어 전주 이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그 뒤 이성계의 아들로부터 계파의 1세가 되어 전주 이씨의 500년 왕조가 뿌리를 내렸다.

전주 이씨의 시조 묘소가 전주에 있고 시조로부터 18대손까지 전주에 살았으므로 전주를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전주 이씨는 시중공파, 평장사공파, 주보공파 등 무려 102파로 나뉘어져 있다.

 

李 - 가평 이씨

 

시조는 춘계. 고려 시대 판도판서 벼슬을 지냈다. 그의 증손자 현손이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마절도사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가평군에 봉해져 가평을 본관으로 가평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李 - 강진 이씨

 

시조는 이진. 본래 신라 남해왕 때의 사람 이완이 시조라 하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진을 중시조로, 강진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진은 고려 충선왕 때인 1308년 원 나라 사신으로 있을 때 공을 세워 공민왕 때 평리 벼슬을 지냈다. 또한 천추사로 원 나라를 다녀왔다.

 

李 - 경주 이씨

 

시조는 알평. 진한 6부 촌장의 한 사람으로 기원전 57년 다른 5부 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신라 초대 임금으로 받들고, 개국 공신이 되어 아손의 벼슬을 지냈다.

그 뒤 유리왕 때 이씨로 성을 하사받고 경주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의 고향이 경주라 본관을 경주로 삼은 것이다.

 

李 - 광산 이씨

 

시조는 김정. 본래 김씨로서 김알지의 후손 헌안왕의 7대손인 김정이고려 때 향공 견사 벼슬을 지냈고, 그의 8대손 순백은 고려 충숙왕 때 왕이 토번으로 가게 되자 다른 신하들은 모두 도피했으나 혼자 임금을 수행한 공로로 광산부원군이 되어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최근 문헌이 발견되어 경주 김씨 후예임이 분명해지자, 정을 시조로, 순백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李 - 광주 이씨

 

시조는 이자성. 신라 내물왕 때 벼슬을 지내고, 후손들이 신라에서 계속 벼슬을 하였으나, 신라가 고려에게 나라를 넘겨주자, 이에 반대하고 절개를 지켰다.

그 뒤 후손인 당이 광주 유수의 딸과 결혼하여 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들이 성장하여 고려에서 모두 벼슬을 하면서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본관은 조상들이 살기 시작한 준안이 고려 성종 때 광주로 바뀌자 광주로 삼았다.

 

李 - 성주 이씨

 

시조는 이순유. 동생 돈유와 함께 신라 때 벼슬하여 재상에 올랐으나 신라가 망하자, 절개를 지켜 고려에 협조하지 않고 이름을 국신이라고 고치며 성주에 머물러 살았다.

고려에서는 성주 이씨 가문을 대대로 성주 호장으로 삼으며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 뒤, 고려 고종 때에 이르러 시조의 12대손 장경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성주 이씨의 가문을 빛냈다.

 

李 - 수원 이씨

 

시조는 자송. 공민왕 때인 1358년 양광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1362년 전법 판서로 원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홍건적을 평정하여 공을 세웠다.

귀국하여 수원부원군으로 봉해져, 수원을 본관으로, 수원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李 - 연안 이씨

 

시조는 무. 중국 당 나라 출신으로 중랑장이 된 뒤에 소정바의 부장이 되어 신라에 들어온 뒤, 백제를 평정한 공로로 연안백에 봉해져 연안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손이 10개파로 갈라져 지금 40대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강화 이씨, 개성 이씨, 결성 이씨, 경산 이씨, 고령 이씨, 고부 이씨, 고성 이씨, 공주 이씨, 광평 이씨, 교하 이씨, 김구 이씨, 기장 이씨, 김포 이씨, 나주 이씨, 남평 이씨, 단성 이씨, 단양 이씨, 담양 이씨, 대흥 이씨, 덕산 이씨, 덕수 이씨, 덕은 이씨, 동성 이씨, 벽진 이씨, 봉산 이씨, 부안 이씨, 부여 이씨, 부평 이씨, 상산 이씨, 서림 이씨, 성산 이씨, 수안 이씨, 순천 이씨, 신펑 이씨, 아산 이씨, 양주 이씨, 여주 이씨, 영천 이씨, 영해 이씨, 온양 이씨, 용궁 이씨, 용인 이씨, 우계 이씨, 무봉 이씨, 울산 이씨, 장수 이씨, 장흥 이씨, 재령 이씨, 전의 이씨, 정선 이씨, 정주 이씨, 진보 이씨, 진안 이씨, 진위 이씨, 진주 이씨, 창령 이씨, 청송 이씨, 청안 이씨, 청주 이씨, 청해 이씨, 충주 이씨, 태안 이씨, 태원 이씨, 통진 이씨, 평산 이씨, 평창 이씨, 하빈 이씨, 하음 이씨, 학성 이씨, 한산 이씨, 함안 이씨, 함평 이씨, 합천 이씨, 해남 이씨, 해주 이씨, 홍주 이씨, 화산 이씨, 회덕 이씨, 홍양 이씨 등이 있다.

우리 나라 성시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성씨이다.

 

異 - 밀양 이씨

 

시조는 알 수 없으나, 중국 당 나라 때 운남왕이 된 이위심이 있었다.

우리 나라에는 밀양 단본으로 되어 있으나, 동성, 청양, 남원의 3본이 있다고도 한다.

 

印 - 교동 인씨

 

시조는 인단. 인단의 후손인 서가 진 나라 풍익대부로신라 기임왕 때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와 정착하여 벼슬이 아손이 이르고 교동백이 되었고, 후손 빈이 교동부원군이 되어 교동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뒤의 기록이 없어 고려 때 병마사를 지낸 당을 1세로 하여 계통을 이어오고 있다.

 

任 씨

 

문헌에 120본으로 되어 있으나 장흥, 풍천을 제외하고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장흥 임씨와 풍천 임씨 모두 시조는 중국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任 - 장흥 임씨

 

시조는 임호. 일찍이 중국에서 이부상서를 지냈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리 나라로 망명하여 장흥에 머물면서 장흥 임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손자 원후가 고려 인종 때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정안부원군에 봉해지자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다.

 

任 - 풍천 임씨

 

시조는 임온. 중국 소흥부 사람으로 은자광록대부라는 벼슬을 지냈다.

그의 6대손 주가 고려 충렬왕 때 우리 나라에 들어와 안찰사 벼슬을 하고, 풍천으로 내려가 풍천 임시의 시조가 되었다.

임씨는 문헌에 120본으로 되어 있으나, 장흥 임씨와 풍천 임씨 이외에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林 씨

 

기록에는 216본으로 되어 있으나 나주, 평택 임씨를 제외한 본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나주 임씨는 고려 대장군 임비를 원조로 하고, 평택 임씨는 임팔급을 원조로 하여 계통을 이어나간다.

 

林 - 나주 임씨

 

시조 임비는 고려 때 벼슬하여 충렬왕 대인 1281년 왕을 수행하여 원 나라를 다녀온 뒤, 대장군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 탁이 해남 감무로 있을 때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자, 이에 따르지 않고 나주로 내려가 나주 임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5개파로 갈라졌다.

 

林 - 평택 임씨

 

당 나라에서 건너 온 임팔급은 평택에 머물러 평택 임시의 시조가 되었다.

당 나라 문종 때 한림학사였으나, 간신들에게 밀려 학사 7명과 함께 신라로 건너와 변방을 튼튼히 하는 데 공헌하고 평택으로 가 뿌리를 내렸다.

그 뒤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조양, 선산, 진주, 울진, 예천, 부안, 경주 등 20여 파로 갈라졌다.

그러나 평택 임씨가 임씨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張 씨

 

우리 나라 장씨는 중국에서부터 왔다는 것이 통설이다.

고려를 세울 때 일등 공신 노릇을 한 장정필, 덕수 장씨 시조 선무 장군 장순용, 절강 장씨의 시조 장해빈, 이렇게 세 사람의 장씨가 우리 나라 장씨를 전국에 살게 한 원조라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도 신라 시대의 장보고를 비롯해 장변, 장건영, 장빈, 장무, 장밀 등 숱한 장군과 학자들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장씨는 현재 우리 나라 각 성씨 가운데 9번째로 많다.

 

張 - 구례 장씨

 

시조는 악. 원시조 장정필의 21대손. 고려 때 시종으로 있으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70세 때 다시 벼슬을 하여 궁궐로 들어갈 때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이자 임금이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나고 자란 곳이 봉성인데 그 곳을 못잊어 그러하옵니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즉시 봉성군에 봉하였다. 봉성이 나중에 구례로 이름이 바뀌어 지게 되자 장씨의 본관이 되었다.

 

張 - 안동 장씨

 

시조는 정필. 본래 중국 절강성에서 대사마 장군 원의 아들로 888년에 태어나 5세 때 아버지를 따라 우리 나라로 왔다.

18세 때 중국으로 파견하는 정사를 따라 당 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공부하고 24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고려 왕건이 나를 세울 때 일등 공신이 되고 안동군에 봉해져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張 - 덕수 장씨

 

시조는 순용. 1275년 고려 충렬왕 때 충렬왕비인 원 나라 세조의 딸 제국 대장 공주를 따라 우리 나라에 와 덕수현에 살았다.

고려에서 문하찬성사 벼슬을 지내고 덕수부원군이 되었으므로 그 때부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덕수를 본관으로 정하였다.

후손은 50대에 이르고 있다.

 

張 - 인동 장씨

 

시조는 김용. 장정필의 후손으로 고려 때 상장군 벼슬을 하고 인동에 머물면서 인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후손들이 장정필을 도시조로, 김용을 시조로 삼고 인동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인동 장씨는 종파, 황파, 청주파 등 17개 파로 갈라져 42대까지 내려왔다.

 

張 - 절강 장씨

 

시조는 해빈. 본래 중국 항주 오강현 지방 사람으로 정유재란 때 유격 장군인 오유층의 부하 장군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울산의 중성 싸움에 나섰다가 유탄에 맞아 귀국하지 못하고 군위에 머물러 치료를 받았다.

그 뒤 후손들이 고향인 절강을 본관으로 삼고, 장해빈을 시조로 정하였다.

 

張 - 창녕 장씨

 

시조는 천익. 정필의 후예로서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1228년 고종 대 승평 판관이 되었다.

그 뒤에 직사관을 거쳐 전중시어사로 몽고에 사신으로 두 차례나 다녀왔다.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동지중추원사가 된 뒤, 창녕군에 봉해져 창녕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밖에도 결성 장씨, 나주 장씨, 단양 장씨, 목천 장씨, 부안 장씨, 순천 장씨, 예산 장씨, 옥구 장씨, 울진 장씨, 전주 장씨, 지례 장씨, 진안 장씨, 진주 장씨, 진천 장씨, 청송 장씨, 흥덕 장씨, 흥양 장씨 등이 있다.

 

蔣 - 아산 장씨

 

시조는 장서. 중국 송 나라 때 경위대장군으로 나라 안이 어지러워지자 이강과 함께 평화론을 주장하다가 뜻대로 안 되어 배를 타고 우리 나라 아산에 도착, 그 곳에 정착하였다.

조정에서는 아산군에 봉했는데, 이로 인해 아산을 본관으로 하여 아산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全 씨

 

전씨는 문헌에 178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감천, 경주, 기장, 정선 등 17본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거의 없다.

모든 전시는 백제 개국 공신인 전섭을 원조로 삼고 있다. 전섭은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10명의 막료들을 데리고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세울 때 공을 세운 10제공신 가운데 한 사람이다.

 

全 - 감천 전씨

 

시조는 전언. 백제 온조왕 때 10제공신 전섭의 30대손이다.

그는 고려 충숙왕 때 밀직부사 등을 지냈고, 좌명 공신으로 감천군에 봉해져 감천 전시의 시조가 되었다.

감천은 안동현에 속한 땅이라 안동 전씨라고도 한다. 후손은 83대손에 이르렀다.

 

全 - 성산 전씨

 

시조는 전홍. 원조 전섭의 26대손으로 고려 때 판도판서를 지냈고 고종 때인 1231년 몽고의 철례탑이 침입해 오자, 이를 맞아 용감히 싸우고 큰 공을 세워 서산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성산을 본관으로 삼고, 그를 시조로 섬기며, 강화군 인산리에 있는 원모제에서 해마다 10월 10일 시향을 지낸다.

 

全 - 완산 전씨

 

시조는 전집. 원조 전섭의 30대손으로 고려 공민왕 때 중랑장이 되어 두 차례나 홍건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워 완산백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들이 완산을 본관으로, 전집을 시조로 삼았다. 지금 후손들은 크게 번성하여 82대에 이르고 있다.

 

全 - 정선 전씨

 

시조는 전섭. 중시조는 전선. 우리 나라 모든 전씨의 유일한 원조이다.

전섭은 고구려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온조를 따라 부여로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10제공신의 한 사람이다.

그의 8대손인 선이 신라로 가서 벼슬을 얻어 정선군에 봉해져 정선을 본관으로, 정선 전씨의 시조가 되었다. 후손은 100대에 이르렀다.

 

全 -함창 전씨

 

시조는 전살리. 전섭의 29대손으로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부상서를 지냈고 좌리 공신으로 함창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정선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함창을 본관으로 삼고, 계통을 이어와 지금 80대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경주 전씨, 기장 전씨, 나주 전씨, 성주 전씨, 옥산 전씨, 옥천 전씨, 용궁 전씨, 죽산 전씨, 천안 전씨, 팔거 전씨, 평강 전씨, 황간 전씨 등이 있다.

 

田 씨

 

문헌에는 142본으로 되어 있으나, 남양, 담양, 연안, 영광, 하음 전씨르 제외하고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남양 전씨는 중국의 후손이고, 담양 전씨는 고려 대의 전득시 후손이며, 연안, 하음 전씨는 담양 전씨에게서 갈라진 것이며, 영광 전씨는 고려 개국 공신 전종회의 후손이다.

 

田 - 남양 전씨

 

시조는 전풍. 중국의 한림학사로 송 나라와 원 나라 때 임금들의 행적을 기록하는 일을 잘못했다 하여 쫓겨나자 우리 나라로 건너왔다.

고려에서 송 나라에 대한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남양군에 봉해준 것이 남양 전씨의 시조가 되었다.

 

田 - 담양 전씨

 

시조는 전득시. 고려 때 현양으로 천거되고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사참지정사 벼슬에 올라 담양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담양을 본관으로 삼고 계통을 이어 지금 47대에 이르고 있다.

 

田 - 연안 전씨

 

시조는 전가식. 전득시의 9대손으로 조선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벼슬에 올라 영의정을 지내고 연안군에 봉해졌다.

 

田 - 영광 전씨

 

시조는 전종회. 고려 개국 공신으로 운기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 후이 기록이 분명하지 못해 전개를 1세로 정하고 본관을 영광으로 하여 계통을 이어오고 있다.

 

田 - 하음 전씨

 

시조는 전균. 1453년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벌할 때 공을 세워 하음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담양 전씨에서 갈라져 나와 하음을 본관으로 삼았으나, 북한에만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錢 - 문경 전씨

 

중국 팽성 사람. 황제의 손자인 전옥의 후손이 우리 나라에 귀화하여 시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경 전씨는 전유겸이 사신으로 들어와서 최영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문경으로 내려가 문경 전시의 시조가 되었다.

전씨의 후손으로는 대한민국 초대 사회부 장관과, 1,2,3,5,6,대 민선 의원을 지낸 전진한이 있다.

 

鄭 씨

 

문헌에는 210본으로 되어 있으나 30여 본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정확하지 못하다.

정씨의 원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6촌장 가운데 자산 진지촌의 촌장인 지백호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 정씨는 서산과 낭야 정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백호의 후손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 성씨 가운데 5위에 올라 있다.

 

鄭 - 경주 정씨

 

시조는 지백호. 경주 화산에 내려와 부족 구가이던 삼한 시대의 진한, 사로 등 6촌장 중에 으뜸으로 동남쪽에 자리잡은 진지부의 촌장이 되었다.

기원전 57년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나라 이름을 신라라고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로 인해 건국좌명공신이 되고 서기 32년 유리왕 때 진지부가 본피부로 바뀌면서 낙랑후에 봉해지면서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그의 후손인 정진후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평장사 등 벼슬을 지낸 뒤 경주군에 봉해져 본관을 경주로 하는 정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鄭 - 서산 정씨

 

시조는 인경. 중국 송 나라에서 판장작감을 지낸 웅충의 후예로, 웅충의 손자 신보가 송 나라가 망하자 우리 나라로 망명하여 서산에 정착하였다.

신보의 아들 인경은 고종 때인 1254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렬왕이 세자로 원 나라에 머물 때 수행했으며, 충렬왕이 귀국하여 임금에 오를 때 이등 공신이 되었다.

그의 후손들이 서산을 본관으로 하여 지금 40대에 이르렀다.

 

鄭 - 연일 정씨

 

시조는 습명. 고려 의종 때 충신으로 추밀원 지진사를 지내고 연일현백에 봉해졌다.

원래 연일 정시의 원조는 신라 6부 시대의 지백호인데, 그 뒤의 기록이 없어 지백호의 원손인 종은을 중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습명을 1세로 삼아 지금 33대에 이르렀다.

 

鄭 - 진주 정씨

 

원조는 지백호이나, 기록이 없어 시조를 달리하는 진주 정씨가 8파나 되어 진주 8정 또는 진양 8정이라고 한다.

그 후손들이 영절공 정예를 진주 정시의 시조로 하여 통일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을 뿐이다.

 

鄭 - 초계 정씨

 

시조는 배걸. 고려 현종 때인 101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부상서, 중추원사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유가의 대가를 이루었다.

나중에 초계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사공파, 상도파 등 9개파로 갈라져 40대에 이르렀다.

 

鄭 - 하동 정씨

 

하동 정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계통이 다른 3파가 있는데, 삼한 말기의 정도정, 고려 개국 초기의 공신 정웅, 지백호의 원손 정손위의 3파이다.

그 밖에도 고성 정씨, 곤양 정씨, 광주 정씨, 김포 정씨, 나주 정씨, 낭야 정씨, 동래 정씨, 봉화 정씨, 서경 정씨, 야성 정씨, 영덕 정씨, 예천 정씨, 온양 정씨, 장기 정씨, 전주 정씨, 정산 정씨, 정주 정씨, 청산 정씨, 청주 정씨, 함평 정씨, 해주 정씨 등이 있다.

 

丁 - 압해 정씨

 

시조는 덕성. 본래 당 나라 문종 때 대승상을 지냈고, 무종 때 대양군이 되었으나 선종 때 압해로 밀려나 살다가 우리 나라로 건너왔다.

영광파, 창원파, 나주파, 의성파 등으로 갈라졌다.

 

程 - 하남 정씨

 

시조는 정사조. 중국 황제 헌원의 후손으로 그의 138대손인 사조가 노국 공주를 따라 우리 나라로 들어와 고려 충정왕 때 전중시어사를 지냈고, 공민왕 때 한산군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정사조의 고향인 중국 하남을 본관으로 삼아 46대에 이르렀다.

 

諸 - 철원 제씨

 

시조는 제갈충. 중국 제각무후량의 증손자로 13세 때 신라로 들어와 지리산 기슭에 정착하였다.

그 뒤 고려 현종 때 후손인 제갈영이 제갈홍과 제갈형 두 아들을 두었는데, 현종이 큰아들 제갈홍은 남양군에 봉하여 제씨 성을, 작은 아들 제갈형은 낭야군에 봉하여 갈씨 성을 주었다.

고려 충선왕 때 제갈홍의 8대손인 제문홍이 공을 세우고 철원부원군이 되어 철원 제씨가 되었다.

 

諸葛 - 남양 제갈씨

 

시조는 제갈규. 중국 사람으로 우리 나라로 망명하여 지리산 기슭에 정착하였다.

그의 후손들이 제갉의 고향 남양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제갈규의 원손인 공순이 우리 나라로 건너왔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제씨와 갈씨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趙 씨

 

문헌에는 210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고려 때의 평장사를 지낸 조상을 원조로 하는 풍양 조씨를 비롯한 15본 정도를 제외하고는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조선 시대 명성을 떨친 명문 가문의 하나로 꼽힌다. 그 가운데서도 풍양, 한양, 양주, 평양, 임천, 백천, 함안, 옥천, 횡성 조씨 등이 유명하다.

 

趙 - 백천 조씨

 

시조는 지린. 송 나라 태조의 손자로 난을 피해 우리 나라로 들어와 황해도 백천에 정착하였다.

고려 현종 때 참지정사에 올랐고, 그의 아들 양유는 덕종과 정종 때 판위위사승 벼슬을 지낸 뒤 문하시중으로 백천군에 봉해져 백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 뒤 42대에 이르고 있다.

 

趙 - 양주 조씨

 

시조는 잠. 고려 시대 양주 호장통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은 없고, 1453년 정유재란 때 후손들이 잠을 시조로, 본관을 양주로 하여 계통을 이어간다.

 

趙 - 옥천 조씨

 

시조는 장. 본래 중국 전욱의 후예로 조부가 주 나라 때 공을 세우고 조성에 봉해지면서 조씨가 되었다고 한다.

조씨가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고려 시대 검교대장군, 문하시중을 지낸 장을 1세로 하였으며, 그의 증손자 원길이 전공판서로 옥천부원군이 되어 옥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趙 - 임천 조씨

 

시조는 조천혁. 송 나라 태조의 손자 기왕의 다섯째 아들로, 서두공봉관 벼슬을 지내다가 태종이 임금이 되자 삼촌 유고와 함께 우리 나라로 와, 이름을 천혁이라 하고 임천에 정착하였다.

그 뒤 강감찬과 함께 거란군을 무찌르는 데에 앞장서 큰 성과를 올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임천백에 봉해지게 되자, 임천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趙 - 풍양 조씨

 

시조는 맹. 어릴 때 이름은 바위. 고려 왕건이 나라를 세울 때 공을 세우고 문하시중평장사 벼슬을 하고 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가 머물러 살던 천마산 기슭에는 왕건 태조를 처음 만났다는 암굴이 있는데, 견성암이라는 절을 세워 암굴을 보존하고 있다.

전직공파, 호군공파, 회양공파 등 여러 파로 갈라졌다.

 

趙 - 한양 조씨

 

시조는 지수. 기록에 의하면 중국 주나라 몽왕이 서언왕을 정벌할 때 그의 할아버지가 공을 세워 조성에 봉해질 때 조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 뒤 후손들이 조선을 세울 때 공을 세우고 많은 공신, 학자들을 배출하면서 본관을 한양으로 하였다.

이 밖에도 김제 조씨, 밀양 조씨, 직산 조씨, 진보 조씨, 태원 조씨, 평산 조씨, 평양 조씨, 함안 조씨, 횡성 조씨 등이 있다.

 

早 - 창녕 조씨

 

시조는 계용. 신라 진평왕의 사위이다. 그의 어머니는 창녕에서 한림학사의 딸로 태어났는데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졌다.

어느날 꿈에 금관을 쓰고 옥대를 한 남자가 나타나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 아기의 아버지는 동해용왕의 아들이다. 아이를 잘 기르면 크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손도 번창할 것이다."

꿈에서 깨어보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뒤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계용이다.

그 아이의 겨드랑이 밑에는 한문으로 조씨 성자가 새겨져 있어 임금께 아뢰어 조씨 성을 하사받고, 뒤에 임금이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周 - 상주 주씨

 

중국 주 나라 37대 임금인 난왕의 후예들이 나라가 망한 뒤 주씨 성을 가졌다고 한다.

주씨는 상주 주씨, 안의 주씨, 철원 주씨, 초계 주씨가 있으나 모두 난왕의 후손에서 갈라졌다.

상주 주씨의 시조는 주이로, 신라 원성왕 때 우리 나라에 왔고, 철원 주씨 시조는 송관으로 당 나라에서 벼슬하다가 신라로 들어왔으며, 초계 주씨의 시조는 주황으로 신라 때 귀화하였다.

 

朱 - 신안 주씨

 

시조는 잠. 중국 전욱의 후세인 조협을 주 나라 무왕이 주국에 봉하면서 주씨 성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 뒤 주자의 후손인 잠이 우리 나라로 건너와 신안 주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뒤 나주, 전주,함흥 등 여러 곳을 본관으로 써 오다가 고종 때인 1902년 상소를 올려 잠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신안으로 통합하였다.

 

池 - 진주 지씨

 

시조는 경. 중국 홍능 사람으로 960년 고려 광종 때 우리 나라로 와 평장사에 이르고, 그 뒤 6대손 종해가 충주에 살면서 문화시랑평장사로 충원백이 되었다.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정하고, 46대에 이르렀다.

 

秦 - 진주 진씨

 

시조는 전욱. 전제의 후손으로 백익이 순제로부터 영씨 성을 하사받았으나, 그의 후손 비자가 진이라는 고을에 봉해져 진씨로 바꾸었다.

진씨의 시조 진상은 공자의 제자로서 우리 나라 문묘에도 올라 있다.

진상의 76대손인 진욱이 고려 때 박사 보리공신이 되어 진주군에 봉해져 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진필명을 시조로 하는 통기 秦씨도 있다. 진필명은 당 나라 태원 사람으로 신라에 와 백제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풍기 땅에 정착하였다.

 

陣 - 여양 진씨

 

시조는 총후. 중국 송나라 때 진수가 주윤 벼슬을 지내다가 난리가 일어나자 우리 나라로 피신하여 여양에 머물러 살았다.

그의 후손인 총후가 고려 예종 때 신호위대장군 벼슬을 하였고, 인종 때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여 여양군에 봉해져 여양 진씨의 시조가 되었다.

 

晉 - 남원 진씨

 

시조는 함조. 10세 때 문장과 도덕에 뛰어났고, 천문과 수학에 조예가 깊다고 소문이 나, 고려 현종이 이를 불러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스승으로 삼았다.

그 뒤 호부상서 벼슬을 하고 진씨 성을 하사받았다. 함조의 후손 석이 고종 때 거란족을 내쫓고 남원군에 봉해져 남원 진씨의 시조가 되었다.

 

車 - 연안 차씨

 

시조 차효전은 유차달의 큰아들이다.

차효전의 7대 할아버지 차승색이 애장왕 때 좌상으로 있어쓴데, 왕이 삼촌 연승이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으로 임금이 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애장왕의 아들 공숙과 함께 헌덕왕이 사냥가는 것을 알고 죽이려다가 발각되었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아들과 함께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해 할머니의 성씨인 양(楊)씨를 모방하여 유(柳)씨로 바꾸었다.

그 뒤 6대손인 유차달이 아들과 함께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유차달은 승상 벼슬에 올랐다.

그 때 임금이 성씨를 바꾼 내력을 알고, 유차달을 그냥 유씨로 있게 하고 아들 효전을 대광백에 봉하면서 연안 차씨로 고쳐주었다.

 

昌 씨

 

본래 중국 성씨로 황제의 아들 창혜의 호손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공주, 아산, 여산 등 5본이 있으며, 전주, 진안, 익산 등지에 50여 가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創 씨

 

삼국사기에 창조리라는 사람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창씨와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

그는 294년 남부대사자로 국상이 되고 대주부르 지냈으며, 296년 모용외의 난을 평정하고 300년에 흉년이 들었는데도 임금이 사치스런 생활을 하자, 은퇴하여 은불인 미천왕을 세웠다고 한다.

아산, 여산, 장성의 3본이 있으며 경기도와 서울에 11가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蔡 씨

 

문헌에 49본으로 되어 있으나, 고려 고종 때 중서시랑평장사 벼슬을 지낸 경평공 채송년을 시조로 하는 평강 채씨와 채선무를 시조로 하는 인천 채씨를 제외하고는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蔡 - 인천 채씨

 

시조 채선무. 고려 중기에 동지사를 지내고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인천에 머물러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인천 채씨의 시조로 삼았다.

그는 고려 말에 벼슬을 하다가 조선이 세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조선과는 관계를 끊었다.

 

蔡 - 평강 채씨

 

시조 채송년. 그의 기록도 정확하지 않다. 채씨는 본래 중국 주나라 문왕이 아들에게 채후를 봉하였으므로 채씨 성을 가졌다.

우리 나라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그는 고려 고종 때 추밀승선 벼슬을 지내고 최향의 난 때 병마사로 난을 평정한 공으로 대장군이 되어 평강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평강을 본으로 삼았다.

 

千 씨

 

천씨는 본관이 97본이나 되지만, 모두 영양 천씨를 원시조로 갈라져 나갔다.

천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서, 시조 천암은 명 나라 초기에 조신 벼슬을 지냈다.

그 뒤 기록이 끊겼다가 천만리를 중시조로 삼아 다시 그 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명 나라 말기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총독 오군수를 지냈다.

천만리는 임진왜란 때 아들 상, 희 형제를 데리고 우리 나라에 와 군량 수송을 맡으면서 큰 공을 세운 뒤, 귀화하여 영양 천씨의 시조가 되었다.

 

楚 - 파릉 초씨

 

시조는 초해창. 명 나라 파릉 사람으로 한림학사를 역임하였으나, 명 나라가 망하고 청 나라가 들어서자 벼슬을 거부하고 1664년 우리 나라로 망명하여 성산백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의 고향 파릉을 본관으로 삼았다.

 

肖 - 제주 초씨

 

시조는 초고도. 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원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귀화하여 제주도에 정착하였다.

스스로 제주를 본관으로 하고 제주 초씨의 시조가 되었다.

 

崔 씨

 

최씨는 문헌상에 326본이나 된다. 최씨는 우리 나라 성씨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씨족이며, 전국에서 4번째로 많은 성씨이다.

신라의 사노(서라벌) 6부촌 중의 하나인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를 모든 최씨의 원조로 하고 있다.

소벌도리의 24대손인 최치원의 윗대에서 여러 본관으로 갈라졌다.

 

崔 - 강릉 최씨

 

시조는 최필달. 최씨의 원시조인 소벌도리의 후예로 보고 있으나, 그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최필달은 고려 개국 때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우고 강릉부원군에 봉해져 본관이 강릉으로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왕건의 사위인 최흔봉을 시조로 하여 계통을 이어오는 강릉 최씨가 따로 있다.

 

崔 - 경주 최씨

 

시조는 최치원. 소벌도리의 24대손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촌장은 모두 천강 사람으로 이, 최, 손, 정, 배, 설로 각각 성씨를 받았다.

후손들이 최치원을 중시조로, 경주를 본관으로 삼아 41대에 이르렀다.

 

崔 - 수성 최씨

 

시조는 최영규. 본성은 김씨였으나 충렬왕 때 수원 일대가 기강이 문란하고 인륜이 퇴폐해지자 임금이 크게 한탄하며 수원을 다스릴 신하를 찾았다.

그대 최영규가 자청하여 백성들을 사랑과 덕으로 다스려 1년이 채 못되어 살기 좋은 모범 지역으로 고쳐싸.

이에 임금이 감탄하며 큰 상을 내리고 수성백에 봉하면서 최씨로 성을 하사하였다.

 

崔 - 전주 최씨

 

시조는 소벌도리의 후예인 순작. 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으로 완주 개국백에 봉해졌다.

본관은 같으나 완산군에 봉해진 균을 시조로 하는 다른 전주 최씨도 있다.

 

崔 - 탐진 최씨

 

시조는 사전. 1126년 권신 이자겸이 권력을 휘두르자 인종과 협의하여 이자겸을 제거하였다. 그 공로로 병부상서가 되고 탐진백에 봉해져 탐진 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금천파, 판서공파, 준양파, 효소파 등 9파로 갈라져 40대까지 내려왔다.

 

崔 - 해주 최씨

 

시조는 최은. 해동 공자로 널리 알려진 최충의 아버지로, 일찍이 해주 목민관이 되어 인정을 베풀고 선정을 하여 이름을 떨쳤다.

글과 문장이 뛰어났고, 덕망이 높았으며 뒤에 판이부사를 지냈으며, 여러 대가 해주에서 살아 해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이 밖에도 간성 최씨, 강화 최씨, 개성 최씨, 계림 최씨, 고부 최씨, 곡강 최씨, 광주 최씨, 낭주 최씨, 동주 최씨, 부안 최씨, 수원 최씨, 아산 최씨, 양주 최씨, 양천 최씨, 연풍 최씨, 영천 최씨, 영흥 최씨, 완산 최씨, 용강 최씨, 용궁 최씨, 우봉 최씨, 원주 최씨, 직산 최씨, 진산 최씨, 청송 최씨, 청주 최씨, 초계 최씨, 충주 최씨, 태인 최씨, 통천 최씨, 한남 최씨, 화순 최씨, 황주 최씨, 홍해 최씨 등이 있다.

 

秋 - 전주 추씨

 

시조는 추엽. 송 나라 고종 때 사람으로 1141년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이 되고, 고려 인종 때 우리 나라에 들어와 함흥에서 살았다.

그의 손자 적이 중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각 대제학 벼슬을 하였다. 추엽의 10대손이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뒤 전주에 살다가 완주부원군이 되었다. 후손들이 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추계 추씨의 계통도 있다.

 

卓 - 광산 탁씨

 

시조는 탁지엽. 문헌에 나타난 탁씨는 32본으로 되어 있으나 광산 탁씨 단본으로 알려져 있다.

탁지엽은 고려 선종 때 학생으로 천거되어 한림학사를 거쳐 태사에 이르고, 광산군에 봉해져 광산 탁씨의 시조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42대손에 이르고 있다.

 

彈 씨

 

본관은 해주와 전주로 되어 있으나, 시조는 분명하지 않다.

옛 문헌에는 없으나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경기도에 4가구, 강원도에 3가구가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한말 무관학교에 탄원기라는 교관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오래된 성씨로 여겨진다.

 

太 - 영순 태씨

 

시조는 태금룡. 발해 나라 진왕의 원손으로 고려 고종 때 김교에서 몽고문을 무찌르고 이겨 큰 공을 세우고 대장군이 된 뒤 영순군에 봉해져 영순 태씨의 시조가 되었다.

 

太 - 남원 태씨

 

남원 태씨는 협계 태씨의 분파이다. 태집성의 9대손 맹례가 단종 때 진사로 화를 입어 함경북도 길주로 귀양을 갔다.

후손들이 그곳에 머물러 살아 맹례를 시조로, 본 고향인 남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太 - 협계 태씨

 

시조는 중상. 천문, 지리, 군사에 능통하였으며 신라 효소왕 때인 696년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태백산 동쪽에서 진 나라를 세웠다.

그의 10대손 태광현은 발해가 망한 뒤 동생과 함께 고려로 들어와 태조를 모시니, 태조가 태씨 성을 주었다.

18대손 태집성은 몽고군의 침략을 막아내고 협계군에 봉해져 협계 태씨의 시조가 되었다.

 

判 씨

 

본관과 시조는 분명하지 않으나 서울과 고양군에 18가구, 북한에 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彭 - 용강 팽씨

 

시조는 팽적. 원래 중국 금릉 사람으로 1351년 고려 충정왕 때 노국 공주가 공민왕과 결혼하여 들어올 때 내각 학사로 수행하여 용강백에 봉해져 시조가 되었다.

 

彭 - 절강 팽씨

 

시조는 팽우덕. 중국 절강 사람으로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중국 부총병서로 동원장사로 뽑힌 아들 신고와 함께 우리 나라에 와 공을 세우고 귀화하였다.

후손들이 그의 고향인 절강을 본으로 정하였다.

 

片 - 절강 편씨

 

시조는 편석용. 명 나라 선종 때 사람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장군이 되어 우리 나라에 왔다.

그의 할아버지 편일이 절강백에 봉해졌다 하여 후손들이 절강을 본관으로 삼았다.

 

平 - 충주 평씨

 

시조는 평우성. 중국 성씨였으나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충주, 선평, 인천, 예산, 가흥, 평원 등 6본이 있으나 충주를 단본으로 하고 있다.

 

表 - 신창 표씨

 

시조는 표대박. 무헌에는 37본으로 되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없고, 신창 표씨 단본으로 여겨진다.

중국 성씨였으나 장, 방, 위, 변, 윤, 진, 감, 황보 등 8성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 960년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고, 신창백에 봉해져 신창 표씨의 시조가 되었다.

 

馮 - 임구 풍씨

 

시조는 풍삼사. 중국 산동성 임구 사람으로 진 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위 나라 때 풍서을 다스리며 풍씨 성을 받았다.

명 나라 태학으로 명 나라의 광복을 도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 나라에 왔다. 후손들이 그의 고향인 임구를 본관으로, 그를 시조로 정하였다. 지금 40대에 이르렀다.

 

皮 - 괴산 피씨

 

시조는 피득창. 홍천 피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피득창은 조선을 세우는데 공을 쌓고 병조판서 등을 지낸 뒤, 전라감사를 거쳐 괴산에 머물러 살았다.

후손들이 괴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皮 - 홍천 피씨

 

시조는 인선. 주 나라 때 경사인 번중피의 제일 아랫자인 피를 따서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때 원 나라에서 금오위상장을 지낸 피위총이 귀화하여 병부시랑을 지냈고, 그의 아들 인선이 정당문학, 좌복사를 지낸 뒤 홍천군에 봉해져 그를 시조로, 홍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弼 씨

 

대흥, 전주 2본으로 되어 있으며 대흥 필씨는 무과에 급제한 필몽량을 시조로 하였다. 그의 후손 필성뢰는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사성을 지냈다.

전국에 73가구가 있으나 65가구가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河 - 진주 하씨

 

시조는 하공진. 고려 현종 때의 항사 공시를 지냈고, 문종 때 상서공부시랑동, 평장사 등을 지냈다.

1010년 거란이 고려를 침범해 들어오자 강화 교섭사로 적진에 들어갔다가 인질로 잡혀 곤욕을 치렀다.

그 뒤 1451년 하연이 처음으로 족보를 펴내 계통을 정리하였다.

그의 8대손이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이다.

 

韓 - 청주 한씨

 

시조는 한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한란의 집 앞을 지나갈 때 칼을 차고 나가 뒤를 따라 용맹과 지혜로 공을 세우고 고려를 세우는 개국 공신이 되었다.

본래 기자의 후손이나, 기자의 41대손인 예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와 금먀현에서 마한을 세우고 스스로 한왕이라 하여 한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31대손인 지원의 셋째 아들 영이 청주 지방에 살아서 청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양철공파, 문정공파, 충간공파 등 10개 파로 갈라져 42대에 이르렀다.

 

韓 - 곡산 한씨

 

시조는 한예. 중국 송 나라 때 8학사의 한 사람으로 1206년 고려 희종 때 우리 나라에 와서 문하시종평장사로 곡산부원군에 봉해져 곡산을 본관으로 하는 한씨 시조가 되었다.

 

咸 - 강릉 함씨

 

문헌에는 60본이나 되지만, 단본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는 함규. 고려 개국 공신으로 몽고가 침략할 때 대장군으로 나가 공을 세웠으며 당 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던 함혁의 후손이다.

그의 후손들이 강릉으로 내려가 살았으므로 강릉이 본관이 된 것이다.

 

許 씨

 

허씨는 기록상으로는 59본이나 되지만, 가야국 수로왕비 보주 황태후 허씨가 인도 지방 군주의 공주로 16세 때 큰 배에 석탑을 싣고 경남 창원 앞 바다로 들어와 수로왕이 왕비로 삼아 열 아들을 낳았다.

수로왕은 둘째 아들에게 어머니 성씨를 따르게 하여 허씨가 생겼다.

 

許 - 김해 허씨

 

시조는 허염. 김수로 왕의 둘재 아들 허황목의 35대손이다. 고려 문종 때 태어나 벼슬하고 가야군에 봉해져 시조가 되었다.

 

許 - 양천 허씨

 

시조는 허선문. 김수로 왕의 30대손이며, 고려 때 공암에 머물면서 농사 일에 힘써 많은 양곡을 창고에 쌓아 두었는데, 때마침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하자 군량미를 공급해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태조가 그의 공을 크게 칭찬하며 양천 땅을 다스리게 하여 양천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許 - 하양 허씨

 

시조는 허강안. 김수로 왕의 33대손이며 고려 현종 때 호부랑장을 지냈다.

그 뒤 하주에서 살았는데, 지방 이름이 하양으로 바뀌면서 본관도 하양이 되었다. 지금 50대에 이르렀다.

 

玄 씨

 

기록에는 106본이나 되지만 연주, 창원, 성주, 순천 현씨를 제외하고는 기록이 분명하지 못하다.

현씨는 모두 연주 현씨의 시조인 현담윤의 후손이라고 한다.

 

玄 - 성주 현씨

 

시조는 현구. 고려 때 대장군 현담윤의 9대손이다.

조선 세종대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부군수를 지내고 성주에 살아 성주가 본관이 되었다.

 

玄 - 순천 현씨

 

시조는 현원고. 현담윤의 손자이며 영동정 벼슬을 지낸 뒤 순천부원군이 되어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순천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지금 39대에 이르고 있다.

 

玄 - 연주 현씨

 

시조는 현담윤. 고려 의종 때 대장군을 지내고 명종 때 조위총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문하시랑 평장사가 되어 연안군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연주로 삼았는데, 연안 현씨라고도 한다. 지금 40대에 이르렀다.

 

玄 - 창원 현씨

 

시조는 현덕유. 현담윤의 아들로 고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 참지정사 등 벼슬을 하고 창원군에 봉해져 창원 현씨의 시조가 되었다.

 

刑 - 진주 형씨

 

기록으로는 14본이 있으나 진주 단본으로 내려온다. 시조는 형웅. 당 나라에서 파견한 8학사의 한 사라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벼슬하였다.

그 뒤 15대손인 공미가 고려 충렬왕 때 도원수로 왜구를 무찌르고 진양군에 봉해져 진주 형씨의 시조가 되었다.

 

胡 - 파릉 호씨

 

시조는 호극기. 중국 건녕 무인 호견의 후손으로 명 나라 때 한림 학사로 있다가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가 귀화하였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그의 고향을 본관으로 삼았다.

 

洪 씨

 

기록에는 59본으로 되어 있으나 남양, 부계, 홍주, 풍산 홍씨를 제외하고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고구려 영유왕 때 당 나라에서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귀화한 당홍과 토홍으로 구분된다.

당홍은 신라 선덕여왕 때 태자태사를 지냈고, 토홍은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을 지냈다.

조선시대 500년을 통해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洪 - 남양 홍씨

 

시조는 홍천하. 고구려 영유왕 때 당나라에서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건너와 유학을 가르치고 문화를 깨우쳤다.

당성백에 봉해졌고 태자태사가 되었다.

고려 개국 공신으로 벼슬을 지낸 홍은열을 중시조 1세로 하고 남양을 본관으로 삼아 지금까지 59대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홍선행을 시조로 하여 41대에 이른 계파가 따로 있다.

 

洪 - 부계 홍씨

 

시조는 홍좌. 한양에 살다가 부계로 내려가 부계 홍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후손들이 부계를 본관으로 삼아 29대에 이르고 있다.

 

洪 - 풍산 홍씨

 

시조는 홍지경.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을 지낸 뒤, 풍산에 살면서 후배들을 가르쳤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풍산을 본관으로 삼아 32대에 이르렀다.

 

洪 - 홍주 홍씨

 

시조는 홍규.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는데 크게 공헌하고, 홍주부원군이 되었다.

후손들이 홍주 홍씨의 시조로 그를 모시고, 본관을 홍주로 정해 45대에 이르렀다.

 

黃 씨

 

기록에는 163본으로 되어 있으나 후한 시대 학자였던 황락을 원조로, 그 후손들이 여러 계파로 갈라졌다.

신라 유리왕 때 베트남 지방으로 사신을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평해에 표류하여 자리를 잡고 살았다.

황락의 후손에 갑고, 을고, 병고 3형제가 있었는데, 갑고는 평해군에, 을고는 장수군에, 병고는 창원군에 봉해져 3파로 나뉘었다.

 

黃 - 성주 황씨

 

시조는 황세득. 고려 문신 대상공 황석주의 17대손으로 성주에 정착하여 성주 황씨의 시조가 되었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장흥부사가 되고 선조 25년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제사 이순신 장군을 도와 선봉이 되어 고금도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함대의 선봉으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다음 해에 전사하였다.

 

黃 - 창원 황씨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선조 또는 시조를 달리하여 8파로 나뉘어 있다.

시중공파, 공희공파, 호장공파, 존우공파, 예빈동정공파, 전서공파, 우용공파, 규정공파 등이다.

 

黃 - 평해 황씨

 

원조는 황락. 중국 황제의 후예로서 28년 한 나라에서 건너와 평해이 월송사에 도착, 자리를 잡고 갑고, 을고, 병고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중 큰 아들이 평해 황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뒤 고려 때 태자검교를 지낸 온인을 1세조로 하여 지금 41대에 이르고 있다.

이 밖에도 덕산 황씨, 상주 황씨, 우주 황씨, 장수 황씨, 제안 황씨, 항주 황씨, 황주 황씨, 회덕 황씨 등이 있다.

 

皇甫 - 영천 황보씨

 

원조는 황보경. 그의 후손인 금강성 장군 황보능장이 영원 부원군에 봉해져 영천 황보씨의 시조가 되었다.

 

后 - 당인 후씨

 

시조는 알려지지 않고 본관만 당인으로 나와 있다.

본래 중국 성씨로 한 나라 때 후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로 들어와 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강원도 회양군에 3가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탐라국 삼성혈

 

제주도는 옛날 탐라국이라 하였다. 탐라국에는 처음에 고씨, 부씨, 양씨의 삼성이 있어서 이들 삼성이 탐라국을 다스렸다. 고씨, 부씨, 양씨의 삼성 시조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삼성혈의 전설로 유명하다.

탐라국에는 처음에 고을라, 부을라, 양을라 이렇게 3신이 한라산 기슭 북쪽에 있는 모홍혈에서 솟아나왔다. 이들 삼성은 사냥을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동쪽으로부터 큰 상자 하나가 떠내려오는 것이었다. 고을라, 부을라, 양을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큰 상자를 끌어내어 뚜껑을 열어보았다. 상사 속에는 세 사람의 예쁜 아가씨와 쌀, 보리, 조, 콩 등 오곡의 씨앗, 그리고 망아지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삼신은세 사람의 아가씨를 아내로 삼고, 오곡의 씨앗을 뿌려 농사를 짓고,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탐라국의 개국설화이다.

 

 

출처  http://hanja365.com.ne.kr/name_content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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