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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전시실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평양외국인학교 학생사진(1934년)
이기풍목사 전기(1941년)
마펫선교사(1934년)
일제시대 성경책
제단을 중심으로 남,녀석(ㄱ 자)으로 구분되어있다.
오르간
일본 츠지 오르간 회사 제품으로 일제시대(1920-30년대) 수입되어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헌금대와 성미주머니
성미주머니
제단
제단
제단과 찬송가 궤도
찬송가 궤도
평양 장대현교회 역사와 부흥운동 (이덕주 교수)
길선주 목사 설교집(1941년), 김화식 목사 설교집(1940년)
평양신학교 교재(1930년대)
평양신학교 필기노트(1910년대)
평양신학교 학우회보(1923년)
평양신학교 신학생 명부(1914년)
평양신학교 요람(1914년)
평양신학교 졸업앨범(1927년)
당시 성경책
찬송가(1934,1935)
1940,50년대 찬송, 복음송가
평양시 지도
장대현교회 관련기사
평양 옛 교회 자리
평양 옛 교회 자리
평양 옛 교회 자리
평양 옛 교회 자리
현재 평양 시가지 모습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예배, 평양 칠골교회당 (출처- http://news.media.daum.net/culture)
100년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울려퍼졌던 기도의 함성이 100년만에 바로 그 현장에서 재연됐다. 2007평양국제대성회 조직위원회(조직위원장 김기수 목사) 대표단이 13∼16일 평양을 방문했다. 피종진 엄신형 민승 목사 등 26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칠골교회와 옛 장대현교회 터에서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고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전역에 회개와 부흥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기를 기도했다. 이번 방문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위원장 강영섭 목사·조그련)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100년전 장대현교회에서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난 1월 중순에 맞춰 이뤄진 이번 방문은 칠골교회와 장대현교회터 두 곳에서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고 북측이 방문단에게 호텔에 새벽예배 처소를 마련해줬다는 점 등 특기할 만한 일들이 많았다. 강영섭 조그련 위원장도 대표단을 환영만찬에 초청하고 송별예배에 참석하는 등 이번 성회에 대해 큰 관심을 나타냈다. 강 위원장은 “여러분을 환영하며 평양성회를 통해 북남교회들이 영적으로 하나가 되고 유대가 더욱 돈독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15일 오후 2시 평양시 중구 효자동으로 지명이 바뀐 옛 장대현교회터를 찾은 대표단의 감격은 남달랐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 진행된 이날 예배에서는 김기택(국제사랑재단 감사) 장로의 기도 후 피종진 목사가 ‘다시 일어나는 성령의 불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피 목사는 “100년전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강림의 불길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적 체험을 선사하고 거듭남의 통로가 되었다”며 “한국 교회가 영적 부흥을 되살리자는 취지로 준비하고 있는 평양국제대성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황리에 치러져 북한땅에 복음의 불꽃을 피우자”고 강조했다. 14일 주일 칠골교회에서 열린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예배에는 평양 성도들과 해외상사 주재원 등 250여명이 참석했다. 칠골교회 황민우 담임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예배는 평양성회준비위원장 엄신형 목사가 ‘성령의 불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뒤 평양대성회의 성공적 개최 등을 위한 통성기도를 인도했다. 이번 방문에서 대표단과 조그련은 수차례 모임을 갖고 오는 가을에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릴 평양대부흥성회에 앞서 평양준비성회를 갖기로 합의했다. 300∼500명 규모의 방문단이 직항로나 육로로 방북,집회를 갖고 본성회에는 3000여명의 성도와 교계 지도자들이 방북할 계획이다. 엄신형 준비위원장은 “이번 평양성회는 교단장협의회와 한기총, KNCC로부터 협력을 받아 한국 교회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범교단적인 행사로 치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평양국제대성회에 대한 전반적인 준비는 우리민족교류협회(이사장 송기학)가 맡고 있다.
(글- 국민일보, 2007.1.17, 김무정 기자)
장대현 교회 전도회 규칙
평양장대현 교회는 삼일운동을 주도했던 교회이다. 당시의 장대현 교회는 지금 김일성동상이 세워져있다. 장대현 교회 전도회 규칙은 독립기념관 제 4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위의 전도회 규칙은 영안교회 안목사가 필사를 하여 옮긴 것이다. 당시에 쌍받침이 없는 것을 ( )안에 첨부하여 두었다.
章臺峴 敎會 傳導會 規則
평안도 지방의 三.一運動을 추진하였던 平壤 장대현 교회의 전도회 규칙
(길진경 기증)
장대현 교회 전도회 규칙
一 쟝 ?측
뎨 一 됴 본회? 장대현 젼도회라 칭?.
뎨 二 됴 본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젼하기로 목덕?.
뎨 三 됴 본회의 위치? 장대현 교회안에 둠.
二 쟝 회원
뎨 四 됴 회원은 학습인 십오세 이상브터 남녀교우로 조직?.
뎨 五 됴 월 연금은 ?삭 이십젼 이상으로 ?.
뎨 六 됴 회원이 일?년간 무고히 출셕치 안커? 허락? 월 연금을 일?년간 내지 않을 ?(ㅼ)는 임원회에 결의로 뎨명?.
뎨 七 됴 입회 지원자? 총회에 청원?야 허락으로 입회?,
뎨 八 됴 회원이 다른 디방으로 가거? ?(ㅼ)? ?세로 인?야 퇴회?? ?(ㅼ)? ?원셔를 뎨츌?.
三 쟝 임원
一. 회 쟝 一 人.
二. 부 회 쟝 一 人.
三. ? 무 一 人.
四. 셔 기(?) 二 人 .
五. 회 게 一 人.
六. ? 무 七 人. ( 남 三. 녀 四 )
七. 전도위원 十 人. ( 남 五. 녀 五 )
八. ? 찰 四 人. ( 남 二. 녀 二 )
뎨 十 됴 임원의 직무? 여죄?.
一. 회쟝은 본회를 ?표?야 제반 ?무를 ?괄?고 ?회와 임원회에 회쟝이 됨.
一. 부회쟝은 회쟝을 보좌?며 회쟝유고? ?(ㅼ)? ?리?.
一. ?무? 모든 ?무를 쟝리?.
一. 셔기(?)? ?회와 임원회에 모든 의안을 쟝리?.
一. 부셔기(?)? 회원에 츌셕부와 ?인젼도 관? 문무를 쟝리?.
一. 회게? ?졍츌납을 쟝리?.
( ?졍 지츌은 회쟝의 인증이 잇? ?무의 ?구셔가 아니면 지츌치 못?.) 一. ?무? 회원의 게월연금을 월죵?로 회게의게로 보?.
一. 젼도 임원은 ?인젼도에 발뎐을 연구?며 디방젼도 ?업이 확쟝되기를 힘쓸 것.
一. ?찰은 ?회와 림시회의 회셕을 정돈?.
뎨 十一 됴 임원의 임기(?)? 일?년으로 ?고 ?년일월 ?회에서 ?션 ?. (단 ? 고로 인?야 시무키 어려운 ?(ㅼ)? ?회에셔 션??되 임기(?)? 젼임원 의 잔기(?)로 ?.)
四 쟝 회 의
뎨 十二 됴 통샤회와 임원회? 회쟝이 소집?.
뎨 十三 됴 ?회? 뎡기(?). 임시 두죵으로 ?되 一. 三. 五. 七. 九. 十一. 노 ?고 림시?회? 긴급? ?(ㅼ)에 회집?.
뎨 十四 됴 임원회? ?회 모이기젼 ?쥬일젼에 모이고 ?(ㅼ)? 의론?일이 잇을 ?(ㅼ) 마다 모힘.
뎨 十五 됴 ?회? 삼분지 일노?고 임원회? 과반으로 ?.
五 쟝 경 비
뎨 十六 됴 경비급 젼도 비용은 월연금과 특별 연보로?.
뎨 十七 됴 젼도인 월급외에 오원이?은 ?무의 ?유로 쓰고, 오원이샹 二十圓 ? (ㅺ)지? 임원회의 결의로씀.
뎨 十八 됴 ?졍츌납 결샨은 년죵으로 ?야 월?회에 보고하되 십일월 ?회에셔 두 사?의 검사의 인즈을 엇음.
뎨 十九 됴 본회 규측은 ?회 삼분지이 가결로 ?졍?을 엇음.
(참고 원문에 기록되어 있는 글자 그대로 대필하였음. 뎨 十八됴 ‘하’자 외 몇 자는 지금 사용하는 글자로 기록됨. 그리고 ?(ㅼ)자와 ?(ㅼ)자와 ?(ㅺ)는 원본에 괄호 안에 있는 받침으로 기록되었음. 기(?)는 원본에 (괄호의 글자와 비슷함)있는 글자가 없었음.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회 규칙은 독립기념과 제 4전시관에 전시된 것을 안응식목사가 대필.)
군포시 군포1동 855-4 영안교회
평양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 1893. 선교사 공의회가 다시 조직 (미국 북장로교 ?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연합).
* 1900. 7. 장대현 교회 김종섭 장로 장립. (1900년 평양 선교사 공의회가 방기창, 김종섭을 목사 후보로 선발, 선교사 마펫이 1901년 가을부터 두 사람을 집에서 가르침).
* 1901. 길선주, 방기창 장로 장립. 장대현 교회 제직회 구성(장로 3명, 집사 5명, 영수 5명). 제직회 및 11개의 위원회 권한 제도
창시 (교회 사업 수행 및 10명의 교인 신앙생활 돌보는 지도자).
* 1902. 선교사 공의회가 5년의 신학 교육 과정 만듦. 정식 과목, 열람 과목(방학 자습)으로 교육. 지원자 : 양전백, 길선주,
한석진, 이기풍, 송인서 입학.
* 1903. 선교사 공의회에서 목사 후보자 7명 모집. 신학교수 7명 : 마펫, 방위량, 소안론, 이길함, 함위겸, 편하설 외 1명.
* 1905. 그리스도교 교리, 중세 교회사, 이사야서, 로마서, 디모데 전 ? 후서, 주석 등을 가르침 (교회 치리는 토론 과목).
* 1906. 전국 선교사 공의회의 추천 학생 40명 등록. 그 해는 인류학, 요한복음 주석,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과외 활동(운동 경기, 특히 축구).
* 1907.6. 제1회 졸업생 7명 배출 (방기창, 서경조, 한석진,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 양전백).
* 1907. 대한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 설립 (노회장 : 마펫). 10월에 제1회 졸업생 목사 안수. 길선주가 마펫 후임으로 장대현 교회
목사로 임명됨.
1900년도 평양장대현교회 (북한 평양 교회)
1893년 평양에 설립된 장로교회로 사진의 ㄱ자 예배당은 1900년 건립한 것이다. 원래 명칭은 널다리교회였으나 1903년 예배당의 완공과 더불어 교회명을 장대현교회로 개칭했다. 장로교는 평양 개척을 시도했으나 처음에는 실패하고 1893년 1월 선교사 모펫이 데리고 온 한석진이 평양에 머물게 되면서 장로교의 평양 개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해 5월부터는 모펫도 함께 머물면서 20여 명의 교인을 모아 널다리골에 있는 홍종대 소유의 기와집을 매입해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평양 널다리교회의 시작이다. 1900년 6월 김종섭을 장로로 장립해서 당회를 조직했으며 1901년에는 길선주와 방기창을 장로로 장립했다. 이후 교세는 날로 번창해서 1901년에는 18개의 예배처소가 설치되었으며, 1903년 남문밖교회, 1907년 산정현교회, 1909년 서문밖교회를 분립할 정도에 이르렀다. 1905년부터는 길선주를 중심으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1907년의 대부흥회를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 목사가 된 길선주와 선교사 블레어 등의 인도로 부흥회가 개최되었으며 이 부흥회에서는 한국교회사상 미증유의 성령강림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리하여 장대현교회는 '일백만 구령운동'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그뒤 1945년 8·15해방을 맞이하면서 북한지역이 공산주의 세력 아래 놓이게 되자 장대현교회는 북한 내 반공투쟁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 정당의 결당식 거행과 관련해 4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된 이후 교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글- daum 백과사전)
평양장대현교회 (1,900년 건립한 교회)
* 1893. 2. 미국 북장로교 마펫 선교사가 평양 널다리골(판교동) 주택에서 7명의 교인으로 시작.
* 1894. 청일전쟁
* 1896. 7. 교회 건축(교인 300명), 미북장로교 총무 스피어 방문.
* 1900. 6. 교회 봉헌. 장대현 교인 1,200명 중 386명 세례.
* 1900. 7. 첫 장로 장립(김종섭).
* 1901. 길선주, 방기창 장로 장립.
* 1903. 장대현 남문밖 교회 분립.
* 1905. 사창골 교회 분립.
* 1906. 산정현 교회 분립.
* 1909. 서문밖 교회 분립.
* 1911. 외성(성문밖) 교회 분립
평양장대현교회 부흥회 장면과 길선주 목사(원내)
길선주 목사 (맨 오른편) (출처- http://cafe.daum.net/eljoysomyeong)
장로교 목사인 길선주(吉善宙)의 자는 윤열(潤悅)이고 호는 영계(靈溪)이다. 1869년(고종 6년) 3월 25일에 평안남도 안주읍에서 아버지 봉순(鳳順)과 어머니 노씨(盧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4살때부터 모친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7세때부터 당시 유명한 정(鄭)선생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해 시화에 능했고, 음악을 좋아했다. 영계는 11세 때 안주의 선비 신협의 딸 신선행(申善行)을 아내로 맞았다. 1885년에 그의 가족은 평양으로 이주했고, 이듬해 그곳에서 상점을 내고 장사를 시작했다가 1년도 못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 염세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했고, 현실보다는 종교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영계는 19세때 관우를 신으로 섬기는 관성교(關聖敎)에서 읽는 보고문(譜告文)을 만독하는 것으로 수행을 시작했다. 약 9년간 선도수행에 힘써 영계가 도인으로 소문나자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후에 그와 함께 한국 장로교의 지도자들이 될 김종섭(金鍾燮), 김찬성(金燦星), 정익노(鄭益魯) 등도 그 무렵에 찾아와 도를 배우던 사람들이었다. 1893년 평양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영계도 이 낯설고 새로운 도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먼저 자기 밑에서 공부하던 김종섭을 마펫(S.A.Moffett)에게 보내 그들이 믿는 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게 했다. 그런데 기독교에 입교한 김종섭이 그를 찾아와 끈질기게 전도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와 김종섭이 권하는 한문으로 된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는데, 영계는 특히 '천로역정'(天路歷程)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사라지고 급격히 발전하는 기독교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침내 1896년 가을에 영계는 '예수가 참 구주이신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총소리같은 소란한 소리가 들리며, 공중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그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나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방성대곡하는 '인격적'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1896년 초겨울부터 교회예배에 참석한 영계는 성서를 읽으며 본격적인 기독교 연구에 들어갔고, 가족에게도 전도하여 부인과 자녀들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장대현의 땅 800평을 비롯한 전재산을 교회에 헌납하였고, 1897년 8월 15일에 리(Graham.Lee)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98년에는 평양 널다리골 교회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이때 영계는 널다리골 교회 안에 '예수학당'을 차리고 교육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숭덕(崇德)과 숭현(崇賢)학교로 발전하였다. 교회도 급진적인 발전을 보여 널다리골에서 장대현으로 옮겨 1900년에 2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한국식 교회건물을 마련하게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9월 장로회 공의회에서 영계의 발의에 따라 그해 11월 감사절 다음날부터 일주일간에 걸친 구국기도회를 열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가 폭넓게 진행되었다.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의 불길이 점화되었다. 이미 부흥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영계가 이 집회 준비를 위한 새벽기도회 인도에 나섰다. 그가 1905년 친구 박치록(朴致錄)장로와 함께 세계교회사상 최초로 시작했던 새벽기도회의 뜨거운 열정은 이 대부흥운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교인들이 예배 도중에 함께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의식인 통성(通聲)기도도 그의 창안이었다. 이처럼 그는 영적 감응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당대 대표적인 부흥사였다. 첫날부터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한 평양사경회는 집회가 계속되면서 더욱 고양되었다. 사경부흥회 기간에 있었던 회개의 역사는 이러한 개인의 내면적 죄를 고백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 도덕적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용서를 비는 실천적인 회개운동으로 진행되었다. 평양부흥회가 끝난 다음달에는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에서 영계의 부흥회가 개최되었으며, 8월에는 의주에서 사경회가 인도되었다. 이처럼 평양의 장로교, 감리교 연합부흥회와 평양신학교 부흥회를 통해 평양은 부흥운동의 발원지가 되었다. 1907년의 부흥운동은 곧 '백만명구령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 운동은 영계가 1908년 압록강 연안 순회집회를 마치고 평양에 돌아오면서 구체화되었고, 1910년 제 4회 노회에서 그가 부회장에 당선되고 전도국장을 겸임함으로써 정식으로 이 문제를 제안하여 백만명구령운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도대를 전국에 파송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결과 교인수가 급격히 늘어나, 1907년 3만 7000여명에서 1911년에는 14만 4000여명으로 4배이상 증가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을 겪은 후 이른바 105인사건으로 1912년 영계도 수난을 당했다. 당시 선천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그의 장남 진형이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겪다가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1918년에 죽는 등 개인적인 고통을 겪기도 했다. 1912년 9월에는 지방별로 조직된 7개 노회가 연합하여 제 1회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창립했을 때, 영계는 한국인을 대표한 부회장 겸 전도국장에 선임되었다. 이때 그는 한국교회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중국선교를 제안하여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영계는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에 그는 참가하지 못했고, 그날 오후 황해도 장연읍교회의 특별사경회를 마친 뒤 상경하여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미결수로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석방된 뒤 1922년부터 영계는 북간도를 비롯하여 전국을 대상으로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부흥회 행적은 35년간 설교 2만여회, 청강자 연 380만여명, 교회 설립 60여곳이며, 이수(里數)로는 연 6000리 총 20만리에 이르며, 그에게서 세례받은 사람이 3000명 이상이고 개종자가 7만명에 이른다. 그는 부흥집회 외에도 청년운동, 농촌운동, 금주운동 등의 사회운동집회에도 종종 연사로 나가 민족의 살 길을 외쳤다. 그러나 1926년 장대현 교회 청년계층 교인들이 길선주 목사 배척운동을 벌인 것과, 1933년에는 결국 길선주 목사가 자신을 지지하는 일부 교인들과 따로 이향리(履鄕里) 교회를 세우게 된 것 등은 그의 말년의 비극이었다. 이는 교회 안의 청년-원로, 진보-보수 집단의 갈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회주의적인 진보이념을 가진 이들이 그의 보수적 신앙에 대해 저항한 것이었다. 영계가 급격하게 '말세'를 강조한 것은 1931년부터였다. 그해 만주에서 일어난 한-중 농민분쟁인 만보산 사건이 터지고 이어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평양에서는 그 여파로 한국인들이 중국인 화교들을 습격하고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그의 종말론적 신앙은 더욱 강화되어, "예루살렘 멸망!" "평양멸망!"을 외쳤고, 자기 고향 평양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1934년 영계는 북간도와 함경북도를 순회하였고, 1935년 8월 평북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졌다. 그는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자 그해 11월 20일 평서(平西) 노회 사경회가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열렸을 때 이를 인도했는데, 마지막날인 26일 집회의 폐회축도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다시 뇌일혈로 쓰러져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임종 때 들은 마지막 찬송은 '예수가 거느리시니'였다. 영계의 장례식은 평양 노회장으로 12월 3일에 평양시내 각 교회의 종이 울리는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영계는 한국기독교회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며, 한국 장로교 노회 조직의 선봉이자 한국 교회의 대부흥가이다. 특히 그는 성경공부와 열성기도를 중심한 한국기독교의 특성을 세운 목회자로 기억되고 있다. 글/김 탁(철학박사)
평양 장대현교회 복원 모형도
복원된 장대현교회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이천 대월, 2007,9)
평양 장대현교회 복원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평양 교회 터- 평양시 중구 효자동 김일성 공원)
1백년 전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를 재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장대현교회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박물관 부지에 복원된 장대현교회의 외부 형태는 ‘ㄱ’자 형태로 당시와 같으며 내부 구조 역시 동일하다. 이덕주 부관장(감신대 교수)은 “1백년 전 당시 장대현교회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려고 노력했다”며 “크기만 120평에서 5분의 1 크기인 24평으로 축소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복원된 장대현교회에서는 일반인들이 옛날 찬송과 성경책으로 예배를 드릴 수도 있으며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회 장소로도 사용할 수 있다. 내부에서는 전시전도 열려 초기 선교 관련 자료들도 볼 수 있으며, 마당에는 평양선교 개척자(마포삼열, 리길함, 한석진, 길선주)들과 부흥사(최봉석, 이성봉)들의 기념비도 세워질 예정이다. 또 특히 그동안 세간에 공개되지 않았던 길선주 목사의 친필 8폭 병풍이 박물관 본관에 전시된다. 이 부관장은 장대현교회의 복원에 대해 “한국교회 대부흥의 요람이었던 장대현교회를 복원함으로써 이 시대에도 그 때의 기억을 살려 부흥의 초석으로 삼기 바란다”고 말했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된 장대현교회의 준공 감사예배는 2007.9.20일 오전 11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에서 드려진다. 한국장로교 독노회 창설 및 최초 7인 목사 안수 1백주년 기념행사도 함께 열릴 예정이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장대현교회의 복원과 함께 한국교회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역사를 새롭게 되돌아 볼 수 있는 미공개 희귀사진 및 엽서들을 공개한다. 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9월 3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한영제 관장이 오랫동안 수집해 온 자료들로 올해 여름 동안 정리 작업을 통해 총 2천여 점 가운데 선별한 2백여 점이다. 또한 이번에 공개된 자료들은 도록으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사진을 통해 한국교회사를 재정립하고 일반인들에게 한국교회의 역사를 알려 줄 이번 전시회는 교회사적 인물(알렌, 언더우드, 이상재, 전덕기, 이승만, 윤치호, 주기철, 길선주, 이용도 등)들의 사진과, 1907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가 제작한 유리 필름, 1920-30년대 외국 선교사들이 제작한 유리 슬라이드, 일제시대 기독교 선교 관련 엽서, 1919년 3월 3일에 거행된 고종황제 국장 행렬 사진엽서 등 귀중한 자료들을 한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자료들을 수집한 한영제 관장은 “한국의 교회사뿐만 아니라 근대문화사, 민족운동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진 및 그림엽서 자료를 정리하여 전시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과거의 아름다운 역사를 부활시켜 오늘날 우리의 삶에 재현하자”고 전했다.
비 뒷면
정문
정문
복원된 평양 장대현교회
복원된 평양 장대현교회
복원된 평양 장대현교회
복원된 평양 장대현교회
복원된 평양 장대현교회
부흥사(최봉석, 이성봉) 기념비
부흥사(최봉석, 이성봉) 기념비
평양선교 개척자(마포삼열, 리길함, 한석진, 길선주)들과 부흥사(최봉석, 이성봉) 기념비
기념비
길선주 목사 기념비
한석진 목사 기념비
마포삼열 선교사 기념비
리길함 선교사 기념비
복원된 장대현교회 준공감사예배
---가져온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