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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여호수아 3:1-3:6
제 목 :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01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02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0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0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0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0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1. 성경 이야기
오늘은 드라마 작가에 대한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드라마 작가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아마 김수현 작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 작가가 드라마 각본을 썼다 하면 언제나 대박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 집 남자들’같은 드라마는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고, 엄청난 화제가 되었었던 작품들입니다. 드라마 자체뿐만 아니라 그 드라마에 출연하는 연기자는 물론, 그 드라마에서 연기자가 흥얼거리는 노래마저도 언제나 대박을 쳤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워낙에 대형 작가라 그 위세가 드라마 연출자 보다 훨씬 더 대단했고, 연기자들 같은 경우에는 이 작가가 쓴 작품에 출연을 하면 단번에 스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이 작가에게 줄을 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이야기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70세를 훌쩍 넘긴 고령의 연세에도 아직까지 왕성하게 드라마 집필 활동을 하고는 계시지만 세월 앞에서는 장사 없다고, 예전만한 인기나 화제몰이는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요즘에 드라마 극본만 썼다 하면 화제가 되고 있는 작가가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임성한 이라는 작가입니다. 그런데 그 작가가 화제가 되는 이유는 앞서 말씀 드린 김수현 작가와는 차원이 많이 다릅니다. 그 작가가 화제가 되는 이유는 언제나 그녀의 작품이 지나칠 정도로 파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소재도 상상 그 이상일뿐더러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늘 특이하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또 이야기의 비약도 아주 심하고, 그 구성방식도 다소 비논리적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가의 작품은 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나 상식을 파괴하는 데에서 오는 호기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작가가 쓴 드라마 제목만 들어도 아마 감이 충분히 잡히실 것입니다. ‘인어 아가씨’, ‘보석 비빔밥’, ‘신기생뎐’, ‘오로라 공주’등이 대표적인 작품이고, 요즘에는 ‘압구정 백야’라는 드라마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그 작가가 왜 화제가 되는지 감히 잡히십니까? 막장드라마 하면 임성한 이라는 작가가 떠오를 정도로 그녀는 이미 막장드라마의 대가로 방송가에서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또 한 사람의 드라마 작가가 있습니다. 이 작가는 앞서 말씀 드린 두 작가에 비하면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게 화제몰이를 하는 작가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탄탄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고, 상당히 두터운 팬 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실만한 꽤 유명한 드라마도 많이 썼습니다. 그 작가는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신사의 품격’, ‘상속자들’ 같은 드라마를 쓴 김은숙이라는 작가입니다.
이 작가가 쓴 드라마는 작품 소재가 매우 확실하면서도 간명합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서 작품을 이해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또 구성이 치밀하고, 인과관계가 확실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 드라마를 볼 때도 나름 재미가 있고, 드라마가 끝난 다음에도 즐거웠던 기억이 오랜 동안 유지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아내는 이 작가가 쓴 작품들은 물론이고, 이 작가의 작품에 등장했던 남자 주인공들, 예를 들어 박신양, 현빈, 이민호 같은 연기자들의 열렬한 팬이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저보다 이 배우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또 이 작가가 쓴 드라마 속에는 아주 유명한 대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조금 손발이 오글거리는 대사인데 여성분들은 아주 열광하는 대사입니다. 몇 개 예를 들어보면 ‘이 안에 너 있다.’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왜 말을 못해!’ ‘길라임 씨는 언제부터 이렇게 예뻤나?’ ‘혹시 내가 너 좋아하냐?’ 이런 유형의 대사들입니다. 아주 달콤하고, 아주 매력적인 대사들입니다. 조금만 외모가 받쳐준다면 안 넘어갈 여자가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왜 드라마 작가와 그녀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시작했느냐? 그 이유는 성경 속 수많은 이야기가 그녀들의 작품과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읽으면 성경이 임성한 작가의 막장드라마보다 훨씬 더 막장드라마 같고, 어떻게 읽으면 성경이 김은숙 작가의 시나리오보다 더 치밀하고, 더 품위 있고, 더 유쾌하고, 더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도피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사래에게 혹시 애굽 사람이 물으면 사래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누이동생이라고 대답할 것을 요구합니다. 아리따운 자신의 아내를 지켜주지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아내를 팔아서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려고 사래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는 것입니다. 이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전형적인 막장입니다.
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그의 아내 사라는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냅니다. 그런데 하갈이 막상 임신을 하자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하갈을 구박하다가 급기야는 쫓아내 버립니다. 그런 사래를 아브라함은 말리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렇게 행하라고 말을 합니다. 어떻게 자신의 아이를 갖은 여인을 그 험한 광야로 내몰 수 있는지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막장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나이 100세에 얻은 아주 귀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그 아들, 이삭을 사흘 길이나 떨어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칼로 내리쳐 죽이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 귀한 아들을 순순히 내놓을 수 있는지 저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막장입니다. 전형적인 막장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칭보다는 막장의 조상이라는 별칭이 훨씬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가로챈 야곱, 야곱의 딸,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으로부터 몹쓸 짓을 당하자 그 부족 원 전체를 교묘한 방법으로 함정에 빠뜨려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은 야곱의 아들들, 비록 모르고 한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과부가 된 며느리 다말을 취한 유다, 아무리 미운 털이 박혔다고 하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동생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그의 형제들, 모두가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들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임성한 작가가 그녀의 드라마 소재를 모두 성경에서 가져온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 정도로 성경 속 이야기는 막장의 연속입니다.
여기에서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내내 사람들의 이야기는 막장 그 자체입니다. 엽기 그 자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부터 가장 존경 받는다는 왕, 다윗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의 집안은 콩가루 집안 그 자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다윗의 딸, 다말을 범합니다. 즉 오라비가 여동생을 범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아들 압살롬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아버지 다윗에 대하여 반역을 일으킵니다. 다윗 스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하의 아내를 탐하여 부하를 전쟁터로 내보내서 교묘한 방식으로 결국은 죽게 만들고 끝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다윗 역시 막장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삼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다윗의 대를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솔로몬은 어떻습니까? [열왕기상 11:3]에 보면,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백제의 마지막 왕, 삼천 궁녀를 거느렸다는 의자왕이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그 왕이 누구냐? 바로 잠언을 쓰고, 전도서를 쓰고, 아가를 쓴 솔로몬입니다. 소위 지혜의 상징이라는 솔로몬도 막장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시청률 최소한 30%는 보장하고도 남을 인물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본받자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고, 다윗의 순종을 본받고, 솔로몬의 지혜와 명철을 본받자고 이야기 합니다. 이게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과연 그들로부터 배울만한 믿음과 순종, 그들로부터 본받을만한 지혜와 명철이 그들에게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 하실 수도 있습니다. ‘너무 그 사람들의 나쁜 면만 부각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들의 나쁜 면만 보아서 그렇지, 그 사람들에게서도 긍정적인 모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람들에게서도 믿음과 순종의 모습, 지혜와 명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이야기 하실 수 있습니다. 예. 맞습니다. 옳은 지적이십니다. 물론 그들에게서도 긍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실수라는 것입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그것이 아브라함 자신으로부터 인한 것인가요? 다윗의 순종, 그것이 다윗 자신으로부터 인한 것인가요? 솔로몬의 지혜와 명철, 그것이 솔로몬 자신으로부터 인한 것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순종, 그들의 지혜와 명철은 그들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은 절대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셨다면 다윗은 절대로 순종의 사람이 될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으셨다면 솔로몬은 절대로 지혜와 명철의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들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막장드라마의 주인공 같았던 그들을 변화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킨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었습니다. 성경이 임성한 작가의 막장드라마보다 훨씬 더 막장드라마일 수도 있고, 성경이 김은숙 작가의 시나리오보다 더 치밀하고, 더 품위 있고, 더 유쾌하고, 더 아름다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성경을 읽으면 막장 드라마의 이야기 거리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초점을 맞추고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치밀하게, 얼마나 섬세하게 준비하시고 그 일을 행하시는지 그 재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싯딤에서 떠나
오늘 본문 속에서도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주 치밀하게 준비하시고, 아주 섬세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여호수아 3:1-3]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싯딤에서 아침 일찍이 떠나 요단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구절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굳이 성경이 떠난 장소와 떠난 시간을 기록한 것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싯딤이라는 장소입니다. 싯딤은 어떤 곳입니까? 싯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치욕적인 장소입니다. [민수기 25:1-3]에 보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 싯딤은 이방신을 섬기는 모압 여자들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 마시며 흥청망청 부패와 타락을 일삼았던 지역입니다. 하나님께서 40년 광야생활을 인도하시며 그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 수고하시고 애쓰셨지만 이스라엘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방신들에게 절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시라도 빨리 그 싯딤을 떠나게 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하나님의 가치와 하나님의 원리가 풍성하게 넘치는 가나안 땅으로 들여 놓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합니까? 그래서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입니다. 갈 길이 멀어서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빡빡한 일정 때문에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 아침 밝은 태양이 솟아오를 때, 새 시대를 여는 찬란한 희망의 태양, 동녘의 태양이 솟아오를 때 싯딤이라는 어두운 지역을 벗어나 하나님께서 원래 이스라엘 백성을 들여 놓기로 하셨던 곳, 젖과 꿀이 흐르는 곳, 즉 가나안을 향해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정작 이스라엘 백성보다 하나님께서 더 서두르시는 것입니다. 정작 이스라엘 백성보다 하나님께서 더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사람에게 보다 빨리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더 서두르시고, 하나님께서 더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조건, 무작정 서두르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 계획에 맞게, 다 상황과 형편에 맞게 일을 진행해 나가십니다.
그 장면이 요단 강가에서 사흘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숙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서두르셨던 하나님께서 요단 강가에 이르자 갑자기 늦장을 부리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40년 광야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얼마나 빨리 요단강을 건너가고 싶었을까요? 가나안 땅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강만 건너면 바로 가나안 땅인데 얼마나 빨리 요단강을 건너가고 싶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건너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싯딤을 떠나 올 때는 그렇게 서두르시더니 정작 요단에 이르러서는 왜 이렇게 여유를 부리시는 것일까요?
몇 번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 놓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원리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과 사흘 동안 요단 강가에서 유숙하게 하는 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예. 그런 의문이 당연히 생기셔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아주 치밀하게 계획하시고, 아주 섬세하게 준비하시고, 아주 꼼꼼하게 일을 행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만 성경을 읽는 재미가 쏠쏠히 생기고, 성경을 통해 온전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3.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이 왜 사흘 동안 요단 강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숙하게 하셨을까? 그 해답이 [여호수아 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라는 구절입니다.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우리는 이런 구절이 나오면 너무나도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아! 하나님께서도 큰일을 앞두신 상황에서는 사람이 목욕재계하고 성결하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는구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거룩하고 겸손한 자세로 때를 기다리시기를 원하시는구나. 우리가 성결해지지 않으면 기이한 일을 행하지 않으실 모양이구나.’ 이렇게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지극히 타 종교적 사고방식이고, 타 종교적 신앙방식입니다.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기독교와 타 종교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종교이고, 타종교는 나의 행위에 대한 신의 반응을 기대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 종교는 신에게 잘 보여야만 합니다. 타 종교는 신에게 감동을 주어야만 합니다. 타 종교는 신을 설득해서 내 편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신의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께서 반응하시는 종교가 아니라 사람의 형편과 처지, 사람의 자격과 조건, 이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이 변화되어지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단 강가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이 더러운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온전한 성결의 의미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성결해 질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즉 사람 스스로가 성결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성결해 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변화를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사람이 죄인이라 절대로 스스로 성결해 질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요구를 하고 있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요구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치밀함, 하나님의 섬세함, 하나님의 꼼꼼함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요단강 강가에 머무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중 한 명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 여러분께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럼 여러분은 어떻게 자신을 성결하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몸과 정신을 깨끗하게 만드시겠습니까? 자신을 성결하게 하기 위해 어디를 찾아가시겠습니까? 방법은 단 하나, 요단강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그 곳에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뿐입니다.
예.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강물 속으로 들어가 보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성결하게 되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으니 목욕재계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성결해져야 내가 기이한 일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로 하여금 요단강 강물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도록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라고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강물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기를 원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을 통해 과연 어떤 효과를 기대하셨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신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그 두 가지 목적이 정말로 재미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요단강 강물의 깊이를 경험해 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다음 주쯤 살펴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곳을 건너도록 하실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죄인이기에 언제나 의심을 품습니다. ‘이게 정말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일이야? 혹시 우연히 이루어진 자연 현상이 아니야?’ 예. 이런 의심을 품습니다. 오늘 요단 강가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직접 건넜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서 아는 정도일 뿐입니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그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의심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요단강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물살이 강한지 직접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과연 그 강물을 가를 수 있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라는 것입니다. 자연 현상으로 강물이 갈라질 수 있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라는 것입니다. 들어가 본 결과 그들이 내릴 결론은 무엇이겠습니까? ‘아, 강물이 갈라지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도 아니고, 자연 현상으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께서는 며칠 후 요단강을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 이게 하나님의 능력이구나. 아! 하나님으로만 가능한 일이구나. 홍해 바다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켰다는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아! 이제부터는 그런 하나님만 믿으면 되겠구나.’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스스로 인정을 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요단강 강물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요단강 강물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는 두 번째 목적은 강 건너 살고 있는 여리고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여호수아 2장에서 이미 살펴보았지만 여리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녹았고, 정신까지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기에 강 건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 건너 요단 강가에서 사흘 동안이나 물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합니다. 여러분 이 광경을 한번 머릿속에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전쟁에 참여할 만한 남자의 수만 60만 명이 넘습니다.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한다면 적어도 200만 명 이상은 될 것입니다. 즉 수원시 전체 인구의 두 배에 해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합니다.
이 모습이 여리고 백성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요? 이들의 눈에는 그들이 아주 여유롭고 한가하게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을 본 여리고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얼마나 자신 있으면 저럴 수 있을까? 얼마나 강하고 담대하면 전쟁을 앞두고 저렇게 여유로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이미 그들에 대한 소문만으로 마음이 녹고, 정신까지 잃을 지경인데 직접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소문 그 이상입니다. 여리고 백성들은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앞으로 여리고 성은 어떻게 될까요?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리고 성은 이미 함락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동요하는데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지혜로운 자, 현명한 자, 눈치 빠른 자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가족들과 더불어 몰래 성을 빠져 나와 피난길에 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리에 대해 죄의 원리로 대항하려는 여리고 성에 남아있다가는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다 목숨을 잃을 것이 너무나 뻔한 일이기에 야심한 밤을 틈타 피난길에 오르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께서는 살려고 하는 자는 살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탈출할 자는 탈출할 수 있도록 사흘이나 시간을 벌어주시는 것입니다. 요단강 강물 속을 들락날락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더 이상 여리고 성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깨닫는 자들은 스스로 살 길을 도모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리고 백성들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예. 하나님은 아주 치밀하고, 아주 섬세하게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드러내시고, 스스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4.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치밀하고, 얼마나 섬세한 분이신지를 보여주시는 장면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여호수아 3: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라는 말씀과 [여호수아 3: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홍해를 건너는 장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상황과 오늘 요단강을 건널 때의 상황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채셔야 합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통해 바다를 가르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너가자 하나님께서 직접 다시 모세를 통해 추격해 오는 애굽 군사들 위로 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는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를 때였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경험도 하지 못했을 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원리와 하나님의 가르침이 담긴 율법도 받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은혜를 내려주시고, 먼저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홍해를 직접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앞장서지 않습니다. 대신 제사장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가게 합니다. 광야생활 40년을 지내면서 하나님을 배우고, 율법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숱하게 체험해서 미약하나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지금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먼저 요단강 강물에 들어가도록 하시고, 그때에 맞춰 요단강을 가르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어주시고 신뢰해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무작정 사람들에게 맡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동행 하시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제사장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게 하고, 그들을 앞장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밀함, 하나님의 섬세함, 하나님의 주도면밀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구절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 구절은 [여호수아 3: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라는 말씀입니다. 제사장들이 메고 있는 언약궤와의 거리를 이천 규빗, 즉 900m 정도의 간격을 반드시 유지하면서 그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주 쉽습니다. 그냥 건너뛰면 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척,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척, 은근 슬쩍 그냥 넘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 중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자료, 이런 저런 설교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료나 설교의 해석방식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설명은 죄인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신성한 언약궤에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신실하고, 신성한 존재라 죄 범한 사람이,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감히 하나님께 범접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입니다. 그래서 거리를 두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설명이 이해가 가십니까? 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설명을 한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왜 예수님은 늘 병든 자, 가난한 자, 죄 지은 자와 함께 하셨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이 하나님에게 다가오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사람이 죄인이 되어서 사람 스스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죄인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시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설명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설명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사람들이 언약궤를 더 잘 볼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과 그들을 따르는 선두 그룹간의 거리가 무려 900m입니다. 900m면 적지 않은 거리입니다. 오히려 언약궤가 더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언약궤를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가 이백만 명 이상입니다. 그들의 대열은 적어도 수십 킬로미터는 될 것입니다. 어차피 언약궤를 사람들이 온전히 바라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언약궤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게 했다는 설명도 역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설명은 하나님과 사람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녀처럼 대해주시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친구처럼 대해주시지만 사람 스스로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과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람이 교만해 지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감스럽지만 저는 이 설명에도 결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을 섬겨주시기 위해 죽기까지 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세 가지 설명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마음에 드는 설명이 한 가지도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마음에 드시는 설명이 있습니까? 조금이나마 수긍할 수 있는 설명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도록 하셨을까요?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 이야기 하나를 빌려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 시리즈 중에 ‘최후의 성배’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사용하셨던 잔을 찾아나서는 모험물입니다. 아마 보신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한번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실제로 그 잔을 지금 누군가가 찾았다고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검증해 보니까 진품이 확실하다고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그럼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에 대한 존재,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에 대해 사람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까요? 예수님은 진정한 그리스도셨다, 예수님은 진정한 메시아셨다,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본체셨다고 사람들이 인정하며 사람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즉 사람들은 오로지 그 잔에만 관심을 가질 뿐 하나님 자체,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닐 것 같지요? 제가 장담하는데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 논리를 오늘 본문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언약궤가 사람들 앞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럼 사람들의 관심은 어디로 향합니까? 당연히 언약궤로 향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능력을 어디에서 확인하려고 합니까? 당연히 언약궤에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 것입니까? 언약궤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가 들어있다는 궤짝 하나가 졸지에 하나님 자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고, 졸지에 하나님을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가치, 하나님의 원리는 다 사라져 버리고 언약궤가 하나님을 상징하는 우상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우상에 빠져서 그 우상을 섬기는 일에 정신을 놓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원하실까요? 당연히 원치 않습니다. 그런 것을 원치 않기에 당연히 언약궤 가까이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본질이 무엇인지 잘 구분하라는 것이고, 그 본질에서 결코 사람이 멀어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본질에서 한 눈 팔지 않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천 규빗쯤의 거리를 두고 언약궤를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은 본질을 알라는 것입니다. 본질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코 본질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5. 부활절의 의미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본질은 다 잊어버리고, 본질은 다 놓쳐버리고 그저 형식에 사로잡힌 종교행위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가치, 하나님의 원리가 풍성하게 담겨있는 성경은 멀리하고, 하나님은 배울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그저 형식적인 예배로, 그저 기도로, 그저 찬양으로, 그저 섬김과 헌신으로 우리의 신앙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아마도 전국 곳곳에서 각 지역 단위로 연합예배를 이미 드렸거나 아니면 드리게 될 것입니다. 수원에서도 오후 세 시에 야외음악당에서 연합예배가 드려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수고하고 애를 쓰겠습니까?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동원 되겠습니까? 과연 오늘 하루 차분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그런 하루가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부활절을 따로 기념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탄절도 따로 기념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추수감사절도 따로 기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탄절이나,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이 바로 언약궤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은 다 사라지고 그 날 자체가 그저 기독교 절기상 중요한 날로 인식되고 형식적으로 기념되는 언약궤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언약궤와의 거리를 이천 규빗쯤 거리를 유지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잘 깨닫고 이해해서 본질인 하나님, 온전한 하나님, 언제나 사람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 하나님의 뜻 가운데 기쁘고, 즐겁고, 자유롭고, 행복한 신앙생활 이루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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