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품은 달 OST - 달빛의 노래
九.
38.
다시금 밤이 찾아오고 첸은 안월전의 연못 위 다리에 앉았다. 바람마저 제 몸을 스쳐가면 제 것인줄 안다더니, 첸의 마음은 어지럽기 그지 없었다. 황제가 후궁들을 안으러가는 날이 많아지고, 첸은 홀로 밤을 지새는 일이 많아졌다. 그간에 황제와 함께 지냈던 날이 무어라고 첸은 밀려오는 고독을 쉬이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 달을 보시오?"
그리고 그 때 마다 카이가 찾아왔다.
"그 어둔 밤에 달보다 더 환히 빛나는 것이 있다하오. 그게 뭔지 아시오?"
"그게 무엇이오?"
"나요."
첸이 어이없이 카이를 바라보자 싱글싱글 웃던 카이가 얼굴을 굳히고 정면을 바라봤다.
"에이, 재미없는 사람같으니라구."
카이의 그말에 첸이 피식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북쪽을 정벌하고, 서쪽을 묵사발로 만든 장군이 제 앞에서는 한낱 어린아이처럼 구는 모습이 꽤나 재밌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첸이 고개를 틀어 카이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 구리빛 피부에 다소 뭉툭한 콧날과 날카로운 눈매가 흡사 맹수의 얼굴과 다르지 않아보였다. 가만히 있으면 그리 무서운 사람인것처럼 느껴지더니 조금만 미소를 지으면 천진한 아이의 얼굴로 변하는, 그야말로 천의 얼굴을 지닌 이였다. 그의 매끈한 피부위에 달빛이 내려앉자 잔상처가 도드라졌다. 첸이 손을 들어 카이의 뺨에 갖다대었다.
"……."
놀란 카이가 첸의 손을 덧잡았다. 제 행동에 놀란 첸이 황급히 손을 내리고는 고개도 함께 숙였다. 카이가 미소를 지으며 첸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대가 살던 곳은 어떤 곳이었소?"
카이의 물음에 첸이 앙 다문 입술을 열었다.
"내 살던 곳은 꽃피는 산골이었지. 봄에는 분홍빛 꽃잎이 날리우고, 여름에는 푸른 나뭇잎이 우거지고, 가을되면 노오란 은행잎이 황금길을 만들고, 단풍이 산을 활활 불태우는 곳이었네. 겨울이 되면 온 세상이 화선지로 덮인 것마냥 깨끗해져 다시 봄이오면 자연이 그리는 풍경화에 눈코뜰새없이 즐거운 나날이 펼쳐지는 그런 곳이었네."
"사시사철 다른 풍경이라…, 아름다웠겠소."
"아름다웠지. 아름답고 말고. 그대는 이곳 궁궐에서 자란것이오?"
"아니, 나는 저기 동쪽마을에서 왔소."
"동쪽마을? 내 들어본 적이 있소. 그 물이 넘칠듯 넘치지 않는다는 그 곳아니오? 바다라는 것이 있는."
"맞소. 바닷가 마을이었소."
"내 어쩐지, 그대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대의 눈 속에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 같다 생각했소."
"바다를 보셨소?"
"아니, 내 보지는 못했지만 만약 바다를 본다면 꼭 자네와 같은 얼굴일걸세. 장담하지."
첸의 말에 카이가 기분좋게 웃으며 상체를 뒤로 젖혀 다리위에 누웠다. 첸도 카이를 따라 다리위에 함께 누웠다.
"우리 바닷가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소."
"무엇이오?"
"바다에 사는 반인반수의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인어라고 부르오. 위에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아래는 물고기처럼 꼬리와 지느러미가 있는게지."
"으ㅡ, 망측해라."
"예쁘다하오. 그대보단 훨씬 아름다울테지."
카이의 말에 첸이 입을 삐죽이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느 날 어부가 바다에 빠졌는데 인어가 그 어부를 구해주었다하오. 물 밖으로 꺼내어 어부의 얼굴을 보고는 그 모습이 너무 멋져 반했다고 하더이다. 순간 다른 여인네가 다가왔고 놀란 인어는 그대로 바닷가로 돌아갔소. 어부를 잊지 못한 인어는 바다속에 사는 마녀에게 목소리를 댓가로 두 다리를 얻게되오. 그리고 어부를 만나러가지. 허나 어부는 이미 다른 여인과 혼인을 약속하고 인어는 바다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저 육지에 머무르게 되오."
"왜 어부에게 말하지 않소?"
"말을 하지 못하기때문이기도하고, 어부의 옆에 여인이 자신이 구해주었다 거짓말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지."
"참 나쁘오."
"그러던 인어에게 마녀가 목소리를 되찾을 기회를 주지. 단검을 주며 그것으로 어부의 심장을 찌르라하오."
"그래서 인어는 어찌하였소."
"한밤중에 어부에게 찾아간 인어는 마냥 어부의 얼굴을 바라보오. 마냥 그 얼굴을 바라보다 어부의 심장대신 제 심장을 찌르지."
"하…, 어리석소."
"본디 어리석은 이야기요."
카이가 밤바람에 눈을 감았다.
39.
"나의 소년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햇살을 받으며 생각에 잠겨있는 첸에게 황제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옵니다."
첸이 고개를 숙이자 황제가 쓸쓸히 미소지으며 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용상에 앉은 황제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황제가 되면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를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다른 이의 친절을 마음놓고 받아들일 수 없고, 누군가가 의중에 숨긴 말들을 찾으려 애쓰고,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많은 자들에게 시시때때로 제 위엄을 뽐내야만 했다. 부끄럽게도 황제라는 자리는 높은만큼 위태롭고 고매한듯 천박했다.
40.
황제는 식사를 하다말고 첸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두 눈을 반짝이며 저를 바라보고 있더니 이제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채, 황제가 한 번 먹어보라 해도 기미상궁에게 그 역할을 떠넘기곤 하는 것이 영 탐탁치않았다.
"그만 물러라."
황제가 제 몫을 다 먹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을 헹구고 차를 마신 뒤에야 황제는 산책을 하기위해 밖으로 나왔다.
"황제폐하."
멀리서 대비가 황제를 바라보며 다가왔다. 그 옆예는 황제의 후궁 중 하나인 윤씨가 함께 있었다.
"산책을 하시려는 겝니까? 잘 되었습니다. 윤씨가 내게 산책을 하자 졸라오는데 내 오늘 몸이 안좋아 이를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요. 두 분이서 함께 산책을 하고 오시지요."
황제의 건조한 시선이 윤씨에게 향했다. 우연히 마주친거라고 하기엔 행색이 너무 화려한 것을 보아 이 모든 것은 모두 대비가 꾸민 앙큼한 장난임이 분명했다. 황제가 윤씨를 바라보자 윤씨의 얼굴이 다소 수줍은 얼굴을 하며 살짝 내려갔다.
"그럼 늙은이는 이만 물러갑니다."
대비가 자리를 뜬 후에 황제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옆에는 윤씨가 서있었다.
"……."
첸의 시선이 그 둘의 뒷모습을 향했다.
바람 한점 불지 않는 그 날에 첸의 가슴에는 폭풍우가 내렸다.
41.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황제는 윤씨의 침실로 향했다. 첸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청운전으로 향했다. 잠은 오지않으나 잠을 자야했다. 그리하지 않으면 어지러운 마음은 갈피를 잃고 큰 일을 내려 할 것이 분명했다. 사람은 누구나 제 자리가 있으니 욕심내지 말 것을 당부하던 제 조부가 생각나는 밤이었다. 첸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릿하게 지나가던 그 순간이었다.
"…!!"
첸의 입을 막은 누군가가 첸을 어둔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훅ㅡ 하고 끼쳐오는 술냄새에 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둠 속에 시야가 익숙해지자 제 입을 가린 누군가의 눈이 보였다. 파도가 넘실거리는ㅡ
ㅡ카이였다.
첸이 인상을 찌푸리며 제 입을 가린 카이의 손을 찰싹하고 때리자 카이가 웃으며 그 손을 풀었다.
"깜짝 놀랬잖소!"
"잘못한게 많은가보오. 뭐 이런거 가지고 놀라시오?"
"내 본디 마음이 여려 그런 것이오."
"그러하오?"
"그러하오! 어휴, 술냄새. 그 쪽은 매일 하는 일이 술마시는 일 뿐이오?"
"내 오늘은 정말 사정이 있었소."
"그놈의 사정은 뭐 맨날있나."
"이제 곧 북쪽의 영토를 확장하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소. 나는 머지않아 황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할 것이오. 그 곳에서의 승리를 위한 자리였지."
"……."
"내가 곧 떠난다는데 아쉽지도 않소?"
"…아쉬울게 무어람."
"나는, 그대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울 것도 같은데…."
카이가 첸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그의 콧망울에서 입술로 천천히 시선이 내려갔다.
"입꼬리가 특이하오."
"그게 매력이오."
"매력이오?"
"그렇고말고!"
"……."
"무얼 그리 빤히 보시오!"
"…그대의 말이 맞는 것 같소. 매력적이오."
"……."
카이의 시선이 다시 첸의 시선에 맞춰졌다. 달빛이 뜨는 밤, 황궁의 구석진 곳에서 카이의 얼굴이 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카이의 숨소리마저 느껴지는 그 거리에서 첸이 제 입술을 두 손으로 가렸다.
"무…무슨짓이오!
나는 황제의 소년이오. 황제폐하를 보필하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마음에 담지않아야하고, 그 누구의 마음에도 담겨선 아니되오!"
"그럼 그대의 마음에는 오직 황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오?"
"그렇소!"
"…그렇구만."
카이가 설핏 웃으며 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의미를 부여해주어 고맙소."
카이의 말에 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의 의미를 묻고싶었으나 카이는 너무 취했고, 첸은 제 위로 스러진 그를 부축하기에도 힘이들었다. 첸이 궁시렁 거리며 카이를 부축해 그의 처소로 데려다주었다.
첸이 미처 묻지못한 그 말의 의미는 '반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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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01.03 18:29
첫댓글 어떻게이렇게재밌지??원래사극같은거안좋아하는데 푹빠져버린듯...
반역..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