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의 대산종사 9 / "좌선 안하려고 작정했느냐" /인재양성이 제일 급선무
원불교신문 [1642호] 2012년 12월 21일 (금) 이양신 교무
▲ 이양신 교무 / 만덕산훈련원
원기45년 3월19일 나는 좌산상사님으로부터
'영산에 큰 어른이 계시니 한번 찾아뵈라'는 뜻을 받으러
영산성지에 계시는 대산종사님을 찾아뵙게 됐다.
대산종사님께서는 나에게 "너 이 공부 해볼 생각은 없느냐?"고 물으셨다.
"하고는 싶은데 부모님이 너무 반대하고 건강이 너무 자신이 없습니다"고 대답하니
대산종사님은 "부모님은 서서히 이해하시도록 공들이시고
오조 홍인대사는 오십이 되도록 아프셨단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날 나는 대산종사님으로부터 대종사 십상에 대한 법문을 듣고 출가 서원을 하게 됐다.
그 후 출가를 하여 수학을 마치고 법무실에 근무하게 된 것은
영생을 통해서 큰 홍복이 아닐 수가 없다.
익산시 동산동 금강리에서 시봉을 할 때 일이다.
날이 추울 때에 새벽 일찍 불을 때고 있으면
"너 좌선 안하고 무엇하느냐? 좌선을 안하려고 작정했냐?"고 꾸중하셨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떠한 환경에 처해도 좌선을 빠질 수가 없다.
공부시간에 약을 올리러 가면 "너는 공부 안하려고 작정했느냐!
미리 갔다놓고 공부 시간에는 공부를 해야지!"라고 혼내시면서
세세곡절 살펴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
법무실 근무를 마치고 교화계로 나가게 됐다.
평생 모시고 살 각오를 했건만 떠나야 하는 순간 너무도 슬퍼, 울면서
"어떻게 나가서 살아요!?" 하고 여쭈었더니
"오십되도록 남자 교화할려고 생각도 말아라"고 당부했다.
아마도 교화현장에서 남자를 각별히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여겨진다.
영산에서 살다가 병이 나서 요양원에 쉬고 있었다.
어느날 대산종사님은 김관현 교무를 보내어 원평교당으로 부르셨다.
원평교당에 도착하니 문밖에서 기다리시기에 인사를 올리니
"내년에 원평 교무로 와라"고 하셨다.
옆에 있던 고현종교무님이 "쉬어야지 아퍼서 일 못해요"라고 말씀드리니
"쉬면 지레 죽어버린다. 원평으로 오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오너라!
죽을 운수에 죽도록 일을 하면 명을 있는다"고 말씀했다.
불면증에 오른팔은 굳어서 머리도 못 빗고 극도로 약한 상태였지만
대산종사님 뜻을 받들어 원평교당에 부임하여 대산종사님 훈증 속에 건강을 회복하며 살게 됐다.
그 당시 대산종사님은
"내가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께 배운 것을 너에게 가르쳐주니
너는 후배들에게 전해주어라. 인재 천 명만 길러내라.
남북통일이 되기 전에 만명이 있어야 하는데 인재양성이 제일로 급선무이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때 원평교당이 천도재가 많이 들어왔는데 재를 지내러 온 재주들이
종법사님께 시봉금을 올리면 반드시 나를 다시 주시면서
"이 무서운 영가들 돈은 시봉금에 안 합치련다.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시며
재비에 합하도록 했다.
그렇게 재주들이 올리는 시봉금은 절대 받지 않으시고 되돌려 주시던 것을 생각하여
나는 지금까지 그 어른의 흉내를 내고 있다.
하루는 대산종사님께 "대종경 신성품 15장에 노덕송옥 얼굴이 떠오르는지라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는 하늘에 사무치는 신성을 가진지라 산하가 백여 리에 가로 막혀 있으나 그 지극한 마음이 이와 같이 나타난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참으로 그럴수가 있는 것인가"고 여쭈었더니
"출가나 재가나 똑같이 기도를 올려주지마는
내가 편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출가 재가 중에 먼저 오는 기운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 상대방이 정성을 올리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고 답을 해주셨다.
"상전급에 중근은 개인만 해를 당하지마는
항마위 중근은 따르는 사람이 다 해를 당하기 때문에 중근이 무섭다"는 말씀과
"공부를 해 가는데 큰 파도 작은 파도가 끊임없이 출렁이지만
출가위에 가야 잔잔한 파도가 된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내 영생을 이끌어 주시고 마음을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필설로 어찌 다 표현할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