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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와 차별의 동학을 어떻게 깰 것인가
공현
공교육이 차별의 생산지라는 모순
특정한 차별이 다른 여러 차별들의 뿌리나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초기에 체험한 차별이 학교 등 교육기관에서의 차별일 가능성은 높다. 사람들의 생애 주기 속에서 차별 경험의 출발점에는 공교육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 일어나는 차별은 교사나 학생 개인의 편견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학교에서 보편적으로 차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학교 구성원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재 학교교육의 원리 자체가 정상과 비정상을 분류하고 기준에 따라 사람을 평가/서열화하여 차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학교는 ‘정상적인 발달 단계’에 따라오지 못하며 학교가 요구하는 학습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학생들을 장애인으로 분류하는 역할을 해왔던 바 있다.
학교교육이 만들어내는 차별의 핵심에는 능력주의(meritocracy)가 있다. 모두에게 제공되는 학교교육은 그것만으로 최소한의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처럼 간주되며, 학교교육 안에서의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공부하고 지필고사 등 평가를 통해 나온 점수와 순위는 곧 개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학교에서는 능력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도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가르친다. “개인이 받는 교육의 양과 종류는 능력의 척도로 여겨지며 동시에 직업적 적격성 및 직업과 관련된 물질적인 보상을 평가하는 기준으로도 사용된다. 교육은 능력주의의 핵심 동력이다.”
교육권은 인권의 중요한 내용이며, 교육권을 실현하는 제도로서 공교육은 평등한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해 기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공교육이 차별이 정당하다는 이데올로기를 학습시키고, 심지어 차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직시해야 할 현실이다. 이는 학교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에서 만들어지는 서열화와 차별은 학교 졸업 이후까지도 학력·학벌 차별 등의 형태로 이어진다. 또한 학교교육의 이러한 현실은, 평등의 개념과 감각을 익히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속성을 반영하고 재생산한다. 학교에서 사람들은 ‘평등’보다는 ‘공정’을, 능력과 자격에 따른 차별을 배운다. 시험 성적이 좋지 못한 자, 좋은 일자리를 갖지 못한 자, 성공하지 못한 자는 그만한 노력과 능력이 없어서 자기의 선택과 책임에 따라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능력주의 이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능력주의, 메리토크라시는 개인의 능력(=merit)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보상과 인정 시스템을 말한다.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이 개념을 제시하면서, 이때의 능력은 지능과 노력의 합이라고 정의했다. 이후 미국의 기능주의적 사회학에서는, 사회적 공헌과 성과·실적에 따라 사회적 보상과 지위 분배가 일어나는 것을 산업사회의 특징으로 보았다. 다니엘 벨은 후기 산업사회가 교육 수준과 성과에 따라 차등된 소득과 지위를 얻는 능력주의 사회라고 주장했다. 능력주의는 때로는 측정된 지능이나 교육 수준에 따라 차별하는 체제를, 때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과나 실적에 따라 차별하는 체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한 마이클 영은 이를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했는데, 능력주의로 인해 인간이 평등하다는 신념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차별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또한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가 파국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능력주의가 능력을 상속, 세습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상류계급을 세습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며, 상류계급에서 능력이 낮은 자식에게 편법적으로 지위와 특권을 세습하려고 하는 모습이 나타나서 능력주의가 혁명으로 전복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러한 전망조차 다소 낙관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능력주의는 이미 ‘능력이 있으면[지능이 높으면] 성공한다’가 아니라 역으로 ‘저 사람이 성공한 것은 무언가 특출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능력/노력이 부족했던 거겠지’ 하는 식으로, 현실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더 많이 작동하고 있다. 게다가 능력이 세습되고 불평등이 확대되는 사회 현실 속에서도, ‘능력에 따른 신분 상승의 공정한 기회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뿐이다. 자식에게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능력 인증’과 지위를 제공하려는 행태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철저한 능력주의를 바라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던 소위 ‘국정농단’ 게이트의 중요한 고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인이 그 자식을 ‘명문대’에 부정 입학시켰다는 의혹이었다. 이에 분개한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더 공정하고 투명한 능력주의’ 사회였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에 대해 반대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박근혜 게이트의 비유를 들고 나오는 것은 이러한 동학을 드러낸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별이 생기는 것이고 이러한 불평등은 정당하다는 능력주의는,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노동자를 관리·통제하는 핵심 이데올로기이다. 동시에 능력주의는 제도적 장치와 인력 배치 및 선발의 원리로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체제라고도 할 수 있다. 능력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작동하면서 자본주의를 정당화한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가 평등을 대체하면서, 불평등에 대해 분노하는 움직임도 다시 능력주의로 돌아오게 되는 상황에 빠졌다. 능력주의는 분명히 차별이지만 차별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평등’, 더 정확히 말하면 ‘공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학력·학벌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개인의 진정한 능력/실력을 평가해야 한다는 이야기나 ‘고졸 성공 신화’로 치환되는 것이 대표적 예이며, 대학입시제도에 대해서 ‘공정성’을 요구하며 정시 확대를 주장하고 지역균형선발 등에 반감을 보이는 것도 또다른 예일 것이다. 한국 사회는 능력주의 이외의 평등을 상상하고 이야기하고 만들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다.
희망적인 것은 능력주의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주장이 2000년대 이후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맥락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능력주의는 허구이고 완전하고 진정한 능력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능력주의는 허구다》(원제는 《The Meritocracy Myth》로 미국에선 2004년 출간되었고 한국에는 2015년 번역 출간되었다),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원제는 《Success and Luck》으로 2016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한국에는 2018년 번역 출간되었다)와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는 능력주의가 민주주의/공화주의에 해악이며 능력주의 원리를 극복해야 한다고 그 폐해를 강조하는 것이다. 강준만의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가 대표적이고, 장은주의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역시 능력주의가 민주주의와 충돌하고 교육에서 능력주의 원리를 극복해야 민주주의 교육이 가능하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학계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발견되며, 대중적으로도 과거에 비해 능력주의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늘어나고 있다.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담론을 비꼬는 ‘노오오오오력’ 등의 신조어가 이를 방증한다.
‘공정’을 넘어, 그리고 ‘효율’을 넘어
나는 우선 능력주의가 평등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상황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본래 능력주의는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일률적 평가로 능력을 측정하여 선발한다는 방식의 효시격인 과거시험제도도 내세웠던 것은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었지, 모든 선비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준다는 것 따위는 아니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능력주의에서 수단일 뿐이다. ‘진정한 능력주의’는 불가능하고 능력주의는 평등이 될 수 없으며, 능력주의는 선발하는 측(국가, 기업, 학교 등)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문제의식을 가진 여러 사회세력과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능력주의가 평등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왜 존재해야 하는가? 결국은 능력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효율성’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더 큰 권한을 가지고 결정과 지휘를 하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으며, 적당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에 맞는 역할과 기능을 하면 사회에 더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효율성의 논리가 모든 것을 결정해서도 안 된다. 일단은 자본주의 안에서도 능력주의가 적용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나누고, 능력주의 원리에 제한을 걸며, 평등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는 영역을 확보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개인의 능력에 맞추어진 논의의 초점을 사회와 제도로 옮겨가면서 이루어질 것이다. 교육과 같은 공공영역이 대표적으로, 학생 개인의 학습 결과를 평가하는 데서 벗어나 국가와 사회와 학교의 교육의 의무를 먼저 물어야 한다. 노동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개별적인 차별의 원리와 제도를 바꾸어나가는 싸움은 다양한 현장에서 벌어질 것이다. 제일 처음 언급한 학교교육에서 시험성적에 따라 학생을 차별하고 입학 기회를 다르게 부여하는 현실을 바꾸는 것 등이 주요한 과제이다. 그 외에도 능력주의를 내세운 여러 사회적 차별과 싸우고 이를 시정하고 다른 원리를 심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차별금지법이 하는 기능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차별금지법과 같은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것이나 제도를 바꾸는 일 등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중요하다. 경쟁과 차별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하지만, 어떠한 경쟁이고 그 결과 어떤 가치의 분배가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은 사회 체제의 문제이며, 국가는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대한민국의 경우 대학입시제도를 결정하는 것은 정부이고, 1995년에는 기업들의 입사 필기 시험 폐지를 정부가 요구하기도 했다. 국가는 능력주의 체제에서 무슨 능력을 평가하고 어떻게 보상을 할지를 정한다. 어떤 교육과정으로 어떤 지식으로 어떤 내용으로 시험을 치르고 자격을 부여하느냐 하는 것은, 국가가 어떤 능력을 사람들이 학습하고 수련하게 할지 어떻게 인력을 관리할지 하는 의도를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다. 국가에 대해 교육과 평가, 선발과 차등 과정 등에서 능력주의를 약화시키거나 극복하기 위한 조치를 계속 요구하고 얻어나가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대선 후보 당시 내세웠던 “기회는 평등할 것, 과정은 공정할 것,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표어는, 비록 ‘평등’을 직접 언급하고는 있지만 결코 대안은 될 수 없었다. 이 표어는 능력주의 세계관을 아주 잘 담고 있다. 평등한 것은 ‘기회’이고 ‘결과’가 아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회-과정-결과의 도식 자체가 개개인간의 경쟁으로 사회를 이해하고 구조화하는 것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비유는 달리기 등의 경주이다. 이때 우리는 출발선(기회)이 같았는지, 규칙(과정)은 공정한지,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된 승패(결과)가 정당한지를 보게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나 삶은 개개인이 참가하는 경주나 시합이 아니다. 경주나 시합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일 뿐이다. 사회 전체를 경주로 보면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의 속도와 타임을 재기 위한 시험과 평가로 삶을 채워나가야 하고, 일방적인 평가의 권력은 가려지게 된다. 평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경주 바깥과 주변을 보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경주의 세계관을 벗어나 다른 세계관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미래의 이상을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파악하고 세계를 설명할 말을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권운동이 능력주의를 넘어 다른 평등을 이야기하려면 우리가 어떠한 세계관을 이야기하고 어떤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제안할지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