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부제: 제안서를 다시 설명하다.
주제3: ‘분리 개척교회’의 필요성과 성격
가. 서론
나. 본론
1. ‘분리 개척교회’의 필요성
A. 긴급한 새 예배처소의 필요성
B. 장기전을 대비한 생명 있는 ‘공동체’의 필요성
C.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야 할 필요성
2. ‘투 트랙’ 속에서의 ‘분리 개척교회’의 성격
A. ‘싸우는 교회’ 대 ‘건설하는 교회’
B. 본토교회(本土敎會) 대 난민교회(難民敎會)
C. 경찰교회(警察敎會) 대 청정교회(淸淨敎會)
3. ‘투 트랙’을 위한 기본 구상 (도표)
다. 결론
가. 서론
필자가 시간이 갈수록 더 느끼게 되는 것은 오목사와 그 추종자들은 점점 더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고 악해지고 완고해지고 강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성경을 읽고 똑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으나 그것은 종교적 행위일 뿐, 그들의 진정한 ‘미션’은 자기들의 아성(牙城)을 지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들이 앉아있고 오직 자기들의 세상적 성취를 추구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강권적(强勸的)인 특별한 개입이 없이는 이들이 회개하거나 생각을 바꿀 것 같지 않다. 필자도 그 동안 많은 글들을 통해 이들을 책망하며 회개를 촉구했지만 조금도 듣는 것 같지 않고 상태가 나아진 것 같지도 않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오목사를 반대하는 우리 ‘개혁진영’의 모습이다. 필자가 본 개혁진영의 실상(實像)은 오목사와 그 추종자들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하고, 그들을 심판하는 일에만 생각이 매몰(埋沒)되어 있는 것 같다. 친오진영과 개혁진영의 분명한 차이점은 한 쪽은 거짓과 불의의 장본인들이고, 또 한 쪽은 그들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외 다른 부분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닮은 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특별히, 내적 편협함과 완고함은 표현만 다를 뿐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놓고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냥 단순하고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 몸을 불살라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는 하나, 지금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다음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이 아니라 도리어 책망을 받을지 모른다. 나의 양심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투명한가? 우리는 우리자신을 앞에서도 보고 옆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좀 더 멀리 떨어져서 객관적으로도 우리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배의 내부 고장은 없는지 항로를 이탈하진 않았는지 종종 자기점검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양이면 아예 이 싸움을 그만 두는 것이 났다. 주님께서 ‘임재하시고 기름 부으시고 축복하시는’ 곧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일이 아니면 헛수고에 불과한 ‘사람의 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성찰의 노력이 없이 무조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가던 길로만 계속 간다면, 차라리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빼고 싸워야 하지 않을까? 맹신(盲信)과 신앙(信仰)의 차이는 무엇인가? 생각을 하느냐 않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몇 분의 댓글을 통해 염려의 마음을 전달 받았다. 즉 “그 날 그 날 벌어지는 일에 대처하기도 힘든데 새로운 이슈를 가지고 혼란을 야기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필자의 생각에는 도리어 이럴 때일수록 눈 앞의 일에만 이끌려 다니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지금의 활동 템포를 약간 늦추더라도 좀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임했으면 한다. 어쩌면 이렇게 정신 없이 눈 앞의 일들에 쫓겨 다니는 상태가 가장 위험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자칫 앞을 내다 보는 영적 시야를 확보하지 못할 수가 있다. 영적 일은 내 육신이 가장 고단하고 내 마음이 가장 분주할 때 실패로 가기 쉬운 법이다.
다음으로, 이제는 개척교회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분들을 향해 묻고자 한다. 우리는 왜 ‘분리 개척교회’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 ①우리의 목표가 이 대도시에 또 하나의 대형교회를 세우자는 것인가? ②아니면 SGMC를 타도하기 위한 의로운 교회를 일으켜서 ‘의로운 복수(?)’를 하자는 것인가? ③아니면 오목사 부임 이전 옛 추억의 사랑의교회로 돌아가는 것, 그 때의 교회를 재현하자는 것인가? 만약 어느 하나 ‘그렇다고’ 한다면 잘못된 동기(動機)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교회상의 각론(各論)은 제각기 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총론(總論)은 같아야 할 것이다. 총론조차 일치하지 않는다면 분리 개척교회를 굳이 함께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자의 글을 읽는 동안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지혜로운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소망한다.
나. 본론
1. ‘분리 개척교회’의 필요성
‘분리 개척교회’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은 이미 최초 제안서에서 개진한 바 있다. 사실 그 제안서도 대충 쓴 글이 아니다. 심혈(心血)을 기울여 쓴 글이다. 그래서 거기에 이미 설명된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수준이라고 사료된다. 이를테면,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분들은 벌써 이해를 했다는 말이다. 만약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면 그 제안서를 다시 꼼꼼히 읽어 보면 될 것으로 안다. 따라서 더 추가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성의와 노력은 다 해야 될 것 같기에 이 글을 쓴다. 본고에서는 최초 제안서에서 언급했던 ‘분리 개척교회(또는 이하 ‘새 교회’)의 세 가지 필요성’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 드리고자 한다.
A. 긴급한 새 예배처소의 필요성
SGMC에 들어가서 예배 드리기를 원치 않는 성도들이 현재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당장 그들을 위한 온전한 예배처소를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 주일본당기도회는 임시적 방편일 뿐이지 온전한 예배처소가 될 수 없다. ‘새 교회’ 설립을 전제(前提)로, 또 ‘기도회’가 아니라 설교자가 있는 ‘예배’란 이름으로, ‘친오진영’의 방해가 없는 곳에서, 모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투쟁적이거나 시위적인 다른 부차적(副次的) 목적이 없이, 오직 ‘예배 그 자체만을 위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
분명히 다시 말씀 드리지만, ‘분리 개척교회’의 일차(一次) 대상은, “지금 상태로는 더 이상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느끼는 성도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온전한 예배’와, 사랑과 용납을 느낄 수 있는 ‘온전한 성도의 교제’를 간절히 사모하는 분들이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지난 10개월 동안 경험하지 못했고, 그래서 현재 우리의 영(靈)이 몹시 목말라 하고 있기에 우선적으로 채워져야 할 요소들이다
우리 진영에서는 “그 정도도 자기가 해결하지 못하는 수준인가?”하고 일갈(一喝)하는 분들이 있음을 보았다. 솔직히 나는 그런 분들이 무섭다. 얼마나 영적으로 단단히 서 있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연약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나무랄 수 있는가? 그 말에는 ‘영적 교만함’과 ‘이웃에 대한 무정함’이 묻어난다.
욥의 친구들이 환란 당한 욥을 찾아와선, 위로하지는 않고 도리어 정죄하고 잘못된 충고를 늘어놓았던 일을 기억하자. 그들은 ‘체험이 결여된 추상적 지식’과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공의’로 욥을 판단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에서 출발한 이해와 동정과 긍휼과 공감이다. 오목사와 싸워야 한다는 눈 앞의 과제가 이웃의 아픔을 외면해도 되는 구실이 될 수 없다. 사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우리가 저들과 다름’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은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고 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와의 믹마스 전투에서 큰 실수를 했다. 그는 전투 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식령’을 내린 것이다.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삼상 14:24) 그는 속전속결로 승리하기 위해 백성들의 기본적인 필요와 욕구를 무시했다. 전쟁의 승리에만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하나님과 상관없이 오직 자기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큰 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다윗의 경우를 보자. 다윗이 사울을 피해 시글락 땅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잠시 마을을 비운 사이,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마을을 불사르고 부녀자들을 다 잡아가 버렸다. 이에 다윗은 황급히 군사들을 이끌고 아말렉을 추격한다. 얼마나 절박하고 급한 추격이었든지 브솔 시내에 이르렀을 때쯤 600명 중200명이 지쳐버렸다. 그러자 다윗은 이들을 쉬게 하고 남은 400명만 이끌고 추격하여 결국은 아말렉을 쳐부수고 부녀자들을 되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삼상30:1-25)
당시 아말렉 군사는 최소한 천 명은 넘었을 것이라고 한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 한 명의 군사라도 아쉬웠을 텐데, 지친 200명을 쉬게 한 다윗 - 그는 ‘어리석은’ 사람인가? 또 추격 중, 죽어가던 한 소년을 발견하고 그를 구해 준다. 다윗은 전쟁의 기본 ‘매뉴얼’도 모르고 ‘우선순위’도 모르는 사람인가? 구해 주고 보니 그는 아말렉의 종으로 있있던 애굽 소년이었다. 덕분에 그를 통해 순적하게 아말렉의 병영에 도달하게 된다. 만약 다윗이 그 소년을 외면했더라면 아말렉 군대를 찾지 못하고 가족들을 영영 잃어 버렸을 지 모른다. 다윗이 취했던 이러한 일련(一連)의 태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사울과 다윗 - 한 사람은 다 이겨가던 전쟁을 완승으로 이끌기 위해 백성들을 밥도 먹이지 않고 싸우게 했고, 한 사람은 아내들과 자식들을 구해야 하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지친 병사들을 쉬게 했을 뿐 아니라, 단 일분일초가 급했던 그 시점에도 행군을 멈추어 한 이방 소년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두 지도자의 신앙인격과 그릇의 차이를 보여 주는 귀한 이야기들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우리가 본 받아야 할 태도는 어떤 것인가?
두어 달 전, 이제 사랑의교회를 떠나기로 했다는 내용의 글이 사랑넷에 올라왔었는데, 그 글을 올린 분에게 몹시 나무라는 투로 반응을 보였던 댓글들을 읽고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사람마다 모두 개인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신앙의 수준, 신앙의 연조, 성격과 기질, 영적 민감성 등 개인차의 원인이 되는 요소가 많다. 특별히 현재 놓인 ‘환경(環境)의 차이(差異)’에 주목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 암 등 중환자 가족들, 청년실업자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직장인들, 장애인 가족들 등 각종 어려움과 환란을 당한 성도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난 10개월은 이런 분들에게는 더욱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필자의 딸의 영적 고통을 통해 그 분들의 마음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낙타 등 위의 마지막 지푸라기(A Last Straw on the Camel’s Back)”란 말이 있다. 단 하나의 지푸라기에 불과하지만 낙타를 주저앉게 하는 결정적인 마지막 지푸라기란 뜻이다. 우리 주변에는 지금 영적으로 ‘주저앉기 일보 직전’에 와 있는 분들도 있다는 것을 한 지체(肢體)로서 우리가 헤아려 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들을 위해 새 ‘예배처소’가 긴급히 필요하다.
B. 장기전을 대비한 생명 있는 ‘공동체’의 필요성
저들과의 싸움이 단기간에 끝날 수 없고 장기전의 가능성이 큼을 인정할 때,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으며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생명(生命)’ 있는 ‘공동체(共同體)’가 필요하다.
이 ‘생명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하여 ‘새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이 제안에 반대하는 분들의 대표적 세 가지 이유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B-1> 반대하는 첫 번째 이유 – “지금은 오목사를 쳐 내는 데만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도 될까 말까다. 그런데 새 교회 또는 투 트랙이라는 것은 우리측을 선동하고 분열시키는 행위다.”
지금 갱신위를 중심으로 한 투쟁노선은 오목사에 대한 법과 투표에 의한 심판을 강조하고 있는 ‘하드코어’식 접근방법이다. 그 방법이 여러 가지 면에서 허점과 문제가 있음은, 이미 필자가 “법과 표와 시간은 우리편인가?”란 글에서 지적한 바 있기에 이 자리에서는 재론(再論)하지 않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강경노선을 주장하며, 필자의 ‘투 투랙’ 제안에 관한 글들을 선동과 분열이라는 말로 반응하고 계신 분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세 가지로 줄여서 드린다.
1) 먼저, 정중하게 첫 번째 질문을 드린다.
“법적 소송 사건에 대한 심판은 ‘법(法)’으로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수(數)’로 하는 것입니까?”
“무슨 그런 엉터리 질문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필자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법의 심판’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법의 심판은 일차적으로 ‘법(法)’이 하는 것이지 사람의 ‘수(數)’로 하는가? ‘갱신위’와 ‘사랑넷’의 노선(路線)에 최대한 많은 사람이 지지를 해서 한 명이라도 더 줄을 서야 소송에서 이길 수 있고, 그 노선에 줄을 서는 수가 적으면 지게 되는 그런 게임인가? 공동소송인의 숫자가 줄어들던지 지지서명인의 숫자가 줄어들면 소송에서 지게 되는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상식에 맞지 않다. 법의 심판은 누가 더 많은 유효적 증거(證據) 및 신뢰성있는 증인(證人)을 확보했고, 법률상 누가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진실성 있는 진술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제기한 법적 소송 자체에 아무 연관이 되어있지 않은 교인들에게까지 “우리 뒤에 줄을 서시오. 이탈하면 안 되오. 지금 흩어지면 우리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되오.”라고 말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한편, 이미 공동소송인 명단에 들어갔던 사람이라도 개인의 사정에 따라 소송인 명단에서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다소 재판의 절차를 지연시킬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런 행정적인 변수 때문에 소송자체가 취하되는 것은 아니다. 남은 공동소송인들이 계속 해 나가면 된다.
단 한 명이 소송을 하더라도 확실하고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재판에 임하면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재판은 수로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재판에 이기려면 증거확보를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 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그 증거들로서 죄를 구성해내는 변호사 팀의 능력이다. 물론 여기에는 돈의 힘이 작용한다. 더 많은 돈을 쓸수록 더 능력 있는 변호사 팀을 고용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 교인들에게 “한 쪽만 보라”고 막연히 드라이브를 걸 것이 아니라, 차라리 소송재정을 위한 기부금 모금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솔직하고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이왕 법과 소송이란 화두가 나왔으니 몇 마디만 더 하려고 한다. 어차피 법으로 승부를 보실 요량이라면, ‘갱신위’에서도 현재의 법무소송팀에 더 ‘전문적인 평신도’들을 보강함으로써 더 강한 팀을 구성하여 재판에 임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모든 교인들을 무기한(無期限) 막연히 붙잡고 있는 방법보다 더욱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황피디를 볼 때마다 우리 ‘갱신위’ 소송팀과 비교하게 된다. 황피디는 증거확보를 위해서 기자의 취재정신으로 ‘소스’(Source)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그리고 종종 특종을 찾아낸다. 건강도 좋지 않은 양반이 온갖 공갈과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용케 피신해 가면서, 용기와 지혜로, 또 성경적 방법 안에서 팩트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을 본다. (왜 사랑넷이 황피디와 갈라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같이 힘을 합치지 못함이 아쉽다.)
그런 반면 우리 소송팀은 우선 비밀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물론 보안에 해당되는 사항은 공지할 수 없겠지만, 지금 어떤 재판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있는지 최소한의 공지는 필요하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어떤 구체적 협력과 기도가 필요한지도 카페를 통해 정기적으로 알려야 할 것이다. 소송 현황에 관해 필자만 잘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분들은 몰라도 가만 있는데 필자만 궁금해 하는 것인지? 더구나 황피디처럼 발로 뛰어 다니며 동분서주하는 동적인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아, “우리는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의아스러울 때가 많다.
한편 그런 말을 하면, 즉각 나오는 반박이 있다. “다들 말만 하지 정작 발로 뛰며 ‘봉사’하려는 사람이 없다. 손이 부족한 이 판에 직접 돕지는 못할망정 불평만 하느냐”고 한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일이 ‘자원봉사자’(Volunteer)들만으로 되겠는가? 필자의 생각에는 ‘유급 일꾼’(Salaried-staff)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한 재정은 한 구좌 당 얼마씩 전체적 모금을 하더라도 사례비와 출장비 및 취재조사비를 마련해 나가야 되지 않겠는가? 전쟁을 하려면 전비(戰費) 마련이 우선일 것이다. 이왕 하는 전쟁이니 이기는 전쟁을 하려면, 지도부에서 교인들과 함께 호흡하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울여 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호응과 참여가 더 높아지지 않겠는가? 어떻게 도와야 할 지 몰라서 못 돕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이상 법과 소송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주제 넘는 말을 드렸다. 그러나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드리는 고언(苦言)이니 마음을 열고 들어 주셨으면 한다.
어쨌든 법적 소송에 사람의 수가 승패의 결정적 요건이 아니라면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이 대열에 참가할 수 있도록 갱신위가 열린 마음으로 임해 주셨으면 한다. 갱신위가 더 넓은 시야와 통 큰 지도력을 보여 주실 때 도리어 우리 공동체는 더 평안해지고 더 강해질 것이다.
2) 이제는 정중하게 두 번째 질문을 드린다.
“투 트랙이 갱신위와 사랑넷에 해(害)가 될 줄로 생각하십니까?”
지금 우리 가운데는 “SGMC에 들어가서 계속 싸우겠다”는 분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SGMC에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아 밖에서 싸우겠다”는 분들이 있다. 또 후자 가운데는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계속 강남본당에서 예배 드리겠다”는 분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자의 입장처럼 “어차피 우리가 저 무리들과는 앞으로 함께 신앙생활 할 수가 없으니 차제에 제대로 된 새 교회를 개척하자”고 하는 분들도 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자유가 있고 그 선택 또한 자유인들의 권리다. 누가 강압을 할 수 없다. 또한 이 자유인(自由人)들은 누가 선동을 한다고 ‘따라가고 따라오는’ 무지한 분들이 아니다. 비록 말은 안 해도 제각기 깊은 생각들이 다 있는 것이다. (필자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그러한 자유인들의 판단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조언을 드리는 역할일 뿐이다. 받아 들이고 들이지 않고는 전적인 개개인의 자유다.) 따라서 이대로 방치한다면 결국에는 하나 둘 각자가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다 흩어지고 말 것이다.
종종 훌륭한 글을 써오셨기에 닉네임이 친숙한 어느 분이, 필자의 글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댓글을 단 것을 보았다. “새 교회를 세우는 것은 당신의 자유지만 사랑넷은 그런 논의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 말을 하려면 사랑넷 밖에서 하라.”고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랑넷에는 사랑넷의 방침에 따르겠다는 사람들만 모여 활동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찬성만 있고 반대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좀 미안한 말씀이지만 오목사가 자기 목회방침에 동의하지 않는 순장들은 모두 순장 자리에서 떠나든지 교회를 떠나라고 했던 말과 비슷하지 않은가?
필자는 사랑넷이 사랑의교회를 도적질해간 오목사와 같은 악인들을 척결함과 아울러 교회다운 교회를 꿈꾸는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고 참여해 왔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인 개혁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해 왔다. 필자가 오해하고 착각했던 것인가?
한편 ‘새 교회’ 설립의 상황을 한 번 가정(假定)해 보자. 만약 약 100명의 성도들이 새 교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새 교회를 개척했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이 분들이 사랑넷 활동을 안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분들이 오목사 치리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새 교회를 세워나가면서도, 한 마음으로 모여 오목사의 치리를 위한 기도를 할 것이고, 소송 재정지원도 계속할 것이다. 아울러 사랑넷에서 자격을 박탈하지 않는 한, 계속 사랑넷 활동도 하면서 일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필요한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 분들이 갱신위나 사랑넷과 담을 쌓고 적대적 입장이 될까 염려되는가? 아니면 사랑넷 공동체에서 빠져나갈까 봐 두려운가? 그랬다면 여기서 실랑이 벌일 필요 없이 벌써 독자적으로 진행했을 것이다. 이 분들은 지금 이 공동체에 속한 분들 특히 ‘갱신위’와 ‘하모니’(Harmony)를 이루는 가운데 서로를 축복하는 분위기 속에서 새 교회를 개척하기를 원하기에 생각을 나누고 또 나누는 것이다. 진작부터 그런 길을 열어 주었더라면, 필자가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 분들은 ‘생각이 다른 분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기들의 생각을 이해해 주고 인정해 달라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는 오목사를 치리 하기 위해 같은 배를 타야 하는 동지(同志)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연 분열을 꾀하는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이 분들의 생각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SGMC의 악한 무리들과는 결별하겠다는 것, 둘째 더 늦기 전에 개혁적인 교회,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 분들을 이대로 방치하면 머지 않아 사방으로 다 흩어지든지 아니면 결국은 원치 않는 상황이지만 ‘갱신위’의 양해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라도 ‘새 교회’를 개척하게 될 것이다. 아마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될지 모른다. 어떤 것이 더 갱신위나 사랑넷에 도움이 되겠는가? 다 뿔뿔이 흩어지는 것보다는, ‘새 교회’란 매개체를 통해서라도 남아서 사랑의교회 ‘갱신위’와 ‘사랑넷’의 간접적 조력자가 되어 드리는 것이 더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새 교회’ 설립이 결코 갱신위에 해를 끼친다거나 적대적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외연(外延)이 더 넓어질 수 있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3) 이제는 정중하게 세 번째, 마지막 질문을 드린다.
“귀하는 필자가 이렇게 글을 써 올리는 것을 선동으로 생각하십니까?”
선동(煽動)이란 “남을 부추겨 어떤 일이나 행동에 나서게 하는 것”이다. 선동은 항상 부정적인 뜻으로만 쓰이는 용어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설교(說敎)를 선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거짓을 진실인 양 속이든지, 악한 것을 선한 것인 양 속임으로써 남을 부추겨 거짓되고 악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을 선동이라고 한다.
필자의 글이 분열을 꾀하기 위한 선동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필자의 글의 어떤 부분이 ‘거짓’이요 ‘악’인지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가급적 성경적 논증을 해 주시면 더 고맙겠다. 만약 ‘진실’을 드러내고 ‘선’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선동이라고 한다면, 사실은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자기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성도들의 눈을 가리는 선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이 때때로 부메랑이 될 수 있다. 필자를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자라는 암시를 주는 나쁜 댓글들은 조심해 주셨으면 한다. 그것은 필자를 위함이 아니라 그 분 자신들의 품위와 ‘사랑넷’의 품위를 위함이다.
<B-2> 반대하는 두 번째 이유 - “다른 교회 괜찮은 데 많다. 굳이 지금 새 교회를 분립해서 개척하려고 하지 말고 다음에 좋은 교회를 찾아서 떠나라.”
필자는 20년 동안 신앙생활 했던 교회를 한 번 떠나 왔던 아픔을 겪었기에, 사실 또 떠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다른 분들이 다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권면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못하는 분들을 정죄할 권한은 없다. 또 사랑의교회 성도들과의 오랜 교제를 포기할 수 없어 가급적 떠나지 않으려 하는 분들의 마음도 이해해야 한다.
사실 타 교회 정착(定着)이 쉽지는 않다. 사람을 새로 사귀고 정을 붙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격에 따라 그것을 잘 하는 분들도 있고 힘들어 하는 분들도 있다. 따라서, 새 교회에 갔다고 해서 잘 정착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담임목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의 분위기도 중요하다. 소문만 듣고는 알 수 없다. 실제로 들어가도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2년 정도 지내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 막상 옮겨도 그 공동체를 내 집같이 여기며 온전한 소속감을 느끼려면 최소한 3년은 걸린다. 필자는 5년이 지나도 사랑의교회가 내 집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계속 손님 같았다. 규모가 커서 더 그랬을 것이다.
내가 몸 담고 싶은 새 교회는, 살 집을 찾듯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쓸 물건을 고르듯 쉽게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필자의 경우도 이전에 섬기던 교회를 떠나 6개월을 찾아 헤매다 심사숙고 끝에 사랑의교회로 왔지만 지금 이 기막힌 일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어느 분의 쓴 경험담이 기억난다. “본의 아니게 교회를 수 차례 옮기게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문제가 일어나서 결국은 계속 ‘문제교회’만 찾아 다닌 꼴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더 기가 막힌 일이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그 교회에 어떤 밝혀지지 않은 문제가 있는지, 그 교회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목사님들의 ‘설교’만 듣고 평가 하는 것도 위험하다. 목사님들의 ‘설교’와, 실제 그의 ‘삶’과 ‘인격’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도 오목사의 정체를 알기까지 10년이 걸린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을 필자가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선택한다면 격려해 드리고 싶고, 그 장도(壯途)를 축복하고 싶다. 그러나 교회 옮기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는 말고, 알 것은 알고 마음 준비를 하고 가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필자는 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떠나기보다는 분리 개척교회를 생각해 보라”는 ‘강요’아닌 ‘제안’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응집되어 있는 우리의 ‘개혁 에너지’가 분산되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 이 쓰지만 소중한 경험의 자산은,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꼭 활용(活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있는 ‘생명 있는 공동체에 대한 소망’을 이루어 보자는 것이다. 적어도 이 소망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所願)이라고 믿는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B-3> 반대하는 세 번째 이유 - “우리는 반드시 악의 세력을 응징해내야 한다. 그러니 아직 우리는 갈 길이 멀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라면 피하지 말고 SGMC에 들어가서 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 고통의 심연에서 ‘더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매우 비장하고 결의에 찬 주장이다. 필자는 이런 분들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또 그런 선택을 축복하고 싶다. 꼭 기도하고 소원하는 바를 이루시기를 빈다. 그러나 필자가 모든 분들에게 “모두 ‘새 교회’에 참여하셔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음과 마찬가지로,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도 모든 성도들에게 “모두 이런 선택을 해야 옳다”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사랑의교회 반오진영의 성도들이 각자의 ‘믿음의 분량’과 ‘신앙의 수준’에 따라, 고난도 겪을 만큼 겪고 있고, 기도도 할 만큼 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글을 쓰신 성도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각자의 수준에서 나름대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오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우리의 영적 수준을 과대평가하지 말자. 우리가 지금쯤 도달해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성숙의 기대치’를 너무 갑작스레 올리지 말자.
“너 자신을 알라”는 뜻이다. 신앙적 판단과 결정은 각자의 수준에 따라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수준에 정직해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는 말씀처럼, 영적 성숙은 위장해서는 안 된다. 자칫 바리새인의 외식이 된다.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시험에 노출되면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가 모교회였던 동원교회를 떠나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장로로서 성도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또 교회의 시험이 있기 전까지는 나도 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시험의 강을 건너고 나니 나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성숙하지 못하고 미천한 나의 영적 수준이 나를 부끄럽게 했고 스스로만 아는 ‘위장된 경건’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로의 자리에서 떠나야 했고 결국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구도의 여정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영적성숙은 많은 시간(時間)을 요하고 오랜 훈련(訓練)을 통해 이루어 진다.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이 끝났다고 훈련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 각자는 한 평생이 걸리는 이 ‘장기제자훈련’ 코스의 어느 과정에 와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이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임에는 틀림없으나, 어떤 이는 SGMC에서 악한 자를 출교시킬 때까지 끝까지 싸우는 길을 갈수도 있고, 어떤 분들은 새 교회를 개척하고 세우는 일에 매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길을 갈수도 있고, 어떤 분들은 다른 교회를 찾아 떠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두 똑 같은 길을 갈수는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이 다르다. 그것을 부정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할 수도 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짧게는 지난 1년 길게는 지난 10년간 힘든 ‘고난의 터널’을 지나왔다. ‘뜨거운 풀무’를 통과해 왔다. 적어도 아직 남아있는 성도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하다고, 아직도 멀었다고, 더 뜨거운 기도를 더해야 한다고 다그치지 말자. 어떤 때는 기도가 잘 되다가도, 어떤 때는 가슴이 아파 눈물만 나올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몸과 마음이 지쳐 탄식만 나올 때도 있다. 나의 한계를 느낀다. 우리의 이 쓰라린 고통이 ‘기도의 부족’ 때문에 끝나지 않고 있다고 너무 꾸짖지 말았으면 좋겠다.
“기도의 분량과 뜨거움의 정도가 응답의 조건(條件)”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자칫 하나님과의 인과응보적(因果應報的) 거래(去來)가 될 수도 있다. 기도마저 우리의 공로(功勞)가 되면 안 된다. 뜨거운 기도는 응답의 ‘필요조건’은 될 수 있겠지만, 응답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응답(應答)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단지 선물을 받기 위해 벌린 두 손이요 열린 통로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기도의 용사’들이겠는가? 모든 성도들이 다 ‘깊은 영성의 소유자’들이겠는가? 우리 주님께서는 목자를 잃고 유리 방황하는 연약(軟弱)하고 어린 양떼들을 무시하고 관망(觀望)만 하시겠는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 다니지 않으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양들을 흩어지게 한 ‘나쁜 목자’들을 얼마나 나무라셨던가? 『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렘 10:2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렘 23:1) 그리스도인들은 전사(戰士)의 마음뿐 아니라 목자(牧者)의 마음도 가져야 할 것이다.
C.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야 할 필요성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주체인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야 할 사명”이 있다. 이 사명은 “악의 무리들을 대면하여 싸우는 사명”보다 궁극적인 관점에서는 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명이 다 귀하다. 그러나 똑 같은 비중으로 귀한 것은 아니다. 우선순위가 있다. 두 가지를 다 추구하더라도 ‘더 중요한 것’에 ‘덜 중요한 것’은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 우선순위가 헷갈릴 때에는 하나님께 여쭈어 보어야 한다. 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질문하면서 고민해 보아야 한다. “사도들은 어떻게 했는가? 역사적 기록을 통해, 신약시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어떻게 했는가? 기독교의 영적인 스승들은 어떻게 가르쳐 왔으며 또 지금 가르치고 있는가?” 겸손하게 살펴 보아야 한다.
필자는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는 사명’이 지금 ‘오목사와 그 추종자들과 싸우는 사명’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더 중요한 과제라고 믿는다. 이 말에 반대하는 분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오목사와 싸워 그를 몰아내어야 교회를 지킬 수 있고, 교회를 지켜 낸 후에야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 현재의 우선순위는 오목사와 싸우는 것이다. 딴 것은 모두 후차적(後次的)이며 지금 단계에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논리는 사람중심적이며 세상적 사고를 따른 논리이지, 하나님중심적이며 성경적 사고를 따른 논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점 필자가 수 차 설명 드린 바 있다. 또한 이러한 논리는 얼핏 단순 명료해 보이지만 현실성(現實性)과 구체성(具體性)이 결여된 이야기다. 불편한 말이지만 오목사는 그렇게 쉽게 퇴진시킬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른 글에서 여러 차례 충분히 설명 드린 바 있다.
‘새 교회’를 반대하는 분들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분들이 있다. ①“나는 SGMC 예배는 아예 참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교회 교적을 유지해야 되기 때문에 다른 교회에 가서는 예배만 드리고 온다” ②“SGMC 예배는 형식적으로만 참석하고, 인터넷으로 다른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는다.” ③“우리교회 예배 시간에는 설교가 은혜 되지 않으니 예배는 참석하되 설교 시간 중 내내 성경만 읽는다”고 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각자 나름대로의 ‘영적 생존전략’(生存戰略)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라도 하면서, 오목사를 쫓아낼 때까지는 버텨 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얼마나 오래 동안 버틸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많은 분들이 ‘예배학’이나 ‘교회론’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잊어버린 것 같다. 사랑의교회가 대형화되는 과정에서 신앙생활의 핵심적인 요소인 이 부분들이 가려져 버렸고 우리 성도들도 알게 모르게 놓쳐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 ‘예배다운 예배’를 위하여
먼저 ‘예배’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예배다운 예배’는 ‘교회다운 교회’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이다. 그 동안 경험해 온 우리교회 ‘예배의 실상’을 보자. 주일예배는 매주 각자 편(便)한 시간을 골라 드리면 됐고, 주일예배 중 설교자를 영상(映像)으로 보게 되어도 그러려니 했다. 때로는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려도 상관없다. 예배자(禮拜者)로서의 정성(精誠)과 헌신(獻身)이 사라진 현대판 편의주의(便宜主義) 예배가 된지 오래다. 이 모든 행태가 과연 옳은 것인가?
예배는 ‘나 혼자’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행위가 아니다.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가 한 믿음과 한 성령 안에서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적 행위다. 자신이 강단의 목사도 잘 모르고 지기 앞뒤좌우의 예배자들도 잘 모르는 서먹서먹한 타 교회에 가서 ‘하나됨으로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적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몸만 살짝 갔다가 몸만 가만히 빠져 나오는 예배, 그 예배공동체와는 유리(琉璃)된 예배가 진정한 예배일 수 있는가? 물론 늘 그런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은혜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분(充分)한 예배는 아니다. 그런 종류의 예배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로 교회에 가는, ‘교제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드리는 예배와 비교할 때 또 다른 극점(極點)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른 예배가 아닌 점은 동일하다.
예배는 참석만 한다고 참석한 것이 아니다. 예배 시간에 신뢰할 수 없는 설교자의 설교 때문에 예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면 이미 죽은 예배다. 예배 성찬식에서 악한 목사가 나누어 주는 떡과 포도주를 받으며, 그를 정죄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참여한다면 ‘성찬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런 예배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우리의 영(靈)도 살 수가 없다. 머지 않아 우리의 영이 질식하고 말 것이다. 도리어, “그래도 견딜만하다”고 말한다면, 그런 상태는 당신의 ‘영성이 높음’을 증명(證明)해 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당신의 ‘영혼이 심하게 병든 상태’라는 것을 반증(反證)해 준다.
예배의 목적은 무엇인가? 예배 시간은 은혜만 받기 위한 시간이 아니다. 설교만 들으러 가는 시간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경배와 영광과 감사를 올려 드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상반절)
이상 언급한 바와 같이, 예배는 전심(全心)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성령과 진리 안에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드려야 한다. ‘모이는 예배’에 성공해야 ‘흩어지는 예배’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예배다운 예배’가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다.
2) 교회다운 교회를 위하여
다음으로 ‘교회’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지금의 SGMC와 거꾸로만 하면 그 ‘바람직한 교회상’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SGMC는 ‘물량주의’와 ‘기복주의’와 ‘개교회중심주의’라는 찌그러진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다. 세속화로 오염된 사랑의교회-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도 여기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온 덕분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오염이 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 인생은 신앙적 삶이 핵심이요, 그 신앙적 삶의 본거지는 교회다. 자의든 타의든 교회생활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내적 외적 삶 전체가 흔들린다. 지금 대부분의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이 현상, 곧 영혼의 지진과 ‘쓰나미’(Tsunami)를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남에게 자신이 덜 성숙하고 부족하게 보일까 봐 애써 감추고 있을 뿐이다. 성도들이 ‘척’한다고 우리의 진짜 모습이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가면, 나중에는 우리의 심령 속에 몰래 자라고 있는 ‘쓴 뿌리’들이 가시와 엉겅퀴가 되어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목사와의 싸움’보다도 ‘교회다운 교회 개척’에 더 우선순위(優先順位)를 두어야 할 이유다.
교회다운 교회의 일반론(一般論)을 살펴 보자. 교회는 ‘말씀의 참된 선포’(True Preaching of the Word)와 ‘성례의 정당한 집행’(Right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과 ‘권징의 성실한 이행’(Faithful Exercise of Discipline)이란 3대 지표(指標)를 갖추어야 한다. 또 교회에는 4대 요소(要素)가 필요하다. 즉 케리그마(선포), 다다케(교육), 디아코니아(봉사) 그리고 코이노니아(교제)- 이 네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균형 잡힌 교회’가 될 수 있다. 또한 바람직한 교회는 항상 성도들이 ‘균형(均衡) 잡힌 신앙’ - 곧 은혜와 진리 안에서, 사랑과 공의 안에서, 말씀과 성령 안에서, 믿음과 행위 안에서 좌(左)로나 우(右)로나 치우치지 않는 신앙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다운 교회는 누가 만드는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도 아니다. 소속된 교인들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좋은 교회를 만들려면 내가 좋은 성도로 준비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잠시 생각해 보자. 나는 이만하면 괜찮은 교인인가? 그 동안 제자훈련을 비롯하여 웬만한 훈련은 다 받았으니 잘 훈련된 성도인가? 내가 속할 교회 공동체는 나로 인해 멋진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서 필자는 단언(斷言)하고 싶다. 미안하지만 답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제자훈련의 ‘원조(元祖)교회’에서 훈련 받았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그 자만이 우리를 망쳤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우리자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참담한 실패자들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 여러분들이 다른 교회로 적을 옮긴다면 ‘사랑의교회’란 이름은 당분간 ‘주홍글씨’(Scarlet Letter)처럼 자랑스럽지 못한 딱지가 되어 따라다닐 것이다. 마치 부도났던 회사에 근무했던 직원의 이력서처럼 말이다. 사랑의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았던 분들일수록 더 부끄러울 것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오목사와 그 추종자들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당장은 마음이 편하겠지만 절대 발전(發展)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올 때까지 무지, 방관, 또는 무관심으로 일조(一助)했다는 것을 알고, 실패자의 겸손히 배우는 자세와 ‘패자부활전’에 임하는 새로운 각오와 헌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편, 새 교회를 시작한다고 완벽할까? 아니다. 새 교회에서도 마음이 안 맞아서 떠나는 사람이 분명히 나올 것이고, 크고 작은 분쟁이 있을 수 있다. 사탄의 계속된 부추김으로 인한 다른 의미의 영적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분리 개척교회’를 설립해 봐야 소용없다고 겁(怯)을 주려는 것 아니다. 필자는 ‘새 교회’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하는 한 사람으로서, 예상되는 장애물들의 존재를 미리 예고하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먼저 받아들이고, 기도하면서 마음의 대비를 하고 최대한 미연에 예방하도록 힘쓰자는 말이다.
지금 우리 ‘사랑넷’ 공동체 안에도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이 많이 부족하다. 성숙한 모습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나, 성숙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정직하게 볼 줄은 안다. 이대로 가면 실패의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배운 것 이상으로 행할 수 없다. 내 속을 채우고 있던 쓰레기들을 보지 못했는가? 내 영혼의 빈 방을 보지 못했는가? 이제 ‘새 것을 배우는 자’의 겸손(謙遜)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아마 이것이 분리 개척교회 성패(成敗)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 안에서 가장 먼저 겸손한 자세를 보여주어야 할 분들은 교인들의 대표인 장로님들이다. 즉 우리의 교만(驕慢)을 고백하고 회개하는데 가장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실 분들이다. 모름지기 지도자는 좋은 일에는 제일 먼저 영광을 받게 되지만, 나쁜 일에도 제일 먼저 비난을 받게 되는 법이다. 왜?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교회 문제에 대한 원인 분석과 자기 성찰은 지도자인 장로님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스런 순리요, 바람직한 현상일 것이다.
필자가 소개한 바 있었던 ‘프놈펜 장로모임’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우리교회 재정감사 결과 및 건축헌금 등에 관련된 부조리한 일들이 보도된 바가 있어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던 교수 출신 은퇴장로님 한 분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반문했다. “아니 교회시스템이 작동할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특히 ‘사랑의교회’쯤 되면 시스템이 잘 되어 있지 않아요?” 필자는 협동장로에 불과해서 우리교회의 재정운영 및 의사결정 시스템을 잘 몰랐지만, 이 분의 말에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이 멍멍한 느낌이었다.
그렇다. 재정을 가지고 장난치고 나쁜 짓 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지만 시스템을 허술하게 해 놓은 것은 더 큰 잘못이다. 만약 시스템은 잘 되어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면 더욱 더 큰 잘못일 것이다. 필자는 우리교회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아직 구체적인 자료나 정보가 없어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직감(直感)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필자는 우리교회에 두 가지 잘못이 다 있었다고 본다. 재정 통제 시스템 자체도 허술했을 것이고, 그 운영관리도 소홀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시스템의 허술함은 교회정관도 제대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고, 관리의 허술함은 SAP회계프로그램을 도입 설치하는 과정을 들어서 짐작할 수 있다. 내로라하는 여러 명의 법조인들과 회계사들이 장로로 있는 사랑의교회인데, 그들의 전문성(專門性)조차 교회에서 제대로 살리지 못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가? 필자의 진단으로는 ‘담임목사의 독재’가 근본 원인이었다고 본다. 옥한흠 목사님 시절에는 옥목사님 식의 ‘선(善)한 독재(獨裁)’와, 오목사 시절에는 오목사식의 ‘악(惡)한 독재(獨裁)’가 있었다. 극과 극 – 따라서 동기는 선과 악의 차이만큼이나 달랐지만, 독재라는 점은 같았다. 옥목사님은 자신이 깨끗하니까 장로들도 깨끗하게 할 줄 믿었고, 따라서 굳이 타이트한 관리시스템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오목사가 와 보니 관리시스템이 엉성한 사랑의교회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요 널려있는 것이 먹이감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심복이나 가족들을 주변에 두고, 가장 말을 잘 들을만한 장로들을 중직에 앉혔다. 그 이후의 일들은 상상에 맡긴다.
외람되어 죄송하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상 언급한 이유 때문에 사랑의교회 장로님들은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교회 운영의 경험을 많이 못해 보신 것 같다. 우리 장로님들은 “교회는 사회와 다르다”는 전제 아래, 모든 것을 ‘은혜롭게’ 처리하시는 데에만 익숙해지신 것 같다. 또 선배들로부터 내려오는 일종의 ‘관습(慣習)이란 전통’에 밀려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을 수 있다. 타이트한 제도적 장치를 주장하면 다른 사람들을 불신하는 오만불손한 태도라 비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대형교회가 되어 오면서 바람직한 제직회나 공동의회 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중소교회 규모에서 장로로 섬겼던 필자 자신의 예를 들게 됨을 용서 바란다. 필자는 주일 장년출석교인 약 500명에다 8명의 장로가 있는 교회에서 섬기는 동안 비교적 다양한 경험을 했다. 회계담당 안수집사 시절에는 매월 열리는 ‘제직회’ 재정보고 서면자료를 준비하느라 힘들었고, 제직회 석상에서는 재정운용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나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매월 제직회가 열리니 머리 좋은 교인들은 많은 회계항목과 왠 만한 계수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기에 방만한 운영이나 비밀 예산이란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장로로서 예결산위원장을 할 때, 특히 연말 제직회 총회와 공동의회를 앞두고는 합리적인 균형예산을 편성하기 위해 때로는 담임목사님과의 마찰이 있기도 했다. 물론 담당 장로로서 담임목사님께 교회 사정을 설명 드리고 간곡한 호소로 양해를 받아내야 하는 어려움도 겪었어야 했다. 공동의회에서는 어린 대학생들의 발언이라도 경청한 후 ‘이해를 시키든지 아니면 수용하든지’ 하는 민주적인 교회 운영의 경험을 했다. 그 당시는 짜증나고 힘든 일이었으나 지금 보니 얼마나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었던지, 옛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곤 한다.
물론 사랑의교회 출신 장로님들은 모두 감히 필자가 비견되지 못할 만큼 대단한 분들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재정이 풍부한데다 모든 일이 ‘은혜’란 명분으로 잘 풀려 갔던 사랑의교회 장로들이셨기에 힘든 일이나 고난이 많을 개혁적 개척교회를 주도해 나갈 경륜은 좀 부족하신 것 같다. 지금까지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그런 생각이 더 굳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교회 출신 장로님들이 앞장서서 ‘새 교회’ 개척을 주도해 주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왜냐하면, 새 교회를 세운다 한들 교회의 ‘원 뿌리’ 곧 교회 족보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로님들에게 ‘분리 개척교회’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분들이 분발하고 의식이 새로워져서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낮아진 자의 자세’로 개척에 임하신다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희망이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 타 교회 출신인 협동장로님들도 똑 같은 책임과 권한으로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개척교회를 시작한다면 협동장로님들을 무시하지 말고 존중해 주시기 바란다. 우리교회에 와서 아웃사이드로 그 동안 설움을 당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물론 절대 그렇지는 않겠지만, 만약 이전처럼 사랑의교회 출신 장로님들이 더 우대 받는 폐쇄적 문화가 계속될 것이라면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미 그 결과가 보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본교회 출신 장로로서의 겸허한 책임감(責任感)으로 개척교회 설립에 관한 이니시어티브(Initiative; 선도적 주도권)는 쥐되 헤게모니(Hegemony; 패권적 주도권)는 사양해 주십사고 하는 부탁이다. 이 부분에서 앞으로 사랑의교회 출신 장로님들의 헌신적이고 개혁적인 지도력을 기대해 본다. (필자 주- ①필자가 협동장로여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협동장로가 아닌 한 사람의 선교사로만 계속 남을 것이다. ②지금의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운영 및 사역장로님들 가운데는 새 교회 개척을 위해 현재의 장로직을 사임하고 나오실 분이 거의 없어 보여 실망스럽다. <그런 경우는 필자가 이미 언급했듯이 뜻을 같이하는 몇 분 은퇴장로님들과 몇 분 협동장로님들과 다른 평신도들이 개척을 감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③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 미래를 생각하고 이런 주제넘은 말들을 늘어 놓은 것은, 필자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④어쨌든 이 자리를 빌어, 필자가 그 동안 장로님들께 탄원도 하고 비판도 하고 무례를 범한 모든 일들에 대해 정중하게 용서를 빈다. 같은 동료 장로로서의 애정 어린 투정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더욱 고맙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교회다운 교회’는 지금의 SGMC에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다. 설령 오목사가 퇴진한 후에라도 오목사의 지지자들이 엄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절대 기대할 수 없다. 산에 가서 물고기를 찾는 격이다. 세속적인 전통이나 문화와 적당히 절충한 ‘무늬만 교회’를 세우려면 SGMC의 오목사 추종자들과 평생 교회를 같이 하시면 된다. 그러나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 보시겠다는 열정이 있고,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남은 인생을 이 일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고 싶다는 소원이 있는 분들은, 새 교회를 개척하여 시작하시기를 권해 드린다. 앞으로 다른 글에서 더 다루겠지만, 사랑의교회의 ‘남은 자’(the Remnants)들의 새 교회가 반드시 하나만 있을 필요는 없다. 복수(複數) - 즉 숫자가 많을수록 더 좋다. 더 많은 소형교회(小型敎會)가 생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필자는 굳게 믿고 있다. 물론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2. ‘투 트랙’ 속에서의 ‘분리 개척교회’의 성격
‘투 트랙’ 구조 속에서 ‘분리 개척교회’의 성격은 무엇인가? 필자는 ‘투 트랙’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하여, ‘주(主)된 사명(使命)’을 각각 한 가지씩 지닌, ‘두 가지 형태(形態)의 교회(敎會)’로 상호 비교해 보려고 한다. 비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아래의 세 가지 대비 방법을 사용해 보았다. 첫째 싸우는 교회와 건설하는 교회, 둘째 난민교회와 본토교회, 셋째 청정교회와 경찰교회 등이다. 이 용어들은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만든 신조어(新造語)들임을 밝힌다.
A. ‘싸우는 교회’ 대 ‘건설하는 교회’
필자가 고등학교로 진학하던 해, 1968년 1월 12일 북한의 특수부대 124군 소속 31명의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내려와서 청와대 바로 뒷산까지 접근했던 가공(可恐)할 사건이 있었다. 또 그 해 11월 2일은 120명이란 최대규모의 울진 삼척 무장공비침투사건이 있었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 매일 흑백 T.V.와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전국민이 촉각을 세웠던 것을 필자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두 사건은 한국사회에 미국의 9.11 사건만큼이나 큰 충격을 주었던 대형 도발사건이었다. 그러자 그 이듬해 1969년 신년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대국민 호소를 하게 된다.
사실 그 당시에 이미 북한은 우리가 다시 빼앗기에는 너무나 견고했던 괴뢰들의 진이었고, 도리어 그들이 남한을 삼키려고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있었을 때였다. 우리는 저들과 싸우느라 전쟁에만 모든 국력을 다 쏟을 수는 없었다. 백성들도 먹여 살려야 했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미래와 후손들을 위해 건설을 해야 했다. 그래서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말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북한의 존재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건설이고 뭐고 다 미뤄놓고 북한처럼 ‘선군정치’(先軍政治)로 ‘싸우는 일’에만 매달렸다면 오늘의 발전된 조국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최초 제안서에서 2개의 전장(戰場) 개념을 소개했었다. 하나는, 마귀의 하수인들 즉 SGMC로 상징되는 현 담임목사와 그 추종자들을 ‘구축(驅逐)하기 위한’ 영적 전장이다. 또 다른 하나는 분리 개척교회 설립을 통해 “성령을 따라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을 구현(具顯)하기 위한’ 영적 전장이다. 우리가 우리진영의 모든 에너지를 오목사 구축을 위한 싸움에만 다 쏟는다면, 단기적으로는 ‘오목사 구축’이라는 성과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백성도 죽고 나라도 망하는’, 즉 ‘성도도 죽고 교회도 없어지고 마는’ 불행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볼 줄 아는 통찰력과 전망이 있어야 한다. 미시적이고 근시안적인 태도는 결국 그에 상응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이다.
싸우며 건설하는 것은 그 사명들을 감당할 ‘두 주체’가 필요하다. 싸우는 것과 건설하는 사명은 한 주체가 동시(同時)에 다 감당할 수 없다. 각각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召命)을 따라 나누어 감당해야 한다. 싸우는 것과 세우는 것 – 둘 중 어느 것이 전방이고 어느 것이 후방인지의 구분은 없다. 현대전에는 전후방이 없듯이 영적 전투에도 전후방이 없다. 전투는 양쪽에서 다 일어난다. 단지 전투의 양상(樣相)이 다를 뿐이다.
어느 전투 즉 어떤 사역이 더 힘들까? 필자는 싸우는 것보다 건설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본다. 싸우는 것이 ‘단기적’으로 급(急)한 전투라면, 건설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중요(重要)한 전투다. 싸우는 것은 잠시도 눈 돌릴 사이가 없지만, 건설하는 것은 당장 소홀해도 표시가 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관심은 급한 곳에 쏠리지, 중요한 일에는 쏠리지 않는다. 그래서 중요한 일에는 더욱 더 의지적(意志的)인 관심이 필요하게 된다. 또한 사탄의 공격은 싸우는 곳보다 건설하는 곳에 더 강하게 역사할지 모른다. 왜? 건설하는 사역은 눈 앞의 피 흘리는 전투는 아니나 자기의 본영(本營)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적 본영(本營)이 탄탄해질수록 장차 자기들의 전쟁이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이해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느헤미아로부터 배울 교훈이 있다. 그는 예루살렘의 훼파된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어떻게 하든지 이 일을 중지시키려고 온갖 방해를 다 했다. 적들이 군사를 보내 습격할 것이라는 첩보가 있자, 느헤미야는 백성들로 하여금 칼을 차고 일하게 하고, 밤에는 불침번까지 세워 24시간 경계태세를 갖춘다.(느4:15-23) 한 마디로 싸우며 건설하는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물어 보자. 느헤미야에게 우선순위는 무엇이었는가? 물론 망치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칼을 가지고 하는 싸움은 건설을 위해 필요했을 뿐이다. 느헤미아는 애써 그들과 무력으로 맞대응 하려 하지 않았다.(느6:1-9) 무력으로 그들을 물리쳐 버렸으면 쉽게 성벽을 건설했을 텐데 말이다. 그는 서로간에 소모가 많은 피 흘리는 전투보다 성벽 건설이 더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전략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영적 선배들의 통찰력을 배울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성벽을 쌓는 일’은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인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는 사명이라고 적용할 수 있다. 한편 칼을 차고 일하며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한 것은(느4:9), (기도의 중요성을 말하는 영적의미도 있겠으나) 불의와 직접 대면하여 싸우는 것 즉 “오목사를 치리하기 위한” 사명이라고 적용할 수 있겠다. 느헤미야의 성벽재건은 이 두 가지 사명을 함께 잘 조화시켜 공동의 승리로 이끈 역사적 기록이다.
어쨌든 느헤미야의 경우는 성벽건설이 성공적으로 끝남으로써 그들을 대적하던 도비야와 산발랏의 세상적 운명도 저절로 끝나게 되어 버렸다.(느13:4-9, 13:28-29) 이것은 마치 남한이 싸우며 건설하는 가운데 건설에 성공하여 부국강병 해지니, 북한이 오직 전쟁 준비에만 ‘올인’하여 모든 국토를 요새화하고 모든 인민을 군사화하며 적화통일을 노렸지만 그들의 염원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음과도 같다.
필자의 제안을 오목사에게 도움을 주는 이적행위(利敵行爲)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개혁 에너지가 있다. 이 에너지를 분산하는 것은 큰 낭비다. 그러나 가만 두면 이 에너지는 점점 다 흩어지고 만다. 결국 그것은 오목사를 근본적으로 더 편안하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이 도리어 이적행위가 되지 않겠는가? 교회다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갈 ‘분리 개척교회’는 장기적으로 오목사를 더 압박하고 그의 얼굴을 뜨뜻하게 만드는 그에게 ‘괴로운 존재’가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B. 본토교회(本土敎會) 대 난민교회(難民敎會)
우리나라는 6.25 전쟁 때 동족상잔의 비극과 피난민의 아픔을 겪었고, 월남은 베트남전쟁 때 보트피플을 통한 난민의 비참함을 겪었다. 여기 캄보디아인들도 ‘폴폿’(Polpot)의 학정(虐政) 때 피난 나온 난민들이 미국 남가주 롱비치 지역에 집단 거주지를 이루며 살고 있다. 난민들이란 본토에서 쫓겨 왔든지 도망 나온 사람들이다. 본토에 남은 사람들은 못 떠났거나 안 떠난 사람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정죄할 자격이 없다. 각자의 처지와 환경에 따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의교회에서도 한 악한 지도자의 ‘영적 학대(虐待)’에 못 이겨 많은 ‘영적 난민(難民)’이 생겼다. 이미 개별적으로 본토를 떠난 성도들이 많이 있었고, 아직 떠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떠나게 될 많은 잠재적 난민들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난민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현재 우리진영은 시스템이 갖추어 있지 않은지라 목양적 관리를 포기한 채 방치해 놓고 있다. 지금 눈 앞의 싸움이 더 급하니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이다. 도리어, 한 사람이라도 더 의병(義兵)이 되어 나라를 삼킨 저 적장의 목을 베고 적군들을 모두 물리치자고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전쟁은 결코 가까운 시일 내 끝날 것 같지 않다. 우리가 성을 한 자 높이면 저들을 두 자 높이고, 우리가 박격포를 쏘면 저들은 곡사포를 쏜다. 앞으로 장기전 양상이 되면 서로 피를 많이 흘릴 것이며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하고 엄청난 군수물자가 소요되게 된다. 이대로라면 우리진영의 자원은 머지 않아 고갈이 될까 두렵다. 저들의 조직적인 ‘총동원 전시체제’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단기전이라면 모를까 장기전이 될수록 불리해 져 갈 것이다.
그래서 일부의 난민들은 이 싸움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쉽게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직감한 사람들이다. 또 이들은 더 중요한 일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안다. 이미 흩어져 버린, 현재 흩어지고 있는, 또 앞으로 흩어질 난민들을 모아 목양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이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난민들은 사방으로 다 흩어지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다. 땅덩어리도 빼앗겼지만 민족도 이 땅에서 없어질 것만 같다.
그래서 난민들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 공동체가 있는 한 적(敵)은 항상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이 공동체가 있으면 현재 본토에 남아 있는 본토교회의 의병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여건이 생길 수 있다. 필요 시마다 본토교회와 전략적 협력이 항상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개별적으로 뿔뿔이 다 흩어져 버리고 나면 본토교회를 더 이상 지원해 줄 수가 없다. 마음이 있더라도 개별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이고, 점차 마음도 멀어져 언젠가는 잊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본토에 소수(少數)의 ‘의병 결사대’(決死隊)만 남게 되고 결국 전쟁이 우리측의 패배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 이 분들의 걱정이다.
C. 경찰교회(警察敎會) 대 청정교회(淸淨敎會)
쥐는 주방의 적(敵)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이들을 제거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까?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자주 청소하여 먹이감을 없앰으로써 저절로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항상 최대한의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보일 때마다 나올 때마다 열심히 두드려 잡는 것이다. 이 경우 효과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앞의 방법에 미치지 못한다. 많은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웃들도 “저 집은 밤낮 왜 저렇게 시끄럽나?”고 할 것이다.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처럼 더 큰 부작용(副作用)도 우려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의 완전제거는 불가능하다. 먹이가 있는 한 끝없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前者) 곧 먹이를 없애서 쥐를 제거하는 방법은 ‘청정교회’(淸淨敎會)를 지향하는 ‘새 교회 개척’을 뜻하고, 후자(後者) 곧 쥐가 생기는 대로 잡아서 제거하는 방법은 SGMC속에서의 ‘경찰교회’(警察敎會) 의 역할을 통한 ‘직접투쟁’이다. 전자는 당장의 효과는 보지 못하며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장기전략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전략이다. 반면, 후자는 부작용도 감수해야 하나 당장은 조금씩이라도 효과를 눈으로 볼 수 있는 단기전략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전략은 못 된다.
자연계의 이치가 영적인 세계에도 통한다. 영적인 쓰레기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며,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약 3:15)이다. 교회의 영적 환경을 근본적으로 건강하게 만들려면 각 교회마다 이런 영적 쓰레기를 치우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들의 ‘속 사람’도 바꾸고 법과 제도도 바꾸어야 한다.
사랑의교회에는 마귀가 좋아하는 영적인 쓰레기들이 많았다. 특히 대형교회란 점은 최고의 쓰레기더미였다. 진작부터 대형교회가 아니었더라면, 원래부터 교회정관에 대형교회를 꿈꾸지 못하게 하는 분립 교회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었더라면, 마귀의 사주를 받은 사이비목사가 기웃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둑 한 명을 열 사람이 못 막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도둑 자체를 막는 것 보다는, 도둑놈들이 그 마을에 생기지 않게 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더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청정교회가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거룩한 교회’가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 씻음 받은 공동체, 나날이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의 노력을 기울이는 공동체, 나날이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공동체, 예수를 이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것은 말로만 ‘청정지역’이라고 하고 실지로는 갖은 종류의 죄악을 일삼는 SGMC식 ‘가짜 청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SGMC는 대표적 ‘세속교회’다. ‘세속’과 ‘교회’라는 두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교회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즉 ‘세상 밖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SGMC란 존재는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 세상과 짝하고 있으니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는 말씀은 세속교회 SGMC의 현 모습을 잘 묘사(描寫)해 주고 있다. 이 세속교회를 쇠락(衰落)하게 만드는 방법은 청정교회가 더욱 더 많아지고 왕성(旺盛)해지게 하는 방법뿐이다.
최근 SGMC 대학부 젊은이들을 걱정하는 어느 분의 게시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을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새 교회’를 통해서, 청정 교회에서, 능력 있는 바른 메시지 바른 복음이 매일 선포되게 해야 한다. 그 것이 더 확실하고 근본적이고 빠른 방법이다. 이 땅의 청정 교회가 이 땅의 젊은이들을 구해내는 현시대적 ‘노아의 방주’가 되고 그들을 이 세상으로 다시 파송하는 현시대적 ‘안디옥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투 트랙’을 위한 기본 구상(基本 構想)
그 동안 여러 분들이 투 트랙의 개념에 대한 혼동을 일으키시는 것 같아서 필자의 기본 구상을 다음의 도표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필자의 개인적 견해일 뿐이다. 도움이 되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