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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경에 베네딕토 수도사들이 잉글랜드 개종을 완료했을 때, 프랑크 왕국에는 번영의 조짐이 나타났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고대 세계와 중세 세계 사이의 길고도 혼란스러운 전환기가 마침내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도시 문명과 지중해 교역은, 클로비스 이후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사라지고 있었다.
그 후 7세기에 아랍인이 아프리카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바다로 진출하자, 서북 유럽은 더 이상 지중해에 눈길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지중해를 활동 무대로 한 고전 고대가 거의 완벽하게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지중해를 역사의 무대로 삼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장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서북 유럽―오늘날의 프랑스, 저지대 지방, 독일, 잉글랜드―은 토질이 대단히 비옥하여, 적절한 농기구만 사용한다면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지중해를 무대로 로마 제국 시대에 성행했던 도시의 상업이나 지중해 교역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적합한 여건만 주어진다면, 북유럽에는 하나의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농업에 기반을 둔 새로운 생활방식을 창출할 수 있었다. 700년경에 메로빙거 왕조하의 갈리아에서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적합한 여건이란, 일련의 유능한 지배자들이 등장하여 교회와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687년에 메로빙거 왕조의 정력적인 궁재 피핀(Pepin of Heristal)은 프랑크족의 전 영토를 자신의 지배권 하에 통합시키고, 벨기에와 라인 강 유역에 자신의 가문을 위한 새로운 세력 근거지를 구축했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이며 호전적인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마르텔은 “망치”라는 뜻―이었다. 그는 프랑크 왕국 제2의 건설자라고도 불린다. 그가 이런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그는 732년에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에서 에스파냐로부터 침입한 무슬림 군대를 격퇴했다. 푸아티에는 파리에서 불과 150마일(240km) 거리에 놓여 있었다. 이때 침입했던 무슬림 군대는 정규군이 아닌 약탈자의 무리였지만, 이 침공은 서북 유럽을 향한 무슬림 세력 진출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샤를은 이 전쟁의 승리로 크게 위신을 드높일 수 있었다.
둘째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의 치세 말기에 샤를이 교회, 특히 잉글랜드의 베네딕토 수도회와 제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베네딕토 수도회는 잉글랜드의 개종을 완료했으며, 이상주의적인 성 보니파키우스(St. Bonifacius, 680?-755)―“독일의 사도”라고 불린다.―의 지도 하에 중부 독일을 개종시킬 계획으로 잉글랜드 해협을 건너고 있던 중이었다.
샤를 마르텔은 자신이 그들과 공통의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무슬림으로부터 프랑크 왕국의 남쪽을를 방어한 후, 그는 프랑크 왕국의 세력을 독일 방면으로 팽창시키려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선교 사업과 프랑크 왕국의 영토 팽창은 나란히 진행될 수 있었다. 성 보니파키우스와 베네딕토 수도사들은 샤를의 영토 확장을 지지했고, 대신 샤를은 그들에게 물질적 원조를 제공했던 것이다.
프랑크 왕국과 연합한 성 보니파키우스는 샤를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Pepin the Short) 대에 이르러 서양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 중 하나를 벌였다.
샤를 마르텔은 결코 왕의 칭호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피핀은 왕의 칭호를 원했다. 물론 당시 프랑크 왕국의 실권은 “무위왕”이 아닌 피핀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핀은 왕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교회의 권위가 필요했다.
다행히 당시는 그가 교회의 지원을 얻기에 적합한 때였다. 피핀은 부친의 정책을 이어받아 독일에서 베네딕토 수도회와 계속 제휴하고자 했으므로, 성 보니파키우스는 그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보니파키우스는 로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앵글로색슨 베네딕토 수도회는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이래 계속해서 교황권과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강력한 프랑크 왕국 지배자와 운명을 같이 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교황은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서 행해지고 있던 성상 파괴 운동(Iconoclasm) 때문에 비잔티움 황제들과 격렬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잔티움인은 그 당시까지 이탈리아의 교황 영지를 롬바르드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세력이 강력해진 프랑크 왕국은 이제 그 역할까지 충분히 떠맡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교황은 역사적 방향 전환을 단행하여 비잔티움으로부터 단호히 등을 돌리고는 서유럽과 결합했다.
750년에 교황은 피핀으로 하여금 메로빙거 왕조의 명목상의 지배자를 폐위토록 했고, 751년에 성 보니파키우스는 교황 사절 자격으로 피핀에게 성유식을 베풀어 신이 정한 왕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은 정신적 권위를 획득했고, 교황 및 베네딕토 수도회의 노선에 완전히 합류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피핀은 이탈리아의 롬바르드족을 정복함으로써 교황에게 진 빚을 갚았다. 서유럽은 이제 바야흐로 프랑크 왕국과 라틴 교회에 바탕을 둔 나름의 통일성을 이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