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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데사 함락
1144년 에데사 백작령을 지키던 조슬랭 2세가 출정한 틈을 타 장기가 에데사를 총 공격 했다.
- 카톨릭교 대주교 위그, 아르메니아 종파의 주교 요하네스 그리고 그리스 정교의 주교 바실레우스 등 세명의 성직자가 방어전을 지휘.
- 조슬랭 2세는 적에게 가로 막혀 있었슴.
- 안티오키아 공작은 자기 영지내에 움츠리고만 있었고
- 예루살렘의 멜리장드는 망설이다 결국 원군을 보냈긴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슴.
1144년 12월 24일 4주간의 공방전이 끝나고 함락됨.
장기는 에데사 함락 얼마 후 거세 노예에게 살해됨.
(2) 수도사 베르나르두스
- 1090년 프랑스 북동부 상파뉴 지방 중간 정도의 귀족 집안 출신.
- 1115년 시토파 수도원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수도원 설립("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cf 클리뉘 수도원)
- 1145년 2월 베르나르두스의 제자인 에우게니우스 3세 교황에 취임.
(3) 제2차 십자군
- 예루살렘 여왕 멜리장드가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에게 원군을 요청함.
-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는 베르나르두스에게 십자군 결성의 전권을 위임함.
① 프랑스왕 루이 7세
-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결혼
- 영토 확장 전투 중 적군의 교회와 교인을 함께 불 태워 버리는 사건으로 교황에 의해 프랑스 전역의 성무 집행이 정지됨.
- 첫 아이를 가진 왕비 에레오노르가 베르나르두스에게 부탁을 해 성무 정지령이 풀리게 됨.
- 1145년 베르나르두스가 찾아와 십자군 원정에 참가토록 권유.
- 1146년 3월 31일 베즐레 대성당에서 베르나르누스가 십자군 결성을 선언하자 그 자리에서 루이 7세가 참가를 서약함.
②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트
- 8년 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뽑혔으나 로마 교황으로 부터 관을 수여 받지 못하고 있었슴.
- 십자군 원정을 성공하면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하고 참가 결심.
(4) 성지로 가는 길
- 1147녀 5월 황제 콘라트가 먼저 독일에서 출발
- 한 달 뒤 루이 7세도 왕비 엘레오노르와 함께 고국을 떠남.
-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비잔틴 제국 황제 마누엘이 요구한 "충성 서약 선언"에 서명해 줌.
- 마누엘은 얼마전 비밀리에 셀주크투르크의 술탄과 휴전 조약을 맺고 있었슴.
- 마누엘은 콘라트에게 내륙보다는 해안을 따라 소아시아를 통과하라고 충고를 함. 이에 콘라트는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소아시아 내륙 통과를 강행함. 도릴라이움에 매복한 투르쿤에게 공격을 당해 전군의 9할정도를 잃고 니케아로 도망했다 부상 치료르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 감.
- 프랑스 군과 콘라트의 조카 프리드리히는 해안 길을 택하여 진군.
- 1148년 소아시아 남안의 절반 정도를 나아간 지점에서 군 부대는 배 편으로 성 시메온 항으로 향하고, 순례자들은 플랑드르 백박과 부르봉 백작의 호위를 받으며 계속 육로로 행진.
-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자 안티오키아 공작령을 통치하고 있던 엘레오노르의 백부 레몽이 누레딘의 알레포 공격에 루이 7세의 지원을 요청함. 루이 7세는 거절함.
- 부활절인 1148년 4월 3일 제2차 십자군 수뇌회의(서미트)가 열림. 성지 순례를 한 뒤 모든 군대는 6월 24일 항구도시 아코에 집결하여 다마스쿠스로 진격키로 결정함.
(5) 다마스쿠스로
- 다마스쿠스는 노예 병사 출신인 영주 "우누르"가 통치.
- 같은 이슬람교도인 누레딘 마저 탐을 내는 풍요로운 도시.
- 십자군의 공격에 대항할 방책이 없자 누레딘에게 딸을 시집 보내는 조건으로 원군을 약속 받음.
- 1148년 7월 24일 십자군은 다마스쿠스에서 4키로 정도인 배제야발에 전진기지를 설치.
- 7월 28일 누레단의 알레포군의 지원병이 홈스까지 다가왔다는 보고를 받음.
(6) 철수
- 7월 29일 제2차 십자군 수뇌부에서 철수 결정을 내림.
독일 황제 콘라트
- 제일 먼저 팔레스티나를 떠나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 상륙,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손님 대접을 받으며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귀국.
- 1152년 사망. 조카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가 뒤를 이음.
프랑스왕 루이
- 다음해 봄이 되어서야 팔레스티나를 떠남.
- 이탈리아 남부 싳ㄹ리아 왕 루제로의 영접을 받고 비잔틴 제국 공격에 대한 의견을 나눔.
- 가을에 접어들고 나서야 프랑스로 돌아옴.
- 1180년 사망. 아들인 "존엄왕 필리프"가 대를 이음.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루이 7세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해 두 사람의 관계가 험악하게 됨.
- 이듬해 로마 교황 및 공의회에서 결혼 무효 판정을 받음.
- 1152년 후일 영국왕 헨리 2세가 되는 노르망디 공작 앙리와 결혼.
수도사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 "신이 좋게 보시지 않는 사람들이 갔으니 실패로 끝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1153년 교황 에우게니우스가 죽은지 한 달만에 죽음.
- 1174년 성인(Saint)의 반열에 오름.
로마 교황 에우게니우스
- 한마디도 발언을 하지 않음.
- 1872년 복자(Beatus)의 반열에 오름.
(7) 심각한 영향
- 중근동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럽인들이 자기들을 버렸다는 느낌을 받음.
- 이슬람측은 한껏 기세가 올랐슴. 이것이 제2차 십자군이 남긴 최악의 선물이 되었슴.
(8) 누레딘의 등장
1144년 장기 사후 모술은 장남이 알레포는 차남인 누레단이 지키게 됨.
1148년 제2차 십자군 패퇴.
1149년 다마스쿠스 영주 사망. 어린 아들이 뒤를 이음.
모술 영주 사망. 누레딘이 모술을 영유.
1154년 봄 매년 갱신되어 온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동맹을 재 체결하기 위해 모임.
이 자리에서 누레딘이 정권을 찬탈함으로써 시리아가 통일됨.
(9) 십자군 국가의 실태
예루살렘 자체가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다. 거기에 종교 기사단이 존재하는가 하면 "이코노믹 에니멀"들인 이탈리아 항구 도시 국가들의 거류지가 퍼져 있었다. 덕분에 물산들의 교류는 매우 활발하였으나 유럽의 고위 성직자들로 부터는 여전히 타락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 성직자 "티루스의 기욤"이 활동을 하고 있었슴.
- 보두앵 3세가 어머니 멜리장드와 통치 주도권 싸움을 벌임.
이런 상황에서도 누레딘이 예루살렘을 공략하지 못하게 되는 두 사건이 있었다.
(10) 대 지진
① 1156년 시리아에 대 지진이 덮쳐 복구에 여념이 없었슴.
② 이 복구 활동으로 인해 누레딘의 통치 이념이 전쟁에서 평화로 변화됨.
※예루살렘 왕 보두앙 3세가 자청해서 비잔틴 제국의 황제 마누엘에게 혼담을 청해 황제의 조카 딸과 결혼, 대가로 안티오키아가 비잔틴 제국령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됨.
(11) 비잔틴식 외교
- 1158년 보두앵 3세가 비잔틴 제국의 황녀 테오도라와 결혼
- 1159년 안티오키아에서 보두앵과 만나게 된 마누엘 황제가 보두앵의 4촌 마리아와의 결혼을 요청.
- 1160년 마누엘과 마리아 결혼식 거행.
- 1162년 보두앵 3세 사망.
동생 아모리가 왕위를 계승.
마누엘은 아모리에게 비잔틴 제국 황실의 마리아와 결혼토록 권유.
- 1167년 아모리는 본처인 아네스트 쿠르트네와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마리아와 결혼.
※ 비잔틴식 외교
사소한 것에 집착한 나머지 대국을 잃는, 그 때는 득을 본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손해를 보게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
(12) 해군력 = 제해권
이탈리아 세력이 이집트 해군을 지중해에서 몰아낼 당시에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가 안티오키아를 차지하고 난 후에는 시위를 하듯 남하하기 시작한 비잔틴 제국의 해군에 대해 유럽측에서는 매우 못마땅해 했다. 비잔틴 제국의 해군은 유턴 했다.
비잔틴 제국 황제의 속마음은 카톨릭 국가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도 않고 이슬람 국가들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일관적인 비잔틴 제국의 외교였다.
십자군 국가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존속할 수 있었던 세 가지 요소.
① 정예 특수부대가 주요 전력이었으며, 양대 종교 기사단이 상비 전력이었슴.
② 성채가 방어의 주요 거점이 되어 주었다.
③ 이탈리아 해양 도시 국가의 교역 상인들이 뛰어난 선원이 되어 주었다.
(13) 십자군과 십자군 사이의 시기
십자군과 십자군 사이의 중간 시기에도 중근동의 십자군이 자체 세력만으로 방어를 했던 기간이 의외로 길었다. 그 기간동안 방어를 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종교 기사단, 성채, 해군력을 들 수 있다.
(14) 종교 기사단
- 십자둔 시대의 특산물
-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튜턴 기사단
- 대주교나 왕들에게서 완전히 독립된 집단.
- 방어를 최대 목표로 삼은 예루살렘 오아국에 상설 군사력 역할을 함.
(15) "템플 기사단"
- 1118년 창설. 23대 단장을 마지막으로 1314년 괴멸.
- 본부가 기원전 유대시대에 유대교 신전과 솔로몬 왕궁이 있었던 장소라 템플기사단으러 명명됨.
- 흰 옷의 가슴에 붉은 십자를 붙인 유니폼.
- 수도사의 3대 서약외 이교도 박멸을 서약함.
- 단원들 대부분이 유럽사회의 하류층 출신이었슴.
- 기부금으로 대금업을 시작 담당 부서까지 생겨남.
- 프랑스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음.
(16) "병원 기사단"
-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에 아말피의 상인들이 병원을 건설한 것이 시초.
- 본부는 성묘교회 있었으며 세례자 요한을 수호성인으로 받드는 의사들의 집단.
- 검은 옷의 가슴에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를 염색한 것을 붙이거나 검은 옷에 흰색 십자가를 붙임.
- 유럽 사회의 상류 계급 출신들이 많았슴.
- 단원들의 출신지는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 유럽에 있으면서도 "병원 기사단"의 전사가 될 수 있었다.
- 부동산 투자를 중시하였고 금융업에는 손을 대지 않음.
(17) 십자군 시대의 성채
- 12C 전반은 동시대 유럽의 성채 건축에서 영향을 받음.
- 12C 후반부터는 완전히 독자적인 건축 양식을 확립함.
- 13C 거꾸로 유럽에 세워지는 성채에 영행을 주게 됨.
제3차 십자군의 영국 사자심왕 리처드가 유럽으로 전축법을 전파.
- 내륙의 성채는 공격과 수비의 거점이 됨으로 적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 위용을 갖추게 됨.
(대표적인 성채 크락 데 슈발리에 임.)
- 해안의 성채는 방어의 거점에 목적이 더 큼.
서방(옥시덴트)는 성채를 평상시의 거처로 삼았으며 또한 건설 자체를 좋아허는 성향이 있었음에 반해 동방(오리엔트)는 널찌한 정원 안에다 주거지를 건설하였으며 유랑민 출신이라 건설에 열정이 없었다.
(18) 중세의 경제인들
- 이탈리아 해양 도시 국가 사람들은 십자군 보다 200년이나 앞서 이미 오리엔트 이슬람교도들과 사업을 해 왔다.
-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순으로 이슬람교도와 교역 시작.
- 9C 경 두명의 베네치아 교역 상인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갔다가 손상될 위기에 처한 성 마르코 유해를 돼지고기 안에 감추어 가지고 온 사건이 발단이 되어 성 마르코가 베니스 공화국의 수호 성인이 됨. 성 마르코는 신약 성서를 쓴 네명 중 한 사람으로 성서에 손을 얹은 사자로 상징됨.
아말피
제1차 십자군 원정 반세기 전에 이미 예루살렘에 성 요한 병원을 세웠다. 이는 아말피 상인 마우로가 사업을 통해 카이로의 칼리프와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베네치아
"그리스도교도이기에 앞서 베네치아 인"
피사, 제노바
제1차 십자군에 관여함으로써 오리엔트로 진출
- 아말피는 노르만 왕국 수중으로 들어가자 쇠퇴하여 버리고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등 3대 해양 도시국가가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 십자군 국가에 유럽의 식량 및 무구와 무기를 공급.
- 이슬람교도로 부터 물자를 사들여 십자군에 공급.
- 병사나 말 수송.
- 피사는 제노바와의 전투에서 패해 쇠퇴함.
-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십자군 국가가 소멸한 후에도 120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이게 된다.
(19) 해군력
이탈리아 해군이 앞선 이유
- 갤리선은 바람 방향 변화에 영향을 덜 받음
- 조수로 노예의 노동력을 빌리지 않았슴.
- 해적과의 거듭된 싸움을 통하여 전투력과 조종술이 향상됨.
이집트 해군이 밀려난 이유
- 해적선 습격 염려가 없어 전투 경험이 부족.
- 전통대로 노예를 조수로 쓰고 있어 군사력 감소.
(20) 거류지
군주정에서는 전쟁 여부를 왕이나 영주가 결정을 하고 그에 대한 부담도 자기가 지지만 공화정에서는 군사 행동등 중요한 국정을 시민집회에서 결정함으로 공화국의 위정자인 원수(도제)나 내각(콘실리오)은 실행하려는 목적에 대해 설명을 해야하고 이 목적에 대한 약속을 받고서야 참전을 결정했다. 그래서 주로 정복지에 자기들 독자적인 거류지를 마련해 줄 것을 요구했던 것읻.
거류지에는 상관(폰다코)와 영사(콘술)의 공저와 장기 체재하는 상인들을 위한 집 그리고 수호 성인에게 바치는 교회와 빵집등이 건설 되었고 창고들이 즐비하게 늘어서게 되었다.
(21) 상관
이슬람 지배하의 도시에서는 독자적인 거류지 설치가 불가능 했으므로 술탄이나 아미르(태수)의 허가를 얻어 상관을 두었다.
(22) 온건한 이슬람 교도
시리아의 샤이자르 태수(아미르) "우사마 이븐 문키드"의 글 중에서
① 프랑크인 기사에 대하여
예루살렘 왕 풀크가 바니야스 영주와 소작농 간의 소송을 수하의 기사들의 의견대로 판결.
② 프랑크인 의술에 대하여
다리에 화농이 생긴 기사와 영양 실조의 여자를 프랑크인 의사가 외과적인 치료와 혼령술로 치료하다 사망에 이르게 함. 이슬람 측 의사들이 자기들의 의술에 우월감을 가지고 있음.
③ 프랑크인 남자의 질투에 대하여
부인이 다른 남지와 얘길르 나누면 자리를 피해주는 매너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함.
④ 프랑크인의 수치심에 대하여
한 기사가 오리엔트식 공중 목욕탕에서 부부가 같이 음모를 제모하고는 기분 좋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프랑크인들은 수치를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는데도 용감하게 싸울 수 있음을 의아해 함.
⑤ 오리엔트화한 프랑크인
안티오키아의 친구와 프랑크인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갔다가 마을 시장에서 남 동생의 전사에 화가 난 여자에게 벙변을 당할 뻔 했다.
⑥ 예루살렘의 템플 기사단
템플 기사단 친구에게 부탁해 알 아크사 사원에서 기도를 하다 신침 기사에게 기도 방향이 틀리다고 봉변을 당했다.
⑦ '"바위 사원"에서의 일
마호메트가 승천한 바위 사원이 벽과 천정에 그리스도교 성화가 걸리게 된 것을 보고 놀랐다.
⑧ 내 아들을 프랑크인의 나라로 데려가 양육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을 때의 이야기
아들을 보내지 않으려고 할머니 핑계를 댔다고 함.
⑨ 그리스도교도의 신앙심과 이슬람 교도의 신앙심에 대하여
그리스도교도의 진정한 신앙심에 경애를 느끼게 되었다가 이슬람의 고행파 수도승의 보고 이슬람에도 진정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 있음에 안도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