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1791]<삼국유사>에 실린 원효대사 찬미 시
각승초개삼매축 角乘初開三昧軸
각승으로 처음 삼매축을 열었고
무호종괘만가풍 舞壺終掛萬街風
춤추는 호롱박 마침내 온 거리에 유행했네.
월명요석춘면거 月明瑤石春眠去
달 밝은 요석궁 봄의 꿈은 지나가고
문엄분황고영공 門掩芬皇顧影空
문 닫힌 분황사 돌아보는 그림자가 공하다.
원문=성호사설 제15권 / 인사문(人事門)
향악(鄕樂)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속악(俗樂)중에 무애(無㝵)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고려사》를 상고하면, “무애라는 희곡(戱曲)은 서역(西域)에서 들어왔는데,
그 말이 불어(佛語)가 많이 인용되었으므로 절주(지금 음악의 율동과 박자)만
그대로 두었다.” 했다. 《자서(字書)》에, “애(㝵)는 애(礙)와 같다.” 했으니,
무애는 장애가 없다는 뜻이다.
신라의 중, 원효(元曉)가 요석궁(瑤石宮)이 불탄 후에
속복(俗服)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 거사(小性居士)라고 호(號)하였는데,
우연히 광대[優人]가 가지고 춤추며 희롱하던 큰 표주박을 얻은바,
그 모양이 매우 기괴하였다. 그 모양을 모방하여 춤추는 도구를 만든 다음
화엄경(華嚴經)의,
일체 걸림 업는 사람은 / 一切無㝵人
죽고 사는 그 길에서 해탈한다 / 一道出死生
라는 구절을 따서 무애라 이름하고 노래까지 지어 세상에 널리 전하게 되었다.
그는 또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러 삼매경(三昧經)을 저술할 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안치하고 각승(角乘)이라 이름하고는,
각승은 처음으로 삼매경에 열렸고 / 角乘初開三昧軸
무호는 마침내 일만 거리 바람에 걸렸구나 / 舞壺終掛萬街風
요석궁에 달 밝으니 봄 졸음은 깊었는데 / 月明瑤石春眠去
분황사에 문 닫쳤으니 그림자도 비었어라 / 門掩芬皇顧影空
라는 시찬(詩賛)을 지었다.
또 《동경잡기(東京雜記)》를 상고하면,
“원효가 일찍이 목[項]이 굽은 호로병(葫蘆甁)을 어루만지면서
저자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후세에 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병 위에는 금방울을 달고 아래에는 채색 비단을 드리워 놓았다.” 했으니
이른바 배[腹]는 가을철 매미와 같고 목은 여름철 자라와 같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주-D001] 향악(鄕樂) : 《類選》 卷4下 人事篇6 治道門3, 《林下》 卷29
春明逸史5 鄕樂府.
ⓒ 한국고전번역원 | 정지상 (역) | 1978
각승(角乘) : 각(覺)과 각(角)이 음이 같으므로
소의 두 뿔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비긴 것이고,
승(乘)은 불법(佛法)을 수레에 비긴 것이다.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635쪽 주》
일찌기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러 삼매경(三昧經)을 저술할 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안치하고 각승(角乘)이라 이름하고는,
각승은 처음으로 삼매경에 열렸고 / 角乘初開三昧軸
무호는 마침내 일만 거리 바람에 걸렸구나 / 舞壺終掛萬街風
요석궁에 달 밝으니 봄 졸음은 깊었는데 / 月明瑤石春眠去
분황사에 문 닫쳤으니 그림자도 비었어라 / 門掩芬皇顧影空
각승(角乗)은 처음 삼매경의 축(軸)을 열었고 角乘初開三昧軸
무호(無壺)는 마침내 온 거리의 풍습이 되었네 無壺終掛萬街風
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이 깊더니 月明瑤石春眠去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보는 그림자가 비었다. 門掩芬皇顧影空
* 위에 있는 시는 김원중 교수님의 삼국유사 역본에서 발췌한 것이고,
아래 있는 시는 경주를 너무 좋아해서 아예 경주에 머무르며 작품을 쓰시는
강석경 선생님의 에세이집 "이 고도를 사랑한다"에서 인용하였다.
삼매경에 주석을 달아 그 책 이름 각승이라
호로병을 들고 춤추면서 거리거리 쏘다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이 깊었는데
절문 닫고 생각하니 걸어온 길이 허망하여라
깨달음은 밖이 아닌 자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확신한 후,
원효는 중국을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이후 원효의 앎과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저술은 자신의 깨달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이었고,
삶은 깨달음을 실천하는 파격적 행위였다.
원효의 깨달음은 ‘한마음(一心)’이었고, 이에 그는 한마음을
‘불변의 측면(眞如門)’과 ‘변화의 측면(生滅門)’의 관계로 본
‘일심이문一心二門’의 구조를 밝힌《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매우 중시하였다.
따라서 이 책의 해설서로 저술한《대승기신론소》는
중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해동소海東疏》로 불렸다.
이후 원효를 앎의 측면에서 재발견한 인물은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다.
신라 말에 새로 도입된 구산선문의 선종세력이 고려시대에 점차 확대되자,
의천은 기존의 교종의 이론과 선종을 조화시키는 방법에 고심하였다.
그러던 중, 원효의 화쟁사상에 주목하게 된다.
의천은 분황사에 찾아와 설총이 조성한 원효소상 앞에서 분향했는데,
이때 남긴 ‘원효 성사께 올리는 제문(祭芬皇寺曉聖文)’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오직 우리 해동보살만이 본성과 현상을 융합해서 밝히셨고,
고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모든 논쟁의 단서들을 화합해서
한 시대의 지극히 공정한 이론을 이루셨으니 더욱더 신통함이
헤아려지지 않고 교묘한 작용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비록 세속의 먼지와 함께 했어도 그 참됨을 더럽히지 않았고,
빛이 감춰졌어도 그 본 모습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중국과 인도에 명성을 떨쳤고 밝고
어두운 곳에 자애로움으로 감화시켰으니 그 찬양함에 있어서
어떤 주장과도 견주기가 진실로 어렵습니다.”
이에 대해 일연은 원효를 삶의 측면에서 평가하였다.
일연은《송고승전》을 비롯해서 당시 원효와 관련된 설화들까지 직접 채록하고
참고하였고, 이 자료들에는 없었던 원효의 파계문제를 대중을 위한
무애행으로 승화시켜 대중교화의 관점에서 높이 평가했다.
일연은 일견 보기에 기행과 환속 등 극단적이고 파격적인
예측 불가능한 그의 모습을 ‘원효불기元曉不羈’
즉 원효의 얽매이지 않은 삶이라 보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각승초개삼매축 角乘初開三昧軸 각승으로 처음 삼매축을 열었고
무호종괘만가풍 舞壺終掛萬街風 춤추는 호롱박 마침내 온 거리에 유행했네.
월명요석춘면거 月明瑤石春眠去 달 밝은 요석궁 봄의 꿈은 지나가고
문엄분황고영공 門掩芬皇顧影空 문 닫힌 분황사 돌아보는 그림자가 공하다.
앞의 두 절은 원효의 앎과 삶에 대한 보살행을 담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절은 원효의 앎에 대한 내용으로,
‘각승’은 소의 두 뿔 사이에서 저술한《금강삼매경론》을
‘삼매축’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소의 두 뿔에 비유해서 《금강삼매경론》의 중심이 되는
깨달음의 과정인 ‘시각始覺’과 그 결과인 ‘본각本覺’을 상징하였다.
둘째 절은 원효의 삶에 대한 내용으로,
깨달은 한 마음을 실천에 옮기고자 대중들 속에 들어가 호롱박을 가지고
노래하고 춤추는 무애행無碍行으로 불교의 진리를 널리 전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뒤의 두 절은 원효의 무애행에 대한 일연의 생각을 표현했다.
셋째 절은 원효가 세속을 벗어나 출가한 그 틀을 다시 넘어서서
재가로 환속한 것 또한 깨달음의 관점에서 보면 실체가 없는 환영이란 의미이다.
이를 일연은 ‘봄의 꿈’이라 평가했다.
나아가 넷째 절에서 원효 사후 모셔진 그의 소상塑像이
설총(薛聰, 연대미상)을 돌아다보는 것이 마치 석존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상(雙林涅槃相)을 연상시킨다.
이를 통해 일연은 공空의 관점에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경지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원효의 위대한 업적도 사후 의상(義相,625~702)의 화엄종에 가려져 있다가
고려시대인 11세기 후반 의천에 의해 이론적 측면에서 재평가 되었고,
국내외적으로 최고의 사상가로 인정받으면서도,
원효만큼 모순적인 삶을 보여준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천오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원효의 삶은 한편의 연극처럼 흥미로울 수 있으나,
정작 그 속에 녹아있는 그의 본모습을 이해하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이에 의천과 일연이 자신의 시대에서 원효를 거듭 새롭게 발견했듯이
, 현대를 사는 우리들 또한 원효의 앎과 삶이 추구했던 의미를
이 시대에 적용시켜 읽어낼 필요가 있다. 원효의 삶과 이를 재발견한
의천과 일연의 위대한 스승들을 통해, 그들이 들려주는 메시지가
비단 나 자신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어두운 길을 환하게 밝혀줄 수 있
는 귀한 등불임을 새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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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재 님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인문대 문화예술철학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국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동국대와 중앙승가대 서울예술대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저서로는 ≪원효 구도의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