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鄭鑑錄)에 보면 「사람의 씨를 구하려면 양백지간이어야 한다.」(求入種於兩白之間)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곡식의 씨를 구하려면 삼풍지간이어야 한다.」(求穀種於三豊之間) 라는 말과 대귀를 이루어 정감록 전체의 골격을 이룬다고 해도 좋을 말로서 정감록이 제시하는 보신보명(保身保命)의 이상향의 대명사라 아니 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정감록이란 책은 난세에 보신보명 할 수 있는 장소를 알려줌으로써 민간(民間)에 크게 어필 되었다. 어느 때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느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그때는 어느 곳으로 가야 안전하다는 제시는 정감록의 골자이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겐 희망의 등불이 된 것이다. 그래서 시절이 어수선할 때마다 백성들은 보따리를 싸매고 정감록에 명시된 안전한 장소를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양백지간(兩白之間)이란 무엇인가? 양백(兩白)이란 두 개의 백(白)을 의미하는 말로써, 그 백(白)이란 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지명(地名)으로서의 백(白)과 상징적 의미로서의 백(白), 두가지 의미가 있다. 정감록에서는 지명으로서의 양백을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 즉 태백(太白)과 소백(小白)사이로 말하고 있다.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은 직선거리 100여리인데 그 사이 곧 태백(太白)과 소백(小白) 사이가 바로 양백지간(兩白之間)인 것이며 양백지간(兩白之間)이 보신보명(保身保命)하기 가장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정감록이란 책의 내용은 대개가 정감(鄭塔)이란 사람과 이심(李沁)이란 사람이 서로 주고 받는 대화형식으로 꾸며진 예언서(豫言書)이다. 이심이 어디가 좋으냐고 물으면 정감이 어디가 좋다고 하고 이심이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인가 하고 물으면 정감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 대답하고 이심이 맞장구를 친다. 정감록의 유사본(類似本)인 유산결(遊山訣)에 보면「정감이 말하길… 몸을 보전하는데는 태백과 소백이 으뜸이 되고 지리산은 그 다음이다.」(堪曰… 保身大小白爲上智異山次之) 라고 했으며 이어서 「이심이 말하길 그때가 되면 사람의 씨를 구하려면 양백사이라야 하고 곡식의 씨를 구하려면 삼풍 사이어야 한다.」(沁曰當其時求人種於兩白之間求穀種於三豊之間) 라고 했다. 그리고 「정감이 말하길 백성들의 피난처로 양백(太白, 小白)사이만한 곳이 없다.」(人民避亂之處莫如兩白之間) 라고 하니 「이심이 말하길 양백지간이야 말로 좋고 좋은 곳이다.」(沁曰兩白之間美則美矣) 라고 하였다. 이렇듯이 양백지간인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사이는 유사시(有事時)에 보신보명(保身保命) 하기 좋은 땅이라고 정감과 이심은 극구 찬양하고 있다. 뒤이어 여러 가지 난세의 정황을 예견하면서 「정감이 말하길 후세 사람이 이말을 믿고 자손들을 옮겨다 양백지간에 깊이 감추어 놓으면 심히 다행한 일일 것이다.」(堪曰後人深藏此說移置子孫於兩白之間幸甚) 라고 하니 「이심이 말하길 지각 있는 자가 있어 곡식을 저장하고 때를 기다리며 양백 사이에서 피난한 사람은 낱낱이 다 살아남으리라」(沁曰有知覺者儲穀待時兩白之避亂之人介介得生) 하면서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사이의 양백지간(兩白之間)을 특히 피난처로서 최고의 땅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큰 난리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하고 특히 바다의 섬 가운데에서 진인(眞人)이 나타나 난세(亂世)를 구할 것이라 하면서도 궁극적(窮極的)으로는 양백지간(兩白之間)이 가장 안전하게 편안히 살 수 있는 땅이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정감이 말하길, 십년 장마와 가뭄에 먹을 것은 적고 일거리는 많아 행상과 빌어먹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문벌 있는 집 여인이 술청에서 술을 따르리라, 길에서 만나는 백성들이 반드시 점점 적어 질 것이니 이때가 되면 진인이 바다 가운데 섬으로부터 오리라」(堪曰十年水旱食小事煩行商?乞不恥門閥?頭佳姬路逢相繼民必漸衰眞人自海島中來矣) 하였다. 「이심이 말하길 선생의 후손이 없습니다.」(沁曰無乃先生之後裔耶) 라고 하자 「정감이 잠자코 오래 있다가 말하길 그렇다」(堪默然良久曰然) 고 하니 「이심이 말하길 우리 두 집안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서로 이어짐이 어떠하며 그 좋고 나쁨이 어떠합니까? 또 가로되 원컨데 자세히 말해 주십시요.」(沁曰吾兩家治國相繼豈沌幸耶又曰願其詳) 라고 말하였다. 이에 「정감이 말하길 청귀만정지월(7월) 백양무제지시에 북쪽에서 변고가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 남쪽에서 난이 있으리라, 남원 동쪽이 일망타진되고 전주 이남에 죽은 시체가 산처럼 쌓이리라. 진주와 담양 구례 함양 칠곡 등지가 전쟁터가 되고 의령과 창령에 전사자의 피가 강물처럼 흐르리라. 산청과 밀양은 다소 안전하다. 그러나 오래 머무를 곳은 못된다. 양백지간이야말로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이라 말 할 수 있다.」(堪曰靑鬼滿庭之月白楊無第之時北變先起南亂次之南原以東一網打鎭全州以南積尸如山晋陽禮咸漆灌場寧昌血流漂 杵淸密小安然不可久留之地而兩白可謂安居之地) 라고 하였다. 남북이 전쟁에 휩싸여 시체가 산처럼 방이고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혼란한 난세에 가장 안전한 곳은 양백지간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감록의 생민장(生民章)에 보면 「양백지간은 별천지의 땅이라 칭한다.」(兩白之間稱別世之地) 라고 해서 양백의 사이를 특별한 세상 곧, 전쟁과 흉년이 없는 복 받은 땅, 이상향으로 묘사하고 있다. 정감별록초(鄭堪別錄抄)에 보면 「또 이르기를 그때(亂世:난세)가 되면 곡식 종자를 구하려면 삼풍(茂豊, 豊基, 延豊)사이로 가야하고 인간의 종자를 구하려면 양백(太白. 小白) 사이로 가야한다.」(又曰當其時求穀種於三豊之間求人種於兩白之間) 라고 했다. 그리고 정감이 말하길 「장차 난리가 나면 피난할 곳은 양백지간 만한 곳이 없다.」(鄭曰將移避亂之方莫如兩白之間) 라고 하자 이심은 「양백지간은 좋고 좋은 곳이다.」(沁曰兩白之間美則美矣) 라고 맞장구를 친다. 여기에서 양백(兩白)은 태백(太白)과 소백(小白)이라 하고 양백지간은 태백(太白)과 소백(小白)사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보는 시각과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양백(兩白)을 태백(太白)과 함백(咸白)으로 보고 양백지간은 태백산(太白山)과 함백산(咸白山) 사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니 태백산과 함백산 사이 곧 양백지간은 현계의 태백시(太白市)라는 주장이다. 정북창비결(鄭北窓秘訣)에 보면 「흰백자가 들어간 곳에 의지해 사는 자는 살아날 것이요 풍자가 들어간 곳 부근에 있어도 살아나리라」(依白者生近豊者活) 하였다. 여기에서 백(白)은 태백산(太白山)이나 함백산(咸白山), 소백산(小白山)등을 뜻하는 것이고 풍(豊)은 무풍(茂豊)이나 풍기(豊基), 연풍(延豊)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밖에도 백자(白字)가 들어간 지명(地名)이나 풍(豊)자가 들어간 지명(地名) 부근에 살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징비록(徵秘錄)에도 「말세가 되면 곡식종자는 삼풍(三豊) 사이에서 구하고, 사람의 씨는 양백사이에서 찾을 것이다.」(終末則求穀種於三豊求人種於兩白) 라고 했다. 요람역세(要覽歷歲)에는 즘 다르게 표현 했는데 「이심이 말하길 곡식 씨를 구하려면 삼풍으로 가야하고 사람의 형체를 찾으려면 양백으로 가야한다.」(沁曰求穀種於三豊尋人體於兩白) 라고 하면서 「또 말하길 한양의 이씨조선 말기에 세상 사람이 재앙을 피하고자하면 다른 산은 안되니 이에 최고 좋은 곳은 양백지간이다.」(漢陽李末世人之避災不出於他山乃最好則兩白之間也) 라고 했다. 그러자 이에 대해 「정감이 말하길 산중에 살면 또한 가련한 일이 없을 것이다. 조씨성을 가진 장군이 의병이라 칭하며 삼남에 웅거하는데 전주 이남은 시체가 산처럼 쌓이므로써 그 동쪽은 일망타진되고 만다. 진주와 담양이 처음 패하고 함양 칠곡이 전쟁터가 되며 의령 창령은 퍼바다가 되고 김릉에는 백골이 산처럼 쌓이리라 청도와 밀양이 조금 안전하나 오래 머물 곳이 못되고 양백지간이야 말로 가히 편하게 살만 한곳이다.」(堪曰居於山中則亦無可憐神將走肖稱以義兵據于三南全州以南積尸如山以東一網打鎭晉陽初敗咸漆戰場寧昌流血漂杵金陵白骨稼如山淸密小安不可久留兩白可爲寮居) 라고 했다.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에는 「경에 이르기를 구년 흉년에 곡식씨를 구하려면 삼풍(풍기, 무풍, 연풍)으로 가야하고 12년 전쟁에 사람의 씨를 찾으려면 양백사이로 가야한다.」(經曰九年之?求穀種於三豊十二年兵火求人種於兩白) 라고 했고, 동차결(東車訣)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고 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朱生家藏訣)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적혀있다. 감인록(鑑寅錄)에 이르기를 「태백산과 소백산 아래에는 전쟁과 기근이 침범하지 못하는 곳이다.」(太小白山下兵火饉飢不得債入) 라고 하며, 또 이르기를 「태백산 아래는 마땅히 지상낙토라 하겠다.」(太白之下當爲樂土) 라고 했다. 남격암십승지른(南格庵十勝地論)에 보면 「대저 전쟁을 피할 만한 땅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이 가장 좋으며 전쟁의 화가 영구히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다.」(大抵避兵之地大小白爲上兵火永不入矣) 라고 했다. 도선비결(道詵秘訣)에 보면 「…(전략) 평양과 함경도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매 두 나라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리라. 피는 양 골짜기 사이로 흐르고 죽은 시체가 산처럼 쌓이리라 그때 북쪽의 사람들은 태백산으로 피하면 가히 액을 면하리라… (중략) 뜻있는 사람은 해 뜨는 쪽으로 들어가면 가장 즐겁고 해 지는 쪽은 절대로 해롭도다… (중략) 뜻있는 사람은 벼슬을 버리고 깊은 골짜기의 이름 있는 산으로 들어가는데 태백산이 가장 으뜸으로 좋고 금강산이 그 다음이고 지리산은 그보다 아래이다.」(…平壤咸鏡兩道更爲胡地之時相爲戰國血流於兩峽間橫尸如丘山於嶺中矣當其時北方之人避於太白山則可謂避厄…有志君子入於扶桑之境最樂咸池之方最爲切害…有志君子頭黃巾入于巨谷之名山太白山爲上金剛次之頭流又次) 라고 했다. 위와 같은 문구 때문에 관서 지방 사람들이 태백산 쪽으로 피난을 많이 왔던 것이다. 해 뜨는 쪽(扶桑)그러니까 강원도로 가야 안전하고 해지는 쪽(咸池)인 서쪽으로 가면 위험하다는 것이고 몸을 보존하는데는 역시 태백산이 최고로 좋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정감록의 여러 유사본(類似本)들은 한결같이 양백지간(兩白之間)을 최고의 피난지(避亂地)로 꼽고 있으며 최상의 안전(安全)한 곳으로 배곯치 않고 잘 살 수 있는 지상낙토(地上樂土)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양백지간(兩白之間)은 난세(亂世)의 보신처(保身處)요 유사시(有事時)에 은둔처(隱遁處)로서 도생(關生)의 안전지대(安全地帶)인 것이다. 그러니 정감록류(鄭鑑錄類)의 유사(類似) 도참서(圖識書)가 민간에 약 60여종이나 유포되어 몇 백년 동안 전해져 왔으나, 그 모든 도참서에 양백지간이 들어가지 않으면 아니 되었고 또 정감록책에 양백지간(兩白之間)이 빠지면 그건 이미 정감록(鄭鑑錄)이 아닌 것이다. 양백지간 곧 '구인종어양백지간' (求人種於兩白之間)이란 문귀가 빠진 정감록은 이미 도참서(圖讖書)가 아니니 상상도 할 수 없고 '구인종어양백지간' (求人種於兩白之間)이 빠진 정감록은 불 꺼진 항구이며 심지 없는 등잔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 가야 하는 것은 양백(兩白)이 태백(太白)과 소백(小白)사이라고 하나 실지 태백(太白)과 소백(小白)은 거리가 너무 멀어 기(氣)가 산만하고 너무 허황하여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백이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사이라는 일반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해석에 따라 양백(兩白)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데 양백(兩白)은 태백산(太白山)과 함백산(咸白山)사이라고 하여 현재의 태백시(太白市)로 보는가 하면 태백산(太白山)과 백운산(白雲山)사이라고 하며 태백산(太白山)과 백병산(白屛山) 또는 태백산(太白山)과 육백산(六百山)사이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태백산(太白山)을 때고는 양백(兩白)이 형성되지 않는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란 말이 있다. 낙엽은 떨어져서 결국 뿌리로 돌아간다는 논리이다. 인간도 뿌리로 회귀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다. 태백지역(太白地域)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갈라지며 한강과 낙동강과 오십천의 발원지가 되는 국토 뿌리의 땅이다. 그러기에 땅의 뿌리인 태백(太白)과 함백(咸白)사이로 와야만 목숨을 보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에 정감록 계통의 그 많은 도참서들에 한결같이 그리도 많이 대소백(大小白)이니 양백(兩白)이니 하는 구절이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