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호 의성문화
인물 탐방
-김용락 시인-
‘늘 한결 같은’ 김용락 시인
한결 같은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진 마음 따뜻한 시인
몸을 낮추어 이웃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용기있는 시인을 만나다.
※선생님 오랜 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김용락 : 귀한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활이 늘 같아요. 학교(경운대학교 교양학부)에서 강의하고, 강의 없는 날은 저의 개인연구소인 <한국문화분권연구소>(대구시 수성구 범어동)에 나가 책 읽고, 글 쓰고 합니다. 가끔씩 제가 지회장을 맡고 있는 <대구경북작가회의> 관련한 업무도 보곤하지요.
주로 책 읽고 사람 만나고...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 단촌역이 생각나는데 고향은 자주 오시는지요?
김용락 : 아시는 거처럼 제 집이 단촌 이잖아요? 한 달에 두어 번 가지요. 아흔 되신 어머니가 혼자 계시거든요. 가서 주로 하룻밤씩 자고 옵니다. 의성도서관에서 한 달에 한 번 문학강의를 해요. 그런 날도 의성 간 김에 단촌까지 들어가서 어머니와 얘기도 나누고... 하루 자고 오기도 하고요. 비교적 자주 갑니다. 어머니 건강이 좀 안 좋으면 매 주 갈 때도 많았어요.
※늘 하는 순서대로 선생님의 고향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김용락 : 저는 의성군 단촌면 세촌1동 825-1번지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도 그곳에서 태어나셨고요. 단촌초등학교를 6학년까지 다녔는데, 제가 58년생 개띠입니다. 그 해 중학교 입시제도가 무시험제로 바뀌어요. 그러면서 의성군내 초등학교는 의성군내에 있는 중학교를 가게 됐지요. 그 이전까지는 시험이니까 원하면 안동이나 서울에 있는 중학교도 갈 수 있었지만 그 해부터는 달라졌어요.
누나들은 단촌초등 나오고 안동에서 중학교를 다니는데... 저는 의성으로 가야돼요. 마침 제가 단촌초등 전교어린이회장 선거에 당선돼서 전교회장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저의 장래를 생각해서 좀 더 학군이 좋다고 판단한 안동시내로 전학을 시키셨어요. 그래서 6학년 때 안동으로 전학하면서 의성과는 멀어지게 됐지요. 중학교는 안동, 이후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다니면서 의성과 학연이 없어지면서 인맥도 없어졌어요.
단촌은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미천강, 달봉산 등... 조계종 16교구 본사인 천년고찰 고운사도 있고요. 어릴 때는 미천강에 나가 멱을 감기도하고, 단촌초등 운동장에서 축구, 야구 등 구기운동도 많이 했어요. 시인으로서 저의 원초적인 정서가 형성된 곳이 단촌이지요.
요즘은 보기 어렵지만, 초여름 단촌 ‘새들’에 보리가 바람에 일렁이는 광경은 잊을 수가 없을 만큼 아름다웠어요. 소나기가 묻어 올 때 바람과 함께 오잖아요. 그 바람에 물결처럼 일렁이던 보리밭의 장면은 황홀해요. 거기다가 특유의 비릿한 보리 내음도 좋고요. 가을에 메뚜기 잡기 등... 농경문화의 막바지인 50년대 말에 태어나 60년대에 유년을 보낸 게 큰 축복이고, 단촌에서 태어나 성장한 것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오늘의 선생님이 있기까지 영향을 주신 분들이 많으실 것 같은데 큰 영향을 주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용락 : 제가 문인이 되는 데는 많은 분들께 영향을 받았어요. 물론 그 영향의 크기는 차이가 있지만요. 우선 고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 유명한 시조시인 이우출 선생님이에요. 제게 시조 쓰라고 많이 권하셨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재수 겸 낭인처럼 떠돌 때 우연히 의성읍에 들렀다가 이용섭 선생님과 김금숙 선생, 김호운, 김진동 등 이런 분들을 만나 <문소문학>을 만들고 제가 말석에 끼어 있을 때도 여러 선배들께 문학적으로 많은 것을 배웠지요.
대학 때는 신동집 시인의 제 영문과 선생님이었고, 제가 대학 4학년 때 불문과에 이성복 시인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문학적 입장은 달랐지만, 이성복 시인에게 많은 것을 배웠지요. 문학적 열정이 이 분들을 통해 한껏 고무되기도 했습니다. 동화작가 권정생, 이오덕 산문가 전우익 선생님께 제가 안동에서 교편 잡던 시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물론 권정생 선생님과 이오덕 선생님은 그 이전에 만났지만 교사생활을 하던 시기에 집중적으로 만났고, 무엇보다 당시 전우익 선생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어요. 이 분들을 통해 평생 문학을 뛰어넘는 삶의 가치를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때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님을 만난 것은 제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사건입니다. 지금도 자주 뵙고 가르침을 받지만 대학생 때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문학과 인품 모두 존경하는 스승이지요.
대학 졸업 후 만나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 역시 제게 많은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 이 분들을 만난 건 문학을 넘어서서 제 인생에서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뵈니 권정생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두 분의 인연은 깊으신 것 같은데 어떠셨는지요?
김용락 : 저의 졸저 『나의 스승 시대의 스승』(솔과 학)이라는 책에 권정생 선생님에 대해 많은 분량으로 쓴 게 있어요. 물론 다른 분들, 가령 백낙청, 임헌영 선생 등에 관해 쓴 글도 있지요. 권정생 선생님을 1980년 5월에 처음 만나 2007년 5월에 임종 하실 때 곁을 지켰지요. 오랜 세월 가까이서 모셨는데요... 처음 뵈었을 때는 가난하고 남루한 무명의 작가였어요. 그 후 문학적 업적을 이루시고, 또 삶 자체가 매우 고결한 분이셨지요.
뭐라고 할까? 저는 문학공부에서 이론지향적인 데가 좀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작가시니 이론적인 갈증을 풀어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요. 그러나 진실하시고 이 땅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정말 사랑하시고... 또 선생님께서 병으로 고통 받고 계시니 제가 많이 안타까워했지요. 지금도 그리워요.
※ 어떻게 시를 쓰시는지, 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용락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근래 펴낸 저의 제5시집 『산수유나무』(문예미학사)에 실린 <시인의 시론>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이번에 등단 32년 만에 5번 째 시집『산수유나무』를 내니까 6년 반마다 한 권씩 시집을 낸 것이다. 한 때 나는 다산 선생이 말한 “不憂國 非詩也”(나라, 백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라는 말을 믿어왔다. 지금도 다산을 좋아하지만, 그 당시는 다산에 빠져 있었다. 대구에서 강진 그 먼 다산초당까지 여러 번 갔다. 기본적으로는 지금도 다산의 이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시를 쓰고 있다. 기교나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한다. 물론 시가 언어예술인 이상, 시적 비유나 수사를 영 무시할 수는 없다. 잘된 비유나 아름다운 이미지를 빚어내는 시의 영롱한 서정성에 나는 감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선천적으로 그런 재주가 없다. 언어를 다스리는 무당과 같은 그런 천부적 재능이나 기교가 없다. 시를 언어의 측면이나 이미지 빚어내는 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시가 이런 의미라면 시는 내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시는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에서 내용과 사상을 중시한다. 기교나 비유가 다소 투박하더라도 전달하려는 내용이나 사상이 분명하고, 그 내용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아픔이나, 억압적인 시대현실에 저항하는 것이라면 좋게 본다. 물론 시가 곧바로 사상이나 철학은 아니지만 사상적, 철학적 깊이가 빈약한 시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물론 형상화가 덜 된 관념적인 프로파겐더시, 철학시를 신뢰하지도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내 시는 다산 정약용의 우국시, 연암 박지원의 조선시, 김수영의 반시론, 이오덕의 일하는 아이들 시론, 염무웅의 리얼리즘론, 백낙청의 민족문학론, 김우창의 한국시의 사상적 빈곤을 통탄한 궁핍한 시대의 시인론, 김종철의 생태주의, 랭스턴 휴즈와 프란츠 파농의 흑인시와 흑인성(네그리튜드), 사르뜨르의 앙가쥬망, 노신의 눌함(吶喊)시학, 모택동의 연안문예강화론, 맑스,레닌의 몇 명의 유한마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백만 명 굶주리는 소녀직공을 위한 예술론, 하이데거의 대지의 시론, 헤겔의 변증법시론 등 대충 생각나는 대로 읊어 봐도 이런 시론들에 빚진 바 있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우리 세대에 책 좀 읽는 이라면 거의 한 두 번은 거쳐 갔을 목록이다.
그러나 나의 자질이 워낙 천해서 이런 대사상가들의 문학론을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언저리를 충실히 배회했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공부가 됐다. 요즘도 나는 일간지에 발표되는 염무웅, 김종철, 서경식, 박노자, 홍세화 등의 명칼럼(時論)을 즐겨 읽는 편인데 선명한 사회의식과 역사적 통찰력이 돋보이는 이런 산문에 내 영혼이 훨씬 깊이 매료된다.
이런 선학들의 글에서 깊은 영감과 공부를 얻었지만, 그래도 내 시의 최고의 스승은 내가 살아온 시대와 현실이다.”
※혹 시를 쓰실 때 독특한 습관 같은 게 있으신지요?
김용락 : 시 쓸 때 독특한 습관은 없어요. 저는 늘 손을 깨끗이 해요. 글 쓸 때나 독서할 때는 언제나 손을 비누로 씻고 앉아서 글을 쓰고 책을 읽어요. 시를 쓸 때 소위 시상이 떠오르면 곧바로 종이나 컴퓨터에 옮기지 않고 머릿속에서 며칠 간 이리 저리 굴려요.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종이에 옮기지요. 대신 퇴고는 하지 않아요. 그걸로 끝이에요. 그러니까 머릿속에서 시를 쓰는 셈이지요.
※독서와 창작과의 관계, 독서가 창작에 어떤 도움을 줄까요?
김용락 : 저는 독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요. 흔한 비유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을 때도 동전을 넣어야 커피가 나오는데... 책을 읽지 않으면 시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초보 수준에서 몇 편 정도는 독서가 없어도 천성적인 감수성으로 쓸 수 있겠지요. 그러나 대작, 본격적인 문학은 진지한 독서 없이는 불가능해요.
독서를 해야 문학도 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살 수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영혼을 깨우는 독서』(문예미학사, 2014)라는 독서론 책을 내기도 했어요. 이 책을 교재로 지금도 대구교육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독서와 작문’이라는 과목을 십 수 년 째 가르치고 있기도 하고요. 학교와 우리사회에 독서의 중요성을 확대할 필요가 있어요.
※꼭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뭐가 좋을까요?
김용락 : 다 권하고 싶어요. 우선은 경전, 불경, 성경, 코란 등 경전도 읽어야하고 소위 고전이라 말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과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노신, 솔제니친 등 동서양의 고전을 무조건 많이 읽으면 좋을 듯해요. 국내 작가도 많이 읽고요.
박경리 선생이 자신은 젊어서 “‘야수(짐승)’처럼 책을 읽었다”고 한 걸 본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선생께서 「토지」와 같은 대작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용락 약력 : 1958년 의성 단촌 출생
계명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학 박사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등을 수료했다.
1984년 창작과비평사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로 등단
1985년 <분단시대> 동인지 『이 어둠을 사르는 끝없는 몸짓』 에 비평 발표
시집 『푸른별』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시간의 흰길』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
『단촌역』(시선집)
『산수유나무』
시해설집 『시와 함께하는 오후』
평론집 『예술과 자유』
『민족문학논쟁사연구』
『지역, 현실, 인간 그리고 문학』
『한국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2인 공저)
『나의 스승, 시대의 스승』
『평화와 깨달음을 찾아가는 교육』
『영혼을 깨우는 독서』
『문학과 정치』
현재 경운대 교양학부 교수
한국문화분권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