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평가를 통하여 그에 대한 심판과 역사의 교훈]
광해군이 역사에 폭군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세력에서 밀려난 후, 득세한 권력층의 시선에서 사초를 적은 당시 사관들의 위치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보면 광해군은 폭군이 아니라 성군으로 평가되기도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광해군 입장이 되어서 일부 사초에 폭군 묘사는 정말 억울할 것이다.
광해군은 선조 승하 후, 비록 왕이 되었지만 당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이었다. 우유부단하고 겁많은 선조는 임진왜란에 대해 대처를 못하면서, 광해군에 강제로 국정을 임시 떠맡게하고는, 이 일을 수습되니까, 시기하고 질투를 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 후 잘못한 부분 중에는 선조가 승하하고 왕이 되자, 이복 동생 영창 대군을 귀양보내 방을 뜨겁게 해서 죽게 만들고, 어머니 (친어머니 아님, 계비) 인목대비 (광해군보다 나이가 젊었음)를 궁에 가두어 버렸다. 또한 자신의 친형 임해군을 사사 했었지요. 그리고 중립외교 (명과 후금)를 통해 당시 반대층의 신하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를 곱게 생각지 않았던 층에서는 당연히 명나라의 은혜도 모르고, 폭군이라 들을 만도 하지만 그래도 연산군 같은 인간은 아니었다.
광해군의 입장이 되어서 폭군이 아니라고 해명해 보면,
광해군 : 저는 폭군이 아닙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한건 당시 외세 정세에 대하여, 조선을 강대국으로 부터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나의 의붓 형제 영창 대군과 친형 임해군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왕위가 없어질 까봐, 특정한 자기 지지 기반이 약했던 나로서는, 당시 집권층들의 실세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왕자 시절부터 이 나라를 위해 힘썼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선조 임금은 임진왜란이라는 크나큰 전쟁의 수습을 방치하다시피하고, 내가 일을 수습하고 백성들 에게 환영을 받자, 나를 시기 하고 질투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서적 편찬, 사고 정리 등 내치에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공납제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경기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했습니다. 왜 내가 잘못한 일만 떠들고 나의 업적에 대해선 과소 평가하는 것인지요? 나는 조선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힘을 썼습니다. 나를 몰아낸 서인 들은 대북파가 집권하는 것이 불만스러워,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사사하고 인목 대비를 궁궐에 가두었다는 것만 들춰낸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광해군과 대다수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그는 분명 성군이었습니다. 전후복구사업 (토지조사, 호구조사 등등)을 벌여 다시 세금의 전반에 대해 백성을 위하여 조사하였습니다. 당시 즉 임진란직후 광해군은 왕이 되자마자 정권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다. 의병장들 출신으로 구성된 북인 (곽재우는 아니죠. 북인계열은 주로 남명조식의 제자들입니다.)들의 정권싸움에 그는 휘말리게 되고, 결국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맙니다. 이건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 일기등 중요한 사초는 주로 왕이 죽고난 후나 물러난 후부터 작성이 되기 시작합니다. 당시의 사관들이 쓴 글에 의존. 이는 철저히 주관이 개입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복동생을 죽인 광해군은 유교 윤리에 따져보면 완전히 폭군이고 미친놈 취급을 당했죠. 그리고 이 사초를 작성하던 시기가 바로 인조때 입니다. 이때는 광해군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서인이 집권하고 있었던지라 그 내용들에 주관이 개입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서인 혹은 남인의 기질이 강했던 관리들은 사관들의 내용에 의존하여 적기도 했지만 자신의 주관이 개입되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지요. 또 하나의 폭군으로 남을 수 밖에 (광해군 일기의 내용상) 없었던 이유는 바로 중립정책, 이는 광해군이 강대국의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 이를 실시했다는 것이 높습니다. 전후복구에 신경을 써도 모자랄 판에 또 전쟁이라니, 그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죠. 친 명쪽에 가까웠고 배금을 하는 서인측 입장에서 볼때 이것은 그들의 쇠약이지요. 그것이 또 광해군 일기 주관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지요.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토지조사, 호구조사 등을 철저히 하고 대동법을 시행시켜 그들에게는 성군으로 보였을 수도 있을겁니다. 호패법 실시는 좀 그렇겠지만, 게다가 광해군 시기엔 큰 전란조차 없었으니 백성들에게 이보다 좋은 태평성대는 없었겠죠. 정치적으로는 폭군일지 몰라도 민심 면에서는 성군으로 보여지는 면인 것이지요. 오히려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나라를 파탄지경까지 몰고간 서인들이 더 미쳤다고 여겨집니다만, 그는 어찌보면 효종과 비슷한 면이 많이 보일겁니다. 군사훈련, 성수리 등을 통해 국방력을 강화했지요. 효종때 북벌정책을 시행했다고 많은 분들이 알고계시나 고작 모아봐야 10만명인 군대로 청나라를 상대하기엔 무리였죠. 당시 군사훈련, 성벽수리등이 북벌정책으로 보인거 같습니다만, 사실상 북벌정책을 일어날 수도, 일으킬 수도 없는 현실이지요. 결과적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국가가 강력해지고 부강해졌다면 폐위한 일이 옳은 일이나,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것을 보면, 자신들의 개인 집단 이익 추구를 위한 싸음에서 지지 기반이 약하여 제대로 꿈도 펼쳐보이지 못하고, 희생된 왕이 된 것입니다.
광해군의 생모였던 공빈김씨가 생전에 다른 후궁들과의 마찰이 심했고 광해군을 나은 산후병으로 숨지면서, 선조의 미움을 받고 외조부인 김희철마저 임란중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전사하는 등, 지원새력이 없는 상태에서 성장 하였던 것입니다. 그나마 광해군을 옹호해주고, 변호한 이가 공빈 김씨에 이어, 선조를 극진히 모셔 총애를 받던 나중에 인조의 할머니가 되는 인빈 김씨입니다. 후에 광해군은 그런 인빈 김씨에 극진한 감사의 말을 하기도하지요. 그런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된 것은, 임해군이 광폭하여 전란 중에 민가에 피해를 많이 주는등 횡포가 심해서였던 것이기도하지요. 반면 광해군은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는 한편, 군량미를 모으는 등 많은 공을 새우고. 전란 후에도 동궁으로 혼란한 당쟁와중에서도 선조를 돕는등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럼에도 선조는 광해군을 미워해서 신성군을 세자에 책봉하려하고 서인세력이 임해군을 세자책봉을 하려하지만 실패하지요. 전란의 와중에 선조가 북쪽으로 자리를 비울시, 세자로 책봉되고, 분조를 만든 선조를 대신하여 임진왜란시 승리 불씨를 살리는 업적을 세웠답니다. 그러면서 많은 백성으로부터 신망과 지지를 받지만, 선조로부터는 인정을 못받고 심한질책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선조 인품은 방계승통에 대한 컴플렉스나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광해군을 시기하는 내용이, 불멸의 이순신 업적을 살펴보면 어느정도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건강이 위중해진 선조가 어린영창대군을 세사로 옹립하려고하다 결국 광해군에 왕위를 계승한다는 교지를 내린 다음, 약밥을 먹다 체해서 승하합니다, 이사건은 광해군이 배후에서 선조를 독살했다는 의혹 재기로까지 번지는데 인목대비가 현실성 없다 옹호해줌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후에도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중북파 소현세자를 지지했던 소북파의 당쟁(?) (=세력다툼, 오늘날의 여당과 야당 등이 있듯이)이 첨해화하고, 그걸 해결하려는 광해군은 많은 노력을 하지만 실패하죠. 광해군의 평가 중에 형제들을 척살했다는 주장들은 이러한 왕위쟁탈을 위한 당파 싸움에서 살아 남으므로서 생긴 결과물일 뿐입니다. 이러한 당파싸움을 해결하기위해서 남인계를 등용하는 등의 노력을 하지만 오히려 지지기반인 대북파와 반발하는 원인이 됩니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러한 조선의 갈등을 침소붕대하여, 조선말기에 일본 사학자들의 그릇된 표현 즉 당쟁으로만 몰고가는 한민족의 정기를 흐르게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 왕권 귄위 하에서도 많은 언로가 열려져 있었다는 것은 주변 어느 나라를 보아도 자랑 할만한 점이란 것입니다. 단지 그 운영에 있어 사심이 많은 경우 우를 범한 것이다. 당시 시대상에서 신하들의 쿠데타인 것이지요.
광해군의 업적과 정책은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여 전후 복구 사업을 실시하여,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억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대동법과 양전사업을 펄치고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고 소실된 서적출판에도 힘씁니다. 실리적 외교정책을 기반으로 군자적방어가 용이하고, 대륙과의 해상교역이 가능한 파주로 수도를 이전할 계획을 하나 계속 미루어지다 실패하고,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자, 병기와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해서 국방에 힘씁니다. 후금이 심양을 공격하자 강홍립·김경서 등을 지휘관으로 원군을 보내는데, 적극적인 공세를 하지말고 전황을 잘 판단하고 행동하라고 이르고 상세한 보고를 하도록 명합니다. 이에 강홍립 등은 화살촉을 빼고 쏘는등 소극적인 공세를 하다 모문룡이 패주하자 후금에 투항여 해명합니다. 임진왜란에서 이미 명군의 전투력은 쇠한 상태이고, 명군의 군율 또한 해이하고 방만하기만 것이 들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명의 운이 다했다 판단하여 내린 결정임으로, 명과 후금사이에서 후금과 화의를 유지하는 이중적인 중립외교를 펼쳐, 실익을 추구하였으나 서인계의 반발을 삽니다. 결국 서인계에는 이 방법은 아주 효과가 좋아서 실질적으로 친금정책을 편 광해군이 패위 되었지만, 오히려 명에 간 서인세력을 문전박대 당하고 22개월 후에나 인증을 받게됩니다. 당시 광해군은 후금은 비빌리에 조선과 화친조약과 동등한위치의 형제국가를 요청하기도 합니다. 광해군의 패위는 1623년 서인인 이귀, 김류, 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후에 횡포를 부리다 탄핵 당한후 다시 모반을 꾀함 등이,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綾陽君) 종(倧)을내세워 궁궐을 장악합으로서 패위됨. 광해군의 횡포를 기록한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객관적이지 못한 자료가 있는 것이지요.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하여 전란후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민란이 없었고 오히려 인조때 민란이 빈번한점, 처절한 왕권경쟁과 당파 싸움으로 인한 원한 관계, 그리고 묵과되는 것중 가장 중요한 점이 대동법을 근간으로하는 광해군의 개혁정치입니다. 대동법은 특산물을 내게하는 공납과 호단위로 부과하던 세법을 토지단위로 과해서 형평성과 효율성, 세수확대와 쌀로 통일해서 내게한 다음 그 대동미로 다시 필요물품을 사서 상업을 성장시키는 부수이익까지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였던 것입니다. 광해군은 강력한 대동법 시행하고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인조반정으로 대동법은 반쪽 개혁으로 머무르고 기존의 공납등의 패단이 다시 살아나고 대동법 기본취지와 다르게 운영되면서 의미를 읽게됩니다. 결국 세수확대로 백성들의 부담만 가중시키고 아전들의 횡포만 키우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당시 처절했던 권력층들의 세력싸움과 왕권경쟁의 결과로 광해군은 패위되서 폭군의 굴레에 갇치게 된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더 큰 파장을 일으키는데 사대주의 사대부들이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으므로서, 신생후금을 배척하고 국운이 다한 친명정책으로 회귀합니다. 그것은 결국 정묘호란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가져옵니다. 안으로는 근대화의 개혁이 무산되고, 봉건시대에에 머무르고 대외적으로는 신생강국과의 화친기회를 날리고, 패전국으로 전락하고맙니다. 정묘호란후 다시 개혁을 꿈던 소현세자가 독살되면서, 조선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국가로 자리잡게 된게 아닌가 합니다. 국가전체와 일반 백성의 관점이라면 분명 성군으로 평가되기에 부족함 또한 없습니다.
영의정까지 역임한 유성용이 관직 퇴임후 낙향하여 작성한 "징비록"이 그 빛을 발휘 못된 것은 당시 일부 권력층의 안목이 근시안적이고, 당시 양반 계급의 굴레 속에서,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인 것이다.
* 본 내용에 대한 상업성이 없음을 고지. 온고지신의 자료가 되었으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