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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초고왕(肖古王)과 히미코(ひみこ卑彌呼)의 증손자(曾孫子) 진무텐노(じんむてんのう神武天皇) 이야기
아마데라스오호가미(あまてらすおほかみ天照大神=연오랑세오녀燕烏郞細烏女)는 스사노오노미코토(すさのおのみと素戔嗚尊, 須佐之男命)에게 빼앗겼던 미즈호노구니(みづほのくに水穗國)를 탈환(奪還)하라고 아들 마사가쯔아카쯔가찌하야히아메노오시호미미노미코토(まさかつあかつかちはやひあめのおしほみみのみこと正勝吾勝勝速日天忍穗耳命)에게 명령했습니다.
마사가쯔아카쯔가찌하야히아메노오시호미미노미코토(まさかつあかつかちはやひあめのおしほみみのみこと正勝吾勝勝速日天忍穗耳命)는 이즈모구니(いずもくに出雲國)=미즈호노구니(みづほのくに水穗國)를 차지하고 있는 이복형(異服兄) 구수왕자(仇首王子)=오호구니누시노가미(おおくにぬしのかみ大国主神)가 무서워 반도(半島)로 달아나, 다가미무스비노미코토(たかみむすひのみこと高皇産靈尊)의 딸 다구하다치지히메(たくはたちぢひめ𣑥幡千千姬)와 결혼(結婚)하여 낳은 아들 아마쓰히고히고호노니니기노미코토(あまつひこひこほのににぎのみこと天津彦彦火瓊瓊杵尊)를 열도(列島)로 보내자고 제안(提案)했습니다.
아마데라스오호미가미(あまてらすおほみかみ天照大御神)는 천손(天孫) 아마쓰히고히고호노니니기노미코토(あまつひこひこほのににぎのみこと天津彦彦火瓊瓊杵尊)를 열도(列島)에 강림(降臨)시켜 미즈호노구니(みずほのくに水穂国)를 재건(再建)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열도(列島)에 강림(降臨)한 아마쓰히고히고호노니니기노미코토(あまつひこひこほのににぎのみこと天津彦彦火瓊瓊杵尊)도 미즈호노구니(みずほのくに水穂国)를 바로 재건(再建)하지 못하고, 세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돼 았습니다.
[古事記(고지기) 上卷(상권)]
故後木花之佐久夜毘賣參出白 妾妊身 今臨産時 是天神之御子 私不可産故請 爾詔 佐久夜毘賣 一宿哉妊 是非我子 必國神之子 爾答白 吾妊之子 若國神之子者 産不幸 若天神之御子者幸 即作無戸八尋殿 入其殿内 以土塗塞而 方産時以火著其殿而産也 故其火盛燒時所生之子名 火照命【此者隼人阿多君之祖】次生子名 火須勢理命【須勢理三字以音】次生子御名 火遠理命 亦名天津日高日子穗穗手見命【三柱】
그 후에 코노하나노사쿠야비메(このはなのさくやびめ木花之佐久夜毘賣)가 아마쯔히고히고호노니니기노미코토(あまつひこひこほのににぎのみこと天津彦彦火瓊瓊杵尊)에게 와서 ‘저는 임심했습니다. 지금 낳을 때가 되었습니다. 이 천신(天神)의 자식을 저 혼자 낳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듣고 ‘사쿠야비메(さくやびめ佐久夜毘賣)여 단 하루 밤의 정으로 아이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필시 그 아이는 나의 자식이 아니다. 국신(國神)의 아들일 것이다.’고 말 하였다.
그러나 사쿠야비메(さくやびめ佐久夜毘賣)가 대답하기를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가 만약 국신의 자식이라면 낳을 때 무사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그 아이가 천신의 자식이라면 무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곧 문이 없는 넓은 산실(産室)을 짓고, 그 속으로 들어가 흙으로 모두 막고서, 그 산실에다 불을 붙이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하여 불이 활활 타오를 때 낳은 자식의 이름은 호데리노미코토(ほでりのみこよ火照命)라 하는데, 이 사람이 하야토(はやと)의 아다노가미(あたのかみ)의 시조이다. 그 다음에 낳은 자식의 이름은 호스세리노미코토(ほすせりのみこよ火須勢理命)(須勢理, 3글자는 소리나는대로 읽는다)이다. 그 다음에 낳은 자식의 이름은 호오리노미코토(ほおりのみこよ火遠理命)이다. 이 신의 다른 이름은 아마쯔히다카히꼬호호데미노미코토(あまつひたかひこほほでみのみこよ天津日高日子穗穗手見)라고도 한다.(3명의 신)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열도(列島)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천손강림신화(天孫降臨神話)를 한데 모아 묶어서 세대신화(世代神話)로 만들어 천년(千年)의 역사(歷史)로 늘린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족보(天皇族譜)를 만들었습니다.
천손(天孫) 아마쯔히코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あまつひこひこほのににぎのみこと天津彦彦火瓊瓊杵尊)가 낳았다는 세 아들 가운데 막내인 아마쯔히다카히꼬호호데미노미코토(あまつひたかひこほほでみのみこよ天津日高日子穗穗手見)가 열도(列島)의 초대천황(初代天皇), 진무텐노(神武天皇)인데, 여기서 다시 세대반복(世代反復)하는 신화로 엮어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기록했습니다.
[古事記(고지기) 上卷(상권)]
於是海神之女豐玉毘賣命自參出白之 妾已妊身 今臨産時 此念 天神之御子不可生海原 故參出到也
한편, 바다의 신의 딸인 토요타마비메노미코토(とよたまびめのみこよ豐玉毘賣命)가 몸소 남편을 찾아와 ‘나는 벌써 아이를 가졌습니다. 지금 낳을 때가 되었습니다. 이를 생각건대 천신의 자손을 바다에서 낳을 수는 없어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爾即於其海邊波限以鵜羽爲葺草造産殿 於是其産殿未葺合 不忍御腹之急 故入坐産殿 爾將方産之時 白其日子言 凡他國人者臨産時 以本國之形産生 故妾今以本身爲産 願勿見妾 於是思奇其言
그리하여 곧 해변에 가마우지(鵜)의 날개로 지붕을 잇고 만들었다. 그런데 산실의 지붕을 다 잇기도 전에 진통이 심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산실로 들어가 이윽고 해산하려고 했을 때 그 남편에게 말하기를 ‘모든 다른 나라 사람들은 아기를 낳을 때가 되면 자기 나라 모습으로 아기를 낳습니다. 원하옵건대 저의 모습을 보지 말아 주십시오.’하였다.
竊伺其方産者 化八尋和邇而 匍匐委蛇 即見驚畏而遁退
이에 그 말을 이상히 여겨 출산하는 모습을 몰래 들여다 본즉 아주 큰 상어가 되어 엉금엉금 기며 몸을 틀고 있었다. 깜짝 놀라 두려워 물러나 도망쳤다.
爾豐玉毘賣命知其伺見之事 以爲心恥 乃生置其御子而 白下妾恆通海道欲往來 然伺見吾形是甚怍之即塞海坂而返入
그리하여 토요타마비메노미코토는 들킨 사실을 알고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여 곧 아이를 낳고 ‘저는 늘 바닷길을 통하여 이 나라를 다니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은 저로서는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말하고 곧 바로 바다로 통하는 길을 막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是以名其所産之御子 謂天津日高日子波限建鵜葺草不合命【訓波限云那藝佐 訓葺草云加夜】
이 때 낳은 자식의 이름을 지어 아마쯔히타카히코나기사다케우가야후기아에즈노미코토(あまつひたかひこなぎさたけうがやふきあえずのみこよ天津日高日子波限建鵜葺草不合命)(波限을 뜻으로 나기사라 읽고, 葺草도 가야라 읽는다)라고 부른다.
然後者 雖恨其伺情不忍戀心 因治養其御子之縁附其弟玉依毘賣而 獻歌之 其歌曰
그렇지만 후에는 그 부끄러워 원망하던 마음이 바뀌어 그리움을 견딜 수 없어 그 아이를 양육하도록 아우 타마요리비메(たまよりびめ玉依毘賣)를 붙여주고 노래를 바쳤다. 그 노래는
阿加陀麻波 袁佐閇比迦禮杼 斯良多麻能 岐美何余曾比斯 多布斗久阿理祁理
아가다마와(あかだまは)오사헤히가레도(おさへひかれど)시라다마노(しらたまの)기미가요소히시(きみかよそひし)다후도헤아리게리(たふとくありけり)
赤玉緒光 白玉 君装 貴
붉은 구슬은 그것을 꿰고있는 줄까지도 아름답게 빛나지만 하얀 구슬과 같은 당신의 모습은 고귀하였습니다.
爾其比古遲【三字以音】答歌曰
이에 그 히고지(3저는 음으로 읽는다)에 답하여 노래 부르기를
意岐都登理 加毛度久斯麻邇 和賀韋泥斯 伊毛波和須禮士 余能許登碁登邇
오기쯔도리(おきつどり)가모도구시마니(かもどくしまに)와가이네시(わがいねし)이모하와즈레지(いもはわすれじ)요노코토고토니(よのことごとに)
沖鳥鴨著島 我率寝 妹忘 世悉
물오리들이 날아드는 섬에 내가 데리고 잤던 아내는 잊을 수가 없구나 언제까지나
故日子穗穗手見命者坐高千穗宮 伍佰捌拾歳 御陵者 即在其高千穗山之西也
그리하여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ひこほほでみのみこよ日子穗穗手見命)은 타카치호궁에 580년간 있었다. 능(陵)은 타카치호산 서쪽에 있다.
是天津日高日子波限建鵜葺草葺不合命娶其姨玉依毘賣命生御子名 五瀬命 次稻氷命 次御毛沼命 次若御毛沼命 亦名豐御毛沼命 亦名神倭伊波禮毘古命【四柱】
이 아마쯔히타카히코나기사다케우가야후기아에즈노미코토(あまつひたかひこなぎさたけうがやふきあえずのみこよ天津日高日子波限建鵜葺草不合命)는 그의 이모(姨母)인 타마요리비메(たまよりびめ玉依毘賣)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의 이름은 이쯔세노미코토(いつせのみこよ五瀬命), 다음에 이나히노미코토(いなひのみこよ稻氷命), 다음에 미케누노미코토(みけぬのみこよ御毛沼命), 다음에 와카미케누노미코토(わかみけぬのみこよ若御毛沼命)인데, 이 신의 다른 이름은 토요미케누노미코토(とよみけぬのみこよ豐御毛沼命). 또 다른 이름은 카무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코토(かむやまといわれびこのみこよ神倭伊波禮毘古命)라고도 한다.(4명)
故御毛沼命者跳浪穗渡坐于常世國 稻氷命者爲妣國而入坐海原也
그리고, 미케누노미코토(みけぬのみこよ御毛沼命)는 파도를 밟고 토코요노쿠니(とこよのくに常世國)로 건너갔고, 이나히노미코토(いなひのみこよ稻氷命)는 어머니의 나라(ははのくに妣國)가 있는 바다로 들어갔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아마쯔히타카히코나기사다케우가야후기아에즈노미코토(あまつひたかひこなぎさたけうがやふきあえずのみこよ天津日高日子波限建鵜葺草不合命)가 자기 이모(姨母), 타마요리비메(たまよりびめ玉依毘賣)와 혼인하여 낳은 네 아들 가운데 막동이, 카무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코토(かむやまといわれびこのみこよ神倭伊波禮毘古命)의 이름을 그 할아버지 이름과 같은 히코호호데미(ひこほほでみ彦火火出見)라 하고, 그가 바로 초대(初代) 진무텐노(神武天皇)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日本書紀卷第三(일본서기권제3)神武天皇(진무텐노)]
神日本磐余彦天皇。諱彦火火出見。彦波瀲武鸕鶿草葺不合尊第四子也。母曰玉依姬。海童之小女也。
카무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코토(かむやまといわれびこのすめらみこと神日本磐余彦天皇)의 이름은 히코호호데미(ひこほほでみ彦火火出見)이다. 히코나기사타케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코토(ひこなぎさたけうがやふきあえずのみこよ彦波瀲武鸕鶿草葺不合尊)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타마요리비메(たまよりびめ玉依姬)로 바다 신(海童)의 작은 딸이다.
아마데라스오호가미(あまてらすおほかみ天照大神)의 손자, 히코호호데미(ひこほほでみ彦火火出見)가 열도(列島)의 열국(列國)들을 통일(統一)하여 초대천황(初代天皇)이 됐다고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년(千年)이나 늘려 꾸민 신화(神話)를 연대기(年代記)로 바로 잇을 말이 궁색(窮塞)해서 위(魏)나라와의 교류(交流) 기록을 인용(引用)하여 아마데라스오호가미(あまてらすおほかみ天照大神)와 히코호호데미(ひこほほでみ彦火火出見)의 이름을 히미코(ひみこ卑彌呼)와 난승미(難升米)로 바꾸어 기록했습니다.
[三國志卷三十(삼국지권30)魏書三十(위서30)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오환선비동이전제30)倭人傳(왜인전)]
景初二年六月,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其年十二月,詔書報倭女王曰:制詔親魏倭王卑彌呼:帶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次使都巿牛利奉汝所獻男生口四人,女生口六人、班布二匹二丈,以到。汝所在踰遠,乃遣使貢獻,是汝之忠孝,我甚哀汝。今以汝為親魏倭王,假金印紫綬,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其綏撫種人,勉為孝順。汝來使難升米、牛利涉遠,道路勤勞,今以難升米為率善中郎將,牛利為率善校尉,假銀印青綬,引見勞賜遣還。今以絳地交龍錦五匹、臣松之以為地應為綈,漢文帝著皁衣謂之弋綈是也。此字不體,非魏朝之失,則傳寫者誤也。絳地縐粟罽十張、蒨絳五十匹、紺青五十匹,荅汝所獻貢直。又特賜汝紺地句文錦三匹、細班華罽五張、白絹五十匹、金八兩、五尺刀二口、銅鏡百枚、真珠、鈆丹各五十斤,皆裝封付難升米、牛利還到錄受。悉可以示汝國中人,使知國家哀汝,故鄭重賜汝好物也。
경초 2년(238) 6월에, 왜의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으로 하여금 군에 이르게 하여, 천자에게 나아가서 조헌하기를 요청하므로, 태수 인 유하가 관리를 시켜서 전송하여 경도에 이르게 하였다. 그해 12월에 조서를 내려서 왜 여왕에게 답하여 말하였다. “친위왜왕 비미호에 제조하노라. 대방군 태수인 유하가 사인을 보내어 너의 대부 난승미와 차사 도시우리를 호송해 왔는데, 네가 바친 남자 생구 4인, 여자 생구 6인 그리고 반포 2필 2장을 받들고 왔다. 네가 있는 곳은 대단히 먼데도, 사신을 파견하여 공헌하였다. 이는 너의 충성과 효심이니, 나는 너를 심히 어여쁘게 여기노라. 이제 너를 친위왜왕으로 삼고, 금인자수를 수여하노라. 장봉하여 대방태수에게 보내어 수여토록 하겠다. 너는 너의 나라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어루만져주며, 효순하는 데 힘쓰도록 하라. 네가 보낸 사신 난승미와 우리는 먼 곳을 건너오느라 길에서 부지런히 힘썼으니, 이제 난승미를 솔선중랑장으로, 우리를 솔선교위로 삼고, 은인청수를 수여하노라. 그들을 만나서 위로하고, 하사하여 돌려보내노라. 이제 강지교룡금 5필 [배송지주], 강지추속계 10장, 천강 50필, 감청 50필로써, 네가 공물로 헌납한 값에 보답하겠다. 또 특별히 너에게 감지구문금 3필, 세반화계 5장, 금 8량, 오척도 2구, 동경 100매, 진주와 연단 각각 50근을 하사할 것이고, 모두를 포장해서 봉하여 난승미와 우리에게 부친다. 귀환하면 기재된 그대로 받을 것이다. 모두는 너의 국중 사람들에게 보여라. 국가가 너를 어여쁘게 여기는 것을 알게 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정중하게 너에게 좋은 물품들을 사여하노라.
삼국지(三國志)의 이 기록을 일본서기(日本書紀)가 그대로 인용(引用)해서 진구고코기(神功皇后紀) 중간(中間)에 끼워 넣어 기록했습니다.
[日本書紀卷九(일본서기권9) 神功皇后攝政(신공황후섭정)]
卅九年是年也。大歲己未。〈魏志云。明帝景初三年六月。倭女王遣大夫難斗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太守鄧夏遣使將送詣京都也。〉
39년 이 해는 태세 기미년이다. 위지에 명제 경초 3년(AD.239년) 6월에 왜여왕이 대부 난두미 등을 보내 천자를 조헌하기를 구했다. 태수 등하가 부하를 시켜 경사까지 안내했다. 고 기록했다.
四十年。〈魏志云。正始元年。遣建忠校尉梯携等奉詔書印綬。詣倭國也。〉
40년. 위지에 정시 원년(AD.240년). 건충교위 제에게 조서와 인수를 주어 보내 왜국에 보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두 사서(史書)는 같은 사건(事件)을 기록하면서 1년의 차이로 기록했습니다.
경초(景初) 2년(AD.238년) 6월이면 위(魏)나라가 요동국(遼東國) 정복전쟁(征服戰爭)을 한창 하고 있을 때이어서 왜여왕(倭女王) 히미코(ひみこ卑彌呼)의 사신(使臣) 난승미(難升米)가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하(劉夏)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三國志卷八(삼국지권8) 魏書八(위서8) 二公孫陶四張傳第八(2공손도4장전제8)]
二年春,遣太尉司馬宣王征淵.
경초 2년(238년) 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을 보내 공손연을 쳤다.
六月,軍至遼東.
6월, 군(軍)이 요동(遼東)에 도착했다.
「한진춘추漢晉春秋」 - 공손연이 자립하여 소한(紹漢) 원년(元年)이라 칭했다. 위나라가 장차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오나라에 칭신(稱臣)하며 (오나라) 군대가 북벌하여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청했다. 오나라가 그 사자를 죽이려 하자 양도(羊衜)가 말했다, “(공손연의 사자를 죽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는 필부(匹夫)의 분노를 드러내 패왕(霸王)의 계책을 내버리는 것이니, 이때를 틈타 사자를 후대하여 기병(奇兵,기습군,正兵의 반대)을 몰래 보내 그가 일을 이루도록 기다리느니만 못합니다. 만약 위나라가 공손연을 쳐서 이기지 못하면 우리 군이 멀리 달려갔으니 이로써 멀리 떨어진 오랑캐(遐夷)에게 은혜를 베풀어 만리 바깥에까지 의(義)로 뒤덮은 것이 됩니다. 만약 싸움이 연이어 풀리지 않아 머리와 꼬리가 나뉘어지면 우리가 그 부근의 군(郡)을 노략하고 구략(驅略)한 뒤 돌아오면 되니 또한 족히 천벌을 가해 지난 일을 설욕할 수 있습니다.” 손권이 말했다, “옳은 말이오.” 그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대거 출병하며 공손연의 사자에게 말했다, “뒤의 소식을 기다리시오. 응당 간서(簡書,죽간에 쓴 글,편지)를 좇아 필히 동생과 휴척(休戚,기쁨과 근심), 존망(存亡)을 함께할 것이니 비록 중원(中原)에서 죽더라도 나는 달게 받아들일 것이오.” 또 말했다, “사마의(司馬懿)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 심히 동생이 염려되오.”
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圍塹二十餘里.宣王軍至,令衍逆戰.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宣王令軍穿圍,引兵東南向,而急東北,即趨襄平.衍等恐襄平無守,夜走.諸軍進至首山,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復擊,大破之,遂進軍造城下,爲圍塹.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雨霽,起土山﹑脩櫓,爲發石連弩射城中.淵窘急.糧盡,人相食,死者甚多.將軍楊祚等降.
공손연은 장군 비연(卑衍), 양조(楊祚) 등을 보내 보기(步騎) 수만으로 요수(遼隧)에 주둔케 하고 주위 20여 리에 참호를 팠다. 선왕(宣王)의 군대가 도착하자 (공손연은) 비연(卑衍)으로 하여금 이를 맞아 싸우게 하니 선왕(宣王)이 장군 호준(胡遵) 등을 보내 격파했다. 선왕(宣王)이 군대에 명해 포위를 뚫고 군대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향하다 급하게 동북쪽으로 돌려 양평(襄平)으로 나아갔다. 비연 등은 양평에 방비가 없는 점을 두려워해 밤중에 달아났다.
제군(諸軍)이 전진하여 수산(首山)에 도착하니 공손연이 다시 비연 등을 보내 영격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했다. 다시 이를 공격해 대파하고는 진군하여 (양평)성 아래에 이르러 성 주위에 참호를 팠다. 때마침 장마비가 30여 일 동안 내려 요수(遼水)가 크게 불어나 운선(運船,물자를 운반하는 배)이 요구(遼口)에서 곧바로 성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비가 그치자 토산(土山)을 쌓고 노(櫓,망루)를 세우고 발석(發石,투석기), 연노(連弩)를 만들어 성 안으로 쏘았다. 공손연은 군급(窘急,궁지에 몰려 매우 급박함)해졌고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장군 양조(楊祚) 등이 항복했다.
八月丙寅夜,大流星長數十丈,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壬午,淵衆潰,與其子脩將數百騎突圍東南走,大兵急擊之,當流星所墜處,斬淵父子.城破,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傳淵首洛陽,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8월 병인일(7일) 밤, 길이 수십 장에 이르는 큰 유성(流星)이 수산(首山) 동북쪽으로부터 양평성(襄平城)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임오일(23일), 공손연의 무리가 무너지니 아들인 공손수(公孫脩)와 함께 수백 기를 거느리고 포위를 돌파해 동남쪽으로 달아나자 대병(大兵)으로 급히 들이쳐 유성(流星)이 떨어진 곳에서 공손연 부자를 베었다. 성을 함락하여 (공손연이 임명한) 상국(相國) 이하 수천 명의 수급을 베었고 공손연의 수급을 낙양(洛陽)으로 보냈고, 요동(遼東), 대방(帶方), 낙랑(樂浪), 현도(玄菟)가 모두 평정되었다.
진수(陳壽)가 삼국지(三國志) 왜인전(倭人傳)을 쓰면서 공손탁전(公孫度傳)의 태세(太歲)로 착오(錯誤)를 일으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즈호노구니(みづほのくに水穗國)를 탈환(奪還) 하려다가 오호쿠니누시노가미(おおくにぬしのかみ大国主神)인 구수왕(仇首王)에게 쫓긴 왜여왕(倭女王) 히미코(ひみこ卑彌呼)는 구수왕(仇首王)의 이복형(異服兄)인 온다라(百濟)의 구지왕(仇知王)으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해, 경초(景初) 2년(AD.238년) 6월에 증손자(曾孫子)를 사신(使臣)으로 보냈으나, 온다라(百濟)인 대방(帶方)이 요동(遼東)과 함께 함락(陷落)되어 만날 수 없었습니다.
8월에 전쟁(戰爭)이 끝난 후에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대로 이듬해인 경초(景初) 3년(AD.239년)에 온다라(百濟) 대신 위(魏)나라를 만난 것입니다.
사신(使臣)의 이름을 삼국지(三國志)는 난승미(難升米)로,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난두미(難斗米)로 기록했습니다.
삼국지(三國志)는 왜여왕(倭女王) 히미코(ひみこ卑彌呼)의 증손자(曾孫子) 히코호호데미(ひこほほでみ彦火火出見)의 이름 글자 호호(ほほ火火)를 불에 탄 재난(災難)으로, 데미(でみ出見)를 소리 나는 대로 되미(升米)로 바꿔 썼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삼국지(三國志)를 베끼면서 되미(升米)를 두미(斗米)로 기록한 것입니다.
히코호호데미(ひこほほでみ彦火火出見)가 규우슈우(九州)에 있던 야마다이쿠니(邪馬臺國) 여왕(女王) 아마데라스오호가미(あまてらすおほかみ天照大神)의 사신(使臣)으로 위(魏)나라를 다녀온 AD.239년에 동정(東征)을 시작하여 AD.244년에 야마또(大和)=지금의 오호사카(大阪)를 다스리던 에시키(兄師木)와 오토시키(弟師木) 형제(兄弟)와 싸워서 에시키(兄師木)를 전사(戰死)시키고 승리(勝利)했습니다.
전사한 에시키(兄師木)는 구수대왕(仇首大王), 즉 대국주신(大國主神)의 아들로서 일본서기(日本書紀) 4권에 의덕천황(懿德天皇)으로 기록된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鉏友命)이고, 그의 동생 오토시키(弟師木)는 시키즈히코(師木津日子命)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야마또(大和) 정벌전쟁(征伐戰爭)에서 승리(勝利)한 후 AD.247년에 할머니, 아마데라스오호가미(あまてらすおほかみ天照大神)가 죽자 히코호호데미(ひこほほでみ彦火火出見)가 초대천황(初代天皇)인 진무텐노(神武天皇)로 즉위(卽位)하고, 열도(列島)에서 효소천황(孝昭天皇)이 된 사반대왕(沙伴大王)의 딸,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氣余理比賣)를 황후(皇后)로 맞았습니다.
4-2-8) 초고왕(肖古王)과 히미코(ひみこ卑彌呼)의 증손자(曾孫子) 진무텐노(じんむてんのう神武天皇) 이야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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