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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베트남!
1.시작부터
최근 5, 6년 동안 가족여행을 잊고 살았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또 몇 년 전부터는 아내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경황이 없기도 했지만, 아내와 딸, 나와 아들의 여행스타일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들과는 방학 때마다 크고 작은 여행을 했다. 동학혁명 전적지를 따라 전주에서 공주까지 도보여행도 했고,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모험도 했다. 설악산 등반, 서울문학여행, 고창과 순창 일대 여행, 여수와 순천여행, 제주도 자전거여행도 함께했던 여행목록에 들어있다. 덕분에 아들과는 돈독해졌지만 어딘가 모르게 허전한 구석도 있었다.
그러다가 올 초 아내가 운영하던 국수나무 매장을 하나로 줄이면서 잠시 시간과 돈에 여유가 생겼다. 마침 지난해가 결혼 25주년이기도 해서 모처럼 가족해외여행을 가자고 생각을 모았다. 여행준비 과제는 딸과 나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나도 이리저리 바빴던 터라 모든 것을 딸에게 미뤘고 여행도 자유여행보다는 준비가 간편한 패키지로 하자고 우겼다. 어렵게 여행날짜가 잡히고, 대만과 일본을 저울질하다가 베트남으로 정했다. 아내는 새 여권도 준비했고 여행사와 계약도 순조롭게 성사되어서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출발 열흘 전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식당에서 일하던 아내가 허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거동이 불편해진 것이다. 아내는 한의원 치료를 받으며 어떻게든 함께 가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도무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문제도 발생했다. 내년에 있을 평택지역 3.1운동 1백주년기념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는 과정에서 내가 논문발표를 맡았는데 잠시 날짜를 착각하고 여행날짜와 겹쳐 잡은 것이다. 아차 싶어 여행사에 날짜조정을 신청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안 된다는 연락이 왔다. 몇 십 만원의 위약금을 물고서라도 취소하려던 노력도 물거품이 되었다. 난감한 마음에 주최측에 간곡히 양해를 구하고 발표는 효명고의 장선생께 부탁하는 것으로 수습을 했다.
출발 이틀 전 아내는 허리 시술을 결심했다. 한의원에서 침과 부항치료를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자 궁여지책으로 찾은 병원에서 척추와 중추신경 사이를 떼어 놓는 시술로도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말에 결심한 것이다. 비급여 시술이라 비용도 250만원이나 들었지만 아내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술 후 아내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오히려 거동만 불편해진 느낌이었다. 출발 하루 전까지 고민하던 아내는 아무래도 동행이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아내의 판단에 동의는 했지만 아내 없이 떠나는 가족여행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행 취소는 더욱 어려운 일이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공항으로 향했다.
2.젊은 딸과 늙은 아빠
우리 여행지는 베트남 하노이와 하룽베이다. 새벽에 집을 나서 5시에 출발하는 공항리무진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날 두 시간밖에 못잔 터라 졸음이 쏟아질 법도 했지만 인천공항까지 가는 동안 정신만 말똥거린다.
공항에서 여행사를 찾는데 어리버리하는 나와는 달리 대학생 딸아이는 제집 드나들 듯 휘젓고 다니며 잘도 찾아낸다. 나는 패키지여행이라고 해서 공항에서 깃발 든 가이드가 기다렸다가 수속도 도와주고 단체로 비행기를 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딸아이가 하는 것을 지켜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공항 구석에는 여행사 부스가 있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체킹만 한 뒤 개별적으로 탑승을 했다. 그러다보니 베트남 현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가이드나 일행을 알 수가 없었다.
수속을 마치고도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우선 아침을 먹고 공항 면세점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내에게 줄 반지를 하나 샀다. 사실 아내에게는 반지가 없다. 결혼예물은 IMF 금모으기운동을 할 때 기부했고 그 뒤로도 귀금속을 싫어하는 나 때문에 변변한 반지 하나 장만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는 ‘은혼식에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는다는데...’라고 말끝을 흐리는 아내에게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다고 인간의 품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며 핀잔까지 했던 터였다. 매장에서 상품들을 살펴본 뒤 아내와 영상통화를 하며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도록 했다. 몇몇 제품을 살펴보던 아내는 하필이면 가장 비싼 제품을 골랐다. 허걱... 머리 속에서는 ‘그건 안 돼’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입으로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개인용 카드를 내밀며 5개월 할부를 요청하고는 아내에게 구매했다고 전화했더니 희희락락이다.
우리는 베트남항공을 탔다. 딸이 선택한 국적기였다. 몸은 피곤했는데 비행기 안에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핸드폰에 저장해간 다큐를 한두 편 보다가 옆자리에 앉은 베트남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4년 전 취업비자로 한국에 왔다가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에 다니러 간다는 이 여성은 전라도 광주의 방직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2년 전에는 그곳에서 베트남 남성과 만나 결혼도 했으며 아이도 한 명 낳았는데 아이와 남편은 베트남으로 귀국하고 혼자 남아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베트남 여성에게서 과거 돈 벌러 서울, 부산, 울산의 가발공장, 방직공장, 피혁공장으로 떠났던 우리의 누이와 형들의 냄새를 맡았다. 집안을 일으키고 남동생을 공부시키겠다며 야간작업, 철야작업을 했던 그들. 베트남에 도착하면 누가 가장 보고 싶냐고 했더니 남편이나 아이보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를 만나 맛있는 것도 먹고 실컷 울고 싶다고 했다.
3.북부 베트남의 최고 관광지 하롱베이
하노이 공항에서 가이드와 일행들을 만났다. 경험자들은 패키지여행은 가이드의 품성과 역량이 좌우한다고 해서 긴장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이드는 세련됐으면서도 품성이 착했고 일행들도 모두 좋은 분들 같았다.
25인승 승합차에 올라타자마자 곧바로 하롱베이로 출발했다. 일정에는 하노이관광이 잡혀 있었지만 늦게 합류가 이뤄져 부득이 일정이 바뀌었다고 했다. 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는 160km 남짓. 하지만 소요시간은 무려 3시간 반에서 4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버스가 고속도로로 접어들면서 왜 그런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베트남 고속도로는 우리나라 4차선 국도만도 못했다. 노면도 불량했고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섞여 달리는데다 교통정체가 너무도 심해서 시속 50km 이상을 낼 수가 없었다. 베트남 고속도로에는 승용차보다 트럭이나 특용차량이 훨씬 많았고 때때로 오토바이도 있었다. 그 이유는 나중에야 알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국민들에게 싼값의 차를 공급할 수 있는 자동차공장이 없어 승용차구입이 어렵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국에서 수입하는 자동차에 200~300%의 관세가 부과되어 어지간한 사람은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자동차 중에는 기아·현대자동차의 모닝, 프라이드, 엘란트라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택시들도 대부분 작고 값싼 모닝이었고 아주 드물게 닛산이나 토요다 자동차도 있었다. 베트남인들이 기아차 모닝을 좋아하는 이유는 작지만 많이 탈 수 있고 연비가 좋아서라고 한다. 베트남의 모습에서 1970, 80년대 우리의 자화상을 봤다.
베트남은 칠레처럼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나라다. 남과 북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공통점이 적다. 북쪽은 중국과 유교문화의 영향이 강하다면 남쪽은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 또 북쪽은 기원 전후 중국 한무제의 지배를 받은 이후 처절한 저항과 독립, 재지배의 역사를 안고 있고 농경문화와 유교, 불교의 영향이 강한반면, 남쪽은 인도의 영향으로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이 강하고 해양문화와 상업문화가 발달했다. 또 북쪽은 오나라와 리씨, 진씨가 다스린 대월의 역사적 전통이 있다면, 남쪽은 참파국이 대월(베트남)에 복속되면서 끊임없는 지배와 동화를 강요받으며 살아왔다. 근대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은 것은 같지만 2차 대전 뒤에는 북쪽이 호치민을 중심으로 프랑스, 미국과 독립전쟁을 전개했다면, 남쪽은 프랑스와 미국의 어용정권인 월남의 통치를 받았던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같은 베트남 안에서도 북쪽은 정치적이고 유교문화의 전통이 강한 반면 남편은 개방적이고 상업적인 성향이 많다.
하노이와 하롱베이는 베트남 최북단에 가깝다. 중국 국경과도 멀지 않으며, 동쪽 바다에는 중국의 대표적 휴양지 하이난섬도 있다. 그래서인지 하노이에는 정치적, 역사적 유적들이 많은 반면, 하롱베이는 수려한 경관으로 관광사업이 크게 발달했다. 하롱베이는 일찍이 007영화를 비롯해서 유수의 영화에 단골로 등장했다. 늦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하롱베이에 도착했다. 한국식당에서 만두전골로 늦은 저녁을 먹고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유명하다는 베트남 전통 맛사지를 받았다. 이제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아들에게는 자칫 향락적으로 비춰질 수 있을 것 같아 어떨 것 같냐고 물었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들은 황홀한 시간을 보냈지만 고된 여행으로 지쳐버려 그만 맛사지를 받으며 잠이 들어버렸다.
4.하롱베이는 환상이고 제주도는 현실이다
몇 번 다녀오지 않은 외국여행이지만 어디를 가 봐도 제주도만한 관광지는 흔치 않다. 풍광이 수려하면 기후가 좋지 않고, 기후가 좋으면 풍광이 거시기한 경우가 허다하다. 하롱베이는 천하 절경이지만 흐리고 음습한 날씨 때문에 상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바닷가를 낀 아름다운 해변에 위치했음에도 해변과 거리에서는 관광객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하롱베이를 유람하는 정크선을 타러 갔을 때 중국관광객들을 만났다. 마치 들소 떼처럼 떼를 지어 관광지를 누비며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중국관광객들은 어디에서나 식별이 가능했다. 그건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예의는 제쳐두고 오로지 자신들의 즐거움만 찾으려는 그들의 태도를 보며 중국 중심의 미래는 어떠할지 상상되었다.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패키지여행답게 우리 가이드는 여행일정을 소화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일행이 달랑 8명뿐인데다 3명은 대학생이고, 두 명은 50대 후반의 부부여서 이동이 불편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30명이 탈 수 있는 정크선에 달랑 우리일행 8명과 가이드 2명만 탑승했더니 공간이 넉넉했다. 항구를 벋어나자 사진으로만 봤던 하롱베이 군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흡사 영화 적벽대전을 보는 듯 풍경은 무척 화려했지만 청량감은 적었다. 셀카를 찍기도 심심하고 풍광에도 익숙해질 무렵 선착장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나룻배 관광을 한 뒤 007영화에 나왔던 고속정을 탄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어선을 타고 놀아서인지 나룻배와 고속정 관광은 정크선에 비해 훨씬 재밌었다. 칙칙하던 날씨도 활짝 개어서 청량감이 가슴 속까지 밀려들었다. 하룽베이 관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점심식사였다. 사실 패키지여행은 커피를 비롯한 각종 샵을 방문하여 상품판매를 강요받는 것과 기본사양 외에 붙는 각종 옵션이 여행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여행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상식으로 주문한 민어회와 각종 해산물 요리는 기대치를 훨씬 뛰어 넘는 맛과 즐거움을 주었다.
하롱베이 관광을 다녀온 뒤 오후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지만 마땅히 돌아다닐 곳도 없었고 몸도 피곤해서 호텔에서 골아 떨어졌다. 식사는 대체로 한식 중심으로 제공되었는데 여행 중에는 현지음식을 먹고 싶었던 나에게는 맛도 없고 오히려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저녁식사 뒤 관람한 수상인형극은 우리나라 꼭두각시놀음처럼 내용은 단순했지만 신선했다. 무엇보다 연주자들의 전통악기가 눈길을 끌었는데, 어떤 것은 아쟁이나 해금 같았고 어떤 것들은 공후처럼 생겼으며 음색도 비슷했다. 공연이 끝나고 해금 비슷한 악기 연주자에게 관심 있다고 했더니 선뜻 ‘아리랑’을 연주해줬다. 고맙고 아름다웠다.
공연 후 ‘베트남 커피’를 소개하는 샵에서 커피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베트남은 커피의 세계적 산지다. 이웃국가인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처럼 프랑스 식민지시대에 플렌테이션농업으로 커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세계 제2위의 커피생산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강사는 한국여성이었다. 강사는 ‘베트남산 위즐커피가 얼마나 힘들게 만들어지고 맛이 좋으며 한국의 호텔 커피숍에서 한잔에 얼마에 팔리는지’를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관광객들에게 커피를 홍보하고 판매를 유도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열띤 홍보는 어쩌면 당연했지만 고객을 배려하지 않는 지나친 강요가 거듭되면서 분위기는 시큰둥해졌다. 그러자 자존심이 상한 강사는 값을 대폭 내려가며 이번에 사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둥 협박성 발언까지 해가며 구매를 강요했다. 분위기는 자존심 싸움으로 번졌고, 참다못한 내가 손을 들어 무척 피곤한 우리의 상태를 설명하며 그만 중단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한 것은 용인에서 온 부부가 구입한 커피 몇 봉지였다. 그제서야 굳었던 얼굴이 풀어지는 강사, 우리는 무사히 숙소로 복귀했다.
5.옌뜨국립공원과 옌뜨사원
베트남은 내가 좋아하는 국가 가운데 하나다. 이들의 장점은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줄 알고, 결코 강자 앞에서 비굴하지 않으며, 장점을 지혜롭게 사용할 줄 안다는 점이다. 패키지여행이었지만 베트남 여행 중에서도 하노이를 선택했던 것은 순전히 이들의 역사와 호치민과 지압장군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3일째 일정은 베트남의 역사와 관련된 유적들이 포함되었고 하노이로 이동해서는 반딘광장과 하노이 시내관광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큰 기대 속에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부터 편백나무제품 숍에 들러 기분을 잡치게 했던 버스는 서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조금 피곤하기는 한데 잠이 오지 않아서 차창 밖을 응시했다. 길 좌우로 지나치는 베트남의 마을과 민가들은 참 독특한 풍경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앞뒤가 길고 좌우가 좁은 3층짜리 민가들과 간간이 나타나는 황금색을 칠한 건물들이었다. 베트남에서도 황금색은 부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해서 이해되었지만, 전면 4m, 측면 12m에 3층으로 지은 기형적인 민가들은 도무지 납득되지 없었다. 가이드는 베트남의 민가들이 현재와 같은 모양을 갖게 된 것은 식민지시대의 영향 때문이며 앞뒤로 길쭉한데다 창문이 적은 것은 고온다습한 기후의 영향이라고 하였다. 북부베트남은 아직도 대가족 중심이고 유교문화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3대 이상이 한 집에 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집집마다 조상들의 위패와 유골을 모시고 있다고 했다. 사회주의도 전통과 문화를 바꿔 놓지 못했다는 사실이 기이하기만 했다.
집과 가까운 논이나 들판 가운데에 붉은 벽돌로 묘지를 조성한 점도 특이했다. 베트남의 묘지는 일종의 풍장(風葬)과 같은 가묘인데, 사람이 죽으면 일정기간 망자가 살았던 집이나 경작지 근처에 매장을 했다가 시체가 썩으면 뼈만 화장해서 집안의 사당에 안치한다고 한다. 우리와 달랐던 것은 부모의 유골을 모실 때 아들의 수대로 유골을 나눈 뒤 각자 집에 사당을 마련하고 모신다는 점이다. 조상의 영혼이 후대에 복을 내린다는 조상숭배의 전통이 가져온 풍습일 것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논밭에 방목되어 있는 소와 가축들을 보고 있노라니 금세 옌뜨국립공원이다. 가이드는 옌뜨국립공원은 베트남인들의 성지와도 같다고 말했다. 재빨리 검색한 인터넷 포털에도 ‘3명의 왕이 부처가 되어 산을 지킨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사원이 있으며, 백 년 동안 불공을 드렸어도 옌뜨에 가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성지’라고 소개되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옌뜨국립공원을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기차를 타는 것과, 다른 하나는 튼튼한 다리로 직접 걸어 올라가는 것. 우리는 당연히 전기차를 탔다. 전기차로 몇 분쯤 오른 뒤 케이블카로 옮겨 타서 백 수십 개의 계단을 오르니 작고 고즈넉한 옌뜨사원이다.
옌뜨사원은 규모가 큰 편은 아니다. 다만 절 입부에서부터 즐비하게 서 있는 부도들과 몇 백 년이 넘는 나무들, 고풍스런 사찰건물들이 절의 내력을 말해줬다. 네이버 검색창에는 이곳에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500여 개의 부도, 600년이 넘는 나무들이 있다고 나와 있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고 사찰 안으로 들어섰더니 앞 쪽에 세 분의 부처, 뒤쪽에 세 분의 부처가 우릴 맞이한다. 대승불교의 교리에 따라 조성된 우리나라 불상들은 수인과 좌우 협시보살로도 불상의 명칭을 알아낼 수 있는데 남방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곳의 불상들은 불(佛)인지, 보살(菩薩)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가이드는 몽고의 3차례 침입을 물리친 쩐타이똥 황제가 말년에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 왕위를 내려놓고 승려가 되어 이곳에서 열반했다는 이야기를 해줬는데, 사실은 황제가 아니라 황제의 사촌으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침략을 물리친 영웅 쩐흥다오(우리나라로 말하면 이순신장군 같은 인물)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6.호치민의 숨결, 하노이
베트남의 자주의식과 저항의식은 앞서 밝힌바 있다. 하지만 막상 키 작고 왜소한 베트남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 작은 체구의 사람들이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옌뜨에서 하노이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인터넷에서 베트남의 역사를 검색했다. 강인했던 저항의 역사, 자주의 역사를 되새긴다. 베트남의 저항의 역사는 기원 전 한나라의 지배에 저항한 쯩자매의 투쟁에서 시작한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압제에 당당히 맞서 독립을 쟁취하고, 몽고(원)의 최전성기를 이끈 세조 쿠빌라이의 세 차례 침략을 쩐흥다오를 중심으로 하여 괴멸시켰다. 1788년에는 응우옌 반 후에가 이끄는 베트남군이 청나라 최 전성기를 구가하던 건륭제의 20만 대군을 당당히 물리쳤다. 19세기 후반에는 잠시 프랑스제국의 식민지지배를 당했지만 2차 대전 중 호치민을 중심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하며 다시 일어섰고, 종전 후에는 식민 지배를 영속시키려는 프랑스와 8년 동안 싸워 이겼다. 몇 년 뒤에는 인도차이나 공산화를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침략한 미국과 목숨 건 14년 전쟁을 전개해서 승리했으며, 1970년대 말에는 중국의 침략마저 가볍게 물리쳤다. 이들의 할 말 없게 만드는 저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대륙에 딸린 소국(小國)의 생존은 사대(事大)밖에 없다고, 집안에도 큰집과 작은 집이 있듯이 국가 간에도 위계질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며 영혼까지 중국을 섬기려 했던 우리선조들은 베트남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까. 오늘날 분단국가인데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이라는 최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은 강대국 미국에 찰싹 달라붙는 길밖에는 없다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부류들은 어떡하고. 그들은 부끄러운 줄이나 알까.
역사를 거론하면서 베트남 여성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 여성들은 매우 강인하다. 흡사 제주도 여성에게서 느끼는 작지만 강한 이미지가 있다. 가이드도 베트남 여성들은 생활력과 책임감이 강하며 가정에서도 여성이 가정을 책임지는 일이 흔하다고 대답했다. 베트남 여성의 강인함은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한나라의 지배에 대항하여 최초의 민중봉기를 일으켰던 쯩자매를 비롯해서 베트남의 역사에는 수많은 여성독립투사들이 있었다. 베트남전쟁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이 위대했음을 우리는 수많은 사례들로 알고 있다. 남성들의 뒤에 숨어 있지 않고 앞장서 싸우고 피 흘리며 당당하게 맞섰던 그들의 영웅적 투쟁.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기여한 만큼 대우도 받고 당당해지는 것이 세상 이치다. 베트남 여성들이 그렇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베트남 영웅들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현재의 베트남이 호치민의 영도로 건국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역사상 모든 영웅들 가운데서도 호치민같은 지도자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호치민을 만나려면 바딘광장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번잡한 하노이 시내를 가로질러 정해진 시간 안에 바딘광장까지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노이 뿐 아니라 내가 목격한 베트남의 모든 도시들은 혼잡했다. 한낮인데도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뒤섞여 달렸으며 서로 조심하라며 경적을 울려 대서 시끄럽기 짝이 없다. 우리 버스가 오토바이들과 곡예운전을 하는 동안 나는 하노이 시내와 베트남인들이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시내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이 거의 없고 자동차들 가운데 기아모닝과 프라이드, 현대차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오토바이가 상상을 초월 할 만큼 많은 것도 놀라웠는데, 가이드는 자동차공장이 없는데다 관세가 200% 이상이나 되어서 값싸면서도 많은 사람이 탑승할 수 있는 차를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시민들이 오토바이를 타는 것도 대중교통이 적고 자동차를 살 여력이 없어서라고 했는데 이래저래 복잡한 베트남이다.
7)하노이 뒷골목 탐색
바딘광장은 엄격하게 통제되고 관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베트남정부는 광장을 개방했다가도 의전상의 문제나 약간의 일만 발생해도 광장 출입을 금지시킨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가 그런 날이었다. 출입을 금지시키자 가이드는 안절부절 못했다. 일정을 마치고 빨리 다른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데 무작정 기다릴 수도 그렇다고 생략하고 다른 일정으로 이동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삼 십분 뒤 개방을 해서 우리는 광장 곳곳을 관람할 수 있었다.
바딘광장에는 한기둥사원을 비롯해서 호치민 묘소, 호치민박물관, 호치민 관저와 관공서가 집중되어 있다. 우리는 한기둥사원에서 시작해서 호치민 묘소와 박물관을 먼저 답사했다. 호치민의 시체는 방부제처리를 해서 썩지 않도록 했다는데 특별한 날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다만 호치민박물관이 개방되어 아들과 둘이서 재빠르게 둘러보았는데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기보다 사진과 유품으로 혁명열사들의 삶을 기억하는 기념관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호치민 관저는 감동이었다. 관저라야 프랑스식 2층 양옥이었지만 호치민은 그것마저 분수에 맞지 않다며 관저를 청소하고 허드렛일을 하는 분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귀퉁이 작은 집에서 죽을 때까지 지냈다는 일화가 가슴을 울렸다. 돌아 나오며 사진관에서 호치민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 구입했다. 허름한 복장에 곡괭이를 어깨에 메고 어딘가로 걸어가는 모습. 우리도 언제쯤 이런 지도자와 조우할 수 있을지.
저녁 일정은 전기자동차로 호안 끼엠 호수를 돌고, 다시 자전거 인력거를 타고 호수와 구 시가지를 도는 투어를 했다. 호안 끼엠 호수는 잠실 석촌호수만 했는데 하노이 청춘 남녀들의 대표적인 데이트코스인 듯 했다. 인력거 투어의 종착지는 성 요셉성당이었다. 일행들이 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틈을 타서 나는 아들과 함께 뒷골목 투어를 했다. 뒷골목은 큰 도로변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좁은 골목도 인상적이었지만 성당 주변 골목에 게스트하우스가 많은지 세계 각 나라의 여행객들이 숙소에 짐을 풀고 작고 좁은 술집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참 부러웠다. 내가 원하는 여행은 저런 것인데... 베트남 청춘 남녀들은 큰길가나 좁은 골목의 좌판 옆에 깔판을 놓고 앉아 쌀국수를 먹거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같은 풍경은 중국의 동북삼성에서도 자주 봤지만 중국보다는 베트남이 훨씬 정감 있고 멋스러웠다. 사람도 이면의 모습이 아름다워야 하듯 여행의 참맛은 뒷골목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8)에필로그
맛없는 저녁밥을 먹고 베트남 거피를 한 봉지 구입한 뒤에 호텔로 돌아왔다. 하노이의 호텔은 예상보다 크고 깨끗했다. 우리가 호텔에 들어간 시간이 저녁 10시 30분쯤이라 깨끗이 샤워하고 짐을 정리했더니 12시가 훌쩍 넘었다.
이른 아침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식당에서 조식을 했다. 마침 창가에 자리가 있어 하노이 풍경을 마음껏 감상하며 아침을 먹었다. 하노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홍강의 모습도 이곳에서야 제대로 봤다. 중국의 황허처럼 황토가 많이 섞여 붉게 보인다는 강. 베트남인들은 홍강의 황토로 붉은 벽돌을 찍어서 집을 지었고 외세의 침략을 강을 배경삼아 물리쳤다고 한다.
여행 마지막 날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조식 후 호텔 방에 들어가 짐을 정리하고 4일 동안 우리를 싣고 다녔던 버스에 올라 공항으로 향했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가이드는 지난 4일 동안 짜증부리지 않고 잘 따라준 우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서 일정 내내 함께했던 베트남 현지가이드의 처지를 슬쩍 흘렸다. 아이 둘을 둔 집안의 가장인데 4일 동안 우리를 도와준 댓가로 겨우 30달러를 번다는 이야기였다. 아이들을 키우는 나와 용인부부에게는 남일 같지 않은 스토리, 나는 가지고 있던 십 몇 달러 가운데 10달러를 현지 가이드에게 나눠주었다. 그것은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예상치 못했던 것은 나의 아들 김진헌군이 선물사라고 준 10달러를 그분에게 모두 줬다는 것. 이럴 땐 칭찬해야겠지? (2018.2.28.)
첫댓글 선생님이 좋은 아빠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어릴적에 여행을 함께한 시간이 적어 후회가 많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