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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굼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막 5:41)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을 때 하신 말씀이다(막 5:41). 예수님은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아람어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이다. 달리다굼’에서 ‘달리다’는 어린 암양을 말하는데, 소녀를 부르는 애칭이기도 했다. ‘쿰’(qum)은 ‘쿠미’(qumi), 즉 ‘일어나다’라는 단어의 여성 단수 명령형이다. 아람어 '달리다굼'은 그 당시 상당히 많이 쓰이던 보편적인 단어였다고 합니다. ‘달리다’는 ‘아주 작은 것, 미천한 것, 불쌍한 것, 연약한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작은 아이야’라는 말입니다. ‘일어나라’는 '굼' 또는 '구미'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작은 아이야, 일어나라”라는 말씀과 함께 소녀는 벌떡 일어납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일어 날 수 없는 사람이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한복판에 있었던 기관입니다. 여기에서는 종교적 기능도 수행되지만, 더 많은 사회적 기능들이 수행되었습니다. 회당은 학교의 역할도 했고, 재판소의 역할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사회적 명예와 존경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회당마다 적어도 열 명쯤의 관리들이 있었고, 큰 회장의 경우에는 회장장이 세 사람씩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정도의 신분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당시 젊은 예언자, 아직 사회적으로 공인 되지 못한 이단의 교주처럼 취급될 수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이 그 예수님 앞에 나와서 엎드립니다. 그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희망, 마지막 소망을 예수님께 걸고, 그는 예수님께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이 꼭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사랑하는 딸로 인한 고통이 없었더라면, 이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까요? 그래서 옛날 청교도들은 고통이나 역격을 가리켜서 "변장된 축복"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고통이, 이 역경이 회당장을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만났고 이제 드디어 예수님과 함께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는 '주님만 우리 집에 가시면, 그리고 우리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라는 해결의 희망을 안고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걷고 있었던 도상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랑하는 딸의 목숨이 지금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일 분이 아쉬울 때입니다. 일 초가 급한 상황인데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출현으로 인해 사랑하는 딸의 치유가 지연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회당장 편에서는 이것은 방해거리였습니다. 왜 주님이 이런 사건을 허용하셨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회당장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시려는 의도적인 사건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하나님, 다른 사람의 기도는 다 들어주시는데, 왜 내 기도는 안들어주십니까?" 이렇게 접근하지 마시고, "내 주변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신 주님, 나에게도 동일한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처럼 이웃들을 보면서 내 믿음이 강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주님이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가 기다릴 수 있느냐?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느냐?" 바로 이러한 시험이 이 사건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단 한 번의 기도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문제 해결보다도 더 중요한 가르침을 위해서 기다리게 하십니다. 주님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과의 신뢰가 생기도록, 문제의 해결을 지연시키면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더 엎드려야 합니다. 더 기다려야 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계속 기도하십시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여기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은 한 번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본 뜻은 "계속해서 구하라, 계속해서 찾으라,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셋째,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집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당신의 딸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현재 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어라!", "계속해서 믿어라!"는 말입니다. 최악의 절망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부활의 위대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육체적 사망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부활입니다. 부활이 확실하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부활의 소망이 확실하다면 죽음의 사건 앞에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육체적 사망은 두려워하고 고민하면서 영적 사망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적 사망을 아십니까? 영적 죽음, 그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채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살리시려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보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부활의 위대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죽음 건넌편에 있는 부활의 소망을 약속하십니다. 인생을 살다가 무력함에 시달리고 좌절하고 주저앉아 앞에 캄캄할 때에도, 주저앉은 우리 곁에 부활의 주님은 어김없이 다가오십니다. 다가오셔서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달리다굼!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사랑하는 딸이여, 일어나라!"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말씀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동원 목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2)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 5:24-25)
‘달리다굼’은 왜 어느 나라에서도 번역하지 않았을까? 이어령 박사(양화진문화원 명예원장)와 이재철 목사(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의 ‘문화로 성경읽기’ 中에서 본문은 마가복음 5장 21-43절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그의 집으로 가다 12년간 혈루증 앓던 여인이 자신을 만져 병이 낫고, 그 사이 딸이 죽었지만 다시 살리시는 이야기다. 이어령 박사는 “달리다굼, 할렐루야, 마라나타, 호산나, 에바다, 아멘처럼 성경에는 번역이 안 돼 원어 그대로 나오는 말들이 중요하고, 여기서 기호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며 “언어라는 게 뭔가, 하나님은 무슨 말을 쓰시는가, 하나님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이 오늘의 주제가 될 것”이라고 서두를 열었다. 이 박사는 “신약성경 기자들이 다른 말은 모두 헬라어로 번역했는데, 실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람어인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면 될텐데 굳이 왜 원문 그대로 썼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어령 박사의 설명은 이렇다. 예수님 말씀은 크게 ‘비유로 된 말’과 ‘하나님의 말’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은 성령, 살아있는 말, 음을 고치면 안 되는 말, 우리가 말하는 ‘주문’ 같은 말인데, 이런 부류는 산스크리트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처럼 종교마다 존재한다. ‘달리다굼’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말씀과 가장 가까운 원형이었다. 이어령 박사는 “지난 시간에 비유를 함께 봤는데, 예수님께서 왜 비유를 쓰셨을까”라고 물었다. “여러분들이 만약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면, 한국에만 있는 것을 미국인에게 설명할 때는 천상 비유로밖에 얘기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요 16:25)”는 말씀을 제시했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말씀인데, 참 기막히고 눈물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이 아닌, 제자들이 쓰는 ‘땅의 언어’로 그들이 모르는 얘기를 하려니 서로 너무 답답했다. 예수님은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들과 서로 통할 수 없음을 화내시지 않고, 다만 안타까워하셨다. 이어령 박사는 “성경에서 가장 슬픈 장면 중 하나로, 준비하면서 눈물이 났다”고 털어놓았다. ‘지금은 하나님을 비유로밖에 보여줄 수 없지만, 나중에는 보여줄 수 있다’, ‘나를 못 보게 되면 나를 보게 되리라’, ‘곧 떠나는데, 이제 만나게 되리라’는 기막힌 말이지만, 제자들은 또 알아듣지 못한다. 부활 후에는 새로운 관계로 만난다는 말인데, 못 알아들으니 다시 ‘아이를 낳는 고통’을 비유로 쓰신다. “내가 죽어 슬피 울고 애통해야 나를 만나는 기쁨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말씀하셨다. “얘들아, 이제까지는 내 이름으로 간구해 봐야 얻은 게 없었지만, 내가 죽고 부활해서 아버지와 부자관계가 되면 내 이름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지만, 그때가 되면 비유로 하지 않고 진짜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천상의 언어’, 하나님 말씀인 진리는 무엇인가. 한 마디면 된다. 모르면 길어진다. 비유는 길다. 진리는 “빛이 있으라” 하면 있는 것이다. 비유나 기호는 가짜이고, 그림자다. ‘달리다굼’은 영어에서도, 한글에서도, 어디서도 그대로다. 시대가 바뀌고 어떻게 해도 못 버린다. 절대 번역이 안 된다. 예수님께서 당시에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는 현장에 있던 사람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말도 어감과 상황에 따라 수백 가지가 된다. 다르다. 그래서 번역이 안 됐던 것이다. 진짜 하늘의 말이다. 그래서 언어의 감옥에 갇혀서는 안 된다. 그 사람들이 기호학과 언어학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번역하면 안 되느니라’ 해서 못한 것이다. 아멘은 그냥 아멘이다. ‘할렐루야’는 일종의 주문 같아서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이 알아들으실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말이다. ‘호산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환영하면서 하는 말이다.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 하는 애절한, 그러나 환희의 목소리로 정말 구세주가 오셨구나, 하는 뜻이다. ‘달리다굼’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죽어 있었구나, 여태껏 살아있는 줄 알았는데 좀비처럼 죽어 있었는데 하는 깨달음이 온다. 이 소녀는 죽었다가 ‘소생’했지만, 우리는 ‘부활’을 원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극한에 가서야 하나님을 찾는다. 절대로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제 힘으로 한 줄 안다. 그런데 제 힘을 다 쏟아도, 모든 걸 다 해도 안됐을 때에야 ‘아이고 하나님’ 소리가 나온다. 하나님 만나려면 얼마나 이처럼 고생을 많이 해야 하나. 그걸 알고 교회 나올 사람이 있겠나. 인간이 원죄임을, 한계임을 알았을 때 “달리다굼” 같은 권능의 말이 나온다. 이어령 박사는 “그래서 세례를 받는데 ‘난 죽었구나’, 욥처럼 끝없는 환란이 오겠구나 하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라며 “내가 편하고 옆에 아내가 있고 귀여운 자식이 있고 통장에 잔고가 두둑한데 하나님을 왜 찾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재철 목사도 거들었다. “2000년 전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요즘 말로 하면 어머니가 ‘아가야 일어나거라’ 하고 아이를 깨우는 말이다. 매일 듣던 말이다. 아침이 와서 황홀하게 태양이 떠오르고 햇빛이 비치는 가운데, 그 소리를 듣고 눈을 부비면 그 빛 속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의 모성애적 사랑으로 이 죽은 아이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고자 하니, 절대 어느 나라 말로도 번역이 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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