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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술교육대학교 임세영 교수가
Kathryn Lindskoog의
Dante"s Divine Comedy: Inferno, Mercer Univ. Press, 1997
서문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임세영 교수는 독일의 카셀 대학교에서 직업 교육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분으로서, 우리나라 직업교육학계의 독보적인 중견 학자입니다.
독자분들 중에는 교육방송(EBS-TV)을 통해 임세영 교수의 모습을 접한 분도 계실 줄로 압니다.
영미권에서는 지금도 꾸준히 단테 <신곡>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책맹’ 수준인 우리 현실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카페의 자료실 추천사이트에 가시면 단테 홈페이지도 링크되어 있습니다.
“피렌체의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에 대한 위대하고 명약관화한 한 가지 사실은 그가 종이 위에 펜대를 굴린 바 있는 사람들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얘기꾼이라는 단순한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스(Dorothy L. Sayers)
1. 탄생
어느 봄날, 작은 아르노강의 양안에 자리 잡은 번화한 도시에서 벨라(Bella)라는 이름의 한 여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의 이름은 두란테(Durante)라고 지었다. 아마 1265년 5월 하순경이었을 것이다. 그 해 유럽은 평온하지 않았었다.
그 해에 포로로 잡혀있던 에드워드(Edward) 공이 탈출에 성공하여 영국의 정권을 잡았다. 유럽의 여러 정부들은 정권 다툼에 분주했다. 로마에서는 교황이 찰스(Charles)에게 시실리 왕위를 부여하여, 당시 시실리 왕 만프레드(Manfred)를 운명적 경악 가운데 실각하게 만들었다. 교황은 만프레드 왕이 수집해 보관하던 값비싼 희귀 도서들을 탈취해갔다. 당시 모든 책은 비싸고 희귀했다.
옥스퍼드, 파리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는 대학들(Universities)이 ‘무모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프랑스에는 샤트르(Chartres) 대성당이 새 건축물로 반짝거렸고, 거대한 노트르담(Nortre Dame) 사원이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막강한 샐리스버리(Salisbury) 사원이 건립된지 7년째를 맞이하였고, 이태리에서도 피사에 180피트(약 54미터)나 되는 대리석 종루가 지반이 약해 약간 기울어진 상태로 근 200년의 공사를 마치고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적 걸작인 이교도 반대 논전(Summa Contra Gentiles)을 완성하고 있었고 옥스퍼드에서는 최초의 근대과학자라 불리는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14?-1292)이 그의 걸작 Opus Maius의 완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는 신대륙의 발견과 미래에 증기선, 비행기, 자동차, 화약 그리고 잠수함 등이 발명되리라고 예언했다. 노르웨이는 그때 막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를 정복하였고, 마르코 폴로는 동방 여행을 감행하기 위해 집을 떠났었다.
1265년에는 이러한 대중적 번다스러움의 저편 모퉁이에 조용히 새로운 것들 몇 가지가 시작되었다. 이 해에 런던의 몇몇 수사들이 허름하게 과일과 야채를 파는 판매대를 길거리에 내놓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전하여 결국 Covent (또는 Convent라고도 함) Garden 이라 불리는 시장이 되었다. 그후 이것은 점점 번성하여 유명하게 되었다. 후에 성 바울 사원과 그랜드 오페라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 극장이 또 그곳에 건립되었다. 코벤트 가든은 1970년대까지 700년이나 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일, 야채, 꽃 등을 파는 런던의 주요 도매시장이었다.
1265년 런던의 길가에 새로 등장한 작은 야채 판매대로부터 동남쪽으로 약700마일(약 1,2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독교 저술가의 운명을 지니고 벨라의 아기가 태어났다.
두란테 알리기에리(Durante Alighieri)가 태어난 곳은 중부 이탈리아의 인구 9만 정도 되는 도시 피렌체(Florence)이다. 그의 이름(Durante)은 ‘오래 지속하다’라는 뜻을, 그의 성은 ‘날개 달린 사람’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자신의 이름을 ‘단테’(Dante)라고 줄였다. 그의 부친은 좋은 가문 출신인데, 그들은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많은 재산을 잃고, 그저 호사스럽지 않게 먹고 살 정도로 지냈다.
알리기에리 집안의 가세가 기우는 동안 그 도시는 크게 발전했다. 피렌체는 이미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고, 미술가와 수공 장인들에게 상거래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졌다. 피렌체에는 화려한 옷을 입고 아름다운 건물을 드나드는 많은 신흥 부자들이 있었다. 피렌체는 햇볕을 듬뿍 받아 활력이 넘치는 도시였다.
2. 베아트리체와의 만남
단테가 두 살 되던 해에 피렌체의 재산가중 한 사람이 산타 마리아 누바(Santa Maria Nuova)라는 이름의 병원을 설립했다. 그 병원은 멀리 영국에까지 유명하게 되었다. 병원의 설립자는 베아트리체(Beatrice)라 불리는 여자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녀는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그녀의 아버지와 그의 병원보다 더 유명하게 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축복하는 여인”이라는 뜻을 가졌다.
알리기에리 집안은 계속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단테가 읽고 쓰는 것을 제대로 익히기도 전에 그의 모친이 타계하였고, 그의 부친은 재혼했다. 그의 계모나 그 밑의 자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단테가 9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산타 마리아 누바 병원의 설립자인 폴코 포르티나리(Folco Portinari)의 집에서 열린 메이데이(May-Day) 파티에 그를 데리고 갔다는 것이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그곳에서 단테는 그 집주인의 어린 딸을 보았다: “그녀는 가장 고상한 빛깔의 화사하면서도 옅은 붉은 색의 수가 놓인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어린 나이에 너무 잘 어울렸다.” 그는 첫눈에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다. 그 사랑은 그 후로 45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서 애만 태우는 사랑이었다.
청소년기에 단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공장소에서 베아트리체를 응시했다. 마음속으로 그는 자신을 그녀에게 헌신했다. 민감하고 예술적인 영혼을 지닌 사람에게 있어서 그러한 사랑은 오늘날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단테의 시대에는 아름다운 여성에게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는 것은 유행가의 주제였다. 그는 기꺼이 사랑에 빠지는 문화 속에서 자랐던 것이다.
첫 만남이 있고 6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베아트리체를 보았다. 그 해는 단테가 부친을 여의고 집안을 이끌어야 할 처지가 된 때였다.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나 베아트리체와의 가장 완벽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녀는 그날 순 백색의 옷을 입고 그녀보다 약간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귀티 나는 두 여인 사이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그녀는 우연히 단테를 보았고 그들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수줍어 눈길을 돌리지 않고 그녀는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기쁨으로 취한 것 같았다.
그는 이미 등단한 시인이었기 때문에 집으로 가서 그 사건에 관한 단시(sonnet)를 썼다. 그러나 그 다음에 만났을 때 베아트리체는 단테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있었던 터라 그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그 후에 다시 어떤 파티에서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너무 흥분해서 마치 병든 사람같이 보였다. 그 때 그는 그녀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단테는 이러한 사랑의 여정을 자신의 작은 책 ‘새로운 삶’(La vita nouva)에 기록했다. 그 책은 주로 베아트리체에 관한 사랑의 시로 채워졌다. D. Sayers는 “우리가 이 책만 본다면 단테는 10살부터 25살 때까지 피렌체의 지성인들 사이에 연애 시나 써서 돌리고 계속 이어지는 정서적 위기를 울며 헤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라고 말했다. 사실상 그는 다양한 흥미를 가진 열정적인 독서가였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 외에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했다.
그는 특히 미술가들이나 음악가들과의 회합을 즐겼다. 그는 중간 정도의 키에 길고 가는 콧날을 가진 아주 건장한 젊은이였다. 당시의 관습에 따라 그는 자신의 가족이나 교육, 친구관계, 사업, 정치활동 혹은 군 복무 등에 대한 것은 일체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피렌체 시(市)의 사료집 여기저기에 적혀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적극적인 것이 불운한 생애를 보내게 하였으나, 결국, 그 자신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왔다.
단테의 필체는 깔끔하고 우아했으며 그 당시 통용되고 있던 서체인 정교한 고딕체로 글을 썼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육필 원고는 한 조각도 보존된 것이 없다. 그는 펜으로 쓰기 전에 시구를 머리 속에서 충분히 맞추어 보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틀림없이 수입된 종이나 양피지에 깃이나 갈대로 만든 펜을 사용하여 원고를 작성하였을 것이다. 원고가 완성되면 믿을 만한 사람에게 돈을 주고 독자들을 위한 사본을 만들게 하였으리라. 그는 시간을 잴 필요가 있을 때는 모래시계를 사용했다.
그러나 단테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제지 기술이 마침내 이탈리아에 들어왔다는 것이리라. 한편 그곳에서 세계 최초로 안경이 만들어졌다. 물래 바퀴와 비단 실 뽑는 기계도 발명되었다. 기계 시계도 그의 생존시에 완벽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단테가 죽기 얼마 전에 최초의 대포가 발사되었다.
3. 결혼과 정치적 불행
당시 결혼은 부모들이 경제적인 면이나 정치적인 목적을 고려하여 결정했다. 로맨틱한 사랑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결혼의 약정이 자녀의 유년기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공문서에 의하면 베아트리체는 1287년 한 은행가와 결혼했다. 그러나 단테는 그녀에 대해 쓴 글에서 그 불행한 사실을 무시했다. 1289년 그녀의 부친이 죽었을 때 단테는 그녀와 슬픔을 함께 했다.
그런데 1290년에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베아트리체가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결국 단테는 하늘에 있는 그녀를 묘사하는 단시를 썼다. 그것을 쓴 다음 그는 천상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놀라운 환상”을 갖게 된다. 그리고 훨씬 웅장한 작품을 쓸 수 있을 때까지 그녀에 관한 글은 당분간 쓰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것을 준비하는 데는 수년이 걸릴 것이었다.
그렇게 단테는 그의 사랑의 시집 신생(La vita nuova)을 완성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귀족 출신의 젬마(Gemma)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몇 년 전에 이미 단테의 부친에 의해 선택되었던 것 같다. 둘 사이에는 적어도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문필계의 관습대로 단테는 그의 가족에 관해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그에게 허용된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1215년 부활절 아침 피렌체 중심가에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애인에게 버림받은 한 여성이 새로 맞춘 흰옷을 입고 말을 타고 지나가는 전 약혼자를 몰래 기다리다가 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두 가문과 나아가 그들의 배후 정치 세력은 서로 영원한 원수관계가 되고 말았다(역주 : 겔프당과 기벨린당의 대립). 그런데 단테가 소속한 당파(겔프당)도 내부 구성원 사이에 일어난 유혈 사태로 분열이 되었다. 1300년 오월 축제(May Festival) 기간에 일어난 노상 충돌 사건은 폭동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도시는 무장한 두 진영(흑당과 백당)으로 나누어져 대립했다.
온통 혼란스러운 가운데 단테는 35세의 생일을 맞이하였고, 바로 그 때 시국(市國)의 공직을 수행할 임무를 맡는다. 그렇게 그는 6인 시정 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대립하고 있는 양파의 지도자들을 시 경계 밖으로 잠시 추방하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백당으로서) 자기 부인의 친척(흑당 사람)과 동료 시인이자 오랫동안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백당 사람)를 함께 추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백당 측에서는 자기들이 추방당한 지역에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있으니 어서 시로 복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 청원을 단테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친구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는 말라리아에 전염되어 돌아와 그해 8월에 그 병으로 죽고 말았다.
1년 후 피렌체는 여전히 내적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적 위협을 받게 되었다. 황제도 국가도,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할 정부도 없었다. 단테는 교황 보니파키우스(Bonifacius) 8세에게 몇 사람과 함께 구원을 청하러 떠났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프랑스 왕의 동생이 1301년 만성절(All Saint Day)에 가장을 하고 피렌체에 쳐들어 온 것이다. 도시의 정권은 흑당으로 넘어 갔다.
그들은 백당 사람들의 집을 약탈하고 방화했다. 단테는 로마에서 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돌아왔지만 사태를 수습할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1302년 초 그는 막대한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공직에 임명될 자격을 영구히 박탈당하였으며, 그가 피렌체에 돌아온다면 화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경고를 받는다. 그것이 패자 쪽에 속한 그에게 내려진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형벌이었다.
D. Sayers가 요약하듯이 단테는 피렌체와 전 유럽에 평화와 정의를 어떻게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높은 이상과 강력한 주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피렌체의 정치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세 가지 천품(天稟)이 그의 정치적 성공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그의 비타협적 기질, 날카로운 언변, 그리고 지나치게 예리한 두뇌였다. 그는 아마 피렌체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한 번도 숨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4. 단테의 유랑과 신곡 집필
“우리말이 통하는 거의 모든 곳을 나그네로 유랑했다. 자존심을 억누르고 나의 불운의 상처를 내보이면서 나는 거지처럼 서성거렸다. 바로 나는 고통스런 가난에서 불어오는 폭풍에 밀려 여러 포구와 해안을 떠돌아다니는 돛도 노도 없는 배와 같았다.”
단테는 19년이라는 추방기의 어느 때 집필에 착수했다가 바로 포기하였던 한 책의 서문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가 파리로 가서 그곳의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리고 그가 옥스퍼드에까지 갔었다는 소문도 있다. 그는 아마 이 시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탈리아 안에서 가르치거나 강연하는 일로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부유한 사람들의 비서로 근무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공부했다. 그는 가끔 피렌체에 자신의 추방명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도 썼다.
1313년 단테는 또 다른 충격에 상처를 입었다. 5년 동안 이상(理想)을 지니고, 파당에 휩쓸리지 않았던 헨리 룩셈부르크(Henry of Luxemburg) 공(公)이 평화와 법률을 바탕으로 하는 인본주의적 정부를 수립하여, 이탈리아의 피로 물든 오랜 반목을 종식하고자 했다. 그는 한 도시 한 도시의 지지를 얻어 로마까지 확보했다. 단테는 결국 그의 좋은 정부에 대한 꿈이 실현되어 자신도 곧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글과 언변으로 열렬히 헨리 공을 지지했다. 그러나 피렌체는 헨리에 대항하여, 그의 시도가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1313년 8월 24일 갑자기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단테의 두 아들은 피렌체에서 도망쳐 망명중인 아버지와 합류했다. 그들이 공식적으로 성인이 되는 14세가 되자, 그들이 피렌체로 돌아올 경우 처형할 것이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친척들의 도움에 의지하였던 단테의 부인 젬마는 자녀들에게 아주 뛰어난 어머니였지만 단 한번도 남편을 만나기 위해 피렌체를 떠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녀와 단테는 한 때 친밀하였더라도 그의 망명으로 일찍이 멀어지게 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그의 글은 후기의 사랑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의 낭만적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모두가 추측이다.
1315년 피렌체 시국(市國)은 단테와 다른 망명자들에게 그들이 무거운 벌금을 지불하고 공개적으로 죄과를 뉘우친다면 입국을 허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단테는 피렌체에 있는 그의 옛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어찌 정의를 외치다 불의에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자신을 해친 자들에게, 아무리 그들이 자신의 사면권자라 해도, 벌금을 낼 수 있으랴? 맙소사, 그것은 나의 조국으로 돌아가는 방도가 아니다. ....”
이 때 단테는 아마 그의 코미디(Comedy)의 처음 삼분의 일, 즉 지옥편을 완성하였으리라. 그는 이 책에 다음과 같은 씁쓸한 서문을 썼다: “여기 피렌체에서 태어나기는 하였지만 품성으로는 피렌체 사람이 아닌 단테 알리기에리의 희곡이 시작된다.”
1317년 단테는 그의 두 아들과 딸 베아트리체를 데리고 라벤나(Ravenna)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드리아 해에 인접한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이 도시는 거의 1000년이 된 찬란한 그리스도교 모자이크로 유명했다. 그곳에서 단테는 강의를 하였고 시를 가르쳤으며 그의 코미디 나머지 두 편을 완성했다. 이 때는 틀림없이 단테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중 하나에 해당될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집까지 제공하였던 친절한 폴렌타 백작(Count of Polenta)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5. 단테의 죽음과 그 이후
1321년 여름 라벤나의 폴렌타 공은 단테를 다른 몇 사람과 함께 북쪽 베니스에 선편으로 파송했다. 베니스와 라벤나 사이에 붉어진 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베니스는 그 문제에 대하여 비협조적이었으며, 심지어 그들이 귀환할 배를 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말라리아가 전염되어 있던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육로로 귀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였을 때 단테는 고열로 앓고 있었다. 그는 그해 9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Dorothy Sayers는 “세상에 어떤 모기도 이보다 더 우뚝 솟은 사냥감을 쓰러뜨린 적이 없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라고 말한다. 폴렌타 공은 그의 시신에 자주색 학사 복을 입히고 월계관을 씌워 깊은 존경심으로 장례를 지냈다.
단테의 전기를 맨 처음 집필한 보카치오(Boccacio)는 단테의 딸 베아트리체를 한번 만난 적이 있는데, 단테가 죽은 뒤 8개월이 지난 1322년 5월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는 한 가지 기이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단테는 죽기 전에 이미 신곡을 모두 완성하였지만, 마지막 13개 곡(曲)은 아직 그의 작품을 필사하여 원하는 사람에게 보내주던 그의 친구에게 넘겨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아들 야코포(Jacopo)와 피에트로(Pietro)는 온갖 곳을 다 뒤졌지만 마지막 부분의 원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친구들은 그들에게 아직 미완된 부분을 직접 써서 작품을 완성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던 중 야코포는 꿈속에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지시하는 어떤 환상을 본다.
꿈에 야코포는 아버지 단테가 빛나는 흰옷을 입고 광채띤 얼굴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야코포는 그에게 아직도 살아 계신 것이냐고 묻자 단테가 대답했다: “그렇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의 것이 아닌 진정한 생명으로 살아 있느니라.” 야코포는 잃어버린 원고에 대해 물었다. 꿈에서 단테는 그에게 자신이 사용하던 침실을 보여주었다. 그 방의 한쪽 벽을 만지면서 그는 말했다: “여기에 네가 그렇게 오랫동안 찾고 있는 그것이 들어 있다.”
그리고 잠에서 깬 야코포는 곧 그 꿈에서 본 것이 정말인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는 한 친구를 데리고 단테가 살던 집에 찾아갔다. 그들은 새로 이사 온 사람을 깨워 그 집에 들어가 단테가 사용하던 침실을 점검했다. 그 방 한 쪽 벽에 매트가 항상 걸려 있었고 매트 뒤 벽에는 얇은 유리창이 달린 공간이 있었다. 그 창을 여니 그 속에 원고 뭉치가 있었다. 그 원고는 곰팡이가 피었고, 벽의 습기로 훼손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원고를 다시 깨끗하게 닦아내고 필사했다. Comedy가 완성된 것이다.
이 가슴 조이는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단테의 시신을 놓고 벌어진 또 하나의 얘기는 사실이다. 단테가 죽은 다음 피렌체는 그이와 같이 천재적인 사람의 무덤이 그 도시를 보다 유명하게 할 것이라는 계산아래 그의 시신을 가져가고 싶어 했다. 물론 라벤나는 그 청을 거절했다. 결국 1519년 교황 레오 10세는 단테의 유골을 라벤나는 피렌체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공포했다. 그러나 피렌체의 대표단이 유골을 가져가려고 라벤나에 와서 그의 무덤을 개방하였을 때 그 속에는 작은 뼈 부스러기와 마른 월계수 잎 몇 개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오랫동안 거론되지 않았다.
그 후 346년이 지난 1865년 단테의 빈 무덤 옆의 담장 건너편에 있던 예배 실에 펌프를 설치하는 공사가 착수되었다. 담장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던 한 인부는 그곳에 숨겨져 있던 나무 관 하나를 발견했다. 그 관 위에는 단테의 이름이 써 있었다. 라벤나의 프란체스코파 수사들은 1519년 단테의 유골을 구해내서 346년 동안이나 안전하게 감추었던 것이다. 단테의 유골은 오늘도 라벤나에 안전하게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망명 기간 중 그를 후원한 또 하나의 도시 베로나(Verona)의 중심가에는 유명한 그의 동상이 서있다.
사람들이 단테의 유골이 안치되어야 할 장소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전적으로 사람이 무덤에 들어가기 전과 그 후를 문제 삼은 1만 4천 행의 운율을 가진 서사시를 쓴 작가인 것이다.
첫댓글 공부 잘 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글 쓰신 분이나 소개하신 두분 감사합니다
임 교수가 지금은 물러나 있지만 조만간 신앙의 일에 착수하겠죠..
방가방가요 제발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처음 홍성 풀무학원에서(19년전)에 집회 할 때 아마 장문강, 임세영, 박상익, 그리고 한병덕 선생인가 아니면 최정일 교수인가 모르지만 어울려 다니시는 모습 보면서 많이 부러워 하고 저는 처음이라 감히 말도 걸지 못하고 멀리서만 바라보았습니다. 또 임교수님 강의도 감명깊게 몇번 들었고요. 박상익, 임세영 교수님이 함께 나오셔서 강의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합니다. 더불어 기도합니다.
임교수가 대학에서 워낙 많은 일을 맡고 있어서요. 이제 나이도 있으니 한발 물러서서 정말 중요한 한가지 일을 해주면 좋겠군요. 요즘 임교수는 풀무학교에서 이런 저런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요즘 단테에 빠져이씀다. 감사히 퍼감다!
넹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