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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삼총사
심양섭
연극 <헤이그 1907>을 보았다. 두 달 전부터 벼르고 별렀던 연극 관람이었다. 처음 공연 소식을 접하고부터 손가락으로 날짜를 꼽으며 기다렸었다. 서울대학교 연극 동아리 출신 배우들의 모임인 관악극회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총동창회의 후원으로 준비한 야심작이었다. 공연 후에는 개막 기념 리셉션까지 열려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난 출연진들을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맛있는 뷔페로 저녁식사까지 할 수 있었다.
6년 전 유럽미술기행 중에 헤이그를 방문했을 때 이준 열사 기념관에 들렀던 적이 있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분 밀사가 묵었던 호텔을 구입해서 기념관으로 꾸몄는데 허름했다. 은퇴한 한인 노부부가 이준 열사 기념사업에 여생을 바치고 있었다. 두 분이 저술한 <<아, 이준 열사>>라는 책도 한 권 샀다.
그분들의 설명을 듣는데 이준 열사가 할복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1907년 당시 헤이그 현지 언론들은 이준 열사가 뺨의 종기 때문에 사망한 걸로 보도했지만 이위종은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이준 열사가 죽기 며칠 전부터 음식물을 전혀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이준 열사는 부산항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과 합류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한 뒤 66일 만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장장 삼만 리 여행길이었다.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가 이미 개막된 지 열흘 뒤였다. 몸도 지쳤지만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하고 장외 외교전을 펼치는 동안 상심은 더욱 더 컸으리라.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분사(憤死) 순국’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가장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외면 속에 끓어오르는 분을 차마 억누르지 못하셨던 듯하다.
우리에겐 이준 열사가 많이 알려졌지만 특사단의 대표(정사)는 이상설이었고, 이준과 이위종은 부사였다. 당시 세 사람이 찍은 흑백사진을 보면 하나같이 고종황제의 특사다운 당당함이 묻어난다. 이상설과 이준의 카이젤 수염은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세 분 다 흰색 셔츠에 타이를 메고 조끼까지 입은 정장 차림인데 이준과 이위종의 셔츠 깃은 아래로 접혀 있지 않고 빳빳하게 위로 세워져 있다. 연극에서도 이런 복장이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다. 세 분 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회중시계를 지녔는데 그 줄이 조끼 바깥으로 늘어져 있다. 당시 스물한 살로 가장 어렸던 이위종은 헤이그에서 ‘왕자’로 통했는데 귀공자 스타일에 키가 크고 늘씬한 꽃미남이다. 비운의 세 남자지만 참으로 멋드러진 세 남자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소설 속에서만 삼총사가 있었던 게 아니다. 20세기 초 대한제국에도 삼총사가 있었던 것이다.
나도 연극을 보며 눈물을 많이 훔쳤지만 헤이그 밀사 사건을 너무 무겁게만 다룰 건 아니다. 심각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오늘날 한국의 젊은 세대가 반드시 공감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반일감정이나 강대국에 대한 불신감을 부추긴다고 해서 실제 국익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다.
<헤이그 1907> 연출자 이수인의 제안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역사의 무게와 애국의 부담일랑 던져버리시고 그저 한 편의 연극으로 대하시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풍자와 해학을 중시하는 마당극의 전통을 이어내려오고 있는 관악극회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헤이그 1907>은 슬프고 진지한 중에도 코믹한 장면이 곳곳에 등장한다. 공연 후 민낯으로 보는 출연진의 표정에도 그늘이 없다. 특히 젊은 배우들은 천진난만한 해맑은 청년들이다.
세 사람의 특사는 헤이그 평화회의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열아흐레를 활약하고는 그만 망국의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향년 48세였다. 장장 넉 달에 걸친 회의 일정 중에서 겨우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세 분의 장외 외교는 뜻밖의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취재단의 대표격이었던 윌리엄 스테드 영국 기자와 오스트리아 출신 평화주의자로 노벨평화상을 1905년에 받은 여류작가 베르타 폰 주트너가 세 분 열사를 도왔다. 호소문을 뿌리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들의 분위기가 일본의 잔학성을 규탄하고 강대국의 위선을 조롱하며 약소국 조선을 동정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 와중에 이준 열사가 숨졌는데 죽음보다 더 강한 외교는 없었다.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3개 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의 활약은 눈부셨다. 을사늑약의 부당성이 전 세계에 폭로되었고, 동방의 은둔국이었던 ‘꼬레’의 존재가 알려졌다. 나도 기자 출신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평화회의장보다 오히려 장외무대를 누비는 아시아의 세 남자가 더 흥미로운 뉴스메이커였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세 남자들의 이야기를 <<대한제국 삼총사>>라는 소설로 쓰고 싶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유쾌한 이야기로 만들고 싶다.
이준 열사는 고국의 부인과 딸을 다시 보지 못하고 먼먼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상설과 이위종도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힘이 없으면 친구도 없고, 나라를 잃으면 갈 곳도 없어지는 법이다. 신상옥 영화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영화의 제목처럼 세 분은 <돌아오지 않은 밀사>들이다.
그러나 나는 이 대목에서 세 분의 처자들을 떠올린다. 세 분은 ‘열사’ 호칭을 받고 기념도 되지만 처자들은 무엇인가. 오늘날도 남자가 죽으면 대개 가세는 급격히 기운다. 그저 미망인으로 어렵게 자녀들을 키웠을 세 분 열사의 부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한낱 필부로 살아가는 내 처지도 내세울 건 없지만 가족이 흩어지지 않고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내 아내는 걸핏하면 나 보고 ‘집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힐난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난세에 태어난 수컷들, 아니 영웅들의 운명은 롤러코스터를 탄 것과 마찬가지다. 여인들이 남정네들한테 기대하는 안정감은 애당초 제공할 수가 없다.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지구촌 어디를 여행하다가도 돌아올 내 나라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가.
첫댓글 저도 오래전 네덜란드를 방문했을때 이준열사 기념관에서 손녀되시는 분으로부터 직접 그 때의 상황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덕분에 이 아침, 다시금 우리의 지난 역사와 국가와 민족정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
네. 슬프지만 우리 역사죠~~
원고 다시 수정해 최종본 올렸습니다.
언젠가 소설로 나오게 될 <대한제국 삼총사>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