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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이라는 이름의 주춧돌
이방원(0730)
태종 어진
이성계는 몇 가지 면에서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첫째 그는 여진족과 왜구를 토벌하는 전장(戰場)에서는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지만 전쟁터로 돌아다니느라 학문을 익히지 못한 무장(武將)이었다. 용맹은 뛰어나지만 지략(智略)이 부족한 무식한 군인에 가깝다. 부패한 고려를 엎어버리고 새나라를 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면 그에 따른 정치적인 식견과 정세를 정확하게 분석하여 대처할 수 있는 책략(策略)이 있어야 하는데,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 태조가 된 이성계는 왕위(王位)를 물러줄 후계자를 정하는 고유의 권한을 바르게 행사하지 못했다.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서 결국에는 보위에 오르지도 못할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쿠데타를 통해 새나라를 세운 군주가 베갯머리송사에 휘말려 들었다는 것은, 현명한 처신을 한 것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대통을 누가 이었을 때 신흥국인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 심사숙고(深思熟考)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결코 왕조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왕자를 제외시키고,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열한 살 짜리를 세자로 책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려 왕조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대안을 명분으로 개국한 조선은 강력한 왕권을 갖춘 중앙집권제를 이룩할 필요가 있었다. 명분이 약한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세웠기 때문에 왕권의 약화(弱化)는 곧바로 왕조의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런데도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국공신들이 왕권을 제약하려고 했을 때 이에 맞서지 못했다. 자신을 왕으로 옹립해 준 사람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그것은 이성계가 국가를 반석위에 올려놓겠다는 야망이나 능력이 없었거나, 부족한 늙은이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이방원(李芳遠)은 달랐다. 그는 태조 함흥 본궁에서 이성계의 5남으로 태어났으며, 자는 유덕(遺德)이다. 문과에 급제한 이방원은 이론적으로 무장이 되어 있었고, 상황의 추이(推移) 변화를 주시하는 관찰력을 갖추고 있었다. 요즘말로 하면 방원이 우수한 성적으로 행시에 패스한 다음 합격통지서인 사령장(辭令狀)을 받았을 때, 태조는 너무 기뻐서 그것을 몇 번이고 읽게 했었다고 한다. 방원의 과거급제는 '군인 집안'이라는 열등감을 확 씻어준 일대 사건이었다. 그런 이방원은 어느 때부터인가 위풍당당한 새나라의 왕이 되어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정치를 펴고 싶다는 야망을 은밀하게 키워 왔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이방원이 아니었다면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국하는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보위에 앉힌 사람은 이성계다. 그러나 공양왕은 이성계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허수아비로 살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공양왕은 즉위 4년이 되던 해 은밀하게 정몽주와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을 결집시킨 다음 이성계를 제거하는 공작을 진행시켰었다. 이때 중국에서 돌아오는 왕자를 마중하기 위해 갔던 이성계가 황해도에서 낙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성계가 중앙 정계에서 장기간 공석 중인 틈을 이용하여, 정몽주는 재빠르게 정도전을 귀양 보내는 등 친이성계파 숙청을 단행하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방원은 지체 없이 황해도로 달려가, 누워있던 이성계를 개경으로 모셔온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이성계는 감히 누가 나를 건드리겠느냐는 자만에 빠져 정몽주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성계를 대신하여 나선 것이 이방원이다. 그는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를 주고받는 것으로 정몽주의 의중을 읽는 과정을 거친 다음, 함께 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아버지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 위에서 쳐 죽이는 냉혹한 결단을 내린다. 25세 청년의 이런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단호한 결정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분기점이 되었다. 정몽주가 시해(弑害)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후 불같이 화를 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성계는 사전에 상의를 했다면 반대했을 것이 뻔하다. 정몽주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내쳐졌다고 가정하면, 그때서야 대사를 그르쳤다는 것을 알게 될 정도로, 이성계는 대처가 느린 낙관주의자다.
이방원이 조선 건국에 별다른 공헌이 없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방원은 이성계와 같이 전장(戰場)을 누비지도 않았고, 중요한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릴 때 적극적으로 참여할 기회도 없었다. 이방원이 어느 정도 성장했을 무렵에는 이성계가 중앙 정계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었고, 주위에 정도전과 조준 같은 브레인들이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방원은 아웃사이더로 남아 있어야 했었다. 그런 점만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뒤에서 새로운 나라를 열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온 숨은 야망가였다. 그런 이방원에 의해 연출된 정몽주 살해사건을,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이방원이, 어떻게든 아버지 눈에 들고 싶은 충정에서 저지른 행동이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정몽주의 목을 따서 거리에 내건 사건은 상황을 급반전시킨 확실한 모멘템(Momentum)이 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이것만으로도 조선 건국의 장벽을 제거하는 결정적인 공을 세운 것이었다.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정몽주가 사라지자 공양왕은 물론 고려 권신들 중 누구도 더는 이성계에게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로부터 선양(宣揚) 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 그런데도 이성계는 아들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정도전 같은 공신(功臣)들의 의견만을 수렵, 그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을 통해 조선의 태조로 등극한 것이었다. 이방원에게는 백성의 원성을 듣는 기피인물로 치부하여 은인자중(隱忍自重)하라는 부당한 조처를 취했다. 이방원은 부자간이니까 일단 참았지만, 속으로는 또 하나의 반전 카드를 이때부터 준비한 것이었다.
이방원이 차지해야 할 공적(功績)을 독식한 정도전은 이론과 책략이 부족했던 군바리 출신의 이성계를 부추겨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한다. 왕도정치는 중국의 고대 성왕들인 요, 순, 우임금, 주나라 문왕, 무왕의 정치를 재현하는 것으로, 왕이 백성들을 위해 덕치(德治)를 베푸는 정치를 말한다. 왕도정치에서의 왕권(王權)은 여러 부족들의 권한과 이견을 조정하는 범주를 넘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정도전은 도평의사사를 만들어 고대 부족 연합이 했던 역할을 대신토록 하였다. 이것은 도평의사사에서 결의한 것을 재가하는 권한만을 갖는 왕권에 비해, 실질적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신권(臣權)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이거야말로 죽 쑤어 개 준 꼴이었다. 이성계는 도평의사사의 출현을 제지하지 못했지만, 현실 정치의 권모술수와 정치적 계산에 밝았던 이방원은 왕권을 위협하는 신권의 출현을 좌시(坐視)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만약 태조 이성계가 정치적 야망과 식견을 갖춘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한 다음, 이방원과 정도전이 협력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조정자로써의 역할을 포기했기 때문에, 이방원은 왕권강화의 걸림돌이 되는 개국공신파들을 숙청하는, 또 한 번의 쿠데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성계가 제 역할을 다했다면 이방원이 연출하고 주연한 골육상잔(骨肉相殘)의 숙청사는 조선이라는 신흥국 무대 위에 올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이방원이 함으로써 왕권 강화는 엄청난 대가를 치룬 후에야 결실을 맺게 된 것이었다.
이때 정도전을 위시한 개국 공신파와 방석 방번 등을 제물로 받친 것은 오히려 작은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순리에 따르지 않고, 찬탈(簒奪)의 형식을 빌려 해결한데 따른 대가는, 고스란히 조선 왕조 전 기간을 통해 치러야 하는 빚으로 남게 된다. 이점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도전과 이방원이 외교정책에서 이견(異見)을 보였었다는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창출한 군부 정권은 처음 명나라에 친명(親明) 정책을 표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조선 왕조를 세운 뒤에도 한동안 바뀌지 않았었다. 그러나 잠잠하던 명나라가 조공(朝貢)의 양을 늘릴 것과, 철령 이북 땅의 소유권을 요구하는 식으로 압력을 가해오자, 정도전은 명나라의 부당함에 맞서 일전(一戰)을 불사할 각오로 군대를 양성하기에 이른다. 강경책을 편 근거는, 왕조의 기틀이 잡혀 얼마든지 명나라와 힘으로 맞설 수 있다는 판단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달리 왕권이 아직도 안정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생각한 이방원은, 명나라를 자극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이라고 여겼었다.
정도전은 신권을 강조한 내치(內治)와 자주를 표방한 외치(外治)에서 다분히 이상주의적 노선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이방원은 지극히 현실주의적 사고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것은, 대내적으로 보면 왕권의 강화를 꾀한 것이 되자만, 대외적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자주권을 포기한 것을 뜻한다. 태종이 된 이방원은 보위 계승을 추인 받는 과정에서, 명나라에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시작된 사대주의는 조선 왕조 내내 계속되었다.
이성계는 마음만 먹었다면 정도전과 이방원이 손을 잡을 수 있도록 중재(仲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게만 되었다면 적당한 선에서 왕권과 신권의 갈등이 봉합 되었을 것이고, 인명 살상도 피할 수 있었고, 비굴한 사대주의의 멍에를 뒤집어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조선 왕조 5백년에 걸쳐 중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기는 데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 되었다. 그것은 몇 사람의 목숨 값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막대한 것이었다. 그리고도 수백 년에 걸쳐 살다간 전체 조선인의 상처받은 자존심은 결코 돈으로 보상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엄청난 상실도 기껏 나라를 열어 놓고는 왕권 강화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이성계의 무능이 낳은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태종은 피를 본 다음 그렇게도 원하던 보위에 올랐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잘된 것은 아니었다. 또 한번의 거친 저항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 즉위 초 태상왕으로 물러났던 이성계가 전국 곳곳을 떠돌아다니다가, 자신의 토착적 기반이었던 함흥 지역에서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실록에는 그것을 '조사의의 난'으로 기록해 놓았지만, 조사의는 이성계가 내세운 대리인일 뿐이고, 이 난의 실질적인 막후 조종자는 이성계였다. 초기 조사의의 난은 정치적 명분에 힘을 실어주는 태상왕의 존재에다가 강력한 함흥의 군세가 합쳐짐으로써 제법 맹위(猛威)를 떨쳤었다. 위기의 순간 태종은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웠던 이숙번을 데리고, 아버지를 상대로 친정(親征)에 나서는, 조선왕조사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초유의 막장 드라마를 연출한다.
이성계는 여말(麗末)에 출전했던 모든 전투에서 불패(不敗)한 명장이지만, 부자간의 전투에서만은 이기지 못했다. 그 전투에서의 패배가 이성계 인생의 가장 쓰라린 패배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을 상대로 이겼더라도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기엔 너무 늦었기에, 결국 조사의의 난은 이성계가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벌인 화풀이적 성격이 짙은 난이었다. 그랬더라도 패자는 굴욕감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이 전투에서 지는 바람에 이성계는 돌아갈 수도 없었고, 언제까지나 함흥에 남아 있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에 처하게 된다. 체면상 안 가겠다고 튕기는 가운데 불거진 것이 이른바 함흥차사(咸興差使)다. 생떼 같은 아들과 사위, 동지들을 다 쳐 죽인 후레자식 이방원에게 너죽고 나죽자고 덤볐다가 개박살이 난 이성계로써는, 환궁(還宮) 설득의 사명을 띠고 오는 사신들을 살려서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무학대사의 중재로 부자간의 갈등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봉합된다. 그러나 태종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을 어느 때부터 조금씩 내치에 반영시키게 되는데, 그에 따른 폐해가 장난이 아니었다. 가령 태조 이성계는 원래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조선은 처음부터 숭유억불 정책을 노골적으로 편 것이 아니다. 정도전의 억불 요구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으며, 신덕왕후 강 씨가 죽었을 때는 대궐에서 멀지않은 곳에 정릉을 조성하고 원찰(願刹)을 세운 다음 명복을 빌었던 독실한 불자(佛者)였다. 태종은 그런 아버지에 반항하여 불교 옹호정책에 반기를 들고, 사전(寺田)을 몰수하고, 승려들을 탄압했었던 것이다.
태종은 1차의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웠던 민무구 민무질에 이어 셋째와 넷째 처남인 민무휼과 민무회에게 마저 사약을 내린 바 있다. 네 아들이 다 죽임을 당하자 장인 민제와 장모 안 씨가 화병을 얻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떴다. 태종비 원경왕후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사랑하던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14세 어린 나이로 요절하자 원경왕후는 친정부모 형제들과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교에 귀의한다. 그러자 원경왕후와 사이가 극도로 나빴던 태종은 부녀자들이 절을 찾아가서 불공을 드리는 것을 금하는 법을 제정반포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숭유억불이 깊이 뿌리를 내렸고, 그로부터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 폐불(廢佛)이 진행된다.
조선의 배불정책은 종교탄압의 차원을 넘어서서 유래를 찾기 힘든 인권유린으로 이어졌으며, 여말의 불교 폐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숭유(崇儒) 정책의 폐해를 낳았다. 거기다가 이방원의 무리한 왕권 강화는 엄청난 인권 유린을 희생의 제물로 받치기를 강요했다. 정도전은 그런 것을 염려하여 왕권을 제한하려 했었던 것이다. 적서(嫡庶) 차별이나 과부 재혼 금지법 같은 악법은 태종 이방원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시발점이다.
원하고 또 원하던 보위에 오른 국왕답게 태종은 정치를 아주 잘 한 편이다. 연로(年老)하고 이론적인 무장이 되어 있지 않았던 태조 이성계는 똑똑하고 코드가 서로 잘 맞았던 정도전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다 시피 했었다. 그런 정도전은 국가 체제를 채 갖추기도 전에 거세되었고, 2대 정종은 자리만 지키다 물러난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조선이라는 국가의 제도적 기틀을 만든 사람은 태종이다. 그는 왕족은 물론 지방 토후 세력들이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고, 전제를 개혁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정책을 착오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시켜 확실하게 마무리 지었다.
태종의 사대주의도 굴욕과 막대한 비용만을 일방적으로 지불했다고 규정해서는 안된다. 명나라로부터 의학과 각종 서적을 비롯한 선진화된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전체적으로 고려시대보다 선진화시켰기 때문이다. 일개 컴퓨터가 아니라 한 나라를 업그레이드 시키는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 태종은 적어도 비용을 탓하며 빗장을 닫아 건 근시안적인 쇄국주의자는 아니었다.
집권 과정의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고려 시절의 정치적 성향이 맞지 않는 보수적인 인물들까지 대거 포섭해서 정국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빠른 기간 내에 나라를 안정시키고 육조직계제를 정착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조선이라는 신흥국의 각종 법령과 통치기구를 만들어 놓은 것만으로도 태종은 큰일을 한 것이었다. 개국 공신파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을 통해 등극한 태조와는 달리, 태종은 스스로 쟁취하여 천신만고 끝에 보위에 오른 준비된 국왕이었다. 그런 만큼 국정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여 여러 위업을 달성했었고, 정치 부분만을 떼어내어 평하면 성적표도 조선 전체 국왕 중 최상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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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바이오코드는 0740이다. G07 코드에는 걱정과 의심이 들어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섯 개의 불 이 다 켜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하나가 꺼진 것이 07이다. 당연히 07은 왜 불이 꺼졌을까 의심하게 된다. 의심은 잘못될지 모른다는 걱정과 경계심을 유발시킨다. 힘을 가지고 있던 이성계는 자신을 믿고 낙관적일 수 있었지만, 07코드의 이방원은 의심의 눈초리로 상황을 주시하다가, 정몽주의 의중을 알게 되자. 전광석화처럼 그를 제거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빠른 일처리는 S30에서 나오는 것이다.
태종은 즉위 초에 사병을 철저하게 분쇄 흡수하여 나라의 정규군으로 만들었다. 사병을 동원하여 1, 2차 왕자의 난을 성공시키고, 보위에 올랐었던 태종은, 사병을 용납하면 언제 어느 때,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병의 정규군화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노리고 추진된 것이었다. 이에 앞서 시행되었던 정도전의 사병혁파 정책은 실패했었지만 태종은 확실하게 매듭을 지었다. 사병혁파의 성공은 의심이 많았던 태종이 위험 요소를 방치하지 않고, 철저하게 봉쇄 시켰다는 것을 알려 준다.
태종은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고, 대간과 사관 등 오늘날의 사정기관이나 언론기관에 해당하는 부처에 상당한 힘을 실어 주었었다. 간관의 비판에 시달리던 대신들이 그들의 활동을 제한하려 했지만, 태종은 스스로도 빗발치는 상소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언로(言路)를 탄압하지 않았다. 태종은 이렇게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걔네들이 없으면 사악한 놈들을 어떻게 걸러내느냐고.”
태종이 사간원을 활성화시켰던 것은 반정(反正)을 꿈꾸거나 역심(逆心)을 품은 자들을 색출해 내는 길을 열어놓기 위함이었다. 이 역시 의심병과 관련이 있다.
태종은 조선 역대 왕 중 최고의 야심가, 지략가, 정력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용맹과 지략과 정력이 여법하게 써졌다면 조선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07코드의 태종은 일평생 모든 주변 사람들을 믿지 않는 의심의 감옥에다 가두어 버렸다. 이런 스트레스 반응은 자신이나 의심을 받은 사람들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태종은 10명의 부인에게서 12남 17녀, 도합 29명의 자녀를 두었다. 조선 역대 왕중 랭킹 1위다. 그가 그렇게 많은 부인과 자녀를 둔 것도 외척의 세도를 우려하여 권력을 분산시켜놓겠다는 의심병과 맞닿아 있다.
07과 30의 결합은 자체로 합이다. 합이기 때문에 매사 낙관적이고, 어려움을 모르며, 위기 역시 즉각 느끼지 못한다. 긍정적인 자세는 좋으나 대비하고 준비하는 습관이 모자란다. 그런 중에서 예측하지 못한 행동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주변 사람들을 놀래게 만든다. 평소 상황을 안이하게 인식하거나 의심되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경솔한 행동을 잘 했기 때문에, 이성계는 아들이 정몽주를 죽였을 때, 또 그런 행동을 한 것으로 판단하여 화를 낸 것이었다. 그 만큼 이방원의 성질이 급해서, 망쳐 놓은 사례가 많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이방원이 정몽주를 의혹의 눈으로 주시하다가 기습적으로 죽인 사건만은, 경솔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개국을 위해서는 꼭 필요할 때, 했어야 할 일을 한 것이었다. 합의 조합에서 오는 안이한 일처리 보다, 의혹의 시선으로 지켜본 07의 힘이 더 강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떻든 0730은 약간의 확신만 들어도 실행에 옮겨버리는 빠른 실천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경솔할 때가 많다.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일을 벌여 대사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심사숙고하고, 준비를 많이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방원의 정몽주 제거는 준비하면 오판하지 않는다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0730코드는 사람들과 잘 화합하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을 때는 과격하게 대응한다. 따라서 너무 쉽게 화를 내거나, 확실하지 않은 작은 일을 근거로, 상대를 의심하는 습관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G07이 의심이 많은 것은 완벽을 향해 다가가려는 몸부림 때문인데, 그 몸부림에 주변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 0730은 다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G07의 특성 때문이다. 0730은 아주 예민한 귀를 가졌으며, 감정의 미묘한 차이를 감지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태종은 왕권에 위협이 되는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은 가차 없이 제거하는, 0730의 과격성을 여지없이 보여 주었다.
목인해라는 인물이 종친이었던 조대림이 역모를 꾀하였다는 무고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태종은 목인해의 고변 이전에 이미 무고라는 것을 알았었다. 그런데도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가, 역모 고변이 일어나자 조대림을 구금시킨 다음, 맹사성으로 하여금 국문을 시켰다. 쉽게 입을 열지 않기 때문에 국문을 할 때는 곤장을 치거나 주리를 틀게 마련이디. 그런 후 태종은 친국(親鞫)을 통해 조대림이 무고하다는 걸 직접 밝힌 후, 맹사성에게 무고한 종친을 억울하게 때려 왕실을 능멸했다는 죄목을 덮어 씌웠다. 맹사성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두고 볼 수 없었던 조정 중신들이 상소를 올려 맹사성을 변호하자, 태종이 짐짓 살려주라는 어명을 내리는데, 그 결정이 조금만 늦었으면, 맹사성의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사형집행을 중지하라는 어명은 망나니의 칼이 맹사성의 목에 닿기 바로 직전에 전달되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풀려난 맹사성은 오금이 저려서 더는 콧대를 세울 수 없었다. 의심 많은 고약한 군주의 똑똑한 신하 길들이기 작전은 이렇듯 기상천외하였다. 0730의 상황을 가지고 노는 복잡한 노림수와 잔인함이 엿보이는 일화다.
0730은 G05, 06, 07, 08을 만나면 대체적으로 화합이 되고, 의사소통이 원활해지는 편이다. S25, 30, 35, 40도 그러하다. 다만 G12, 01, 02, 11 하고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서로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S60, 05, 10, 55도 그러하다. 정몽주는 0160이고 이성계는 1150이다. 두 사람 다 이방원과는 소통이 잘 되지 않는 겨울 코드들이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거나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해버린 것을 바이어코드로 풀면, 두 사람이 다 0730의 반대쪽에 있다가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겨울의 권위와 느림은 여름의 신속성을 당해낼 도리가 없다. 0730의 무기는 신속함이다.
0730인 영화배우 니콜 키드먼은 0230의 탐 크루즈와 『폭풍의 질주』라는 영화에 함께 출연한 것을 계기로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었다. 이후 10년간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살았는데,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을 끝으로 두 사람은 갈라섰다. G02와 G07은 거리가 멀다. 자유를 추구하는 0730은 0230에게 순종의 미덕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 장교의 딸로 태어난 0730의 조제핀(Joséphine)은,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 파리의 사교계에 진출하고, 그 곳에서 자신보다 어린 젊은 장교 0140의 나폴레옹 1세를 만났다. 1796년 3월에 두 사람은 결혼하는데, 조제핀은 쾌활하고 남에게 호감을 주는 여인이었으나, 사치스럽고 낭비가 심할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과의 후사가 없던 탓으로, 1809년 05에 이혼한다. 조제핀의 G07과 나폴레옹의 S40은 이웃해 있어 유사하지만, 나폴레옹의 G01은 조제핀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대로 0140의 나폴레옹 역시 조제핀의 0730을 오래도록 사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0730은 많은 것을 감정으로 시작해서 감정으로 끝낸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시킨다. 따라서 의심할 것 없이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 보여주면 0730은 쉽게 설득 당한다. 0730은 한순간도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는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0730은 시간을 주면 의심을 하기 쉽기 때문에 속전속결(速戰速決)로 해결해야 한다. 선물을 해야 한다면 아주 조심스럽게, 꼭 필요한 것을 이유까지 설명해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물한 의도를 알아내려는 의심의 그물에 걸려 들어, 오히려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0730을 공략해야 한다면 시간이 가장 큰 무기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0730은 매우 폭발력이 있지만 항상 순간적이다. 즉 긴 싸움에는 지친다. 따라서 속전속결로 제압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시간을 넉넉히 갖고 대응하는 것이 이기는 비결이다. 시간을 끌면 제풀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면 의심을 하느라 시간을 지체시켜 그르치게 만들 수 있다.
0730은 무엇이든 의심한다. 태종 이방원은 왕권에 도전하거나 왕권을 위협하는 무리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응징했다. 태종은 혁명 동지인 이숙번을 귀양 보내서 중앙 정계에서 영원히 강제 퇴출시켰는데, 이숙번이 특별한 불충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숙번이 자기 공을 내세워 왕권에 순종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서 그렇게 한 것뿐이었다. 태종의 공신들 중 숙청의 칼날을 피하고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은 조영무와 하륜 정도다. 조영무는 처신을 잘해서 위기 때마다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갈 수 있었고, 하륜의 경우엔 나이가 많았던 점이 어드벤테이지가 되었다는 평이다.
태종이 처남들 네 명을 모두 죽인 것도 원경왕후의 팔을 자르려는 의도보다 외척 세도정치의 출현을 원천 봉쇄시킨 면이 강하다. 태종이 세종대왕의 장인인 심온(沈溫)과 그의 아우인 심정을 불경죄로 사사한 것도 세도를 차단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처남을 죽인 의심병은 사돈이라고 해서 예외를 둘 리가 없다. 아들인 세종이나 며느리를 생각한다면 사돈인 청송 심 씨 형제를 이런 식으로 박살 낼 수는 없는 일이다. 태종은 권력 핵심부에 접근이 용이했던 외척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수준의 의심병을 가지고 있었다.
태종은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놓은 주춧돌 위에다 조선이라는 집을 지었다. 주춧돌이 튼튼하기 때문에 그 집안에서 잔인한 인권 유린이 도출되고, 폭발할 것 같은 불만세력이 팽배했어도 오백년이나 붕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백년 창업의 주춧돌이 의심병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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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논리적인 분석에 바이오코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여기에 제 생각을 조금 얘기한다면 07은 열정과 냉정함을 같이 가지고 있는듯 합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불같은 열정으로 상대방을 대하지만 자기가 준만큼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그만큼의 애증으로 상대방을 차갑게 대하고 이별을 말합니다. 이러한 경향이 07을 의심의 코드로 말하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