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베트남 정부 및 남베트남군의 분열과 북베트남의 기도로 볼 때 남베트남을 지탱시키기 위해서는 미 지상군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이미 통킹 만 사건 이후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 각각 여단 규모의 군수지원 부대와 공병부대 파견을 요청한 바 있고 1964년 12월과 1965년 2월에도 계속 요청한 바 있었다. 군수지원 시설, 보급로 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전준비의 결여가 미 지상군이 개입한 이후에 전투력을 발휘하는 데 많은 지장을 주었다.
베트남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근본적으로 북베트남으로부터의 침투를 봉쇄하여야 하기 때문에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의 이상적인 방안은 북위 17도선의 비무장지대와 태국 국경까지의 라오스 회랑에 연합군 5개 사단을 배치하여 북베트남의 지원과 침투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주베트남 미 부(副)대사 알렉시스 존슨(Alexis Johnson)과 합동으로 17도선 근방의 9번 도로로부터 태국국경까지의 도로 건설을 1964년 말부터 추진하였으나 워싱턴 당국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주베트남 미 부(副)대사 알렉시스 존슨
1964년 12월부터 미국과 우방국가의 전투부대 파견의 필요성에 대하여 사이공에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역사적으로 외국인 혐오감정이 강한 베트남인들은 이에 대하여 냉담하였으나 1965년 3월에 들어서면서 북베트남의 위협이 증가하자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롤링 썬더(Rolling Thunder) 작전의 성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자 존슨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들은 초조하기 시작하였다. 존슨 대통령은 지금까지 베트남전의 확전에 대하여 가장 반대 의사를 가지고 있는 육군 참모총장 해롤드 존슨(Harold K. Johnson) 장군을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여 건의하라고 하였다. “육군 참모총장은 지금까지 저 조그만 나라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모두 한결같이 북폭이나 하라는 그런 장군들은 필요 없다. 어떤 해결책이 필요하다.”
육군 참모총장 해롤드 존슨
당시 남베트남의 군사적 정세는 심각한 징후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할 때였다. 가장 북부인 1군단 지역에 적의 활동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2군단 지역인 중부 고원지대에 북베트남군 325사단 예하 1개 연대가 1964년 말에 침투하였다는 정보가 포착되었다. 3월 말에는 콘툼(Kontum) 성 닥 토(Dak To)의 남베트남군 전진기지는 북베트남군 2개 대대의 공격으로 유린되고 연대장까지 전사하였다. 이제는 북베트남군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라 규모와 그들의 의도가 문제였다. 짚차에 폭탄을 장치한 베트콩들이 미 대사관 건물을 폭파하여 미국인 사망 2명, 부상 54명, 길거리에 있던 남베트남인 15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미국은 이 사고 후 남베트남 독립궁 근처의 미 대사관 건물을 새로 건축하였다.)
남베트남의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의 복안을 수긍한 존슨 장군은 북위 17도선과 라오스 회랑을 연하여 북베트남의 침투를 차단해야할 필요성과 현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미군 1개 사단의 파견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1965년 4월초의 안보회의에서 합참도 미군 2개 사단을 파견하고 한국에게 1개 사단 파견을 요청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존슨 대통령은 잠정조치로 비행장 경계를 위한 해병 2개 대대의 추가 파견만을 승인하였다.
점점 악화되는 베트남사태에 대한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1965년 4월 20일 호놀루루에 국방장관 맥나마라(McNamara), 합참의장 휠러(Wheeler) 장군, 태평양 사령관 샤프(Sharp) 제독, 국방 차관보 맥노튼(McNaughton), 국무 차관보 윌리엄(William), 테일러 대사, 웨스트모얼랜드 장군 등이 모여 회합을 가졌다.
존슨 정부 당시의 맥나마라(오른쪽)
합참의장 얼 휠러
국방차관보 존 맥노튼
태평양 사령관 샤프 제독
시찰에 나선 태평양 사령관 샤프
북베트남의 승리를 거부함으로써 북베트남이 전쟁을 계속하려는 그 의지를 꺾는다는 전쟁목표는 변함이 없고 이제 어떻게 효과적으로 제한된 지상군 개입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느냐는 것이 이 회합의 목적이었다.
이 회합에서는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이 요청한대로 비엔 호아(Bien Hoa), 붕 타우(Vung Tau) 일대 및 비행장 경계를 위하여 육군 1개 여단(3개 대대), 퀴논(Qui Nhon)과 나트랑(Nha Trang) 일대의 방어를 위해서 육군 1개 여단(3개 대대), 추 라이(Chu Lai) 지역 일대 방어를 위해서 해병 3개 대대, 기타 군수지원부대 등을 포함하여 총 병력을 82,000명으로 증가시키고 추가병력은 추후 상황에 따라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번의 병력증원은 전략 요충지 방어전략 개념에 의한 것이었다. 즉 롤링 썬더 작전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기지 경계만으로는 남베트남의 붕괴를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사이공, 다낭(Da Nang), 추 라이, 퀴논, 나트랑 일대의 5개 전략요충지를 방어하여 남베트남의 붕괴를 방지하고 북폭을 강화하여 북베트남의 전쟁 계속 의지에 영향을 주어 협상 테이블로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이번의 병력증원 조치로 173공정여단, 503보병여단 등이 5월에 들어서 남베트남에 상륙하였고, 이 부대는 요충지 방어임무를 수행하면서 적의 위협이 있을 때에는 워싱턴 승인 하에 50마일 이내에서 공격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이공 지역의 방어는 남베트남인들의 자존심과 배타심을 고려하여 스스로 방어토록 하고 긴급 시에는 비엔 호아 지역의 미군을 전용토록 하였다.
173공정여단의 패치
1965년 베트남에 도착하는 173공정여단
이와 같이 미 지상군 개입은 북폭 카드와 유사하게 점진적으로 개입을 확대해가는 식으로 마지막 카드를 뽑아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략요충지 방어 전략은 현재의 상황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방책이라고 판단한 웨스트모얼랜드는 이의 무용성을 주장하고 워싱턴 당국에 50마일 이내의 작전제한을 철폐하도록 건의하였다.
미국이 제한된 지상군의 개입을 실시하고 있을 때 북베트남군은 군사적 총 공세의 일환으로 남베트남군의 병력분산을 위한 강력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1965년 5월초에 사이공 북족 캄보디아 국경과 인접한 푸옥 롱(Phuoc Long) 성 성도(省都)인 푸옥 롱을 베트콩 1개 연대가 공격하였다. 강력한 항공지원과 남베트남군 1개 연대의 공수로 겨우 구할 수 있었다. 6월에 쾅 가이(Quang Ngai) 성의 바 지아(Ba Gia)에서는 베트콩 연대가 매복작전으로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격멸하였고 중부 고원지대에서는 적의 집중공격으로 수개의 군청 소재지가 포기되었다. 푸옥 롱 성의 동 쏘아이(Dong Xoai)에서는 베트콩 2개 연대가 공격하여 전초 경계부대를 전멸시키고 증원병력 3개 대대에 막대한 손실을 가하고 접촉을 단절하여 버렸다.
이와 같이 병력을 집중하여 남베트남군을 압도하면서 전국적으로는 통상적인 게릴라전을 강화하였다.
미 정보기관은 중부 고원지대에 북베트남군 1개 사단을 확인한 외에 2개 사단이 추가로 침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1개 사단은 라오스 국경지대에 이미 침투하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제 중부 고원지대에 주력을 집중하여 플레이쿠(Pleiku)-퀴논(Qui Nhon)을 점령, 남베트남을 남북으로 절단하고 전국적인 봉기로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북베트남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이러한 적의 의도에 대응하기 위하여 미 제1기병사단(공중기동), 3개 보병대대, 해병 1개 대대, 추가적인 전술공군, 육군 항공대(헬기 장비), 군수지원 부대 등의 미군과 한국군 9개 대대, 오스트레일리아군 1개 대대 등의 병력을 신속히 증파해주도록 6월 7일 합참에 건의하였다.(한국은 1965년 6월 14일과 6월 28일에 1개 전투사단의 파견을 정식으로 남베트남으로부터 요청받고 수도사단(1개 연대 제외), 해병 2여단이 각각 10월 22일, 10월 6일에 파병되어 퀴논과 투이 호아(Tuy Hoa) 지역에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제9사단은 1966년 2얼 22일 요청을 받아 1966년 9월부터 10월 초순 사이에 파견되어 푸 옌(Phu Yen) 성과 칸 호아(Khanh Hoa) 성 일대의 작전지역을 인수받았고 수도사단의 나머지 1개 연대는 1966년 4월 파병되어 병력은 45,000~50,000명 수준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은 1965년 5월에 보병 1개 대대를 파병하였고 1966년 4월에 2개 대대를 추가하여 병력규모는 7,600여 명이었으며, 태국은 1964년도에 소수의 전투지원 요원을 파견하였고 1967년부터 전투부대가 파병되어 1969년도에는 사단 규모인 11,500여 명에 이르렀고, 필리핀은 의료반, 심리전반, 대민 건설 지원부대 2,000여 명, 뉴질랜드는 1965년 7월부터 1개 포대, 1967년에 1개 포병대대 500여 명으로 오스트레일리아군과 같이 작전하였다. 대만은 심리전요원 20~30명을 파견하였다.)
1965년 오스트레일리아군 전사자의 관이 운구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의 오스트레일리아군 SAS
또한 현 상황에서 미 지상군은 북베트남군을 타격하는 적극공세를 취하고 남베트남군은 자국민을 보호하도록 하여야만 남베트남의 붕괴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전략요충지 방어전략은 더 이상 무용하며 요청된 부대와 현재 남베트남에 있는 10개 대대를 포함한 44개 대대는 승리를 위한 전력이 아니라 남베트남의 붕괴를 모면하기 위한 전력이며, 현재의 전망은 추가 개입이 필요한 지구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 이를 대비하여야 한다고 워싱턴에 타전하였다.
남베트남의 붕괴를 막기 위한 웨스트모얼랜드의 건의를 받은 워싱턴은 현지 사령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어느 지역에서나 작전수행을 할 수 있다고 승인하여 전략 요충지 방어전략 개념은 사실상 없어졌다. 또한 미 7함대가 항공 및 함포 지원을 개시하도록 하였고 계속 거의 되었던 전략공군사령부의 B-52 폭격기 운용도 승인하였다. 전략 폭격기의 전술적인 운용에 대하여 최초에는 반대의견도 많았으나 그 효과는 대단하였다. 6월 18일 최초로 폭격을 실시하였다.
B-52 폭격기
웨스트모얼랜드의 병력 요청에 대한 결심을 하기에 앞서 존슨 대총령은 맥나마라 국방장관, 헨리 캐봇 로지(Henry Cabot Lodge, 남베트남 미 대사로 임명 예정, 테일러 주베트남 대사는 1년만 대사직을 수행하기로 사전 약정됨), 휠러 합참의장 등의 현지 조사단을 7월 16일에 남베트남에 파견하였다.
헨리 캐봇 로지와 구엔 반 티우
웨스트모얼랜드는 이들에게 현재 남베트남의 긴박한 상황을 인식시키고 추가 병력의 필요성을 납득시켰다. 웨스트모얼랜드는 앞으로 수행될 지상작전의 작전개념을 다음과 같은 3단계로 제시하였다.
• 제1단계 : 1965년 말까지 ‘기울어져가는 전세’를 만회하는데 필요한 미군과 연합군을 투입한다.
• 제2단계 : ‘1966년 전반기 내’에 ‘우선순위가 높은 지역’의 적을 격멸하고 평정계획을 재개하기 위하여 미군과 연합군의 공세를 취한다.
• 제3단계 : 만일 적이 계속 저항하여도 2단계 종료 후 1년 내지 1년 반 내에 적은 병력과 기지를 상실하고 패배할 것이다.
소요병력은 제1단계 시작은 175,000명으로 가능하며 이후 10만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하며 작전개념에 제시된 작전단계의 기간과 병력소요는 적의 대응에 따라 가변성이 있다고 하였으나 미 국내에서는 웨스트모얼랜드가 1967년까지는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소지가 되었다.
결국 존슨 대통령은 의회의 동의를 얻어 북베트남에 선전포고를 하고 예비군을 동원하는 단호한 확전 결의를 표명함이 없이 현지 사령관이 필요하다는 병력과 장비를 주어 본다는 식의 결심을 하게 되어 1965년 7월 28일 “본인은 오늘 공중기동 사단과 기타 지원부대의 남베트남 파견을 명령하였습니다. 따라서 파병병력은 곧 75,000명에 125,000명으로 증가할 것입니다. 추가병력은 필요에 따라 추후 파견될 것입니다.”라고 발표하였다.
전쟁이란 전쟁 그 자체가 어떤 모멘트를 만드는 속성이 있는 것이다. 이제 베트남전쟁은 워싱턴이나 하노이 양측이 피차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확전되어 새로운 차원으로 진행되게 되었다.
중부 고원지대를 점령하여 남베트남을 양분하려는 북베트남군의 공격이 빠른가, 이를 저지할 미군의 증원이 빠른가 하는 시간경쟁이 시작되었다.
전투부대만 도착하여서는 전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며 전투부대, 전투지원 부대가 전력을 발휘하는 기본전제는 군수지원이다. 미국과 북베트남의 시간경쟁은 다른 의미에서는 군수지원 문제를 누가 먼저 해결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쌍방의 필사적인 노력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군수지원은 지구 반 바퀴를 건너 공중과 해상으로 지원되어야 하기 때문에 항만 시설과 비행장이 필요하였다. 남베트남 해안은 캄란(Cam Ranh) 만과 봉로(Vong Ro) 만을 제외하고는 수심이 너무 얕아 원양에 정박한 후 소형선박으로 지루하게 하역하여야만 했다. 비행장도 탄손누트, 비엔 호아, 다낭의 3개만 가용되었다.
캄란 만
1962년부터 민간 계약회사인 RMK사가 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1965년 말에는 인원이 4,000명에서 25,000명으로 증가되었다. 군 공병대대는 1965년 5월 7일에 해군 건설대대가 추라이(Chu Lai)에 도착하여 공사를 서둘렀고, 8월에는 미 35공병단이 캄란에서, 다른 공병대대가 퀴논에서 항만시설, 비행장, 물자 저장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다낭, 판랑(Phan Rang), 투이 호아(Tuy Hoa) 등지에서 미국의 설비가 바닥날 정도로 급피치를 올렸다. 1965년 여름, 가을은 공병이 가장 많은 인원을 점하여 총 15개 공병대대(육군10, 해군4, 공군1)가 작업을 하였으나 태부족이었다. 수송선박은 줄을 이어 보통 2개월 걸려야 하역작업이 끝날 수 있었다. 최고 기록은 110일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한 때였고 시급하였다.
북베트남도 지리적으로는 근거리였으나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호치민 통로로의 장비이동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고 미군기의 폭격도 큰 장애였다. 소형선박을 이용하여 인적이 드문 해안에서 야간 접선으로 용이하게 보급할 수도 있었으나 1965년 2월 봉로 만에서 미군에게 발각되어 100톤의 화물이 격침되었다. 이후 미군이 해상보급 차단을 위하여 미 해안 감시대를 파견하여 해상 경계를 강화한 후 부터는 해상수송도 거의 중단되었다. 캄보디아의 항구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안전하고 신뢰도가 높은 보급로는 호치민 통로였다. 다행히 전투지대 바로 후방에 라오스, 캄보디아의 성역(미군의 제한전쟁 정책에 의거 남베트남 국경선 내에서만 작전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 있어 저장이 가능하고 전투 시에는 용이하게 보급이 가능하였다.
호치민 루트
호치민 루트를 이용해 물자를 수송하는 북베트남군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 한 북베트남군 병사는 박격포탄 2발을 등에 매고 도보로 호치민 통로를 따라 남베트남 내 작전지역에 전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두 달 동안 공중공격에 시달리고 말라리아에 걸리면서 밤에는 추위를 견디며 공격지역에 도착하였다. 포탄을 받은 베트콩들은 몇 초 만에 두발을 발사한 후 소속, 이름을 확인한 후 복귀하여 두 발을 또 가져오라고 지시하자, 기가 막힌 이 병사는 남베트남군으로 귀순해 버렸다.
이것이 북베트남이 수행하는 가난한 자의 전쟁 단면이었다. 이제 남베트남군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차량이 아니면 헬기가 모든 것을 그것도 충분히 보급하여 주는 편한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온실의 화초는 잡초와 달리 험한 기후조건에는 생명력이 약하듯이, 남베트남군은 점점 온실 속에서 자라는 격이 되어 보급이 두절되고 상황이 악화되면 쉽게 전의가 상실되는 약한 군대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군수지원 경쟁에서는 아무래도 북베트남이 이기게 된다. 9월부터 적의 대공세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북베트남의 군수지원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웨스트모얼랜드는 중대 결심을 하였다. 아직 군수지원 체제가 미흡하나 충분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제1기병사단을 투입하여 선제공격을 가하는 일대 모험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아(Ia)는 베트남 산악부족의 방언으로 강(江)을 의미한다. 드랑 강은 중부 고원지대의 중앙인 플레이쿠(Pleiku) 근처에서 시작하여 수개의 지류가 합하여 메콩 강으로 합류하는 조그마한 강이다. 이 지역은 캄보디아 국경에 인접되어 북쪽에 있는 19번 도로는 플레이쿠를 지나 퀴논(Qui Nhon)까지 연결되고 콘툼(Kontum)-반메투오(Ban Me Thout)를 연하는 14번 도로와 교차된다. 플레이쿠를 확보하기 위하여 19번 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이 계곡 일대로 접근하는 것이 단거리이며 기습을 달성할 수가 있기 때문에 1975년도 공세 시에도 북베트남군은 이 지역을 이용하였다.
이아 드랑 계곡의 항공 사진
보 구엔 지압은 미 지상군이 개입하고는 있으나 증강 전에 대규모 공격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1965년 10월부터 1966년 4월까지 북베트남군 3개 사단을 투입하기로 하였다.
먼저 사이공 일대, DMZ 일대 및 기타 인구 밀집지역에 강력한 견제공격을 실시하여 적의 예비역량을 고착시키고 주력은 중부 고원지대에 지향하여 이아 드랑 계곡으로부터 공격, 플레이쿠를 1개 사단으로 확보하고 후속하는 2개 사단으로 19번 도로를 따라 안케(An Khe)-퀴논을 점령하여 남베트남을 양분하면 남베트남군은 전의를 상실하게 되고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 사이공 정권은 붕괴한다는 것이다.
이아 드랑 지역 일대는 가파른 지형과 우거진 정글로 미군의 공중지원 효과가 감소되고 적 기계화 부대 작전이 제한되는 이점이 있으며 최종 목표인 빈 딘(Vinh Dinh) 성은 남베트남 내에서도 공산주의 동조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 캄보디아 성역에 대기하였다가 3개 사단을 집중 시 운용 가능한 미군이나 남베트남군보다 전투력의 우세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빈 딘 성
이 계획은 견실하고 성공가능성이 충분하였고 북베트남은 이 작전은 동 쑤안(Dong Xuan, 冬春) 작전이라 명명하였다.
한편 미 정보기관은 정확하게 북베트남의 공격 목표, 시기를 판단하고 있었으나 초전에 어느 부대를 운용하여 이를 저지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웨스트모얼랜드는 제1기병사단(공중기동)으로 정하고 증파 요청 시 이 사단을 지명한 바 있다.
제1기병사단 마크
공중기동 사단은 보병사단의 5배가 넘는 450대의 헬기를 보유하고 있어 전 사단의 기동, 화력지원, 지휘통제, 정찰, 군수지원, 행정까지 헬기 지원이 가능하였다.
정글, 강, 산악, 도로폭파 등이 작전의 장애가 되지 않으며, 지형이 복잡하고 도로망이 결핍된 광대한 지역인 중부 고원지대에 최적의 부대인 것이다. 도보나 차량기동과는 비교가 될 수 없으며 이제 도보 기동과 헬기 기동의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사단은 미국에서 부대 기동시험을 마쳤고 이제 실전시험을 하게 되는 셈이다.
적의 공세가 시작되면 즉각 공격을 실시키로 한 웨스트모얼랜드는 이 사단을 작전 예상지역에 비교적 근접하고 적의 공격축선 상에 있는 안케(An Khe) 지역에 주둔시키기로 결정하고 1965년 9월 상륙하기 전에 다른 부대를 파견하여 이 일대를 확보케 하고 해병 대대로 상륙지역을 엄호하게 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북베트남군은 플레이쿠(Pleiku) 25마일 서북방에 있는 플레이메(Plei Me)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고 예비 연대가 증원되면 플레이쿠 일대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즉 북베트남군 325사단 예하 33연대가 플레이메를 공격하고 적 증원부대 격멸을 위해서 32연대(북베트남군 1개 연대 병력은 약 2,000명으로 추정)가 매복하여 증원 병력을 격멸한 후 33연대와 합류, 미끼로 남겨놓은 플레이메를 점령한 후 라오스로부터 강행군으로 합류하게 될 66연대의 증원으로 계속 공격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플레이메 기지
10월 19일 미 특수부대 요원 12명의 지도하에 몽타냐(산악부족) 400여 명이 방어하고 있는 플레이메를 북베트남군은 동틀녘을 기하여 포격을 개시하였다. 참호는 구축되었으나 피해가 늘어났다. 적의 최초 공격은 격퇴되었다.
몽타냐 족들을 훈련시키는 미군 교관
플레이메 기지에 있던 미군 특수부대원들
남베트남군 2군단장 빈 록(Vinh Loc) 소장은 허겁지겁 증원군을 파견하다가 적의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고 증원군을 준비하였으나 신중하게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첫 번째 공격은 적의 주공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함정이 있으리라고 판단하였다.
남베트남군 2군단장 빈 록 소장
10월 20일 미군은 강력한 항공지원을 실시하여 하루 동안 696쇼티, 750톤의 폭탄을 투하하였고 B-52도 폭격을 실시하였다. 적의 포격과 공격도 계속되어 필사적인 재보급과 의무지원을 실시하였고 플레이메 기지 내 막사는 흔적도 없어지고 기지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10월 21일 미군 1개 대대를 공중기동으로 플레이메에 증원하여 기지를 지탱하도록 하고, 빈 록 소장은 미군 지역사령관 스탠리 라손(Stanley Larson) 중장과 협조 하에 플레이메와 연결 작전을 개시하여 기갑부대를 선두로 하여 적 기습에 철저히 대비하면서 플레이메 전방 5㎞ 지점에서 적 32연대를 격퇴시키고 10월 23일 연결에 성공하였다.
의도가 무산된 북베트남군은 최후의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10월 26일부터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북베트남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웨스트모얼랜드는 사단장 해리 킨나드(Harry Kinnard) 소장에게 북베트남군을 탐색, 격파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확보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제1기병사단장 킨나드 소장
킨나드 소장은 2차대전에서 바스토뉴 방어전에 참전한 바 있다. 당시 101공정사단 부사단장 맥콜리프 준장과 함께 찍은 사진.
1여단은 사단 수색대 등 전 역량을 동원하여 4일 동안 수색을 실시하였으나 적의 기동을 추적할 수 없었다. 적을 발견하여 공중기동으로 접촉을 유지하려고 하면 적은 이미 접촉을 단절한 후였다. 다행히 전사한 북베트남군 장교 소지품 중에서 2개 연대 기동로가 그려진 지도가 발견되었다. 전쟁에서 행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미군은 11월 3일부터 6일 동안 계속해서 적의 철수로를 선점하여 적을 공격하였고 북베트남군 33연대는 미군의 공격을 받으면 계속 우회하여 추 봉(Chu Bong) 지역에 도착하였다. 2,200여 명 중에 싸울 수 있는 인원은 700여 명에 불과하였다. 10여 일 동안 미 제1기병사단은 압도적인 화력, 기동력의 우세를 이용, 근접전에서도 과감하게 포병지원과 근접 항공지원을 받으면서 북베트남군을 공격하여 피해를 강요하였으나 화력지원이 곤란한 정글지역으로는 북베트남군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피해를 입을 위험도 있었으나 기병사단은 아직 정신적, 육체적으로 베트남전쟁에 적응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킨나드 장군은 1여단과 3여단의 임무를 교대하기로 하였다. 교대로 인한 1여단의 철수를 미군이 작전을 종료한 것으로 판단한 북베트남군 325사단장 추 후이 만(Chu Huy Man)은 지금까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새로운 66연대를 주공으로 플레이메를 재공격할 것을 결심하고 부대를 수습하여 11월 16일 공격을 개시하려고 하였다.
북베트남군 325사단장 추 후이 만
그러나 새로운 미군 부대가 출현하자 이를 먼저 각개격파하기로 하고 거미가 거미줄에 먹이가 걸리기를 기다리듯이 추 봉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미군 3여단은 적의 탐색에 실패하고 지역 내에 적이 철수한 것으로 판단하고 추 봉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이를 후속하여 2여단의 제1대대가 11월 14일 아침 추 봉에 착륙하였다. 북베트남군 66연대와 피해를 입은 33연대의 바로 코앞에 착륙한 것이다.
1965년 11월 14일 밤 이아드랑 전투의 상황도
착륙지점 X에 투입되는 제7기병연대 1대대
대대장 해롤드 무어(Harrold Moore) 중령은 선두 제대로 착륙하였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최초의 작전에서 큰 접전도 없이 적이 이미 캄보디아로 철수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착륙지역에는 붉은 개미 떼가 우글거렸고 병사들은 개인호를 구축하기 싫어했으나 대대장의 예감으로는 큰 전투가 있을 것만 같았다.
이아 드랑 전투를 지휘한 해롤드 무어 중령
착륙지역 주변 수색중 비무장 북베트남군 낙오자 1명을 생포하였다. 그는 5일 동안 바나나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이 일대에 적어도 3개 대대가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대기 중인데 아직 부대를 찾지 못했다고 진술하였다.
대대장은 B중대에게 착륙지역 동북방에 있는 감제고지를 신속히 점령하도록 지시하였다. 은밀하게 공격준비를 하고 있던 북베트남군도 그 감제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B중대와 12:45에 교전이 시작되었다. B중대장은 최소한 적 2개 중대와 접전 중이라고 보고하였다.
아직 완전한 공격준비가 안된 북베트남군도 교전이 시작되자 착륙지역에 포격을 개시하였다. 놀란 미군들은 즉각 개인호를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헬기들도 긴급 대피하였다. B중대와 북베트남군이 서로 뒤범벅이 되는 혼전이 계속되어 B중대장은 중대를 착륙지역 주위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으나 1개 소대(소대장과 병사 26명)는 철수할 수가 없었다. 소대장은 현 위치에 참호를 구축하여 전투를 계속하도록 지시하였다. 서측방에도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대의 인가병력은 장교 23명, 사병 610명이었으나 기지 경계, 환자, 행정병 등을 제외한 장교 20명, 사병 411명만이 작전에 참가하여 신장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대대장은 즉각 병력증원과 근접 항공지원, 포병화력을 요청하였다. 2여단장은 우선 1개 중대를 공중기동시켜 대대의 예비대로 운용토록 하고 차후 병력을 더 증원하였다.
북베트남군은 아직 피해가 없는 66연대와 많은 피해를 입은 33연대의 병력으로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이를 집중 운용하여 일거에 착륙지역을 유린하지 못하고 축차공격을 하는 우를 범하였다. 무어 대대장은 북베트남군의 축차공격에 대응하여 가용병력을 전환 운용하여 착륙지역을 지탱해 나갔다.
행운도 있었다. 포로를 획득하여 적의 의도를 사전에 간파하여 동북방 감제고지를 사전 점령하여 적의 공격준비 이전에 전투가 개시되어 적의 축차공격을 유발시켰고 연막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실수로 백린 연막탄이 지원되어 적에게 많은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 지휘관과 병사의 용감성보다도 적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였다. 수천 발의 포병화력, 수십 회의 근접 항공지원, B-52 폭격 등의 지원으로 적의 공격을 격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야간에 재편성을 한 북베트남군은 다음 날 여명에 재공격을 시도하여 치열한 백병전까지 전개되었으나 공격에 실패하였다. 11월 15일 오후에는 지상으로도 증원 병력이 도착하여 역습으로 고립된 소대와 연결을 하였다. 27명 중 8명은 전사하고 12명이 부상하여 소대장 이하 7명만이 전투 가능하였다. 북베트남군이 야간을 이용하여 후송을 많이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도 40여 구의 적 시체가 주위에 발견되었다.
이아드랑 전투 랜딩존 엑스레이의 마지막날, 최종적인 수색정찰당시 모습
11월 15일 오전까지의 처절한 공방전을 끝으로 이 착륙지역 전투는 사실상 종료되고 야간에 산발적인 적의 공격이 있은 후 11월 16일 아침까지 북베트남군은 모두 철수하였다.
이 단일 전투에서만 북베트남군이 유기한 시체는 600여 구였고, 북베트남군 66연대는 2,000여 명의 병력 중 최소한 1,000여 명 이상의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미군의 사상자는 79명이었다.
이 착륙지역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미군은 사이공 지역에 있는 남베트남군 5개 대대를 200여 마일 떨어진 둑 코(Duc Co)에 하루 만에 공중 기동시켜 적의 철수로 상에 매복 작전을 전개하여 철수하는 북베트남군을 끝까지 맹타하였다.
제1기병사단을 과감히 투입하여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양분 시도를 무산시킨 미군은 이제 ‘기울어져 가는 전세를 만회’할 수 있었다. 이제 지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나 지지 않는다는 것은 승리한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최후의 카드인데 단기간 내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미국의 딜레마는 계속되었다.
1965년 3월 8일 미 해병 9여단이 지상 전투부대로서는 처음으로 다낭(Da Nang)에 상륙한 이래 미군과 한국 등 우방국들의 전투부대가 남베트남에 계속 파견되었다.
1964년 말 베트남 내 미군의 병력은 23,300명(육군 14,700명)이었으나, 1965년 말에는 184,300명(육군 116,800명)으로 증가되었다. 우방국의 연합군도 1964년 말 비 전투부대 467명(한국 200명, 오스트레일리아 200명, 뉴질랜드 30명, 대만 20명, 필리핀 17명)이었으나, 22,402명(한국 20,620명, 오스트레일리아 1,557명, 뉴질랜드 117명, 필리핀 72명, 타이완 20명, 태국 16명)으로 증가되었다.
1965년 말까지 베트남전에 투입된 연합군의 주요 전투부대는 미군이 3개 사단(보병, 공중기동, 해병 각1), 3개 여단, 1개 해병연대, 3개 전술비행단이었고, 우방군이 한국군 보병 1개 사단(-1), 1개 해병여단, 오스트레일리아군 보병 1개 대대 등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군 병사들의 수색정찰 모습
이아 드랑 전투 후 사이공을 방문한 맥나마라(McNamara) 국방장관은 웨스트모얼랜드의 계속적인 추가병력 요구에 깊은 실망을 안고 돌아가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북베트남의 전의는 오히려 강화되고 예상 외로 북베트남 정규군의 침투가 증가하여 웨스트모얼랜드의 작전개념대로 제2단계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북폭을 강화하면서 1966년도에 총 40만 명의 병력이 소요되고, 1967년도에는 약 20만 명의 추가병력이 필요할 것이며 월 1,000여 명의 전사자가 예상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규모 병력으로도 승리를 보장할 수는 없으며 평정계획도 현재는 지지부진하고, 중국의 개입도 아직은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워싱턴 당국의 행정 관료들의 실망은 컸다. 이제 미국의 선택은 대폭 양보를 하고서라도 협상하거나 소요되는 병력과 장비를 증가시켜 주는 두 가지 뿐인데 아직 북베트남의 협상 신호는 전혀 없으므로 갈 길은 하나뿐이었다. 미 국방차관보 맥노튼(McNaughton)은 1966년 1월에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하여 “우리는 확전된 군사적 교착 상태에 직면하였다”라고 표현하였다.
1966년 2월 5일 호놀루루에서 열렸던 미, 남베트남 정상회담에 앞서 웨스트모얼랜드는 1966년도에는 통신, 공병, 정비부대 등 각종 지원부대를 포함하여 주베트남 미군은 43만 명 정도가 소요된다고 건의하였다.
호놀루루 정상회담에서 존슨 대통령은 남베트남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티우(Thieu)와 키(Ky)를 만나서 이제는 막다른 골목까지 치달은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결의를 표명하고 그들로부터 정국의 안정과 단계적으로 민주화 조치를 취할 것을 다짐받았다. 또한 웨스트모얼랜드에게는 1966년도에 계속해서 공세작전으로 적에게 최대한 손실을 가하고 평정계획을 확대하도록 지시하였다.
이후 미군의 병력은 계속 증강되어 1966년말 485,300명(육군 239,400명), 1967년말 485,600명(육군 319,500명), 1968년말 536,100명(육군 359,800명), 1969년 1월 542,400명(육군 365,600명)이었다.
우방국 군대의 최고 병력 수준은 한국이 1968년 50,003명, 오스트레일리아가 1969년 7,672명, 태국이 1969년 11,568명, 뉴질랜드가 1969년 552명이었고 기타 국가는 비 전투부대였다.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아이 드랑 전투부터 진짜 베트남전의 시작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