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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 - 01. (사랑의 힘. 탓. 새날의 빛으로. - 미루나무)
(성인들의 죽음에 관한 문제 - 홍시몬. 2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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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 사랑의 힘 - 미루나무
사랑의 힘
관계의 단절을 가져온 어둠
그 감옥에 있을 때
사랑을 거부하고
사랑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경험한다.
나는 너를 나에게 오지 못하게 하겠다.
보기도 싫고
만나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다.
미움이 증대되면
싫은 것을 넘어 폭력을 행한다.
언어의 폭력
눈빛과 표정의 폭력
말을 하지 않는 폭력
그리고 마침내 악마적인 에너지를 총동원하여
물리적 폭력과 더불어 죽이려는 마음에까지 이른다.
이것이 어둠에 갇혀 있는 동안 경험하는 진짜 어둠이다.
출구가 없는 감옥
그 참담한 어둠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빛,
별의 인도로 예수를 만나게 해준 빛,
누군가가 예수님의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굴려 주는 일,
누군가가 선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낄 때,
먼저 다가와 건네는 사랑스럽고 다정한 말 한마디,
말없이 다가와 일상의 불편을 덜어주는 작은 선행들,
어둠 속에서는 의심의 불을 켜고 있지만
일상의 작은 것들 안에서 변화는 일어난다.
외부로부터 오는 아주 단순한 사랑이
저수지에 뚫린 작은 구멍처럼 마침내 둑을 무너뜨린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감옥에서의 탈출이
외부로부터 누군가가 보내는 사랑으로
조금씩 조금씩 어둠을 비추기 시작한다.
의심은 변화를 시작하는 첫 신호다.
마음에서 정신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윤리적 의심으로
존재론적인 의심으로
마침내 전 존재의 와해를 불러오는 바닥의 진실과 직면하게 된다.
자신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바닥의 진실을 보게 되면
모든 원인이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둠이라는 혼돈 속에서 창조하는 에너지
그것이 사랑의 힘이다.
이 창조의 힘으로 시작하는 믿음은
혼돈 속에서도 다시는 흔들리지 않게 한다.
실존적인 어둠을 경험한 사람이
밖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으로 새로 태어나면
다시는 어둠으로 도망치거나 돌아갈 수 없다.
공현의 신비는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우리가 행하는 선의 실천으로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
2020, 1, 5. 주님의 공현 축일에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형제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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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 탓 - 미루나무
탓
탓의 어리석음은
자신 안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투사시킴으로
관계를 최악으로 만든다.
남을 탓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영이 활동하는 영역인
창조적 불안과 복음적 불안을 없애버리기 때문에
분별과 성찰을 할 수가 없다.
개인의 자유와 인격이 무시되고
자기가 만든 법으로 조종하고 통제하기 시작한다.
선인과 악인을 구분 짓고
나는 선하지만 너는 악하고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죄인인 너를 구원해준다는 명분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횡포와 폭력은
상대방을 출구 없는 감옥에 가두고 자신의 말을 들을 때까지
끝없는 통제로 관계를 질식시킨다.
자신이 선하다는 의식 속에서 바치는 기도는
자신의 자의식을 강화하고 스스로 의로움에 집착하게 하여
관계를 지옥으로 만든다.
나는 잘했는데
너는 잘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늘 화가 나 있다.
탓하는 사람이 찾는 것은
결국, 자신이 지배하는 나라다.
협력하여 만들어 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이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단절과 미움, 앙갚음과 싸움만 있을 뿐
평화와 자유와 기쁨이 없다.
하느님과 연결된 사람은
어둠을 짊어진 채 십자가의 길을 간다.
너를 탓하기보다 내가 죽는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길은 희망에 차 있다.
죽음 후에는 반드시 새로 태어나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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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 성인들의 죽음에 관한 문제 - 홍시몬
성인들의 죽음에 관한 문제
2020. 01. 03. 03:03.
성 프란치스코는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셨다고 한다.
젊은 시절 프란치스코처럼 방탕한 한량이었다가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영성가이자 자서전 <칠층산>의 저자로 유명해진 토마스 머튼은 방콕에서 열린 국제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태국의 무더운 날씨에 지친 나머지 샤워를 하고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젖은 손으로 선풍기를 틀다 감전사하고 말았다.
열다섯 살에 리지외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한 아기 예수의 데레사는 수녀 생활 십년만에 폐결핵으로 각혈하다 선종하였다. 아마도 영양실조와 열악한 환경 탓이었을 것이다.
열다섯 살이면 피자 햄버거 고기는 아니더라도 충분한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골고루 섭취해야 할 나이에 금육과 단식은 물론 짚 요 위에서 자고 맨발에 짚으로 만든 샌들을 신었으며 고복(사람의 머리털로 짠 까칠한 고행복)을 수도복 안에 상시로 입었으며 심지어 가시로 엮인 띠를 맨몸과 팔에 두르고 살았으니 오죽했으랴.
육체노동도 만만치 않아 아기 예수의 데레사의 그 아름다운 생전모습이 담긴 사진 가운데 빨래터에서 수녀들이 빨래를 하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데레사의 시신이 아직도 땅속에서 잠들어 영원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 비록 성녀께서는 천상에서 장미꽃잎을 지상으로 뿌리고 계실지라도 - 리지외 대성당의 유리관 안에서 사람들에게 전시되고 있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끔직하기까지 하다.
도미니코 사비오 성인은 소년의 나이에 역시 각혈과 빈혈, 영양실조, 결핵 등으로 짐작되는 병으로 죽었다.
효과도 없는 피를 주사기로 뽑아대는 치료를 수시로 받은 병상에서의 창백한 어린 소년.
공자그의 성 루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차라리 로마 콜로세움에서 사자와 호랑이에 물려죽었더라면.
잔다르크는 비명을 지르며 장작더미에서 불타 죽었다.
마더 데레사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가 어쩌면 실제로 눈으로 본 두 분의 성인이시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을 방문하셨던 두 분이 시성되는 것을 우리가 목격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교황청 시성 절차는 예외적인 경우는 있으나 최소 5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신앙교리성(신앙교리성 장관 출신으로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되신 요셉 라칭거 추기경이 있다.)의 생애 조사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증거 수집과 증언 수집, 기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의 재판과 절차를 거친다.
그런데 이렇게 때로는 허망하게 그러나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귀천하신 성인들의 죽음을 앞 둔 공통점이 있다. 그분들은 죽음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고통을 미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는 수녀원 병실에서 그의 큰언니가 받아쓴 수첩에 나오는 증언대로 자기는 너무 고통스럽고 아파서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와중에도 성녀는 자신의 피를 펜촉에 찍어 사도신경을 종이에 남긴다.
성 라우렌시오가 철판에 구워져서 죽을 때 이쪽은 다 구워졌으니 반대편으로 뒤집어 달라는 말을 했다는 것은 후대 사람들의 과장과 왜곡일 뿐이다.
심지어 예수님도 십자가형의 고통에 몸부림 치셨던걸 생각해보라.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들 죽음을 앞두고 극심한 신앙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과연 계신가에 대한 근원적인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이었다.
생각해보면 과연 너무나 당연한 질문 아니었을까.
죽음을 앞두고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신앙의 허무에 대해 괴로워하며 심지어 신앙을 잃을 뻔한 고백을 마더 데레사나, 아기 예수의 데레사 같은 분들은 증언하고 있다.
그러한 질문 끝에 드디어 종국적으로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 나의 창조주, 나의 구원자로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대단원을 맞이하게 된다.
<오소서 창조주여>로 시작하는 그레고리안 성가 VENI CREATOR를 꼭 유투브 등에서 찾아 다시 들어보시기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참으로 냉담했던 신앙을 회복 시켜주는 성가이다.
듣고 가사를 음미하면 저절로 눈물이 나오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
신앙인은 죽을 때 매장을 할지 화장을 할지 수목장을 할지 어느 곳에 묻을지 어떤 수의를 입을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염려를 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 아닌가.
육신을 벗어나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가는 귀천에 거추장스러운, 불필요한 걱정일 뿐이다.
인간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무슨 말이냐면 배터리로 작동하는 북치는 토끼인형이 배터리가 다해 작동을 멈추면 그것으로 끝인 것과 같다.
죽음은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교리문답서에 나오는 것이다.
영혼은 프랑시스 잠의 시구처럼 <기도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지옥은 끝내 하느님을 거부하고 아담과 이브처럼 낙원을 스스로 벗어난 사람(하느님이 쫓아내셨으나 자유의지의 선택과정에서 본다면)에게 해당되는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 상태이다.
천국은 창조주 하느님과의 영원한 함께함이다.
아기가 엄마 품에 있을 때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가장 행복하고 사랑으로 충만한 것처럼, 그런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어 더 이상 필요한 바가 없는 상태이다.
아직도 천국이 미드 <더 굿 플레이스>처럼 알록달록한 페인트의 예쁜 집에 분수가 나오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평화로운 동네인냥 착각하는 무지한 분은 적어도 이 글을 읽는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슬퍼한다.
혈육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죽었다고 하면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다.
엄마가 죽었으니 천국에 가셨겠구나하며 기뻐 날뛰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이승에서의 삶에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한스러움일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현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연극이라고도 하고 소풍이라고도 하고 제각기 낭만적인 혹은 감성적인 표현들로 인생을 노래한다.
죽음을 항상 바라보고 기억하고 준비하라고 한다.
웃기는 얘기다. 죽음이 닥치면 그냥 받아들이면 되고 내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이 두렵다는건 그리스도교 신앙인들 사이에서 제일 어이없는 코미디이다.
뭐가 두려운가? 가족과 헤어져서? 그 가족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뭐가 두려운가? 천국에 못가고 지옥에 갈까봐? 지옥이 두려우면 왜 그렇게 살고있는가?
뭐가 두려운가? 창조주이신 하느님 만나는게?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나?
도대체 두려움의 실체가 없다.
두려움도 관습이고 습관이다. 나쁜 버릇이다.
물론 죽음을 준비하라는 얘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을 바라보며 현재를 충실히 잘 살라는 의미에서 하는 좋은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꼭 죽음을 전제로 죽음의 상대적 개념으로 현재의 삶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현재는 누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계속되고 흘러가는 것이며 죽음은 그 종착역이고 종착역에 도착했으면 인생이란 지하철에서 내리면 되는 것이다.
내리면 오느라 수고했다고 하느님이 반겨 주실 것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그리스도교 구전에 의하면 미카엘 대천사장이 말이다.
그리고 지옥에 갈까봐 두려워 덜덜 떨고 있는 우리에게 한마디 할 것이다.
쫄지말고 천국으로 들어가라고. 하느님은 태초부터 널 기다리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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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 새날의 빛으로 - 미루나무
새날의 빛으로
지우개로 지우고
새하얀 도화지를 받았다.
점 하나 찍고
첫발로 발자국을 내었다.
만물과 더불어
유려한 가락으로
창조주를 찬미하며
새해 새날을 축복해주시기를 빌었다.
주님!
우주 안에 모든 행성을 축복하소서
지구 안에 모든 피조물을 축복하소서
모든 나라를 축복해주시고
모든 사람을 축복해주시고
모든 관계를 축복해주소서
서로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고
돌보아야 할 이웃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이들을 축복해주소서
자신의 삶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드러내는 이들을 축복해주소서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유혹에서
선을 선택하는 이들을 축복해주소서
정직하기 위해 손해를 보는 이들을 축복해주시고
선의 흔적을 감추는 이들을 축복해주소서
자신을 해체 시키는 이들과
바닥으로 내려가는 이들을 축복해주소서
일상에서 발견하는 하느님!
관계 안에서 발견하는 하느님!
피조물 안에서 발견하는 하느님!
말씀과 성사 안에서 발견하는 하느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과 더불어
온 세상에 자유와 해방의 복을 주소서
팔을 펼치시어
새날의 빛으로 온 세상을 축복해주소서
2020 새해 첫날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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