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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동학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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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자료실 스크랩 동학과 청산, 그리고 정순철
추연창 (淵庵) 추천 0 조회 60 15.04.17 16: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학과 청산, 그리고 정순철

 

 

 

정순철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동요 작가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짝짝꿍, 졸업식노래 등이 모두 정순철의 작품이다.

더욱이 그는 방정환과 함께 1920년대 어린이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가능하였던 출생의 비밀은 무엇일까?

왜 그는 어린이운동에 앞장 서고 순진무구한 동요를 짓고 보급하는데 일생을 바쳤을까?

그 사상적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가 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외손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곳이 바로 옥천 청산이다.

청산 가는 길,

그 길은 곧 사람이 하늘인 세상이다.

정순철은 바로 아이들이 그 세상의 문을 열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1. 최시형과 청산

 

해월 최시형은 1871년 이필제난 이후 삼엄해진 감시망과 동학에 대한 탄압을 피해 강원도 영월, 정선, 영춘, 인제 등지로 피신생활을 하였다. 해월은 보다 안전한 곳을 찾던 곳을 찾던 중, 정선 적조암 철수자 스님이 일러준 대로 단양 대강면 도솔봉 밑에 있는 절골<寺洞>로 1874년 4월초에 이사하였다. 이곳은 경상도 풍기와 통하는 묘적령 고갯길이 있을 뿐 아니라, 예천으로 통하는 등 산골이지만 교통의 요지였다.

 

이 당시 해월은 손씨부인을 찾지 못해 옹색한 생활을 하였다. 거처할 집도 없어 김연순의 집에 동거하고 의복 수발도 이웃 부인들이 맡아 하였다. 그래서 권명하의 소개로, 그의 인척이자 오래 전에 홀몸으로 딸 하나와 같이 살고 있던 안동김씨와 예를 올렸다. 그리고 권명하가 절골에 마련해준 새 집에 1874년 4월 10일 이사하였는데, 김연국도 함께 살았다. 이 안동김씨가 바로 정순철의 외할머니이다.

 

해월이 머무르는 절골은 점점 동학도들로 넘처났다. 1875년 1월 24일에는 김씨부인이 첫 아들을 났는데, 본명은 양봉(陽鳳), 이름은 솔봉(率奉), 자가 덕기(德基)였다. 도솔봉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하여 솔봉이란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해월 최시형이 머물던 단양 도솔봉 아래.....

이곳이 꺼져가던 동학의 불씨가 되살아난 곳이자, 정순철 할머니와 해월이 결혼해 살던 곳이다.

 

이렇게 해월의 생활이 안정되면서, 동학 조직도 해월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 자리잡고 동학 조직도 날로 확대되었다. 해월은 단양 절골을 기반으로 산간벽지를 돌아다니면서 동학을 전국적으로 포교하는데 진력하였다. 1880년대는 충청도와 경상도, 1890년대에 들어와서는 전라도 전역으로 동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1880년대 초까지 충북 단양에 머물러 있던 해월은 1884년 6월에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전라도 익산 금마면에 있는 미륵산 동쪽 계곡의 사자암에 들어갔다. 가족들은 충북 보은에서 동쪽으로 약 60리 지점인 작은 산성터인 경상도 상주 화서면 봉촌리 앞재에 초가 3간을 마련하고 단양에서 거처를 옮기었다.

 

사자암에서 기도를 마친 해월은 1884년 10월에 손병희 등과 함께 공주 마곡사 북서쪽에 있는 가섭사로 들어가 21일간의 기도를 마친 뒤, 전에 살던 단양 장정리로 가 수운 최제우의 탄신 기념제례(10월 28일)를 거행하였다. 그런 다음 상주 앞재<前城>에서 가족들을 만나 기거하였으나, 갑신정변 이후 1885년에 들어와 관의 감시가 심해져 보은 장내리로 내려와 은신하였다. 이것이 보은 장내리가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해월 최시형이 단양에서 옮겨온 보은 장내리.

이곳이 동학농민혁명의 산실이 될 줄이야....보은집회를 거쳐 혁명 속으로

 

 

해월은 보은 장내리에 거처하면서 청주와 진천지역을 오가면서 동학도인들을 지도하였다. 곳곳에서 많은 동학도인들이 체포되었다. 그러자 해월은 1885년 7월에 공주 마곡사로 일시 피신한 뒤 다시 보은 장내리를 거쳐 상주 앞재로 왔다. 해월은 은식처를 옮길 때 늘 보따리 몇 개만 지고 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월을 ‘최보따리’라 부르게 되었다.

 

1887년 1월 15일에는 아들 최덕기가 청주 율봉에 사는 음선장의 둘째딸과 결혼하였다. 음선장의 첫째 딸은 이미 서인주(서장옥)와 결혼을 한 상태이므로, 서인주는 해월의 아들인 최덕기와 동서간이 되었다.

 

김씨부인은 아들을 장가 보낸 뒤 곧 병을 얻어 1887년 2월 24일 운명하였다. 해월은 김씨부인을 장사지낸 뒤, 1887년 2월 그믐께 보은 장내리로 나와 첫째 부인인 손씨와 살림을 합쳤다. 그리고 환갑잔치를 한 뒤 강원도 정선에서 49일간의 기도를 마친 뒤 1887년 5월 하순 보은 장내리로 돌아와 동학 본부인 육임소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이로써 보은 장내리는 명실상부한 동학교단이 들어서게 되었다.

 

1888년 3월 62세인 해월은 도인들의 권유로 26세인 손병희의 누이동생 밀양 손씨를 새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첫째 부인 손씨가 병을 앓아 해월을 모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해월과 손병희는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889년 강원도 정선에 민란이 일어나자, 다시 동학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해월은 7월에 보은 장내리 육임소를 파하고 괴산 신양동으로 피신하고 10월에는 서인주 등이 서울에서 체포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해월은 다시 아들 덕기와 김연국 등을 데리고 음성, 인제, 간성, 양구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은신하였다. 가족들은 손병희가 충주 외서촌에 마련한 집으로 옮기었고, 1890년 3월 손씨는 아들 봉조(鳳朝, 후에 東曦로 개명)를 낳았다. 가족들은 1890년 7월에 다시 공주 정안면 활원(活院, 弓院)으로, 9월에는 청주 금성동(현 진천군 초평면 용산리)으로, 1891년 2월에는 공주 동막으로, 1891년 12월에는 다시 충주 외서촌으로 이사하였다.

 

해월은 이곳저곳으로 은신하고 호남 등지를 순회하면서 동학 조직을 강화하고 확대하였다. 여러 동학 교칙도 반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891년에 충청도관찰사로 조병식이 부임하면서 동학에 대한 탄압의 강도 역시 강화되었다. 해월은 다시 1892년 5월 15일경 상주군 공성면 효곡리 왕실 깊은 산중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곳에서 해월은 1892년부터 1893년에 걸쳐 공주와 삼례, 그리고 광화문 복합상소는 물론 보은 장내리 집회도 지도하였다.

 

해월은 1893년 4월 2일 보은 집회에 참여한 동학도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린 뒤 상주 왕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4월 15일 아들 덕기와 김연국을 대동하고 영남지역을 순회하면서 아들 덕기가 병을 얻어 고생하였다. 그해 8월에 조재벽이 찾아와 옥천 청산면 문암리 문바윗골(현 청산면 한곡리) 김성원(金聖元)의 집으로 이사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황간 사람으로 일찍부터 영동, 청산, 진산, 고산지역에 많은 포덕을 한 대접주의 한 사람이었다.

 

청산 문바위골.

해월 최시형은 1893년부터 다음해까지 이곳에 머물며 보은취회, 동학농민혁명을 지휘하였다.

정순철의 어머니도 이곳에 살다 붙잡혀 기구한 삶을 살아야 하였다.

 

문바윗골로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아, 덕기의 병세가 위중해져 결국 10월 15일에 19세의 나이로 별세하고 며느리는 후사가 없어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의 묘소는 골짜기 안쪽 우편 산기슭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1893년 11월 해월은 동학 포 단위로 법소를 설치하고 본포(本包) 소재지에 도소(都所)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에 따라 김연국은 법소를 청산 문암리로 정하였다. 해월 역시 청산 문암리에 임시로 대도소를 만들었다. 장내리 대도소는 관의 지목으로 폐쇄하였다.

 

해월은 1894년 새해를 맞이하여 1월 5일에 청산 문암리에서 강론을 마련하였으나, 전라도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점점 세상의 이목은 전라도로 쏠리게 되었고, 드디어 1894년 3월 20일 전봉준 등은 고창 무장에서 기포하기에 이르렀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을 때, 해월은 청산 문암리에 머무르면서 동학도들을 지휘하였다. 드디어 9월 18일 문암리에서 접주회의를 열어 기포하기로 결정,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동학도들은 무장을 하고 보은 장내리를 거쳐 청산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때가 1894년 10월 11일경이다. 이곳에서 손병희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논산으로 향하여 전라도에서 올라온 전봉준부대와 합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0월 14일 이두황이 이끄는 정부군이 보은 장내리에 진입하여 초토화하였으나, 옥천지역이 반농민군 수중에 들어간 것은 11월에 들어와서이다. 적어도 11월 3일 동학농민군이 옥천에 집결해 있었던 만큼, 이 무렵까지도 해월은 청산 문암리 대도소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1월 5일 일본군이 옥천으로 진입하였고 같은 날 관군과 동학농민군이 청산 석성리에서 전투를 벌였다. 11월 6일에는 일본군 조사대가 청산으로 들어왔고 11월 8일에는 일본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대규모의 증약전투가 벌어졌다. 이것으로 보아 해월이 머물던 청산지역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간 것은 11월 6일경이었다.

 

옥천 증약

갑오년 11월 6일 이곳에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

정순철의 어머니가 체포된 것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옥천감옥에 구금되어 옥살이를 하다 해월이 원주에서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진 뒤

아전과 강제 결혼,

1901년에 정순철을 출생하였다.

이렇게 정순철의 삶은 시작되었다.

 

해월은 이미 전라도방면으로 피신한 상태이나, 김씨 부인 소생인 외동딸 최윤(崔潤)은 함께 미처 피하지 못하고 체포되어 옥천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 시기는 청산지역이 일본군 수중에 들어가는 11월 6일 이후였을 것이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옥천군수가 아전인 정주현(鄭注鉉)에게 최윤을 데려다 살라고 주어버렸는데, 그 시기는 1898년 해월이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진 직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순철은 이렇게 연을 맺게 된 해월의 딸 최윤과 정주현 사이에서 1901년에 태어났다.

 

 

2. 1920년대 어린이운동과 정순철

 

‘어린이’이란 말은 조선시대에도 사용했던 말이지만, 그것이 근대성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14년 11월 최남선이 <<청춘>> 창간호에 ‘어린이의 꿈’을 게재한 데에 기원을 둔다.

 

그러나 최남선이 말한 ‘어린이’는 연령적으로 어린 아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는 1908년 그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말한 소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어린이’이가 일정한 근대적 개념으로 본격 사용된 것은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들어와서인데, 그것을 주도한 것은 천도교계에서 언론종합잡지로 1920년에 창간한 <<개벽>>지이다. <<개벽>>은 어린이(소년)이와 관련된 글을 수시로 기고하여, 어린이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확산하여 뿌리 내리게 하는 미디어 역할을 하였다. <<개벽>>지에 실린 어린이 관련 글은 다음과 같다.

 

<표 2> <<개벽>>지에 실린 어린이(소년) 관련 글

연월

필자

글 제목

1920. 6

(창간호)

이돈화

최근 조선에서 기하는 각양의 신현상

김기전

의식의 구속보다도 애정 그대로

소춘(김기전)

금삭악?옥가루

1920. 7

김소춘(김기전)

장유유선의 말폐

1920. 8

이돈화

신시대와 신인물

잔물(방정환)

어린이 노래

1920. 9

묘향산인(김기전)

종래의 효도를 비판 하야써 금후의 부자관계를 성언함

1920.11

박달성

세계의 공존키 위하여 교육문제를 재거하며 위선 서당 개량을 절규함

1921. 4

백두산인(이돈화)

유년교육

1921. 8

노아자(이광수)

팔자설을 기초로 한 조선민족의 인생관

1921. 9

이돈화

생활의 조건을 본위로 한 조선의 개조사업

1921.10

김기전

우리의 사회적 성격의 일부를 고찰하여서 동포형제의 자유를 촉함

백두산인(이돈화)

현대윤리사상의 개관, 아동 상호간의 경어 사용

가하할 소년계의 자각

1921.11

노아자(이광수)

소년에게

백두산인(이돈화)

동양식의 윤리사상 변천 개관, 청주의 소년운동회

1921.12

이돈화

신조선의 건설과 아동문제

1922. 2

노아자(이광수)

소년문제와 조선민족의 부활

1922. 3

노아자(이광수)

소년문제와 그 구체적 체험

1922. 9

세검정인

불쌍한 소년! 조선의 소년

이돈화

진리의 체험

1923. 5

소춘(김기전)

5월 1일은 어떠한 날인가

 

1920년 6월부터 1923년 5월까지 <<개벽>>지에 실린 어린이 관련 글은 모두 21편인데, 그중 1920년과 1921년에 이돈화와 김기전을 중심으로 각각 8편이 발표되었다. 1920-1921년은 사실상 우리 역사에서 ‘어린이’를 발견하고 뿌리내린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이들 글은 모두 남존여비사상을 비판하면서 비인격체로 취급되던 어린이를 인격체로 대할 것, 어린 자식에게 효도만을 할 것을 강요하는 효도관을 비판하고 맹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서당교육의 문제점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어린이는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이자 미래 희망이란 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담론은 1920년대 <<개벽>>지에 실린 여러 글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며, 인내천사상을 가진 천도교 인사들의 주의·주장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각각 <<개벽>>의 주간과 주필을 맡았던 이돈화(1884-?)· 김기전(1894-?)과 방정환(1899-1931) 등이었다.

 

한편 천도교는 3.1운동 이후 젊은 지도층 중심으로 교단 지도체제를 정비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919년 9월 2일 발족된 것이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이다.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는 1920년 4월 25일 천도교청년회로 개칭되고 그 산하에 포덕부를 두었다. 그리고 1921년 4월에 다시 포덕부 밑에 소년부를 특별히 설치하여 소년의 지덕체를 발육시킬 방법과 실행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5월 1일에는 소년부를 천도교소년회로 개편하여,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으로 운영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전국적인 규모의 소년회 단체였다. 천도교소년회는 결성 이후 순회 강연과 동네나 학교 단위의 독서회 활동 등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지부가 확대되었다. 그에 따라 어린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확대됨에 따라, 천도교소년회는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오늘이 어린이날, 희망의 새 명절 어린이날’을 슬로건으로 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1월 28일 회의에서 어린이를 위한 잡지를 발간하기로 결정하고, 3월 20일 개벽사에서 월간지 <<어린이>>를 발행하여 어린이들에게 어린이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과 슬픔, 재미를 제공하였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는 1920년 <<개벽>>, 1922년 <<부인>>(1922년 6월부터 신여성으로 개칭)에 이어 세 번째 잡지였다. 이를 통해 천도교는 억눌려 있던 여성과 어린이를 해방하여 개벽된 사회, 평등한 사회,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천도교소년회는 그해 4월 17일 서울시내 소년단체 대표들과 각 신문사 기자들이 천도교소년회 사무실에 모여 소년운동협회를 만들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전국적인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전국적인 첫 어린이날 행사였다.

 

그 무렵 일본 동경에서도 1922년에 유학을 떠난 정순철 등이 방정환 주도로 1923년 3월 16일에 ‘색동회’를 발족하고 5월 1일에 맞춰 창립하였다. 지금까지 <<어린이>> 창간과 어린이날 제정은 방정환와 색동회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천도교소년회에서 주도하고 방정환이 지원한 것이다.

 

그렇지만 <<어린이>>가 천도교소년회 기관지로 발행되었지만, 발행 이후 실제 방정환의 생각이 그대로 관철되었다. 방정환은 종래 열등하고 학대만 받던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존중받고 평등한 어린이로 자리매김하고자 하였고, 그를 위해 동요와 동화 등과 같은 새로운 어린이문화를 확대하였다.

 

이와 같이 1923년 3월부터 5월 천도교소년회의 기관지인 <<어린이>> 발행과 ‘색동회’ 창립 및 5월 1일 어린이날 행사는 모두 어린이운동의 일환이었다. 어린이날 행사는 어린이 개념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고 어린이와 자주 대화를 나누고 칭찬할 것 등과 같은 어린이를 존중해 주는 어른들의 태도를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어린이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여, 전국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더욱 확대 발전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 정순철이 있었던 것이다.

 

정순철은 1923년 9월 <<어린이>> 제1권 제8호에 ‘형제별’을 발표하는 등 이후 동요를 짓고 보급하는 일에 진력함으로써, 어린이 문화운동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 천도교의 어린이운동 사상 뿌리

 

1920년대에 주로 천도교 관련 인사들로 추진된 어린이운동의 정신과 사상은 기본적으로 천도교, 즉 동학의 정신과 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천도교는 ‘어린이’를 새롭게 정의하고 어린이운동을 주도하였다. 그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내천사상과 평등주의적 인간관이었다.

최제우에 의해 1960년에 창시된 동학의 근본 철학과 사상은 기본적으로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있다. 최제운 시천주 개념에 대해서 다음과 말하고 있다.

 

“‘시’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주’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동경대전>>, 논학문)

 

시는 곧 내 안에 있는 신령을 섬기어 밖으로 우주의 기운과 소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신령이 곧 한울님이며, 그런 한울님은 나와 너, 우리 모두에게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곧 나=너=우리=사람=만물=한울님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제우는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사람이 바로 한울이요, 한울이 바로 사람이다. 사람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사람이 없느니라. 마음은 어느 곳에 있는가, 한울에 있다. 한울은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있느리라. 그러므로 마음이 곧 한울이요, 한울이 곧 마음이니, 마음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마음이 없느리라”(<<동경대전>>, <천지인·귀신·음양>)

 

사람이 곧 한울인데, 그 마음이 곧 한울이고 한울이 마음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시천주 사상은 최시형에 의해 ‘양천주(養天主)’로 재해석되고 ‘사람이 곧 하늘(人是天)’인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 섬기길 하늘 같이 하라’는 명제를 낳았을 뿐 아니라, 보다 실천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선생님(최제우)은 한울님을 섬기듯이 사람을 섬기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나는 비록 부인이나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한울님의 말씀으로 여기겠다”며 어린아이가 곧 한울님과 같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아이를 부모의 소유로 보고 그 인권조차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기존의 아동관과 크게 달랐다.

 

 

이와 같이 최시형의 사인여천 사상은 모든 인간의 위치를 한울님의 반열에 올려놓음에 따라 전통적인 남존여비와 신부귀천을 부정하는 것으로 근대적인 인간 존엄성과 평등사상으로 귀결된다. 이는 전통적인 인간관을 해체하고 근대적인 인간형을 재발견할 수 있는 가치와 사상을 제공하는 것으로써, 그 과정에서 ‘어린이’가 새로운 인간군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라는 동학의 이념이 실천에 옮겨진 것이다.

 

특히 어린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어린이는 어른과는 달리 때 묻지 않은 한울님이다. 때 묻지 않은 한울님이란 곧 순수무결한 마음상태를 말한다. 마음 안에 한울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교의 무심(無心), 성리학의 본성과도 통한다. 성리학에서의 본성은 고요한 상태의 마음이고, 마음이 움직임에 따라 오욕칠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마음이다. 어린이는 고요하고 순결한 마음을 가진, 그래서 누구보다 한울님을 닮은 존재인 것이다. 이는 1923년 <<어린이>> 창간호 권두언에 잘 나타나 있다.

 

“꽃과 같이 앵두 같이 어린 입술로,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그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그대로 한울의 소리입니다. 비둘기와 같이 토끼와 같이 부드러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뛰노는 모양, 그대로가 자연의 소리이고, 그대로가 한울의 그림자입니다. ...... 죄 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한울나라! 그것은 우리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까지든지 이 한울나라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며 .....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이 세상에 사는 사람사람이 모두 이 깨꿋한 나라에서 살게 되도록 우리의 나라를 넓혀 가야 할 것입니다”(<<어린이>>, 1923년 창간호)

 

이와 같이 어린이는 순진무구 그 자체로 한울님과 다름 없는 존재였다. 천도교는 인간 안에 있는 완전성(‘內在神’)에 도달하는 데에서 인내천에 이르는 길을 찾았는데, 그 완전성의 원형은 바로 ‘어린이’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천도교에서는 어린이를 ‘인내천의 천사’로 보고 있다.

 

 

둘째, 어린이는 개벽의 주체이다. 개벽된 사회는 한울님의 나라요, 미래 개벽사회의 예비주인인 것이다. 그런 만큼 어린이는 존귀하게 대접받고 개벽의 주체로 교육시켜야 하는 귀한 존재이다. 그래서 방정환을 비롯한 천도교가 인식한 어린이는 민족의 미래를 직접 짊어지고 가야 할 주체였다.

 

*2010년 12월 옥천 정순철기념사업회 발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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