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이순신 충효사상 연구소 소장)
孝는 백행의 근본이고 인간의 기본 도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孝子라고 칭송받는 일부사람들의 이야기는 일반 범인들이 따라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효행 사례가 많았다.
할고단지(割股丹脂)나 자기 몸을 팔아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심청의 孝나, 한겨울 얼음판위에서 잉어를 구하는 등의 孝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하는 孝라고 인식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현상이다.
특히 오늘날 밥상머리교육이 사라지고 핵가족 시대로 가족 구성이 바뀌어 가면서 우리주변에 孝는 점차 잊혀져가는 낡은 유산으로 치부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孝는 평소 사람들의 일상의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의 기본 도리이다.
「대대 예기」에서는 일반적인 孝 실천을 거론하면서 “부모공경”은 효의 으뜸이라고 얘기하면서 단계별 효 실천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孝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가장 큰 孝는 공경하는 일이고(尊親), 그 다음은 부모를 부끄럽지 않게 하는 일이고(不辱), 그 아래는 봉양하는 일이다(能養)”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 세 가지 孝를 실천했던 이순신의 효행 사례를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 가장 큰 孝는 부모를 공경하는 孝가 가장 큰 孝라고 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공경하는 절절한 마음이 담긴 글들이 전쟁터의 난세 속에서도 공경의 孝로 80여회나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어머니를 떠나서 두 번이나 남도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었다.”
“아산에 문안 갔던 나장이 들어 왔다. 어머님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 다행이다”
“어머니 편지를 보니 평안 하시다 한다. 다행, 다행이다.”
“봉과 변 유헌 두 조카를 본영으로 보내어 어머님의 안부를 알고 오게 하였다.”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그는 잠시도 어머니에 대한 염려와 그리움을 잊지 않고 소식을 듣거나 소식이 없을 때는 사람들을 통해 어머니의 안부를 계속 확인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7년 전쟁 중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난중일기는 임진년 5개월, 그리고 계사년 8개월, 갑오년 11개월, 병신년 10개월, 정유년 7개월 그리고 무술년이 4개월로 도합 57개월만 기록으로 남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 효에 대한 기록을 발췌해보면 113회에 달한다. 기록으로 남은 57개월을 기준으로 나누어 보면 한 달 평균 2번꼴로 부모님을 그리고 걱정하는 효심이 기록 되어 있다.
최소 한 달에 보름 꼴로 어머님의 안위를 걱정하고 직접 모시고 봉양하지 못한 안타까운 심정이 절절히 일기에 묻어나고 있다.
결국 한 인간으로서 부모에 대한 애끊는 효심과 군인으로써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임무에 대한 책임감 등은 54세로 노량해전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파란 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7년간의 상처뿐인 전쟁을 승리로 종결하고 우리 곁을 떠난다.
평화 시도 아니고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각박한 전쟁터에서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한 나라의 수군을 책임지고 있는 장수로서 모든 전장을 통제하고 지휘해야 하는 사람이 보인 어머니에 대한 공경의 효행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자식들이나 집안 조카들 그리고 집안 종들과 하다못해 정탐선이나 본영을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어머니 안부를 계속 확인하고, 방법도 직접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전해 듣거나 편지를 보내거나 잘 있다는 안부도 사람을 통해 계속 전했을 것이다.
당시로서 모든 가용한 수단을 다 동원하여 어머니의 안부를 확인하고 소식이 뜸하면 안절부절 하지 못할 정도로 어머니에게 쏟는 자식으로서의 지극정성의 효심이 눈물겹다.
두 번째는 부모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불욕(不辱)의 효다. 이순신은 32세가 되던 해인 1576년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 권관(종 9품)으로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나간다.
평소 올곧은 성정(性情)과 원리원칙에 충실한 그의 근무태도는 직속상관으로부터 잦은 마찰과 질시의 대상이 되어 두 번이나 백의종군을 해야 하는 수난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품성과 의식 속에는 부모에 대한 존경과 함께 부모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자의식이 뿌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 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을 탄식하지 않으셨다.”
“조카 분의 편지로 해서 다시 아산고향 선산이 무사하고 가묘(家廟)도 별일 없고 어머님도 편안하심을 알게 되었으니 다행 다행한 일이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머리털인들 무엇이 어떠랴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부모를 부끄럽지 않게 하는 불욕(不辱)의 효는 두 세 차례 밖에 일기에 기록 되어 있지 않지만 그의 전 생애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자기임무에 충실했고, 군인으로서 올곧은 삶도 바로 이러한 부모를 욕되지 않게 하려는 효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이런 훌륭한 아들을 만든 부모의 역할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생사가 오락가락 하는 전쟁터로 자식을 내보내면서도 국가의 큰 치욕을 씻으라고 격려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이순신의 효는 곧 충으로 승화되었을 것이고 바로 이것이 어머니에 대한 효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훗날 나라와 백성에 대한 충성심으로 확대되어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고 국난을 극복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세 번째로 봉양하는 능양(能養)의 효다. 이순신이 기록한 난중일기에 어머님 봉양에 관한 내용만 25회나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의 가족사와도 결코 무관치 않다고 본다. 45세에 정읍현감(종6품)으로 부임하여 현지에 내려갈 때 주위에서 관리로서 너무 많은 식구를 데리고 다닌다고 비난하자 이순신은 “내가 식구를 많이 데리고 온 죄를 질지언정 이 의지 할 데 없는 것들을 차마 버리지 못 하겠다”고 이야기 한다.
현감으로 부임하는 정읍은 고향 아산에서 가깝고, 이순신은 4형제 중 3남이었는데 이순신이 발포만호(36세)였을 때 둘째형 요신이 사망하고, 녹둔도 둔전관(43세)으로 재직 시 큰형 희신이 사망했다. 그리고 막내 동생 여필은 통제사 재임 기간에 처와 함께 병사하였다. 이렇게 되다보니 어린조카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가족의 아픈 사연도 있었다.
특히 함경도 건원보 군관(39세)으로 근무할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해 겨울 11월15일에 아산에 계시던 부친이 세상을 떠났지만 부친 별세 소식을 이듬해 정월에야 전해 들었다.
그때 겪은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한과 함께 남편과 자식들을 앞세우고 혼자 남으신 어머니를 위해서 이순신의 봉양의 효는 누구보다도 더 정성되고 애틋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아침에 어머님께 보내는 물건을 봉했다”
“이날은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 유감이다”
“어머님이 안녕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답장을 써서 돌려보내며 미역 5동을 집에 보냈다”
“군관 양밀이 제주판관의 편지와 말안장, 해산물, 귤, 유자 따위를 보냈기로 곧 어머님께 보내드렸다.”
홀로 되신 어머니를 위해 이순신의 봉양의 효는 그 누구보다도 더 각별했으며 귀한 음식이나 좋은 물건이 있을 때는 언제나 인편을 통해 어머니께 보내 드렸던 것이다.
군인으로서 그것도 전쟁터에서 보낸 자식의 입장에서 가까이 모시고 조석으로 봉양도 하지 못하고, 남편과 자식들을 먼저 모두 떠나보내고 하나 남은 아들만 바라보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 마다 이순신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귀한 음식과 맛있는 음식을 볼 때마다 어머니가 먼저 생각나서 보내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순신의 봉양의 효는 군인으로서 곁에서 잘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와 아버지와 형제들이 없는 가운데서 더욱 더 잘 봉양 해야겠다는 책임감도 컸을 것이다.
이순신하면 많은 사람들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관료생활은 그것도 주변의 질시와 군왕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고, 두 번에 걸친 백의종군과 잦은 보직 해임 등 순탄치 못한 군 생활이었다.
오직 국가와 민족에 대한 확고한 사명감과 국가관 하나로 자기 삶을 지탱하며 존재이유를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명감과 국가관에 대한 밑바탕은 그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부모님에 대한 공경심과 부모를 부끄럽지 않게 하겠다는 자식으로서의 도리, 그리고 부모에 대한 봉양의 효심 등이 정신적인 토양을 제공했을 것이다.
난중일기 57개월의 전면에 흐르고 있는 이순신의 효행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존속케 한 사상적인 승리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