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리미니의 금인칙서
튜턴 기사단이 마조프세 공의 제안을 받았을 당시, 그들은 이 지역의 정세에 바로 뛰어들지 않았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 했습니다. 기사단은 이미 헝가리에서 자신들의 돈과 인력을 소모하고도 섣부른 자치권 획득 시도로 인해 쫓겨난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사단장 헤르만 폰 살차 경이 마조프세 공의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다른 더 중요한 일에 매달려 있었고 자신의 기사단은 이 지역의 정세에 바로 개입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조프세 공의 제안을 빌미로 장차 자신들이 개입하게 될 헤우민스키(=쿨메를란트) 일대와 프러시아에 대하여, 자신들의 후원자이자 세속권 최고의 권력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를 빌려 확실히 인정 받고 넘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헤르만 폰 살차는 마조프세의 공작이 기사단에게 한 약속을 뒤집지 않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또한, 기사단의 은밀한 소망이었던 자치권에 대한 부분도 인정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기사단장은 황제로부터 중요한 정치적 지원을 얻을 수 있었으니, 바로 리미니의 금인칙서(Golden Bull of Rimini)가 그것입니다. 금인칙서란 흔히 유럽이나 비잔틴 제국에서 중요한 법령을 공표할 때, 법령의 인증에 쓰이던 인장을 금으로 만든 것에서 유래합니다. 원래 비잔틴 제국에서 유래하였으나 유럽으로 퍼진 이 관습은, 공표되는 법령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튜턴 기사단은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부터 뒷받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금인칙서 - 본문의 시점보다 더 후대의 것이다.>
1226년 3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가 리미니에서 선포한 금인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으니 조금 길긴 하지만 적어 보겠습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성모마리아가 소유하신 독일인들의 교단의 단장인 헤르만과 그의 형제들이, 마소비아(=마조프세)와 쿠야비아의 공작 콘라드가 교단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쿨름(=헤움노)와 다른 모든 것을 받아들일 권위가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어떤 부역이나 세금을 지불함이 없이 프러시아를 침공하고 황제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인정한다.
개요 - 황제 프리드리히가 말하길, 주께서 위대하신 당신의 이름으로 그(=프리드리히)의 제국과 정부를 설립했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그 신앙을 널리 펼쳤으니, 그리하여 복음을 전파하는데 주의를 돌리는 것은 그(=프리드리히)의 임무이다. 그(=주)가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는 동시에 제압하고자 하므로, 그는 면죄권을 수여하고 있어서, 그 것을 통하여 카톨릭 사람들이 야만족을 정복하고, 신성한 예배의식을 교정하며, 그들 자신의 재물과 사람들을 이 대의를 위하여 내어놓을 노고를 행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그(=프리드리히)는 제국의 현재와 미래의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를 희망하니, 형제 헤르만 폰 살차가 출석하여 설명하길, 콘라드 공작이 쿨름의 땅을 그들에게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 곳은 프러시아의 전방 지역과 국경 지역 안에 있는데, 그들은 진실된 신의 영광과 명예를 위하여 그 일에 착수해야만 하며 프러시아의 땅에 들어가 그것을 획득할 기회를 강행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프리드리히의 승인을 요청하기 위하여 이 증여물의 수령을 미루어 왔다.
열정적으로 주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교단을 위해 그 땅을 획득하기를 열망하는 기사단장의 즉각적이고 두드러진 헌신 때문에,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기사단장의 사려 깊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 비록 많은 이들이 이미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헤르만 폰 살차)는 직무와 연설에 있어서 강인한 사람이며 그는 주를 위한 정복사업을 강력하게 시작하고 완결 지을 것이기 때문에, - 프리드리히는 그 침공에 대해서 그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그는 또한 산들과 평야들과 강들과 숲들과 바다에 대해서 그의 제국의 권리를 형제들에게 부여하니, 그것들은 사역과 징수에 구속됨이 없이 유지될 것이며, 누구에게도 항변하지 않고도 획득될 것이다. 그들이 그 땅을 정복했을 때, 그들은 통행세를 거둘 수 있고, 시장을 세울 수 있고, 돈을 주조할 수 있고, 토지사용료와 다른 권리들과 기타 등등을 부과할 수 있으며, 재판관과 주임신부의 직위를 수여할 수 있으니 백성들은 개종을 했건 하지 않았건 그들의 신민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형제기사들은 훌륭한 처우와 관습을 내려줄 것이며, 순회재판을 주관할 것이며, 신앙인에게 힘을 실어주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법령을 만들 것이다.”
이 것은 마조프세 공이 헤우민스키 지방을 기사단에 양도했음을 황제라는 증인을 내세워 기정사실로 만드는 동시에, 양도 받은 지방과 앞으로 정복하게 될 지방에 대한 자치권을 제국의 이름아래 인정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조프세 공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내용은 좋게 받아들여 질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내심 폴란드의 왕위까지 생각했던 나름대로 야심만만했던 인물이었고, 더군다나 지난 20년간 그는 크리스티안 주교와 함께 프러시아 십자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었습니다. 따라서 금인칙서에서 명시된 것처럼, 튜턴 기사단이 장차 정복하게 될 지역에서 제국의 이름 아래 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상당히 언짢을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기사단에 “양도”했다는 헤우민스키 지방으로, 그 곳은 프루스 족의 침입으로 만신창이가 되어있긴 했지만 이미 200년 전부터 폴란드의 영토였던 곳으로, 사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이 곳을 은근슬쩍 제국의 권위 아래 집어넣을 권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뒤에 마조프세 공의 행동을 고려한다면, 이 시점에서 그는 이 금인칙서의 내용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내용은 다소 완화되거나 왜곡된 형태로 전달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튜턴 기사단이 이 지역에 발을 들여놓고 몇 년 후 폴란드 측과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아직 힘이 모자랐던 기사단은 교황 빽을 써서 그 위기를 슬기롭게(?) 해결하는 장면이 나오게 될 텐데, 아무튼 추후에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서두에서도 이미 언급했다시피, 당시 튜턴 기사단은 다른 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발트 지역에 바로 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역사상 제 6차 십자군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 원정의 총 지휘관은 튜턴 기사단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이자 금인칙서를 통해 기사단의 권리를 보장해 준 그 인물,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 - 그는 매 사냥을 즐겨 했다고 한다.>
2. 제 6차 십자군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한 제 5차 십자군의 실패 후, 세속권의 최고의 권력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참여했었어야 했다는 여론이 서방세계에서 높아졌으며 교황 또한 황제에게 십자군 참여를 독촉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당시 종교색으로 물든 서방 세계에서는 돌연변이나 다름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지중해 한복판, 그리스, 라틴, 이슬람, 노르만 족이 섞여 있는 시칠리아 섬에서 태어난 그는 ‘세계의 경이(스투포르 문디stupor mundi)’라 불리며 교황이 직접 후견인을 맡았을 정도로 기대가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을, 어머니로부터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국을 물려받아 속세의 최고 권력자가 될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서로 다양한 문명의 양식이 혼합된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의 성당>
그러나 이 미래의 황제는 이슬람 인들과 싸우는 십자군대의 선봉장으로 자라나는 대신 오히려 그들에게 호의적인 인물로 자라났으니, 그의 궁전인들과 백성 중에는 여전히 이슬람 교를 믿는 아랍인들이 많았고 시칠리아 섬에서는 이슬람 인들의 무에진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울려 퍼졌습니다.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그 어떠한 것도 간단하게 믿으려 들지 않으려 했던 이 지적인 인물은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비록 그의 인격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다른 이단들과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가하고, 그의 권력에 도전한 한 아들을 지하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잔혹한 면이 보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일면 근대인과 비슷한 사고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이 중세의 황제는 그러나, 교황과의 관계가 최악이었습니다. 교권이 세속권력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교황에게 이 영민한 황제는 상당히 처치 곤란한 상대였고, 결국 프리드리히 2세의 치세는 거의 대부분이 교황과의 투쟁으로 얼룩지게 됩니다.
그는 1211년 황제로 즉위하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교황에게 약속했으나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미루고 있다가, 1225년이 되어서야 예루살렘 왕국의 상속녀인 욜랑드(Yolande)와 결혼하면서 중동 정세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상 최고의 세속권력자인 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님은 준비기간이라는 명목으로 2년을 더 시칠리아에 눌러 앉아 있었습니다. 약간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는 “교권과 세속권 중 무엇이 더 우위인가” 아니면 “이교도의 머리통을 박살내는 방법” 등 서구의 군주들에게 익숙했을 법한 화제거리를 숙고하는 대신, 카이로의 아이유부 왕조 술탄인 알 카밀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이라던가, “영혼의 불멸성” 이라던지, 아니면 “우주의 기원” 등등, 유익한 주제에 대하여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으니, 장차 그가 쳐들어가서 싸워야 할 상대와 오히려 친분을 돈독히 다지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황제는 십자군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이유로 교황에 의해 파문을 당하여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황제 스스로는 떳떳하다고 생각하면서 교황의 파문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 만의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게 되지만, 그의 권위는 땅바닥으로 추락했고 거의 대부분의 제후들이 그의 주위를 떠나 교황의 뜻을 거역한 십자군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몇몇 충신들과, 튜턴 기사단은 끝까지 황제의 곁에 남았습니다.
<튜턴기사단의 깃발 중 하나>
역사가 유구한 성전 기사단(Templars)이나 구호 기사단(Hospitallars)에 비하면 창설시기가 100년이나 뒤쳐지는 이 독일인들의 신흥 기사단은 자신들의 최고 군주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후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기사단장인 헤르만 폰 살차가 일부 형제 기사들로부터 성지의 기사단 본부보다 유럽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낸다는 반발을 무릅쓰면서도 서방세계의 여러 공후들, 특히 황제와 긴밀한 관계를 쌓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경쟁 관계에 있는 두 기사단에 비하면 아직도 열세인 튜턴 기사단은 기사단장의 정치력에 힘입어서 군주들로부터 많은 특혜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제 6차 십자군은 튜턴 기사단이 세속세계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호의를 결정적으로 굳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더군다나 황제가 교황과 관계가 멀어지고 결국 파문까지 당하여 다른 대부분의 이들이 등을 돌린 이 시점에서, 튜턴 기사단의 충성과 헌신은 더더욱 빛이 나게 될 터였습니다. 그러므로 헤르만 폰 살차는 황제에게, 튜턴 기사단의 형제들은 완전한 지원과 협력을 아낌없이 제공할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1228년, 교황의 파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황제는 성지를 향해 출항했습니다. 비록 이집트의 술탄 알 카밀로부터 예루살렘을 무혈로 넘겨받을 밀약이 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프리드리히 2세는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전체 원정군에서 튜턴 기사단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 못할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성지의 기독교도들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했고 오히려 위협을 당하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기사단장의 약속대로, 황제는 튜턴 기사단으로부터 헌신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 6차 십자군은 1229년,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기독교 세계로 양도 받는 성과를 거두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 곳의 토착 관리가 도시의 이슬람 교도들에게 무에진을 울리지 못하게 하자, 황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내 나라를 방문했을 때에 성당의 종을 울리지 못할 것 아니오?”
이런 종교적인 관용과 함께 황제는 그의 충성스런 신하들에게 특혜를 주기 시작했으니, 튜턴 기사단은 전보다 한층 더 신뢰를 얻게 되었고 아크레 항구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까지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예루살렘의 시가지 - 이 도시는 예나 지금이나 종교적인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파문 당한 황제를 모시고 있던 튜턴 기사단은 처음부터 중동의 기독교인 성직자들과 귀족들, 그리고 다른 종교 기사단들과의 분쟁을 극력 피하고자 노력했고, 이러한 정치적인 노력에 힘입어 황제가 팔레스타인을 떠난 뒤에도 그들은 곧이어 벌어진 지역 기독교도들의 보복공격에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기사단장 헤르만 폰 살차는, 중동의 아크레에서 이탈리아로 귀환하는 배에 황제와 함께 동승하여 끝까지 그를 수행하게 됩니다. 그는 귀국 후 황제에게 내려진 파문을 철회하고자 교황과 교섭했고, 그의 노력에 힘입어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에 내려진 파문을 거두어 들입니다. 그리고 독일인의 교단 기사들의 지도자이자 하급귀족에서 자수 성가한 이 뛰어난 인물은, 황제의 적인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신임까지 얻게 되는 놀라운 정치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사단장 본인은 제 6차 십자군에 종군하며 기독교권의 한심스러운 분열상을 목격해야 했고, 성지에 대한 희망이 희미해져 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사단장 본인은 제 5차 십자군에도 참여했었고, 다미에타에서 이슬람 군대에 패하여 일시적으로 포로로 잡혔던 경험까지 있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튜턴의 형제 기사들은 열광적으로 성지에 매달려 있었지만, 이제 기사단장의 시선은 더 이상 중동지방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성왕 루이의 제 9차 십자군이 다미에타를 공격하는 장면. - 이미 몇십년 전 튜턴 기사단장은 이곳에서 쓴 맛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4년 전 들어두었던 보험증서를 꺼내 들었습니다. “프러시아”라고 불리는 그 보험증서는 마조프세 공의 추천과 프리드리히 2세의 보증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앞으로의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했지만, 기사단장은 중동지역의 정세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 발트 지방의 어두운 삼림지대야 말로 기사단의 미래가 놓여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성지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기사단 내부의 여론에도 신경을 써야 했으므로, 기사단장이면서도 그가 이 곳에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1230년, 헤르만 폰 살차는 마조프세 공이 4년전에 한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콘라드 폰 란츠베르크(Conrad von Landsberg)를 특사로 삼아 7명의 튜턴 기사와 70~100여명의 서전트(Sergeant) 병력을 쿨메를란트(=헤우민스키) 지역에 파견합니다.
(이 첫 파견은 헤우민스키를 “완전히” 기사단에 양도할 것임을 폴란드 측에서 서명했다고 하는 이른바 크루쉬비츠의 조약(Treaty of Kruschwitz)이 체결 된 후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이 조약에 대해서는 다음 번에 기회가 되면 언급할 것 입니다.)
이 소규모 분견대는 헤우민스키의 남서쪽, 비스툴라 강이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굽이쳐 흘러가는 이 지역의 서쪽 강변에 포겔장(Vogelsang)이라는 작은 성채를 건설하였습니다. 아직 강 동쪽은 프루스 족의 일파인 포메사니아(Pomesanians) 인들이 장악하여 위험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 첫 분견대는 성채를 건설하는 한편으로 제한된 규모로 프루스 인들에 대한 습격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포겔장의 성채가 완성되자 튜턴 기사인 헤르만 폰 발크(Herman von Balk)가 28명의 기사와 200~300명 정도의 서전트를 이끌고 이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훗날 발트 지역에서의 튜턴 기사의 수는 1000여명까지 늘어나게 될 것이지만, 이 시점에서 아직 기사단의 주력은 중동 지역의 방어와 성지 탈환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나중에 튜턴 기사단 최초의 란트마이스터(Landmeister, 지역사령관)이자 후대에 "발트의 피사로"라고도 알려지게 될 헤르만 폰 발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제한적인 병력자원에도 불구하고 이교도에 대한 공세를 결심했습니다. 항간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조프세 공은 튜턴 기사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튜턴 기사단과 폴란드 기사들이 섞인 이 십자군의 목표는 우선적으로 이교도들에게 넘어간 비스툴라강 동쪽 지대의 탈환이 될 것입니다.
<심심할때 만들어본 지도 - 시간이 지나면 튜턴 기사단의 심시티...가 아닌 심캐슬 때문에 지도가 좀 난잡해 질 것이다.>
첫댓글 역쉬 재미있어요 ^0^
흥미 진진 ^-^)d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헌데 프리드리히 2세가 내건 십자군의 슬로건은 무엇인가요?
십자군의 목표는 처음에는 이집트였지만 황제가 예루살렘 왕국의 상속녀와 결혼하면서 목표가 예루살렘을 비롯한 그리스도의 성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6차 십자군이 획득한 것이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이었죠.
아..공문서나 상장 같은 것에 보이던 금박입힌 도장의 유래가 이것였군요. ^^;; 중세 군주중 깨어있던 자 중 하나였던 프리드리히 2세도 등장. 좋쿠나~ 신성로마제국이란 호칭은 스페인,오스트리아, 독일, 시칠리아가 사용했나요?
신성로마제국은 독일(+북이탈리아)을 일컫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페인이나 시칠리아의 경우는 혼인을 통한 혈연관계로 황제가 그 지역의 왕위를 겸하는 경우였죠. 예를 들면 황제 하인리히 6세의 아내는 시칠리아의 상속녀였고, 그들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는 처음엔 시칠리아의 왕(3살때 즉위-_-)이었다가 이런 저런 사건을 겪은 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한 것입니다.
ㅇㅇ감사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은 그럼 독일과 북이탈리아로만 생각하는게 좋군요. 프리드리히 2세의 경우는 부계를 따라서 승계한 것이군요.
프리드리히 2세는 근데 참 독특하네요. 당시 유럽으로서는 절대 용납안되는 이슬람교도들과 잘 교류 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