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순조 1년)에 황사영 알렉시오가 천주교 박해를 막기 위해 외세의 군대를 끌어들여 정부를 뒤집으려는 역적 행위를 하려다가 발각된 사건.
조선에서 가톨릭을 탄압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제천(堤川) 배론(排論:舟論)의 산 속에 있는 굴에 몸을 숨겼다. 황사영이 숨었던 굴의 사진
황사영은 굴 속에서 중국 북경에 머물고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편지를 썼다. 2자 가량 되는 명주천에 1만 3,311자를 썼다. 명주천에 썼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을 白書로 잘못 알아 '명반[1]으로 쓴 보이지 않는 편지'를 보냈다고 쓰고 있는 책도 있다.
먼저 당시 조선의 가톨릭 교세와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활동, 주 신부의 자수와 순교 사실, 신유박해와 이때 죽은 순교자들의 간단한 전기를 기록했다. 그리고 조선 국내의 실정과 포교의 방안을 제안했다.
거기까지야 역적으로 볼 소지가 없고 신앙인 다운 행보지만, 문제는 1번을 제외한 그 방안 자체라는 것에 있다.
1. 청 황제가 칙명을 보내 포교를 허락하게 해달라. 2.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만들어 청의 풍속을 따르게 해달라. 3. 청의 친왕(親王)을 조선에 보내 다스려 달라. 4. 3의 방안이 안 된다면 조선의 왕을 청 황제의 부마로 삼아 대대손손 충성을 다하게 하라.[2] 5. 이상의 모든 방안이 불가할 경우, 프랑스 황제[3]가 직접 군대를 보내 조선을 정복해 달라.
과연 황사영은 나폴레옹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았을까…[4] |
즉 외국군에 의한 정변을 추진한 셈인데, 이쯤되면 반역 내지는 역적모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백서를 가지고 청나라로 가려던 황심(토마스)[5]은 그만 우연히다행히 검문에서 걸리고 말았고, 보고를 받은 조선 조정은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6]
물론 수렴청정 중이던 정순왕후 김씨가 신유박해를 일으키기는 했다. 하지만 이 박해는 벽파와 시파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당파싸움)으로 인한 숙청인지라 사실상 일부 양반들을 위주로 한 박해였기 때문에 일반 민중에겐 큰 여파가 없었고 처벌받은 신자도 대부분 정치적 문제와 연관이 있는 지배층이었지 평신도는 별 다른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이 백서사건으로 가톨릭이 서양인 군대와 연결되어 있으며, 아주 왕실과 나라를 뒤엎으려 드는 대역 세력이라는 주장이 확산되고 말았다.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다시 한번 충격과 공포에 빠져 조선은 신앙의 자유가 생기기는 커녕, 더욱 거세게 가톨릭을 탄압하게 만들었으며 지방 유생들을 비롯한 지방 유지와 학자들에게도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크게 심어줬을 뿐이었다. 즉 기존의 천주교 박해 원인이 '문화 충격'+'기득권 지키기'라는 형태였다면, 이후에는 '외래 세력에 대한 적개심'까지 합하여진 것이다. 조선인을 천시하고 인종차별하기로 유명한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7] 주교조차도 "조선 정부가 엄벌에 처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한편 당시 프랑스는 아이티 학살 및 유럽 각지에서 전쟁에 바쁘던 나폴레옹을 보더라도 조선에 황사영이 요청한 만큼 수만이 넘는 많은 병력을 보낼 틈도 없었다. 더구나 프랑스 해군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전력이 약화된데다 영국의 넬슨을 상대하기도 벅차서 머나먼 동아시아까지 대함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만약에 그 요청대로 조선에 그 정도 병력을 보냈더라면, 그야말로 임진왜란이 재현될 정도로 엄청난 재앙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또한 이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서 베트남[8]과 같은 신세가 되는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이건 가능성이 적다. 이 당시 나폴레옹은 이미 가지고 있던 식민지조차 유지하기 버거워서 미국에 헐값으로 팔아버릴 정도였는데 하물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9]
당연히 대역죄인이 되어버린 황사영은 거열형에 처해졌으며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을 갔고[10] 황사영의 어머니는 관노가 되어 거제도로 갔으며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은 아내 정명련[11] 마리아가 제주도로 귀양올 때 추자도에 두고 떠나면서 목숨은 건졌다. 그 뒤 오씨 성을 쓰는 가족에게 발견되어 보호를 받으며 자라게 되어서 추자도에는 황사영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12][13][14]
후에 황사영과는 인척인 정하상[15] 바오로가 천주교를 옹호하기 위해 <상재상서>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서도 황사영은 제대로 된 신자가 아니라며 그를 옹호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오페르트 도굴사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인해 조선 지배층에게는 내통세력으로 낙인이 찍혀 본격적인 개화가 진행되기 전까지 천주교도들은 외세와 내통하는 세력으로 지목되어 탄압받아야 했다.
지금도 외세의 힘을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다는 점으로 가톨릭에서도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에서 추진 중인 124위 시복시성에 황사영 알렉시오, 그리고 황사영을 도왔던 황심 토마스, 김한빈 베드로 등은 결국 최종 시복시성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 이유는 "황사영이 순교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교회 밖, 즉 국가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제외했다" 라고.
국가나 민족 문제를 제외하고서라도, 황사영의 방안은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이기 짝이 없어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당시는 청나라 황실 자체부터가 천주교를 그리 좋게 보지 않고 있었으며, 청은 조선을 자국의 헤게모니 권역으로 보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군대를 보내서 조선을 점령하는 것을 방관할 리도 없다. 그리고 프랑스가 당시 열강급 강대국이라고는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조선까지 군대를 보내서 정복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조선에서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나빠지게 되고, 천주교 박해에 대한 확실한 명분을 그대로 제공했기 때문에 교회 내부에서도 안 좋게 보는게 당연하다.
참고로 그들은 1990년 최초로 시복시성 계획 당시에는 명단에 있었지만, 2000년대 최종 확정과정에서도 계속 제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적인 태도[16]와는 다르게 일부 신자들은 그를 순교자로 기리면서 그의 무덤과 동상, 기념비 등의 기념물에 순례하고 있고 시성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심지어는 무덤까지 버젓히 꾸며놓고 순례하고 있다. 만약 황사영이 바란 대로 청나라나 서양이 쳐들어왔다면 무고한 병사와 백성까지 헤어릴 수 없는 숫자가 학살당하고 노예나 포로로 끌려갔을 텐데도 이렇게 받드는 것은 신앙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자에게는 너무 과분한 처우이며, 천주교의 일신을 위해서라도 이놈은 그냥 사라지는 게 나은 방사능일 뿐이다.
물론 한국 천주교 초창기에 활동했던 선교사들인 앵배르 범 라우렌시오[18] 주교, 다블뤼 안 안토니오[19] 주교,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모방 나 베드로[20] 신부,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 등의 예에서 보듯 세속의 안녕을 버리고 오직 신앙에 헌신하여 조선에서 순교한 외국인 성직자들도 많았다. 이들의 행위는 최소한 천주교 신자의 입장에서는 존경해야 마땅함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재수의 난에서 보듯 외국인 성직자들은 조선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예에서 보듯,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전락하는 최악의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나마 조금 황사영을 옹호할 건덕지가 있다면, 그의 경우 살아 생전 접한 사제가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밖에 없었을 것이고, 주문모 신부는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자들의 죽음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스스로 자수할 정도로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외국인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낭만적인 오해를 하고 있었다고 짐작은 할 수 있다.
또한 황사영이 목격했던 신유박해가 비록 이후에 벌어질 병인박해보다는 희생자 수가 적다고 할지언정, 성별이나 신분을 따지지 않고 300명을 죽인 신유박해는, 병인박해를 본 적이 없던 황사영의 입장에서는 다시는 없을 초대형 박해로 충분히 보였을 것이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아도 작은 박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규모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황사영의 발상은 지나치게 순진하고 위험한 발상이었으며, 제 아무리 옳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외국의 군대를 자국에 불러들인다는 것은 당시의 관점으로도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게 당연하다. 결국 삐뚤어진 신앙심으로 자기자신의 조국을 위기에 빠뜨릴 뻔했던 매국노였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백서 자체는 의금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25년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입수하여 교황에게 보냈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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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
2002년,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교수가 공저한 '우리 역사 최전선'에서, 박노자는 "황사영이 지키려 한 것은 보편적 정의"라며 조선 천주교 신자를 위해 움직일 '외세'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황사영은 천주교를 세계 보편진리로 여겼기 때문에 요즘으로 치면 UN에 탄원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허동현은 신념을 위해 또 다른 폭력을 부른 것은 잘못이라며 이에 대해 비판했다. 해적을 사살하고 IS를 공습하는 것을 비판하던 박노자가 이러는 것을 보니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연하지만 내셔널리즘 성향이 매우 강한 보수 개신교 측에서도 이 사건을 거세게 비판한다. 카톨릭은 항상 매국노짓을 하고, 반대로 개신교는 항상 애국애족의 종교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다만 황사영에 대한 비판이 워낙 거세다 보니, 백서 사건 이전에는 처형을 하더라도 양반 남성에게만 집행하였고 여성이나 평민 이하의 백성에게는 관대하였는데 황사영 때문에 더 거세졌다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백서 사건 이전에 있었던 신유박해에서도 양반만 죽였던 것은 아니다. 이는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항목만 잠깐 흝어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로, 양반만 죽였다던가 하는 것은 매우 근거 없는 오해다. 신유박해 당시의 순교자들 중 양반의 비중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초창기 한국 천주교가 양반들의 학문 연구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즉 양반만 죽인 게 아니라, 당시 신자 중 양반의 비중이 높았다.
또한 신유박해로 인한 대규모 순교,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교황청의 유교식 제사 금지로 한국 천주교의 양반층이 초토화되면서 교회의 성격이 양민 위주로 바뀌게 되었다고 보는게 더 합리적인 해석이다. 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은신시키는데 강완숙 골롬바를 비롯한 여성 신자들의 역할이 컸고,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사된 사람 중에 은언군의 아내인 송 마리아와 상계군의 아내인 신 마리아가 있는만큼 황사영 백서 사건 이전에 벌어진 박해에서 여성 신자로서 참수형, 사약형을 받은 순교자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