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강변에서 / 지음 남성대
노들강변에 비바람 불어오니
옷깃을 여미며 고개숙인다
새남터
피로 물든 터전위에
거룩한 뜻 깃든 이곳
한이 서린 원혼들 구천을 떠돌아다닌다
귀곡이 변하여
산장이 되었고
충절의 표상이 되었네
사도들
순명키위해 박해를 견디다
제물이 되었던
새남터엔
순교자의 기도 소리 귓가에 쟁쟁하구나
''주여! 저희를 용서하소서,,
애절한 눈물이
때 아닌
겨울 비가 되어 내리고 있네
강건너 여의도 불빛도
숙연하게
사육신의 비명소리
바람결에 들리는 듯,
순교자의
안타까운 기도 소리
멈추지않네
강건너 노들나루
로돌(老乭)이 흑석이 되어
무자비한 형장이 거룩한 성전으로
바뀌어
물살에 희석된 빗물처럼
모든 것 끌어안고
대해로 흘러가야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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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새남터 가톨릭성지 기념성당 정측면
서울에 위치한 새남터 가톨릭성지 기념성당의 정측면 모습이다. 1996년 이전 촬영.
유형지명/지명시대조선성격가톨릭 순교성지소재지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정의
가톨릭 순교성지 중의 하나.
내용
지금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앞 한강변의 모래사장으로, 일명 ‘노들’ 또는 한문자로 음역하여 ‘사남기(沙南基)’라고도 한다.
조선시대는 연무장(鍊武場)으로 쓰였으며, 때로는 국사범 등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던 사육신이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그 뒤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이곳에서 처형당한 뒤로는 주로 천주교신자들의 순교지가 되었다.
즉,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Imbert, L.M.J.)·모방(Maubant, P.)·샤스탕(Chastan, J.)이, 1846년 병오박해 때는 첫 한국인 신부이었던 김대건(金大建)과 현석문(玄錫文) 등 신자들이, 1866년 병인박해 때 베르뇌(Berneux, S.F.)와 도리(Dorie, P.H.) 등 5명의 서양인 신부들과 정의배(丁義培)·우세영(禹世英) 등 많은 한국인 신자들이 이곳에서 군문효수에 처하여졌다.
이렇듯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으므로 한국천주교에서는 1950년새남터로 추정되는 인근의 땅을 매입하여 순교기념지로 지정하는 동시, 1956년 ‘가톨릭순교성지’라는 기념탑을 세웠고, 1984년새남터순교기념대성전이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이 성전은 종래의 서양식 교회건축양식을 탈피한 순 한국식 건물로, 기념관·전시관·기념성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국내성지순례10/새남터 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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