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사공배 | 설공찬 | 차이 |
출생 | 1480년 | 1485년 | 5년 |
사망 | 1499년 | 1504년 | 5년 |
<가정보>에 수록된 순서대로 3명이 모두 설공찬의 누님이라면 설충란배가 1480~1485년 사이에 아이를 4명이나 낳았다는 것이 좀 이해하기 어렵다.
또 만약 족보에 없는 누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1480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사실 <설공찬전>에 등장하는 설공찬의 누님이 족보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을 찾아내어 증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일 것이므로 일단 뒤로 미루어 두고, 난이도가 높지 않은 전자(前者)에 관하여 먼저 살펴보자.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도사공배는 <설공찬이>에 등장하는 누님으로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지만, 혹시 이수배(李洙配)나 김종택배(金宗澤配)도 같은 조건일지도 모르고, 또 <가정보>에 적힌 순서에도 불구하고 이수배나 김종택배 중 한 사람은 성공찬의 여동생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 같다.
1749년(영조 25) 발행된 <기사보>는 순창설씨 가문에서 발행한 족보 중에서 가장 이른 것으로 신뢰도가 가장 높다 할 것인데, 1565년(명종 20) 발행된 <가정보>나 1680년경에 발행된 <씨족원류>와는 형제의 순서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가정보>에서 설갑인의 장자로 기록된 설충회가 <기사보>에는 막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순창설씨 가문의 소목(昭穆)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사안이므로, 타성인(他姓人)이 나서서 감히 가타부타 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공찬의 누님과는 아무 관련도 없으므로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설충란 자녀의 순서에 관해서는 사건으로부터 50년 정도 후에 발행된 <가정보>는 신뢰도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으므로 <가정보>를 근거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복규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씨족원류>에 수록되어 있는 설공양(薛公讓)을 설공찬(薛公瓚)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설공양은 설충란의 아들이 아니라 설충회의 아들 설공근(薛公謹)이며 이는 <씨족원류>의 오류인 것이다.
이수는 경주이씨로 재사당(再思堂) 이원(李黿)의 아들인데 <사마방목>에 의하면 1510년(중종 5) 유학(幼學)으로서 식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정염(丁焰)이 지은 이원의 <행록(行錄)>에는
공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수는 군수이고, 차자는 강이고, 셋째는 하이고, 막내는 발로 좌통례에 증직되었다.
군수(이수)는 순창설씨 충란의 딸과 혼인하여 4남 3녀를 낳았는데, 장자 개윤은 현령이고, 차자는 제윤이며, 셋째 종윤은 생원이며, 막내는 핍윤이다.
장녀는 충의위 이헌과 혼인하였고, 둘째는 이조 참판 유세린과 혼인했으며, 막내는 사인 우숭선과 혼인하였다.
公有四男長洙郡守次曰江次曰河次曰渤贈左通禮郡守娶淳昌薛忠蘭女生四男三女男長愷胤縣令次曰悌胤次曰悰胤生員次曰愊胤長女適忠義衛李獻次適吏曹參判柳世麟次適士人禹崇善
이수의 장자 이개윤(李愷胤)은 1546년(명종 1년) 식년 진사에 합격하였는데 <사마방목>에 구경하(具慶下)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수배(李洙配)는 <설공찬전>이 세상에 나와 문제를 일으켜 수거되어 소각된 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갈 무렵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므로 <설공찬전>에 등장하는 설공찬보다 먼저 죽은 누님이 될 수 없다.
- 명종 1년(1546) 병오 식년시 사마방목 이개윤 부분 -
김종택은 상산김씨 이지만 <상산김씨족보>에서는 김종택의 아버지 김영년(金永年) 이하 세대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가정보>에 의하면 김종택의 아버지는 김영년이고, 할아버지는 김경손(金慶孫)이며, 증조부는 김복항(金復恒)으로 노상례(盧尙禮)의 딸과 혼인하였다.
- <가정보> 김덕윤의 처가 부분 -
김영년의 형제는 김정간(金貞幹), 김정미(金貞美)이며, 누이는 권금석(權金錫), 이민형(李敏亨), 박기(朴機), 유삼양(柳三陽)과 혼인하였다.
김종택의 누님은 의신군(義新君) 이징원(李澄源)의 후실(後室)이 되었는데, 이징원은 이위(李偉)의 셋째 아들이므로 김종택 입장에서 이징원은 처외삼촌이 되고 이징원과 후실(김종택의 누님)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날 것으로 보인다.
김종택의 아들은 김덕윤(金德潤)이다.
- <가정보> 김종택 부분 -
<국조방목>에 의하면 김종택의 증조부 김복항은 1399년(정종 1), 할아버지 김경손은 1451년(문종 1), 큰아버지 김정간은 1504년(연산 10), 작은아버지 김정미는 1496년(연산 2)에 각각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김종택은 물론 아버지 김영년이나 아들 김덕윤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상산김씨족보>를 살펴보면 김정간과 김정미 또한 후손이 전해오지 않는다.
김정간과 김정미는 후손이 없지만 문과에 급제하였기 때문에 상산김씨 가문에서 챙겨서 족보에 수록하였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김영년과 그 후손은 챙기지 않아서 누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종택의 아들 김덕윤은 창원황씨 황순경(黃舜卿)의 장녀와 혼인하여 <가정보>에 다시 한 번 수록되어 있다.
황순경의 차자(次子) 황림(黃琳)은 1517년(중종 12)에 태어나, 1543년(중종 3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52년(명종 7)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1578년(선조 11) 종계변무(宗系辨誣)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공을 세우고 돌아와 광국공신이 되었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으며, 1597년(선조 30) 죽었는데, 시호는 평장(平莊)이다.
<가정보>에 의하면 김덕윤배(金德潤配) 창원황씨는 황림의 여동생이므로 황림보다 늦게 태어났다.
김덕윤배가 1519년(중종 14) 쯤 태어났다고 가정할 때 김덕윤은 언제 쯤 태어났을까?
김덕윤배가 후실이 아니므로 김덕윤도 1519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점에 태어났을 것이다.
김종택 누님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정보>는 부인이 전실(前室)인지 후실(後室)인지까지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김종택배가 김덕윤을 낳다가 죽었다고 가정하더라도 1519년경까지는 살아 있었고, 가장 타당하게 추정해 보자면 김종택배는 <가정보>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설공찬의 누님이 아니라 여동생일 가능성이 크고 만약 그렇다면 설충란배가 5년 사이에 아이를 4명이나 낳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 또한 해결된다.
결과를 세계표로 정리해 보면
출생 | 1480 | 1483 경 | 1485 | 1485 이후 | 1485 이후 | 1485 이후 |
사망 | 1499 | 1546 이후 | 1504 | 1519 이후 | - | - |
따라서 족보에 수록된 설공찬의 누이 중에서 <설공찬전>에 등장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도사공배 한 사람 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