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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란 무엇인가? (7) 의롭게 됨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의롭게 됨
몇 년 전 나는 읍내에서 온 설교자의 설교를 듣기 위해 한 교회를 방문했다. 그 초청 설교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 중에 의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들어 보십시오.” 수백 명이 손을 들었다. 실제로 그 예배당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눈에는 자신이 의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교자는 모두에게 손을 내리라고 한 후 다른 질문을 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느끼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이번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 모임에서 내가 본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인의 모습으로 서 있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으로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완전히 이해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그 초청 강사가 던진 것과 같은 유도하는 질문이 자극해주기를 기다리면서 표면에 앉아있다. “제가 의롭냐구요?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손을 드셨으니 저도 손을 들어야겠군요.” 그러나 그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의 어디쯤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의로운지를 안심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받쳐 줄만한 것을 찾고 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올바른 일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뜻이다. 올바른 진로, 올바른 직업, 올바른 배우자를 선택하려고 애쓰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
바르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해야 할 올바른 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점이다. “A와 B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실까?” 올바른 일을 하고자 하는 그들의 진실한 욕구가 그 일을 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를 알 수 없음과 엮어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렵고 불안한 느낌이 들게 한다. “내가 결정을 바르게 했을까?” 그리고 자신이 세운 최상의 계획이 빗나갈awry 때 그들은 당황한다. “어떻게 이렇게 끝날 수 있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자신이 의롭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불안한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평화가 없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감정에 두어서는 안되지만, 의로움에는 틀림없이 기쁨과 평화가 따라오듯이 믿음에는 감정적 안정감이 뒤따른다.
평안의 결핍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정당화하려는 노력의 부산물이다.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생각은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나는 열매를 맺어야 해. 그것이 나에게 기대되는 일이야.” 같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에도 나가고, 세미나에도 많이 참석하고, 신간서적도 많이 읽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충분히 일을 한 건가? 나는 충분히 선한가?” 그들은 의로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 찾아온 젊은 부자 청년처럼 그들은, “영생을 얻으려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이 책도 최신간이지만 나는 당신을 실망시키길 원하지 않는다. 당신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는 당신에게 말하겠다.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요 유산이다.
의로움이라는 선물
왜 복음은 여전히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식일까? 그 모임에서 내가 본 것처럼, 대부분의 신자들은 당신과 내가 필요로 하는 의롭게 됨이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값없는 선물이라는 것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믿음이 아니면 주님이 주시는 의롭게 되는 선물을 받을 어떤 다른 방법도 없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이 의로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롬 1:17상).
율법이라는 나쁜 소식은 당신 자신의 공로로는 하나님을 감동하게 할 정도로 충분히 선하게 될 수 없다고 입증하지만,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선물이 당신에게 값없이 주어지며 여기에는 어떤 것도 추가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너무 단순하여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 그들은 그 선물을 뜯어보지도 않은 채 지나쳐 도덕적 깔끔함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그 선물을 받을 여유를 갖지 않는다; 그들은 구울 빵과 전파할 설교를 가져온다. 그들에게 현재의 느낌을 물어보면 그들은 “피곤해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의 기도를 들으면, 그들은 “주여, 제 형제들과 자매들이 저 혼자 이 모든 일들을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을 보지 않으십니까?” 라고 한다(참조. 눅 10:40).
아이들도 알듯이, 선물에 대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받거나 거부하거나.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정말 제가 필요한 거에요.” 아니면 당신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아닙니다, 예수님. 제가 주님께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 하는 이 모든 일을 보십시오. 놀랍지 않습니까?” 첫 번째 대답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
선물에 대해 당신이 결코 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일은, 특별히 그 선물이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일 경우에는, 당신이 그 선물에 대한 값을 지불하려고 함으로써 그 선물을 주는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시대에 유대인들이 하려고 한 것이요 그것 때문에 바울의 마음이 아팠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1~3)
복음을 알지 못하는 열심은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는 종교를 만들어내는 비결recipe이다. 당신이 일주일에 백여 시간 동안 주님을 위하여 일한다 해도, 주님의 은혜의 복음에 계시된 의롭게 됨 아래에서 한 것이 아니라면, 그 일이 아무 것도 아니다. 당신은 장작을 패는 수고를 할지라도 구원을 받지는 못한다.
자기 의에 빠진 사데 교회 신도들
많은 교인들이 무지와 불신앙에 근거한 열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내고 있다. 그들은 노예처럼 일하지만 하나님의 눈에 그들의 수고는 완전하지 않다. 사데 교회처럼 그들은 더러운 자기 의self-righteousness라고 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옷을 더럽힌 자들이다.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사데 교회의 교인들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었던 것(복음)을 기억하고,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며,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1] 그들은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신들의 무익한 노력을 멈추고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에 복종해야 한다.
누구도 자기 스스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의는 당신 자신의 헌물과 희생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할 때 당신은 자기 스스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가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바울을 추적하여 할례용 칼을 들고 지중해 주위를 돌아다니는 유대인들을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마르다도 어느 정도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이며, 문자 그대로 주님을 위해 일했다. 그녀는 예수님을 위해 빵을 굽는 일을 해야 하는 여성사역팀원이었다.
마르다의 문제는 그녀가 요리를 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녀가 먹지 않은 것이다. 하늘의 주방장이 찾아왔으나 그녀가 한 일이라곤 그분을 위해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앞 뒤가 바뀐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고 의롭게 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축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셨기 때문이다. 더 작은 자가 더 큰 자에게 축복을 받는다.
예수께서는 마르다를 정죄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주께서는 분명히 그 동생 마리아가 더 좋은 선택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의 중요성을 알아보겠는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은 사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음식을 가지고 주님께 온 사람이 아니라 식욕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온 사람이었다.
우리도 주님을 섬기는 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인자(그 사람의 아들)께서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다는 것을 잊곤 한다(마 20:28). 그리고 주님의 핵심 요리는 우리를 의롭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풍성함이다. 여기 하늘의 주방장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당신이 정성 가득한 음식을 먹으면 당신은 또 요리를 할 마음이 일어나겠는가? 당신은 그저 앉아서 소화를 시키고 주방장을 칭찬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에 복종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들은 잘 먹은 포만감으로 만족해 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부엌에서 샌드위치를 만드느라 땀 흘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불만족스런 노래를 부르는 이들도 아니다(“오 주님 채우소서”). 대신에, 그들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주면서 우리에게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에 관한 복음을 전파한다.
예수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의 중요성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말이 아니다. 나는 은혜를 전하는 설교자다. 나는 “해야 한다”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움에 관해서라면, 당신은 정말로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의로움의 문제에 있어서 당신이 주님을 도우려는 어떤 일이든지 결국은 재앙일 뿐이다.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게 끝이다.
바울은 자신의 열심 있는 유대인 동족이 하나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로움을 세우려 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효력을 발생하는 말은 복종하다는 말이다. 큰 바다에 빠진 수영 선수를 생각해 보자. 구원을 받으려면 그의 생명을 구원해 줄 인명구조원에게 그는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그가 두려움에 당황하여 자신을 구하려고 애쓸수록 그는 인명 구조원의 일을 더욱 어렵게 할 따름이다.
몇 주 전에 나는 해군에서 수색과 구조를 맡은 수영 전문가가 물에 빠진 조종사를 구하기 위해 출동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조종사는 힘이 빠져 허우적대다가 자신과 자신을 구원할 사람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었다. 그 인명 구조원은 더 깊은 곳으로 수영해 들어가면서 그 조종사가 몸부림을 포기할 때까지 기다렸다. 달리 말하면, 그는 조종사가 지칠 때까지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것은 우리와 예수님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는 주님을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돕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도와주려고 할수록 일은 더욱 악화되고 우리는 지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애를 쓴다. 아담이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무화과 잎을 엮은 이후로, 육신의 본성은 상황을 제어하고 고치려고 달려들어 왔다. 나는 이 물에서 스스로 구원해 낼 수 있어. 이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의 절망적인 형편을 알려주는 위대한 율법을 하나님께서 우리에 주신 것에 대해 우리가 감사 드리는 이유다. 그러나 당신은 큰 바다의 한가운데 있다! 당신은 그렇게 수영을 잘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라는 복음에 대해 더욱 더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구주 예수께서 여기 계신다. 몸부림을 멈추고 주님의 의로움에 복종하라.
여름 방학의 첫 날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일 년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바로 기말 시험을 마치는 순간이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펜을 놓으세요. 여러분의 답안지를 거둘 때까지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그 순간의 달콤함을 기억하겠는가? 모든 노고와 공부는 지나갔다; 모든 시험도 끝났다. 당신의 마음에 젊은 청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화창한 생각이 들어온다: 학교는 끝나고 여름 방학이다!
바로 이것이 신자의 마음에 의로움의 복음이 뿌리를 내릴 때 일어나는 일이다. 제일 먼저 일어나는 반응은 달콤한 안정감이다. “진짜로요? 예수께서 그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고요? 주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고요? 시험 공부를 그만 해도 된다고요? 오, 기쁜 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말 시험으로 기진해 있다. 복음은 더 이상 시험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미 당신 대신에 그것을 치르셨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찌 되었겠는가? 합격이다. 학교는 영원히 졸업이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고후 5:21).
당신은 새 언약의 수학을 좋아할 것이다: 예수께서 죄가 되시기 전에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셨는가? 아무 죄도 범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의로움을 얻기 전에 얼마나 많은 의로운 행동들을 했는가? 아무런 의로운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은 그 순간, 당신은 언제나 영원히 “의로운 자”라는 확증(인(印), seal)을 받았다. 전에 당신은 의롭지 못했으나 당신은 깨끗하게 씻김을 받았으며 거룩하게 되었고 주의 이름으로 의로운 자라고 선언되었다(고전 6:9~11).
의롭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당신이 완전한 새로움, 성령의 새롭게 하심, 전적으로 새롭게 지음을 받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완전히 바르게 되었다. 당신은 더 이상 예전의 굽어진 사람이 아니다. 아담 안에서 당신은 굽어진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당신 속에서 거니시면서 당신을 안전하게 이끌어가신다.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어 하게 된다. 당신이 죄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죄를 짓는 일이 더 이상 당신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한 당신을 만족하게 하지도 않는다. 당신이 때때로 죄를 범하게 되면, 그것이 당신에게 큰 놀람으로 다가올 것이다 – “아, 내가 그러지 말 것을!” – 그런 행동은 당신의 새로운 성품과는 반대되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폴, 내가 그렇게 의롭다면 왜 성령께서는 나에게 내가 지은 죄를 계속 생각나게 하시죠?” 사실, 성령께서는 결코 그렇게 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것은 깨트려져야만 할 성경 밖의 신화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깨닫는 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과오에 대해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죄책감은 정죄의 근원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위로자라고 부르는 분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제부터 그리고 영원히 정죄함이 없다.
성령의 깨닫게 하심
예수께서는 성령이 우리에게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을 깨닫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요 16:8~10).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의롭게 되었다는 확신이 가장 필요한 때는 언제인가? 그 때는 바로 당신이 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리라. 바로 당신이 죄를 범했을 때 일 것이다.
당신이 죄를 범하면 성령께서는 당신에게 무엇을 생각나게 하시는가? 그것은 당신이 의로우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여전히 의롭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 들어온 것(그리고 우리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설교한 것)과는 전혀 다른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동안 성령께서 하늘의 경찰처럼 우리가 길을 벗어나면 경고하시는 분으로 들어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고, 우리를 진리로(또한 예수께로) 이끄실 것이며, 우리의 의로움(예수님)을 확신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성령은 당신의 죄에 대해 눈을 감는 분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눈을 예수님께로 열게 하시는 분이다. 비행기 안에 있는 자이로스코프(종타조종기)가 올바른 수평을 계기판에 보여주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항상 당신에게 의로우신 분을 가리켜 보여주신다. 성령께서는 항상 당신의 눈이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당신을 위로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선언되었으니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당신은 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아마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나의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진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평화는 항상 의로움의 결과로 온다. 당신이 주님의 의로우심보다 당신의 죄에 관하여 더 의식할수록, 당신은 결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죄에 대하여 건강하지 않은 집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죄를 감시하느라, 그리고 죄에 대하여 이야기하느라, 그리고 죄에서 돌이키려 하느라, 죄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느라,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죄를 정복하느라 우리의 삶을 허비하고 있다. 죄와 죄책감, 그리고 수치에 대해 그렇게 많은 강조를 하면서도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이 의롭다는 느낌을 가지지 못한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그 어느 때보다 더 필요로 한다.
먼저 할 일을 먼저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다. 먼저는 첫 번째를 뜻한다. 먼저는 두 번째를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님의 의로우심을 두 번째로 구한다면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정돈 한 후에 구한다면, 주님의 의로우심을 구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을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다. 죄를 의식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의로우심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화과나뭇잎 뒤로 숨는다.
우리는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의로움과 거룩함 가운데 하나님을 닮게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엡 4:2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하실 일을 다 하셨다-우리를 새롭게 만드셨다 –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말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의인들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당신이 죄를 범할 때 그것은 절대로 당신이 의롭지 못하거나 용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느끼도록 믿음을 앗아가지 못한다.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고, 성령의 음성을 듣게 하며, 이렇게 고백하게 한다: “제가 망쳐놨어요,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저는 여전히 의롭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붙들고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잘 모른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의로운 행동을 해야 의로운 자라는 말을 들었으나 당신은 주께서 친히 의롭다 하신 사람이다. 구약시대의 의로움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주일은 의롭고 월요일은 의롭지 못하는 그런 것이었다.[3] 그러나 당신은 진정한 의로움 가운데 하나님을 닮도록 지으심을 받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는가? 당신은 진실로 그리고 영원토록 의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당신의 행동은 여기에 개입하지 않는다. 당신의 의로운 행동이 당신을 의롭게 한 것이 아니듯이, 당신의 의롭지 못한 행동이 당신을 의롭지 않게 할 수 없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는가? 죄에 대해 걱정하며 세월을 허송하는 대신에, 우리는 생명샘과 생명의 빛을 발하는 기쁨의 사역에 합류할 수 있다.
분석의 중풍병
의로움의 선물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감사하지 못하는 또 다른 표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염려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실까?” 홍콩에 있을 때 나는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예언을 받으려고 아시아를 배회하는were bouncing around Asia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 이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초래한 중풍병에 걸린 상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삶을 보류하고 자신이 그릇된 선택을 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실패하면 어떡하지?” 당신이 이미 목표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그것을 실패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함께 이미 당신은 진실로 의로운 자라고 선언하고 계신다. 이것은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의롭다는 말이고, 당신의 꿈과 행동도 의롭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잠언 12:5에서, “의인의 계획은 의롭다”고 한 것과 같다. 당신이 차 한 잔을 준비한다면, 그것도 의로운 행동이다. 가서 의로운 차 한 잔을 준비하라!
의로운 행동들은 의로운 사람들이 한다. 나는 당신이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의로운 과오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당신이 주님의 사랑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주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의로움이라는 선물을 믿는다면, 당신의 선택은 모두 선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미 이기셨으므로 그 안에 있는 당신은 패배할 수 없다.
자녀들아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라. 그리스도 안에 깊이 머물라.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를 맞을 준비가 될 것이고, 두 팔을 벌리고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될 것이며, 주님이 오실 때 죄책으로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고 서투른 변명도 하지 않게 되리라. 주님이 올바르고 의로우신 분임을 확신했으니, 의를 행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이라는 것을 너희는 알게 되리라. (요일 2:28~29, 메시지 성경)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하늘 아버지처럼 우리는 진실되고 자격을 갖춘 의를 행하는 자들이다. 당신은 늘 당신의 기억을 상기시켜 줄 증서를 액자에 담아 간직해야 한다. 사실, 당신에게는 열 개의 증서가 있으며 그 각각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것들을 당신의 거실에 걸어두면 그것이 위대한 대화를 시작하는 화두가 될 것이다.
당신의 꿈과 소망이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하게 될 것이다. 아니 차라리, 당신의 마음에 있는 소망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심으신 씨앗이라는 점을 알기를 배우라. 당신이 꼭 하고 싶은 일이 트램폴린 검사관a trampoline tester이 되는 것이라면 가서 의로운 트램폴린 검사관이 되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소망이라면 당신이 다른 어떤 것을 하는 것은 실수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 깊이 거하는 삶
오늘날 교회가 하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우리가 직업적 성공을 공적인 목회사역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듣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당신은 네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사람이라면 목사나 집사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선교사나 복음 전도자가 되라. 당신이 만약 자동차 경주자가 되거나 식당에서 면을 만드는 사람이라니 애석하군. 당신이 만드는 음악이나 영화가 명백하게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니 안 됐군.
나는 목사의 아들로 자라났다. 그 경험과 나의 목사로서의 직분을 지내오면서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고 식사를 했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 중의 대부분이 공적 목회사역에 종사하게 된 것은 그들에 대한 기대 때문이거나 그 시절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목사가 되는 것은 고귀한 직업이고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은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을 잘 못하거나 아니면 잘못된 이유로 인해 목회자가 된 사람들이라면 의로움의 복음에 의해 목사 가운을 입게 된 직업적 선택으로부터 놓임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맞추려고 살아가는 것이나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깊이 거하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네 개의 직업에 잔뜩 종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계신다고 나는 보증할 수 있다. 주님의 상상력은 제한 받지 않으시므로 그 가능성은 끝이 없다. 당신이 기대하는 것은 선하다. 전에 그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을 당신이 이 땅에서 시도할지라도 그것은 가능하다.
당신은 주님의 몸에서 고귀하고 독특한 지체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렵지만 당신에게는 쉬운 일이 있다. 이런 차이는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만 주시는 하늘나라의 향기요 표식이다. 그것들은 당신의 은사를 보여주며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 세상은 당신 안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우리가 망치게 하는 단 두 가지의 길이 있다: 참여하기를 거절함으로(하나님 제가 무엇을 할까요?) 또는 아담이 살던 방식인 독립적인 삶의 구습으로 되돌아 감으로(나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에게 유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요, 다른 사람에게 유혹은 자기가 변속 레버를 잡아당겨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삶을 사는 열등한 방법이다. 당신은 위대한 일을 위해 태어났다. 당신은 해처럼 밝게 빛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당신을 의롭게 만드시고 당신 안에 의로운 생각을 주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성공한 사람으로 세우신다. 당신이 손으로 한 모든 일에 대하여 복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미리 하늘의 자원들을 준비하여 대기해 놓으신 분이시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미리 점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을 지금 그 모습으로 만드시고, 지금도 당신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 크기의 꿈으로 부풀어 오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무엇을 기다리는가? 당신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사에 불을 붙이며 사생결단으로 전진하라. 그리스도 안에 깊이 거하면서 주님께서 당신을 만들고 싶어하시던 그 사람이 되라. 당신의 미래는 밝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른다(잠 4:18).
의로움의 복음
당신이 넘어지고 죄를 범하면, 옛 언약의 설교자들은 말하기를, “네가 한 짓을 보아라!” 하고 정죄할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의 설교자들은 말하기를, “주께서 행하신 일을 보아라!”라고 격려할 것이다. 옛 언약 설교자는 당신이 어지러운 죄인이 되기까지 당신을 모든 죄에서 돌이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의 설교자는 당신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힘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풀어줄 것이다(딛 2:12[4]).
옛 언약 아래서 당신이 한 일 때문에 당신은 의로울 수 있었다면, 새 언약 아래서 당신은 주께서 하신 일 때문에 의롭게 된다. 당신은 진정한 의로움 가운데서 의로운 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재창조되었다.
주께서 주신 의로움이라는 선물에 대해 당신이 무엇을 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실까? 주님은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며, 그리고 주님과 함께 의로움 가운데서 다스리고 통치하길 원하신다.
복음은 영생을 물려받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아니다. 그것은 축복된 선언이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당신에게 필요한 의로움, 곧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보다 더 나은 의로움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값없이 주는 선물로 왔다는 선언이다.
본문의 요약 및 소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므로 의롭게 된 것을 안다. 칭의(稱義), 곧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을 안다. 그러나 자신이 의롭게 된 것을 느끼며 확신 가운데 살지 않고 있다. 그 증거는 불안, 안정감의 결여, 끊임없는 노력 등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근심 속에 안정감을 잃은 채 살아가는 이유는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열심 있는 종교인이 되었다.
이런 과오를 사데교회의 성도들이 범했다. 마르다도 그랬고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도 할례를 행함으로 의로워진다고 확신하고 바울을 핍박했다. 차라리 마르다는 하늘의 주방장이 만들어 주는 만나를 먹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 스스로 의로움을 확보하려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요원에게 자신을 맡기기를 거부하고 몸부림치면서 구조를 어렵게 하는 것과 일반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의 선물을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우리가 언제 의롭게 되는가? 사실 이미 예수께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도록 다 이루셨다. 아담 안에서 가졌던 우리의 굽어진 성향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다. 바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죄는 더 이상 나에게 관심거리가 아니다.
내가 죄를 지을지라도 성령께서는 나에게 항상 방향을 잃지 않도록 추락하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바라보라고 인도하신다. 여전히 의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신다. 나는 더 이상 죄를 바라보고 고민하는 자가 아니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것이다.
나는 항상 먼저 주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옷을 입은 새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의로운 사람처럼 행동할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일시적인 의로움에 거할 수 있었으나 나는 영원히 의롭게 되었다. 이는 나의 행동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주님의 공로 덕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패를 걱정하지 않고 주께서 내 안에서 행하심을 확신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무슨 선택을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주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의로운 행동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의로우신 주님의 자녀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직업을 선택하든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 만이 할 수 있는 일, 다른 사람에게는 어렵지만 나에게는 쉬운 일을 할 것이다. 그것을 주께서 나에게 주셨고, 이 세상은 어서 내가 그 일을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주저하지도 않을 것이고, 주님을 거슬러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삶은 주님 안에서 해처럼 밝고 나의 미래도 희망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미리 모든 것을 예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의로운 사람이며 주님과 함께 다스리고 통치할 것이다.
[1] 계시록 3:1~6을 보라. 우리의 옷을 어떻게 더럽히는가? 우리 스스로 의롭게 되게 하려고 함으로써 더러워진다. “우리의 의로운 행동은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사 64:6).” 하나님의 눈에 맞는 의상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며 그의 세마포를 입는 것이다(사 61:10). 이 두 가지의 의로움-우리의 의로움과 주님의 의로우심-은 상호 배타적이다. 우리는 루터의 실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눈으로 덮인 오물이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겉으로만 의롭고 속으로는 썩은 존재가 아니다. 주님과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주님이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존재다(고후 5:21을 보라).
[2] 성경에는 최소한 두 가지의 정죄자가 나온다. 하나는 모세라고 알려진 율법이다(요 5:45). 다른 하나는 마귀다(계 12:10). 성령께서는 아무에게도 심지어 죄인에게도 죄 있다고 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오셔서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 라고 하셨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과오가 아니라 불신이다. (과오는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성령을 모독하고 비방하고 거슬려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죄에 대한 단번에 그리고 마지막의 해결책이 되신다고 성령께서 일깨워주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3] 에스겔 3:20, 18:24~26, 33:13을 보라. 구약 성경 시대 때, 당신의 최고의 의로움도 충분하지 않았다. 엘리후는 욥에게 그의 의로움이 하나님의 의로움보다 낫다고 생각하는지 심각하게 물었다(욥 35:2).
[4]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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