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가 많고 공급이 부족하면 공급자가 가격을 올리기 유리하죠. 대학등록금의 무분별한 인상도 그와 무관하지 않아요. 명문대 출신, 명문대 졸업생, 명문대 진학률……. 지겨워라. 마치 그 명문대라는 곳에 입학하여 졸업만 하면 인생문제가 다 풀리기라도 한다는 듯 온 사회가 주술에 걸려버렸어요. 100년에 걸친 주술이라 아주 대물림이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정말 명문대학교가 있기는 할까요? 첫째, 고교 시절 우리가 접한 교과목들은 각 학문의 개론서에도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많이 봐주어서 개론서를 요약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 교과목을 여러 개 동시에 공부해서 높은 점수를 얻어 들어가는 곳이 소위 명문대학교라는 곳이죠. 더구나 서술형으로 풀어낼 수 있을 만큼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출제자가 함정을 파놓은 객관식 문제에서 정답을 골라내는 방식으로 시험을 치러요. 과연 이러한 입학 시스템으로 선출된 학생들이 모인 곳에 ‘명문’이란 수식을 붙여도 좋을까요? 둘째, 유명 대학교와 나머지 대학교의 커리큘럼이 별로 다르지 않아요. 교수들 수준도 대동소이하고요. 그러니 고교 시절에 경쟁에서 밀린 학생이라도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 마음만 다잡으면 충분히 자기 전공분야에서 우수한 연구자로 자라날 수 있어요. 그럼에도 유명대학교가 아닌 곳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둔 학생이 대학원을 진학할 때나 취업을 하려 할 때 불이익을 겪는다는 뉴스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접해요. 이런 차별은 어디에서 기인할까요? 한창 꽃다운 시기인 10대 후반을 공부에 전념한 보답이라도 주자는 건가요? 말이 안 되잖아요. 사실 10대 후반은 고민하고 토론하고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주어야 할 때죠. 공부보다 방황과 반항이 더 잘 어울리는 때라고요. 셋째, 입학은 어려운데 비해 졸업까지는 너무 쉬워요. 그러니 일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들어가자는 생각에 고액과외니 금품수수니 편법이 등장하는 거겠죠. 적어도 국립대학교는 입학이 쉽고 졸업은 힘들어야 해요. 예를 들어, 신입생을 1,000명 뽑아 2학년 때 500명으로, 3학년 때 300명으로, 4학년 때 200명으로 줄인다면, 최종 20%에 속한 졸업자에게는 ‘명문’이란 명예로운 타이틀을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너무 가혹해요? 제가 말한 명문대학교란 학문을 할 사람을 배출하는 곳을 뜻해요. 대기업에 취직하고자 대학에 오는 학생에게 세금을 낭비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학문 경쟁에서 졌거나 진로 계획이 바뀐 학생은 다른 실용적인 커리큘럼을 갖춘 일반 대학교에 편입하면 그만이고요. 마지막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졸업 이후입니다. 소위 명문대학교 졸업생들의 생존 전략. 이들이 살아남으려, 그것도 아주 잘 살아남으려고 택한 방법이 바로 ‘무리 짓기’죠. 출신, 학연(學緣; school tie) 따위의 말이 그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정치적인 동맹 현상이 사회 각 분야에 두루두루 나타났어요. 이 동맹은 결국 사회 전체로 보면 불합리한 분열이 되고 말죠. 학연을 자산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정치인만으로 충분해요. 지긋지긋할 정도로.
입시지옥과 취업난, 대학교 도시집중화 현상 문제는 현행 교육제도의 낭비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사실 우리나라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를 졸업하죠. 반면 졸업장이 지닌 경쟁력은 의외로 아주 미미해요. 행정기관이나 기업은 물론 사회 각 분야에서 요구하는 바는 실력인데 졸업장은 그것을 입증하지 못해요.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 기업 가운데 입사지원 자격에서 학력 부분을 아예 제해버리는 곳이 점점 늘고 있어요. 그들도 이제 깨달은 거죠, 한국에서는 대학 졸업이 업무 능력과 별로 상관성이 없음을. 학문을 할 소수 학생만 국립대학교를 가고, 취업을 준비할 학생은 사립대학교를 가고, 대학교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길을 걷고 싶은 학생은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마친 뒤 전문기관에 가거나 실무에 뛰어드는 체계. 이것이 우리 교육이 바라보아야 할 모습이 아닐지. 정작 공교육과 사교육의 분리가 필요한 곳은 초, 중, 고가 아닌 대학교라는 뜻입니다. 저마다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제 능력과 적성과 희망에 맞추어 살아야죠. 이 체계로 가기 위해 선결될 과제는 대학에 진학해 공부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검정고시 제도가 정착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일반 국립대학교의 실질적 통합이라고 봐요. 현행 제도에선 수학능력시험을 치러서 대학에 합격한 학생이 진로를 바꾸려 할 때 전과 시험을 치르거나 수학능력시험을 다시 치러야 해요. 이 얼마나 무의미한 낭비인지.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증명한 학생이 다시 그 시험을 치러야 하는 게 과연 상식일까요? 고교 과정을 마친 전국 학생이 일제히 검정고시를 치르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일정 점수를 획득하지 못한 학생은 대학교 학사 과정에 입학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기초학력이 부족한 채로 대학에 들어가 봐야 수업료 낭비죠. 검정고시 합격생은 그 후 최소한 5년 정도는 다시 그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도록 고쳐야 해요. 이것 하나만 정착해도 엄청나게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겁니다.
다음은 국립대학교의 실질적인 통합. 대한민국을 특별시, 광역시, 각 도로 분류하면 16개입니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그리고 제주도. 이 기준에 맞춰 16개 국립 대학교를 선정해 같은 이름으로 통합시켜 학생 거주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이사를 다니고 졸업생에게 동일한 졸업장을 수여하는 겁니다. 특히 국립 교육대학교는 서둘러 통합해야 해요. 초등 교사는 지식 전달보다는 어린이의 생활지도 및 정서함양을 주로 담당하는 사람들인데, 이들부터 순위 경쟁 체제에 놓여 있어요. 배우는 아이들은 의무교육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가르치는 선생들은 차별이 있는 체제 하에서 훈련을 받아요. 말이 안 되죠. 허황된 생각일까요? 그런데 이 주장과 유사한 제도를 실현한 나라가 있어. 프랑스! 프랑스의 국립 대학교 입시제도. 파리와 그 인근에 도합 13개 국립 대학교가 있는데, 파리 제1, 제2, 제3……제13 또는 지역이나 설립자 이름을 이용한 별명으로 불러요. 다음은 파리 국립 대학교들의 별명과 각 대학별 중점 학문입니다. 제1대학교(팡테옹 소르본): 법학․역사학․철학 제2대학교(팡테옹 아사스): 법학․경제학․정치학 제3대학교(소르본 누벨): 문학․동양학 제4대학교(소르본): 문학․언어학 제5대학교(데카르트): 의학․치의학․약학․심리학․교육학 제6대학교(피에르와 마리 퀴리): 이학․공학․의학 제7대학교(디드로): 역사학․이학․의학․동양어 제8대학교(벵센): 철학․예술학․정신분석학․심리학 제9대학교(도핀): 경제학․관리학 제10대학교(낭테르): 역사학․지리학․문학․심리학․교육학 제11대학교: 이학․공학․의학․법학 제12대학교: 의학․법학․경제학 제13대학교: 법학․경제학․문학․의학
프랑스에서는 국립 대학교 입학생에게 정부에서 등록금 및 학비를 지원해요. 이론과 임상실험 중심, 곧 유능한 학자 양성을 주목적으로 운영하죠. 학생이 실제 부담하는 금액이 학기당 100만원을 넘지 않는다더군요. 전공을 바꾸고자 대학교를 옮길 때에도 국립 대학생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하네요. 국립대학교를 들어가는 방식은 아주 단순해요. 일반 고등학교 3년을 마친 뒤 ‘바카로레아(Baccalaureat)’라고 하는 대학입학 검정시험을 봐요. 평균 20점 만점에 10점을 넘기면 통과. 대부분 서술형이고요. 넉넉하게 선발하는 대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정말 무자비하게 도태시키죠. 경쟁에 밀린 학생들은 일찌감치 학문의 길을 접거나 재도전을 해요. 결과에 승복한 학생은 학문 연구를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죠. 열등감을 품지도 않아요. 학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말 뿐. 일반 고등학교가 아닌 직업 고등학교(BEP, CAP)를 2년 수료한 학생은 기술자를 위한 검정시험인 BAC Pro라는 시험을 봐요. 학문을 할 생각이 없는 학생은 굳이 대학교를 가려 하지 않죠. 국세 낭비요 인생의 낭비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으로. 프랑스 국민은 적어도 학교 교육 때문에 콤플렉스에 사로잡힐 위험은 없어 보여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성을 발휘하는 일 아니겠어요? 프랑스 사회가 스포츠를 포함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개성과 예술성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가는 까닭도 이러한 합리적인 교육 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은 앞날을 보장하지도 못하는 대학교만 바라보며 채찍을 맞는 경주마처럼 달려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모르겠어요. 이 지독한 구조적 모순 앞에서 나는 번번이 깊고 무거운 슬픔에 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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