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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4장 1-4절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내용을 살폈는데, 그 의미 안에는 연합 혹은 대표라는 측면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본래는 회개의 세례이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회개의 세례가 아니라 우리와 연합하기 위하여, 우리의 대표로서 세례를 받으셨던 겁니다. 특히 그렇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서 임하셨는데, 이사야 61장에 의하면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의미인 것이고, 바로 그 일을 통해서 본격적인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험 역시 단지 예수님 개인적인 시험이 아니라, 교회를 대표로한 시험이라는 것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험은 택자들의 머리로서 공적으로 받는 시험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가 받는 모든 시험은 예수님의 이 세 가지 시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우리 인생을 통해 많은 시험이 있겠지만 그 모든 시험은 이 세 가지 범주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 시험을 이기셨다면 동일한 원리가 교회의 원리로서 제시가 되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여기 보면 마귀로부터의 시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성령에게 이끌리어 받게 되는 시험으로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시험을 생각할 때 크게 두 가지로 이해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 편에서 오는 시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소위 테스트를 위한 시험이라고 말하고, 후자는 유혹을 위한 시험이라고 말합니다. 즉 전자는 야고보서의 표현으로 하자면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인내를 만들어 내고 또한 그것으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목적으로 한다면(약1:3-4), 후자의 경우는 자기 욕심에 끌려 죄와 맞물려서 있는 그런 시험으로 생각합니다(약1:14-15). 그래서 어떤 사람의 경우 구별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는 ‘test’[테스트]로, 다른 하나를 ‘temptation’[템테이션]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록된 성경의 언어로서는 그런 구별 자체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구별 자체를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언어 자체로서는 그런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별을 통해 분별하는 것은 어느 정도 유익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욥기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마귀의 어떤 시험도 하나님의 뜻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마귀가 자기 마음대로 시험을 하고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마귀의 그런 시험도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더불어 야고보서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시험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시험과 무관하다고 보시면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모든 시험은 결코 죄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시험을 하시되 그런 시험이 하나님 편에 어떤 죄나 악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지만, 주체가 누구시냐 하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주체라고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어떤 시험 혹은 유혹을 받게 될 때 그런 시험과 유혹이 단지 마귀로부터 온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거기에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분명 있다고 생각하셔야 될 것이고, 그런 시험 앞에서 우리의 자세는 죄악 된 방향이 아니라 인내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로 나아가도록(약1:4) 주의 은총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께서 이끌어 마귀의 시험을 받게 하셨기 때문에 비록 예수님께서 그런 시험에 넘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넘어질 수도 없지만, 혹 그의 몸 된 교회로서 넘어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마치 죄와 연결시켜 하나님 탓으로 돌린다면 그것도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시험과 유혹에서 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 핑계를 돌리도록 되어 있지 않으며, 심지어 마귀 탓으로도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라도 죄의 저자가 아니기 때문이요, 야고보서 말씀으로 하자면 모든 죄에 대하여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약1:14). 그러니까 시험에 있어 넘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 탓도 아니요, 혹 마귀의 시험이라 할지라도 마귀 탓으로도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시험과 관련해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시험이 우리를 위한 것으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과 18절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이유에 대해 대제사장으로서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성을 취하심으로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왜 그렇게 인성을 취하심으로 시험을 받으시고 또 고난을 당하셨는가? 바로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왜 예수님께서 시험을 당하셨는가?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시험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인성을 취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시험 자체가 없다면 참된 인성을 취하셨다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의하면 “...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즉 죄가 없는 것 외에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똑같은 인성으로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유혹도 똑같이 받을 수 있으십니다. 때문에 시험과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험을 기꺼이 받으신 것은, 그것도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는 바로 예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함이요, 교회를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대해서 이해할 때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내용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혹 마귀가 시험한다 할지라도 그런 시험이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때문에 적어도 성도에게 있어서 시험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방향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시험에서 넘어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연약함이요 부족함이요 죄인 것이지, 하나님 탓이나 유혹을 하는 자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아담이 하와 탓을 하고 또 하나님 탓을 했던 것,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 탓을 했던 모든 것은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죄가 더욱 드러나는 것으로 있지, 한번도 탓한 것이 정당화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분으로서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고, 또 그런 시험에서 이기셨기 때문에 동일한 시험을 받는 모든 택하신 백성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오늘 본문에서처럼 시험을 받으신 것이고, 또한 이기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시험이 있다 할지라도 주께서 도우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고, 또한 예수님께서 이기신 그 원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붙들어야 하는 것이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자세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로 오시면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오늘날도 보면 이런 말씀 때문인지 40일 금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절기로서 사순절을 지키는 교회들이 적지 않는 것이 사실인데, 감히 말씀드리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금식하신 것은 “너희도 나를 따라 이런 금식을 하라”, 혹은 “너희도 나의 이런 교훈을 따라 사순절과 같은 절기를 만들어 그 날만큼은 더욱 특별하게 십자가를 생각하며,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절제하는 그런 날로 삼아라” 이런 것을 교훈하시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단지 교회들이 사순절로 지키는 그 날에만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러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세상 일이 주를 섬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세상 일을 끌고 오는 것에 대하여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락도 금하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순절과 같은 절기가 따로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순절에 이어 부활절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미 주일 자체 안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모든 내용이 다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절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금식과 관련해서는 건전한 방향성과 함께 하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40일 금식을 한 것이 마치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나 된 것처럼 그것이 자랑꺼리로 내세웁니다. 그러나 금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매일 먹는 음식을 끊는다는 것이요, 음식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그것을 끊음으로 더 이상 힘을 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금식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금식은 내가 아닌 하나님의 일하심을 더욱 의지하기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40일 금식한 것이 마치 자기 자랑인 것처럼 내세운다면 어떻게 옳은 금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했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따라 하는 것은 결코 바른 신앙의 자세는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금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서 해야 할 것이고, 또 40일이라는 숫자에 억 매여 따라 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셨고, 이후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금식으로 인한 배고픔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는 시험이라는 데 있습니다. 3절을 보시면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특히 여기 보면 마귀가 예수님께 대하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렇게 말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임을 몰라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귀신들린 자의 입을 통해 하는 말이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분명히 말합니다(마8:29). 야보고서에도 보면 귀신조차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고 떤다고 말합니다(약2:19).
따라서 지금 마귀가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능력을 한 번 보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예수님은 인성을 입고 오셨고, 또 그런 인성의 몸으로서 금식을 하셨기 때문에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형편 가운데 있습니다. 육신을 위하여 먹어야지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을 행사하여 목숨을 유지해 보라는 것이 지금 마귀의 시험인 것입니다. 즉 “사람의 생명은 먹고 마시는데 있다. 인성을 취한 당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보아라.” 이것이 마귀의 시험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마귀의 시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우선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 대하여 무조건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이시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그렇게 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히 그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보면 실제로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행하기도 하셨습니다.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기도 하셨고, 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 사건의 경우는 네 복음서가 다 기록할 정도로 유명한 내용인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능력을 행하셨다면 능히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종종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들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의 뜻이고, 아들의 뜻 역시 아버지의 뜻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으로서 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성으로만 계신 것이 아니라,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즉 인성을 취하신 분으로서 인성의 의지와 신성의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따라 고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의지를 말하지, 한 의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451년 칼케돈 회의를 통해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혼합되지 않으며, 전이되지 않으며, 나눠지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했다면, 680년 콘스탄티노플 제3차 회의(제6차 공의회)를 통해서는 단일의지론을 정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두 의지에 대해 분명히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말씀이 이것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만약 신성의 의지만 가지고 있었다면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으로서 예수님의 의지는 아버지의 의지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성으로서의 의지도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드렸던 것이고,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도 인성의 의지를 따라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고자 했던 것이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때문에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이 시험 앞에 예수님은 분명 인성의 의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성의 의지를 따라 그 뜻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신성으로서는 능력도 분명 있었지만 인성의 연약함을 따라, 다시 말해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분명 인성으로서 40일을 굶주리셨고, 때무네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행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능력 면에서는 분명 하실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이 있기 전에는 마음대로 행하지 않은 것이 예수님의 삶의 원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하느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러므로 교회의 원리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의 원리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교회와 성도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를 그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가 아니라 ‘성경이 명하고 있는대로’ 그 원리를 삼아야 합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굶주렸기 때문에 그 굶주림을 해결하는 방식만이 하나님의 뜻,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대처방식은 떡이 없으면 떡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건강을 잃으면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방식이며, 물질이 없을 때는 물질이 생겨야지만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제가 터지만 그 문제에 대응해서 해결하는 것이 문제 해결 방식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왜 사람들이 능력을 구하느냐? 능력이 있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을 때보다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은 돈, 더 건강해 지는 것, 더 넉넉하게 그리고 좋은 것들을 먹고 마시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삶 속에서의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습니다. 말씀으로 산다, 말씀으로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떡을 먹어야지만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원리로 있습니다. 그래서 대처하는 방식이 떡이면 떡, 건강이면 건강, 물질이면 물질로만 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떡을 먹어야지, 말씀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신앙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까 어떤 사람들은 육신을 위해서는 떡을 먹어야 하고, 영혼을 위해서는 말씀도 먹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하신 것이 아니라,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았던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즉 그분의 뜻만이 자신의 원리로서 삶을 사셨고,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그렇게 주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서 그 시험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했기 때문에 “떡과 더불어 말씀으로 사는 존재다” 이것을 말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럼 이 두 말씀이 충돌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분명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하시지만, 그 사랑의 열매가 이웃을 향한 정당한 사랑이 펼쳐진다는 의미에서 이웃 사랑을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십계명을 해설할 때 이런 의식을 가지고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5계명만 하더라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분인고로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무시하거나 어떤 식으로 노엽게 해서도 안된다.”(Ⅰ. 17) 그러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는 이 말씀을 해석할 때 단지 부모에 대한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분인고로...” 이렇게 말하더란 겁니다. 하나님 사랑이 전제인 것입니다. 이웃 사랑의 정신을 하나님 사랑 안에서 함께 생각해야 할 것으로 이해를 했던 겁니다. 이웃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 사랑과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돌판에 대한 전체 요약을 이렇게 합니다. “둘째 돌판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계발하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행하며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Ⅰ. 24) 본래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자기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사랑이 넘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만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하나님 사랑에 근거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율법의 요약과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씀이 충돌이 되지 않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떡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이미 떡을 먹지 않으면 힘이 빠지게 되고, 너무 먹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보니 이런 말씀을 육신을 위해서는 떡, 영혼을 위해서는 말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거기가 속는 자리입니다. 오히려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양식임을 천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양식 안에 소위 주기도를 통해 해석이 되고 있는 일용할 양식까지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한 손에는 말씀, 한 손에는 신문이라는 말로 성경에도 밝고 세상에도 밝은 목사가 뭔가 센스가 있는 목사인 양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 자체가 멋지게 보여도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긴다는 말씀과 같습니다(마6:24 참고). 때문에 매우 주의하셔야 합니다.
결국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떡도 먹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참된 생명은 말씀을 떠나서는 없다는 것이 그 의도입니다. 사람의 생명이나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지, 결코 떡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효성의 주인은 누구냐?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도구를 사용하셔서 일하시지만, 그것은 도구일 뿐 유효성을 내 놓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창조 역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소위 풀과 채소,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필수요건 중 하나로서 태양이 있어야 합니다. 태양의 빛을 통해 광합성 작용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풀과 채소, 나무를 언제 만드셨는가? 셋째 날에 만드셨습니다. 반면 필수요건 중 하나인 태양은 언제 만드셨는가? 넷째 날입니다. 얼핏 생각해 보면 순서상 뭔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태양이 필수요건이기 때문에 태양이 먼저 만들어지고, 이후 풀과 채소, 나무가 만들어져야 되는 것처럼 생각되기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그런 순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개혁자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 유효성의 주체는 분명 하나님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는 이 부분과 관련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정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식물들이 자라는 것과 하늘의 물체들의 작용을 함께 묶어서 생각한다. 심지어 우리는 그것들을 숭배하고, 그 가운데서 주님을 잊는다. 주님은 여기에서 모든 것들이 그 분을 의지하고 있으며, 하늘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주님이 그것들을 만드셨지, 하늘의 물체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떡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힘이 없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이 마릅니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육신의 생명이 떡에 의해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사실은 떡을 먹어도 그리고 물을 마셔도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데 있습니다. 떡과 물이 실질적인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근원이요, 그분의 말씀이 참된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빵이지만 우리가 누리는 생명을 그 빵 자체에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빵을 통해 부어 넣어 주시며 우리를 살지게 하는 숨은 은혜 때문임을 알아야겠다.” 그리고 덧붙여 하는 말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지금 우리의 음식으로는 빵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기로 작정하시면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는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하실 것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음식을 먹이지 않고도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만 그렇게 일하지 않으실 뿐입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이 거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고, 또 그렇게 하고자 하시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음식을 먹지 않고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유효성의 주인이 누구냐?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이 사실을 좀 더 피부에 와 닿게 알렸던 것이 구약의 역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는데, 그 부분을 확인하고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2절을 보시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들이 광야 길을 걷게 되었는가? 민수기 14장에 의하면 분명 그들의 반역죄 때문입니다(민14:33).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40일 동안 정탐을 보냈지만, 정탐 이후 오히려 못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40년을 광야 생활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8장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식으로서 너를 낮추시고자 하는 목적으로 있다는 것도 알리십니다. 본래는 원망, 불평, 불만이 끊임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말은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항상 교만한 자세로서 그들이 서 있었던 겁니다. 성경은 어떤 표현까지 하느냐? ‘목은 곧은 백성’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런 저들을 낮추시고자 광야 40년을 허락하셨던 겁니다.
특히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모르시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이어지는 3절의 말씀을 새기도록 하기 위해서 광야 길을 허락하셨다고 보는 것이 더 정당할 것인데, 그것이 뭐냐?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3절을 보시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광야 생활을 하면서 뭘 배우도록 하시느냐 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만나를 먹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이 만나와 관련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어디 있느냐? 출애굽기 16장입니다. 1절부터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16:1-4)
여기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오자마자 불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는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될 것이란 말을 듣기 전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광야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 시작부터 불평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평이 뭐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불평에 대해 매일매일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시 4절을 보시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러분, 지금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왜 갑자기 율법이 나오고, 시험이 나오느냐? 간단히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란 것입니다. 단순히 먹는 문제만 가지고 불평한 것이 아니라 이 일이 하나님의 법과 관련된 일,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관련된 일이라고 판단하신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이기 때문에 틀린 판단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매일 먹을 것을 줄 것이다. 너희가 과연 나의 법을 지키며, 나를 제대로 섬기는지 확인해 보자.”고 하시면서 주시는 것이 만나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먹을 것을 줬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잘 섬겼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나와 관련된 출애굽기 16장만 보더라도 분명 6일 동안은 매일의 양식을 구해야 했습니다. 욕심 때문에 많이 거두게 되면 그 다음날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안식일을 위해서는 그 전날 안식일까지 먹을 것을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매일의 양식보다 갑절을 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다음날에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들이 안식일에 나갔을 때 구하지 못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 2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어떤 면에서 이 말씀이 광야 40년 내내 저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며, 심지어 만나에 대하여 원망했을 때는 고기도 주었습니다. 성경은 광야 40년 동안 의복이 해어지지도 않았고, 또 네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다고 말씀합니다(신8:4). 누가 너희 육신을 위하여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느냐? 하나님이신 것을 광야 40년 동안 분명히 보여주셨던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내내 원망, 불평이었습니다. 출애굽기 말씀으로 하자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이 다 죽어나갔습니다. 바로 그들의 죄로 인해 죽어 나갔던 겁니다. 먹을 것만 주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 스스로는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먹을 것만으로는 그들 스스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 외에는 할 줄 모르는 것이 인간임을 광야 역사를 통해 분명히 보여주셨던 겁니다. 달리 말하면 광야 40년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만이 생명의 길임을 알리신 것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말씀인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만이 생명의 길이다. 즉 말씀에 의해 살고,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만이 참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신명기 8장으로 오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7절과 18절입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물질에 대해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수고, 나의 노력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그들이 수고하고 노력한 것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그저 주웠을 뿐이기 때문에 오늘날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거저 주신 것, 우리는 내 노력에 의한 것!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떡에 관한 것도 그 유효성이 하나님께 있다는 겁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만이 유효성의 주인이고,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될 백성들에게는 그 유효성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은 바뀌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만이 유효성의 주인인 것입니다. 광야는 기적이고, 가나안은 수고와 노력이기 때문에 유효성의 주체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떡을 먹어야 삽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왜 그러한가?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친히 일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떡이 아닌 방식으로 하고자 하신다면 떡 자체는 아무런 유효성도 없는 겁니다.
결국 유효성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시험의 내용으로 있습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참 생명의 근거인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들고자 합니다. 얼마나 교묘한지 인성으로서 주리신 예수님, 그리고 신성으로서 능히 하실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이용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도록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고프지 않은 것도 아니요, 또한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무엇을 앞세우셨느냐? 말씀을 앞세우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 있는 내용으로 하자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던 것입니다(마6:33). 배고프기 때문에 먹을 것을 먼저 구한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 것이 시험의 답변으로 있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원리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 자체만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초점을 두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방식일 뿐입니다. 성도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는가? 말씀이 명하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말씀이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그 말씀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으로 삶의 모습을 갖추어 가야 합니다.
떡이 없어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마6:33). 혹 하나님께서 만나로서만 주실 때가 있습니다. 고기도 주시고,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도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원망하는 것은 말씀의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역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으로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넘치는 것을 줬다는 것은 나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게 그 가르침으로 있습니다. 아니 넉넉하지 못할지라도 더 넉넉하지 못한 자들을 돌아보도록 하시는 것이 말씀을 따라 열매 맺어야 할 정신으로 있습니다(빌4:14-15 참고).
여러분은 어떤 삶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떡입니까? 말씀입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참 생명은 떡에 있지 않습니다. 떡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 말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말씀 없이는 그러한 사실도 사실로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말씀 외에는 참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말씀 외에는 생명이 생명답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고, 또한 그 생명을 생명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신 겁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