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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윤 상 영
여름방학이 시작 되었다. 정상현은 방학 첫날 꼼짝도 하지 않고 집안에서 지냈다.
머리에 노란 타월을 쓰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의 소녀가 깜짝 놀란다. 상현은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자신의 얼굴을 보고 김선화를 떠올린다. 거울 속에서 긴 목에 야위고 가무잡잡한 얼굴이 오버랩 된다.
이사를 온 첫날 집안 마당에서 상현이 선화와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 선화는 잽싸게 대문 밖으로 달아났다. ‘어린 것이 왜 저러지?’ 의아해 하면서도 상현의 가슴은 절로 뛰고 얼굴은 붉어졌다. 하루에 한 두 번은 꼭 집안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그때마다 선화는 상현을 피해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래서 지난 석 달 동안 한 번도 선화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상현은 가끔 미래의 아내로서 선화를 그려보았다. ‘선화가 아직 피지 않아서 예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몇 년만 더 지나면 예뻐지겠지. 공부도 잘하고, 얌전하고, 게다가 기품 있는 양반 가문이라고 하니…….’
상현은 누나와 함께 선화의 집에 세 들어 자취를 했다. 그가 선화의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석 달 전이었다. 선화의 집은 광주시 동명동에 있는 낡은 기와집으로 동쪽의 본채와 서쪽의 행랑채로 이루어졌고 행랑채 한 쪽에 대문과 화장실이 붙어있고 본채와 행랑채에는 각각 긴 마루가 있었다. 본채의 큰방에는 주인인 선화 어머니와 선화가 살았고, 큰방 옆에 부엌이 있었고 부엌 오른 쪽에는 공무원 가족이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행랑채의 크고 작은 방들에는 부엌이 딸렸다. 상현 남매의 방은 행랑채 한 쪽 끝이었고 방 두 개가 미닫이를 사이에 두고 이어진 상하방(미닫이를 사이에 두고 이어진 두 개의 방)이었다. 그 옆의 빈 방에는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에서 내려온 선화의 오빠가 기거하는 중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키가 크고 목소리가 낭랑한 사십대 후반으로 수 년 전에 남편을 사별하고 대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 선화와 함께 살고 있었다. 상현은 아들이 서울대학교 법대생이고 딸 선화도 반에서 줄곧 수석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들은 가끔 상현의 옆방에서 법학 책을 낭독하고 그러다가 쉬는 중간 중간에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럴 때마다 상현은 조선시대의 선비가 글을 읽고 시조를 읊조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상현은 며칠 전에 방 앞의 툇마루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그 대학생을 보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의 늠름한 체구와 수려한 용모를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상현은 선화의 오빠와는 비교조차 될 수 없이 초라한 자신이 부끄러웠고 선화에 대한 은근한 연모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과연 내가 선화에게 어울릴까? 나는 몸도 이렇게 허약하고 공부도 별로인데? 나는 선화에게 어울리는 짝이 될 수 없어.’
상현은 태어날 때부터 허약체질이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덩치가 큰 아이들에게 치여 지냈다. 그러나 공부도 잘 하고 아버지가 규모가 제법 큰 정미소를 운영하는 시골 유지였던 덕분에 기는 살아 있었다. 그는 시골에서는 가기 어렵다는 광주의 명문 중학교에 입학했다. 상현과 그의 누나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광주의 중흥동에 있던 친척집에서 자취를 하였으나 친척이 그 집을 팔고 떠나자 동명동의 이 집으로 이사를 왔던 것이다.
상현은 어느 날 새벽 잠결에 어머니와 누나가 아랫방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쌀 판매 대금을 수금하러 광주에 왔는데 수금이 늦어져 상현 남매의 자취방에서 묵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는 시골의 정미소가 부도직전이라고 말했다. 재작년에 서울에 보낸 쌀에서 한꺼번에 거액의 손해를 보았고, 게다가 지난 삼 년간 계속된 가뭄으로 양곡사업이 크게 위축되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적자가 누적되어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자식들 학교 공부를 중단시키고 시골에 있는 동생을 외가로 보내야겠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누나의 대화를 엿들은 상현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상현은 어머니가 울먹이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아버지가 동생을 외가에 보내고 함께 떠나자고 하셨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왜 무책임한 말씀을 그리 하시오? 우리 귀한 자식들은 어쩌라고 우리만 먼저 죽는단 말이오? 그런 말씀 다시는 하지 마시오, 내가 똥장군을 져서라도 아이들 다 키우고 시집 장가 다 보낼 테니 당신은 아무 걱정 마시오.’라고 했다면서 다시 흐느껴 울었다.
상현은 그날 아침에 학교에 갔으나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말소리가 아득히 들렸고 수업에 전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에 동산에서 뛰고 달리는 친구들을 멍하게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나처럼 끔찍한 고민이 없는 너희들은 참 좋겠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노랗게 보였다. 내일은 태양이 결코 다시 솟아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태양은 멀쩡하게 다시 떴다. 그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끝날 줄 알았던 고통스러운 세상이 계속 이어지다니!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은 나에게 고통과 번민의 어두운 지옥이 이어지는 것이다. 어제 하루에 모든 고통과 번뇌가 끝났어야 했다. 내가 지금 대학생이라면 곧 취직을 해서 부모님을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 내가 중학교나 마칠 수 있을까? 일찌감치 학교는 포기하고 철공소나 식당 종업원으로 취직해서 돈벌이에 나서야겠다.’ 아무 일도 없이 며칠이 지났다. 귓속에서 가끔 들리던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선화가 다시 눈앞에 어른거렸다. 상현은 용기를 내어 선화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하였으나 선화는 좀처럼 눈앞에 나타나주지 않았다. 만나면 뭐라고 할까? 그러나 생각해보니 막상 만난다고 해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중학생인 그는 보잘 것 없이 빼빼 마르고 가무잡잡한 초등학생 여자 아이 하나 때문에 끙끙 앓는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이불을 둘러쓰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어둠 속에서 선화가 떠오를 뿐이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강렬하지만 말없는 눈빛이 그를 쏘아보았다. 상현은 이불 속에서 울기 시작했다. ‘이게 아니야. 이것이 아니란 말이야. 친구들 중 아무도 나 같은 애는 없어. 나만 암담하고 불쌍한 외톨박이가 되고 말았어.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아직 어리고, 사람의 앞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부모님은 부모님의 인생이 있고 내 인생은 분명히 따로 있겠지. 그렇지, 어른들이 어렵다고 나까지 그렇게 되리라는 법은 없어. 어쩌면 나는 잘 풀릴지도 몰라. 어쨌든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잘 풀려 왔잖아? 설혹 운명이란 것이 있다고 해도 내가 조금만 더 성실히 노력하면 별 문제 없을 거야. 하지만 나같이 한심한 놈이 또 있을까? 이 와중에 그까짓 어린 계집애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게다가 난 못난 겁쟁이임이 확실해. 지금 당장이라도 큰방으로 가면 그 애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바보처럼 혼자서……. 이것이 바로 짝사랑인가? 아니지. 사실 나는 그 애에게 아무 관심도 없어. 여자 친구를 사귀더라도 여자가 최소한 중학생 정도는 되어야 해. 지금의 선화는 너무 어려. 그 애는 그냥 주인집 딸일 뿐이야. 집안에서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말하는 거야. 선화야 너 많이 크고 예뻐졌다. 내 말에 선화는 무슨 말을 할까? 얼굴이 빨개져서 도망치겠지.’
상현은 방바닥에 엎드려 방학숙제를 하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커다란 화원에서 선화와 함께 꽃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화원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상현은 감색 정장 차림의 자신을 보고 감탄했다. 선화는 하얀 드레스에 하얀 모지를 쓰고 있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여인처럼 목이 길고 거무스름한 피부에 갸름한 얼굴이었다. 긴 속눈썹의 맑고 큰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거울 속 소녀의 눈이 아름답다.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눈동자 속을 들여다본다. 장미 화원이 보인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선화가 상현에게 미소를 보낸다. 상현은 노란 타월을 벗어 내린다. 군데군데 여드름이 난 얼굴이 멍한 눈길로 상현을 바라보고 있다. ‘넌 누구냐?’
시골에 갔던 누나가 초등학생인 막냇동생을 데리고 돌아왔다. 방학을 이용해서 광주시에 있는 고모 집에 가려고 온 것이다. 동생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키가 작고 귀여웠다. 상현이 동생을 데리고 고모 집에 가려고 나가는 길에 대문에서 선화 어머니를 만났다. 상현이 ‘얘는 제 동생입니다.’ 하고 소개하자 선화 어머니가 ‘쯧쯧쯧’ 혀를 차며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상현은 선화 어머니가 사람을 비웃을 만큼 속이 얕은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히 비웃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비웃었을까? 선화 어머니는 왜소한 나와 더욱 왜소한 내 동생이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혀를 차고 비웃다니! 선화 어머니는 평소에 나를 얼마나 하찮게 보았을까?’ 선화 오빠의 수려하고 늠름한 모습이 눈앞에 지나갔다. 상현은 걸음을 멈칫하고 뒤돌아서 선화 어머니를 쏘아보았다. ‘내 동생까지 모욕을 당하다니!’ 그는 심장이 예리한 칼끝에 찔리는 듯했다. 그러나 선화 어머니에게 따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동생은 상현의 마음도 모르고 ‘형, 빨리 가.’하면서 상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다음날 상현은 동생을 시골로 보낸 후에 이불을 쓰고 종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밖에 나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선화 어머니를 만날까 두려웠고 선화를 만나면 도망을 가야할 텐데 그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대문 옆에 있는 화장실에 갈 때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을 하고 살금살금 갔다. 며칠간 그렇게 지냈다. 그리고 가끔 타월을 머리에 쓰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이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시 여자로 태어날 것을 잘 못 되어서 남자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남자가 이렇게 사람 만나기를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는데…….’
아침 일찍 상현은 아랫방에서 잠들어 있는 누나가 모르게 윗방 문을 살며시 열고 자취방을 빠져나왔다. 늦여름의 이른 아침은 조용했고 공기가 맑고 상쾌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집 대문을 빠져나와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어쨌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희망을 찾아가는 탈출도 아니었고 구도의 길을 떠나는 출가도 아니었다. 파산 직전의 집안 사정, 선화에 대한 짝사랑, 선화 오빠에 대한 열등감, 선화 어머니에 대한 원망…….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어디론가 도망을 가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렇다고 집안의 사람들을 피해서 이른 아침에 남몰래 밖으로 ‘탈출’한다는 것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집 바깥에서 만날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감당할 셈이지? 그 사람들이야 나를 모르니까 괜찮아.’ 그는 지나가는 행인들이 자신에게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 고마웠다. 어느덧 평온을 되찾았고 의기양양해졌다.
상현은 혼자서 묻고 답하면서 걸었다. 다리가 나타났다. 농장다리였다. 다리 아래에 철로가 있었다. 철로 양 옆에는 초록색 잡초들이 무성하게 솟아 있었다. ‘잡초! 잡초는 차별을 모를 것이다. 사람들은 잡초가 허약하다느니, 작다느니, 가난하다느니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놈들은 건강하다. 저 쭉쭉 뻗은 검푸른 잎들을 보라!’ 상현은 잡초들이 부러웠다.
다리를 건너자 오른쪽에 커다란 벽돌 건물이 보였다. 마침 그 건물을 둘러싼 높은 담장에 있는 거대한 문에서 청색 수의를 입은 죄수들이 갖가지 농기구들을 들고 열을 지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행렬 양쪽으로 총을 든 교도관들이 소풍이라도 가듯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죄수들은 피부가 검게 그을려 있었고 건강해보였다. 느릿느릿한 행동은 평화롭게 보였다. 천진하게 웃는 얼굴들도 보였다. 상현은 그들을 보면서 행렬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상현은 죄수들의 행렬이 목욕탕 건물이 있는 커브 길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걷기 시작했다. 개울이 나타났다. 도로에서 개울로 내려갔다. 개울의 물줄기는 멀리 보이는 산에서 시작해서 광주천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는 개울둑을 따라서 산 쪽으로 걸어갔다. 개울의 양 옆에 크고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디선가 ‘당신의 비누 다이얼…….’ 라디오 시엠송이 들렸다. 이어서 ‘삐이…’ 시보가 울렸고 뉴스가 흘러 나왔다. 포플러 나무와 옥수수 잎 사이로 아이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낡은 탁구대가 있는 마당에서 이른 아침부터 탁구를 치는 상현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그 옆집에서 감나무에 매단 그네를 타고 있는 계집애를 보았다. 상현은 선화를 떠올렸고 얼굴이 빨개졌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상현은 걸음을 빨리 했다. 개울 바로 옆에 붙은 집 마당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학생이 상현을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바라보았다. 상현은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수치심으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는 헐떡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아득히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달리기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침밥을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개울은 산기슭에서 작은 도랑으로 이어져 있었다. 상현은 도랑 옆에 난 오솔길로 들어섰다. 그는 걸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상현은 어느덧 산 속의 커다란 소나무 아래 등걸에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라디오 소리도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와 새 소리가 들렸다. 상현은 다시 산길을 걸었다. 그가 멈춘 곳은 절벽 위였다. 아래쪽은 아찔한 낭떠러지였다. 바닥에는 약간의 물이 보였다. 상현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절벽 아래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은 오전에 비가 내렸다. 오후에 비가 그치자 상현은 다시 그 산에 갔다. 오솔길을 걸어가면서 나무와 풀과 꽃과 개미와 산새와 이야기했다. 마침내 전날 갔던 절벽 위에 섰다. ‘나무들아, 풀들아, 꽃들아, 너희들은 좋겠다. 이렇게 무사하게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있으니. 개미들아, 산새들아, 너희들이 부럽구나. 부끄러울 일도 어려울 일도 없을 테니. 너희들은 모르지? 비웃음을 당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래서 너희들은 행복한 거야.’
절벽 아래쪽에 자욱이 끼어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상현이 서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안개가 근방의 숲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뭇가지들이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듯이 보였다. 사방은 온통 구름 바다였다. 그는 절벽 쪽의 구름을 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절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상현의 머릿속에 아버지, 어머니, 누나 그리고 동생의 얼굴이 스쳐갔다. 선화가 나타났다. 긴 목에 마르고 거무스레한 얼굴의 그녀는 금방 사라졌다. ‘왜 저 사람들이 보일까? 너는 누구냐?’ 상현이 자신에게 물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알고 있다. 그들은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그런데 만일 그들이 지금의 내 모습을 본다면……? 부끄럽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 그러나 나의 존재를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이다. 살다보면 조금씩 알게 되겠지. 지금 나는 나를 버림으로써 나 자신을 배반하려고 해. 나를 모독해서는 안 돼. 나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 상현은 절벽 위의 구름으로 옮기려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안개에 휩싸인 산에서 서둘러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산기슭까지 내려왔을 때 안개는 걷혀있었고 주위는 이미 어두웠다. 작은 도랑을 건너고 산기슭의 모퉁이를 돌아갔다. 눈 아래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광활한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검은 구름이 가득 찬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주를 가로질러 광활하게 뻗어있는 온갖 은하와 성운들보다 더 성대하고 화려하고 장엄했다. 웅장한 향연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어떤 세상인가? 나는 왜 여태 이런 엄청난 야경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상현은 벅찬 가슴으로 아득히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상현은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선화와 함께 거닐던 화원의 수많은 꽃들이 보였다. 수많은 꽃들 중에서 작고 노란 꽃 한 송이가 다가왔다. 진달래꽃이었다. 그 진달래꽃 한 송이는 점차 커지더니 마침내 선화의 얼굴로 바뀌었다. 상현은 눈을 뜨고 걷기 시작했다. 치맛자락을 날리며 걸어가는 아가씨가 보였다. 여자는 목이 길고 빼빼 말랐다. 상현은 그 여자의 뒤를 쫓아갔다. 여자가 뛰기 시작했다. 상현도 여자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그러나 여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상현은 허탈한 기분으로 돌아섰다.
상현은 농장다리를 건너면서 다리 밑 철로 옆의 작은 집 마당 한쪽에 다정하게 서있는 수양버들 두 그루를 보았다. 그는 난간 위에 앉아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부엌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젊은 부부와 선화 또래의 여자가 긴 의자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불빛에 보였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자 헤드라이트 불빛에 다리 위에 있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선화가 제 또래의 여자 아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상현이 선화에게 다가갔다. 선화는 상현을 보고 흠칫 놀랐다.
“선화야. 너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잠깐 나 좀 보자.”
상현이 선화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으나 선화는 못 알아들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현은 마른 침을 삼킨 후에 또렷하게 다시 말했다.
“선화야,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선화는 고개를 숙이고 집 쪽으로 달려갔다. 상현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아갔으나 선화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큰방 앞에서 한참 동안 서있었다. 잠시 후에 방에 들어가 쓰러지듯이 자리에 누워버렸다. 몸을 움직일 의욕도 힘도 없었다. 누나가 어디 아프냐고 물었으나 상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며칠 동안 죽은 사람처럼 지냈다. 영문을 모르는 누나가 상현에게 고백하라고 다그쳤다. 상현은 고백할 것이 없다고 완강히 잡아뗐다. 누나는 상현과 선화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넘겨짚었다. 상현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선화를 좋아하고 있다고 밝혔다. 누나는 짓궂은 웃음을 지우고 한 번 나서보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밖에서 친구를 만나고 자취방에 돌아온 상현은 선화와 누나가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며칠 동안에 선화는 꽤 성숙해 있었다. 목이 길고 약간 핼쑥한 얼굴에는 물이 오른 버들강아지처럼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가슴은 살짝 나오고 엉덩이는 약간 벌어져 보였다. 선화는 웃는 얼굴로 상현에게 눈인사를 했다. 누나는 홍차를 두 잔 끓여 내놓고 일어섰다. 선화도 일어서는 것을 누나가 눈짓을 하며 주저앉히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마루에는 상현과 선화 둘만 남았다.
“선화야, 너 며칠 사이에 무척 예뻐졌다.”
상현은 태연한 척하며 침착하게 말을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렸다. 그는 당황했다. 선화는 그의 당황스런 모습이 재미있는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너 농장 다리에서 왜 도망갔냐? 내가 무섭냐?”
상현이 용기를 내서 물었지만 선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무슨 말을 할까 궁리를 했지만 말이 막혔다. 고개를 돌려 시멘트 블록 담장에 낀 파란 이끼를 바라보았다. 이끼는 축축한 담장 밑에서 힘차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선화의 오빠가 떠올랐다. 선화에게 물었다.
“서울 오빠는 잘 계시지? 1차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네. 2차 시험에서 떨어졌대요.”
선화가 허스키하고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 잔 잔기침을 했다.
“그래? 사법고시가 어렵긴 어렵나보다. 오빠 같은 수재도 단번에 패스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리고…… 그런데…….”
상현은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네?”
선화는 짓궂은 눈길로 상현을 보며 물었다.
상현은 무슨 말을 할까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선화 오빠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선화가 차를 서둘러 마시고 일어설 듯이 옷깃을 여몄다. 상현이 당황해서 말했다.
“서, 선화야, 나도 네 오빠하면 안 될까? 친 오빠 못지않게 너를 사랑해 줄게.”
상현은 ‘사랑’이라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뱉어내고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숙였다. 선화의 손이 보였다.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녀는 상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듯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돌리더니 발딱 일어나서 큰 방 쪽으로 가버렸다.
상현이 방에 들어와 거울을 들여다본다. 우뚝 솟은 콧등, 여드름 자국이 있는 뺨과 이마. 우울해 보이는 두 눈. 코밑에 나기 시작한 솜털 같은 수염도 희미하게 보인다.
누나가 노크를 하고 상현 방에 들어왔다.
“어땠어? 선화와 무슨 이야기를 했지?”
“누나, 웃기지?”
“뭐가?”
“애들이 연애하는 거 말이야. 그런데 난 잘 모르겠어. 선화 맘이 어떤지를.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하고 선화가 보고 싶을까? 미칠 것 같아. 이런 걸 짝사랑이라고 하지?”
“이 녀석이 다 컸네. 걱정 하지 마. 선화도 너를 좋아하고 있어. 여자 마음은 여자가 알아.”
누나는 눈웃음을 치며 상현의 등을 두드려 주고 방에서 나갔다. 상현은 느긋한 마음으로 당초무늬 벽지 위에 시선을 박고 미술 책에서 본 적이 있는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떠올렸다. 긴 목, 갸름한 얼굴의 하체가 풍만한 여자. 그 여자는 모딜리아니와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를 상상해보았다. 탁상시계의 초침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그는 처음으로 달콤한 행복감을 느끼며 잠들었다.
그날 밤늦게 상현의 어머니가 자취방에 나타났다. 어머니는 몹시 피곤해 보였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정신이 나간 듯이 보였다. 상현은 가슴이 덜컥했다. ‘끝내 올 것이 왔구나!’ 상현은 책상 앞에 앉아 아랫방에서 들리는 어머니와 누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사채를 얻으려고 광주에 와서 아침부터 밤까지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결국 실패했다. 당장 내일 갚아야 할 돈을 마련하지 못했으니 부도가 나게 되었다. 쌀장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정미소를 정리할 때가 오고 말았다. 서울로 온 식구가 갈 준비는 벌써 해 두었다. ‘밤 봇짐을 싸게’ 된 것이다.
서울로 떠나는 날이었다. 어머니와 누나와 동생은 기차로 먼저 떠났고 상현은 아버지와 함께 트럭을 타고 가기로 되어있었다. 집 앞 한길 가에 서있는 트럭에는 시골에서 싣고 온 간단한 살림살이들이 실려 있었다. 상현은 책, 책상, 의자, 장롱, 옷가지, 이불, 식기, 찬장 등 자질구레한 이삿짐들을 트럭에 실었다. 선화에게 꼭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던 상현은 아버지의 초조한 눈길을 피해 큰 방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성거렸으나 선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화장실을 몇 번 출입하면서 시간을 끈 끝에 장바구니를 들고 오는 선화 어머니를 대문 앞에서 만났다. 상현은 그녀를 보자마자 물었다.
“저어, 선화 어디 갔어요?”
“어저께 병원에 입원했어. 그런디 학생이 뭣 땜에 그러지?”
“아니요. 그냥……, 선화가 몸이 안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입원까지 하디니……, 어디가 많이 아파요?”
“결핵이랴. 며칠 있으면 퇴원할 것이여……. 그나저나 학생네 서울 가서 잘 살아야 써……. 쯧쯧쯧.”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