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 08. 09 주일 낮예배 메시지
제목: 주기도문 강해(6)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참고도서: 주기도문 강해(김세윤), 주기도와 하나님 나라(Tom Wright)
설교를 위한 묵상 및 문제 제기
주의 기도가 하나님의 책임과 동행, 통치와 구원을 고백하는 것이라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마실 것과 먹을 것, 그리고 입을 것에 대한 간구가 아닐까? 도리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늘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므로 우리가 구하는 바램은 믿음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안심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에 더 집중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닐까? 그렇게 말씀하신 주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라고 가르치신 까닭은 무엇일까?
“이제 하나님 나라를 구했으니 저의 필요인 일용할 양식을 구하겠습니다.” 또는 “이것도 구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김세윤 교수는 초월로부터 우리의 필요가 진정으로 채워질 수 있고, 아담적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뢰하는 삶을 살 것을 결단하라는 의미로 양식기도의 의미를 해석한다. 즉,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라는 말이다. 그는 안식일도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 주일에 한번 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의 주인이심과 공급자 되심을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라는 말이다. 여기서 문명낙관론이 부정된다. 즉, 하나님 없는 삶이나 문화는 그 자체로 더 악한 것을 유발하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톰 라이트는 일용할 양식 기도에서 양식의 의미를 ‘하나님 나라’로 이해하여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양식은 천국 잔치와 연회를 약속하시고 행동으로 시위하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몸 주심으로 이해한다.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심으로 참 안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선언하신 것처럼, 금식해야 할 시간에 연회를 베푸심으로, 그것도 죄인들과 어울려 잔치를 베푸심으로써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으셨다. 안식일 치료는 참 안식이신 주님을 상징하듯이, 일용할 양식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잔치를 하라”는 뜻이 될 수 있다.
배를 채울 양식을 주시고 나서 이를 통해 더 깊은 필요와 바람을 채울 더 깊은 양식을 공급하신다. 성경은 이렇게 자연스럽고 깊은 갈망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응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이 새 남편을 얻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나님께서는 나오니의 간절한 바람에 응답하시고 룻을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신 다윗의 선조가 되게 하셨다.
한나는 자녀를 간절히 바랐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사무엘을 주셨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세상의 위대한 민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소망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응답하셨고, 이들을 특사로 파견하여 자신을 온 세상의 새로운 왕으로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 바람의 열기 속으로 당신의 시원함과 향기를 불어넣으소서”-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는 우리의 바람이 제거되거나 사라지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배부르기를 구한다. 우리의 바람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때에 채워지기를 구하는 기도다. 사실 병 낫기를 세 번이나 구한 바울의 경우,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이며, ‘네가 약함으로 온전하여 짐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도리어 자랑할 수 있었다. 그의 바람과 필요는 병에서 나음을 입는 것이었지만, 그의 간절한 기도는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필요와 바람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다. 좀 더 돈이 필요하다든지, 자녀가 주님께 나와야 한다든지, 아니면 우리의 형편을 낫게 하는 조금 더 필요한 것과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것을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찾게 하는 기회가 된다.
설교 목적: 지난 주까지 다섯 번의 설교를 통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의 앞 절반을 살펴 보았고, 오늘부터는 뒷부분을 볼 것이다.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삶의 본질을 생각하고자 한다. 이제는 실천이다!
2015. 08. 09 주일 낮예배 메시지
제목: 주기도문 강해(6)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1. 주기도문의 상편 내용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비는 앞부분과 우리 곧 땅에 사는 우리들을 위해서 구하는 기도, 곧 양식, 죄 사함, 시험과 악에서 건져주시기를 비는 기도입니다. 상편은 하나님을 위해 비는 기도요, 하편은 우리 자신을 위해 비는 기도입니다. 상편은 원리를 다룬다면, 하편은 실천편을 다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상편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기도로 다시 쉽게 풀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책임져 주신 것처럼 우리를 책임져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던 예수님처럼 저희들도 끝까지 순종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세상 어디에서나 하늘 아래 세상이므로 저희가 어디에 가든지 항상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정한 뜻,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져 이 땅을 통치하심을 믿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자녀들인 저희들을 죄의 종에서 건져주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성령을 돕는 분으로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를 예수님의 형상과 같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셔서 거짓 왕에게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 땅이 아름다운 곳이 되도록 저희를 통하여 다스려 주시옵소서. 저희가 예수님처럼 행동하여 낮은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주님의 세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기도문의 상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통치하시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결단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 땅에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2. 주기도문의 하편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주기도문의 상편에 이어 하편에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늘의 명령인 천명(天命)을 받들어 사는 사람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소원하고 그 나라가 오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를 하편에서 보여줍니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죄 사함을 구하고, 시험과 악에서 구원하여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주기도문의 하편을 함께 공부해 보기를 원합니다.
3.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필요를 책임져 주시고, 우리가 가는 그 어디에나 늘 함께 하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친히 다스리셔서 우리의 왕이 되어주심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주님의 제자들이 자신을 위하여 구하는 가장 첫 번째 요청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6:31). 그런데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의탁하는 신앙인과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자연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고 하늘에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온갖 좋은 것과 선물이 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기다립니다. 그러나 자연인 또는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미래란 자기가 얼마나 준비를 잘 해두는가에 따라서 보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이 쌓아두고 많이 저축해 두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의 인생에서 미래를 대비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을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보여주셨습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6~21)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부요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소유와 그의 보호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4. 이스라엘의 만나, 일용할 양식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살게 된 까닭은 본래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던 길이었기 때문에 광야를 지나간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지낼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 훈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용할 양식 훈련입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다 떨어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난 백성들이 거둘 수 있도록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양식은 조그만 알갱이처럼 생겼는데 빻아 빵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구워서 과자처럼 먹기도 하였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다들 그 하얀 먹거리를 주워 입에 먹어보면서, “이게 뭐지?” 하였습니다. 히브리 말로 ‘이게 뭐지?’는 ‘만나’라고 합니다. 그 만나를 먹을 때는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식구 수대로 정량을 거두되 다음날까지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음 날에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처음 보았을 때, 자기 식구 수보다 더 많이 모았습니다. 먹고 남겨두었다가 내일 또 먹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가정에는 만나를 담아둔 항아리에서 벌레가 생겨 못 먹고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위해서 그 전날에 모은 만나는 벌레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매일 하늘에서 먹거리가 내려온다는 것이 신기하고, 스스로를 위해서 다음날까지 남겨두면 못 먹게 되며,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 전날 남겨둔 음식에 벌레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 광야 체험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신뢰하는 훈련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기에 하나님께 구하는 백성들이며, 스스로의 힘만으로 미래를 다 준비하고 그것으로 안심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5.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만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규정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안식일 전날 이스라엘 백성은 평일보다 두 배나 만나를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가지 말라는 모세의 명령대로 집에서 전날 모아둔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 만나는 이상하게도 벌레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하룻밤만 지나면 만나에서는 반드시 벌레가 끓었는데 안식일에는 밖에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들에 나가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나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세에게 꾸중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불신앙적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정하신 이유는 그 날에 인생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면서 인간의 본분과 근본 목적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삶의 참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며, 소홀해진 가족과의 따뜻한 관계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은 더 풍성해지고 더 만족스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계명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6. 잘못된 생각에 물든 인생
그러나 인간이 욕심에 물들거나 이 세상의 신 곧 물질의 신에게 생각과 마음이 빼앗기면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신이 사람들의 생각을 어떻게 바꾸어버렸는지 봅시다. 다음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하인리히 뵐이 쓴 ‘젊은 날의 빵’-1972년 노벨문학상 수상):
어떤 독일인이 일년 동안 열심히 돈을 벌어 마침내 스페인으로 해외 여행을 떠났습니다. 뜨거운 태양과 정열의 나라 스페인 해변에서 사진도 찍고 푸른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고깃배 한 척이 들어왔습니다. 그 배에는 한 어부가 큰 모자를 눌러쓰고 누워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 독일인 관광객은 어부에게 다가가서 묻습니다.
관광객: “고기는 많이 잡았소?”
어 부: “고기 많이 잡았소.”
관광객: “얼마나 잡았소?”
어 부: “대구 여섯 바리 잡고 고등어 이십여 마리 잡았소.”
관광객: “열 시도 안되었는데 그렇게 많이 잡았소?”
어 부: “그렇소.”
관광객: “아, 그럼 또 가서 열심히 잡지 않고 왜 이렇게 쉬고 있소? 오늘 하루 종일 잡으면 적어도 서너 배는 더 잡을 것 아니겠소? 그러면 곧 얼마 안 되어 당신은 아마 훈제공장도 차리고 유통회사도 차릴 수 있을 거요.”
어 부: “그렇게 해서 훈제공장 차리고 유통회사 차리면 뭐합니까?”
관광객: “아, 그렇게 되면 당신은 직원들에게 다 맡기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와서 바다를 즐길 수 있지 않소?”
어 부: “아, 이보시오. 내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데 당신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요?”
독일인의 마음에는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돈을 벌면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의 어부는 이미 그런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당신이 오기 전까지 나는 이 아름다운 바다를 즐기고 있지 않았소?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제의 침탈과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절대 가난을 경험한 이후로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잘 사는 것이 곧 돈 많이 벌어 비싼 집에서 살고 비싼 차를 굴리며 시간을 내서 해외여행을 하고 골프를 치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오신 분들은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을 보고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 사는지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에서 한국에 온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요? 과연 한국은 천국 같은 살기 좋은 나라요 한국인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까요? 한국을 찾은 수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돌아가는 길에 이 복스러운 나라에 꼭 다시 와 보아야 하겠다고 결심할까요? 아니면 다시는 오고 싶지 않는 나라라고 입술을 굳게 깨물고 돌아갈까요?
돈을 많이 벌어 스페인에 관광을 온 부자 독일인과 스페인의 가난한 어부 이 둘 중에서 누가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요? 더 많이 배우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에 속아 수많은 기러기 아빠들이 오늘도 외로움에 치를 떠는 것 아닐까요?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무슨 사상을 그렇게 반복하여 세뇌를 시키고 있는 걸까요? 우리 어른들 마음 속에 있는 사상은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 사상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요?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우리 인생의 참 길을 다시금 점검해 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참 복락이 무엇인지 성경말씀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고장 난 생각을 고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7. 고장 난 세상이 된 원인
자연에서 뛰놀던 동물들을 동물원 철창에 가두어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상한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것은 동물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코끼리는 혼자서 계속 코를 시계추처럼 흔들고, 타조는 자기와 함께 있는 타조의 깃털을 부리로 쪼아서 뽑아버립니다. 어떤 불곰은 암사자를 물어 죽이고 호랑이는 사육사를 물어 죽이기도 하는 등 난폭해집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동물의 자폐증세라고 합니다.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는 증세를 말합니다. 동물들도 미쳐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점점 정신병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신질환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린이 자폐증, 행동장애, 폭력성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점점 정신세계가 황폐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게임이나 영상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는 눈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누군가를 잘못된 사상과 환상으로 가두면 이런 이상현상이 일어나고 사회와 가정은 고장 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고장 난 사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갖기 원하고, 더 많이 부리기 원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원하고, 더 많은 주목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써도 충분히 갖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늘 불만족이요 감사와 기쁨, 여유로움과 관용은 우리와는 거리가 멀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철창 같은 곳에 갇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지만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만족을 모르면서 자폐증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가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지 못하고 매일 매일 그렇게 살아갑니다. 무엇이 우리를 밤잠을 못 자고 수고하게 할까요? 누가 그렇게 시킨 것입니까? 누가 우리에게 더 많이 가지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우리 마음 속에 가르쳤을까요? 우리는 누구에게 속고 사는 것입니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유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를 얻을 것이다. 너희가 자유하게 되려면 진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진리를 알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8장 32절.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라고 기도할 때, 일용할 양식은 바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진리(眞理)란 ‘참’을 말합니다. 참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거짓에게 속아 살수밖에 없습니다. 참이 아닌 거짓의 것, 참으로 인생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닌 것을 좇아서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에는 먹을 것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좋은 옷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합니다. 남보다 공부를 더 잘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출세하는 것입니다. 더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무지개를 좇아서 달음질 하다 보면 인생은 다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가노라면 인생이 허망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인생은 거짓에 속아 참이 아닌 것을 잡으려고 동분서주하다가 끝나버린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8. 일용할 양식이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은 바로 참이요, 진리요, 생명이어야 합니다. 그 양식이 없으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는 그것입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것(헬. 에피우시온epiousion)을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생존에 필수적인 일용할 양식입니까?
우리를 거짓에게 속아 인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에 속은 인생은 가정과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누려야 할 인생의 행복 대신에 돈과 명성을 얻기 위해 가정의 평안도 희생하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돌볼 틈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도둑맞기 때문입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대신에 무의미한 반복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일종의 자폐증입니다. 미쳐가는 동물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생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은 바로 진리입니다. 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우리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은 참을 발견하고 거짓에 속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 6:48~51)
사람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 곧 떡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2,000년 동안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성찬식 때마다 이 말씀을 읽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먹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떡이 되실 수 있습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은 떡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떡을 먹고 힘을 내서 살아갑니다. 사흘을 굶은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금방 힘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사람은 돈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늘 돈 때문에 쪼들리던 사람도 어디선가 잊고 있던 사람에게서 받을 돈이 통장에 100만원이라도 입금이 되면 무척 힘이 나고 생기가 돌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은 밥을 먹으며, 돈을 먹으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밥이 있고 돈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힘듭니다. 외로운 인생은 살 소망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연인을 찾아 헤매고 다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다 만족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게는 아직도 목마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꼭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왜 사나?”하는 인생 자체에 대한 의문이요 삶의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밥으로도 돈으로도 사람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만나야 비로소 채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채워지는 것입니다. 남녀가 하나되어 만족을 누리듯이, 우리의 영혼이 예수님과 하나되어야만 비로소 안식을 얻을 수 있고, 비로소 힘을 얻을 수 있는 영혼의 배고픔이요 영혼의 목마름을 위해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 양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9. 어떻게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먹을 것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이 떡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을 먹으면서 힘을 내기에 사람은 떡으로 삽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들을 만나면서 힘을 얻기에 사람은 사람을 통한 사랑과 우정으로 삽니다. 그러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통해 힘을 얻고 살 소망을 갖게 되고 기쁨과 평강, 안정감을 갖게 된다면 이는 예수님을 먹는 것이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고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앎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알아갑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그분과의 교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성품과 사랑을 배워가면서 우리는 그분께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삶의 문제들을 의논하고 맡기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을 알아갈수록 우리의 마음에 믿음과 소망 그리고 평안이 채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불안감이 사라지고 안정감이 자리잡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참을 추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은 참 평안을 찾는 유익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좁은 길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을 가려면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짐이 되는 것을 알면 그것을 버리는 것을 힘들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리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가벼운 짐을 지고 쉬운 멍에를 매는 연습을 하다 보면 인생의 쟁기질은 더 쉽고 기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자신의 재산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기회를 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자신의 재물이 자신을 얽어 매고 있던 쇠고랑이요 그릇된 무지개임을 알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던 것입니다. 그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라는 떡을 먹는 법을 터득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3,000년 전에 ‘한나’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남편과 사이에 아이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둘째 부인을 얻어 자녀들을 낳아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의 전 인격과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라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는 장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한나는 한 아이를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온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의 간절한 바람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또 다른 사람, 바울을 소개합니다. 그는 교회를 개척하는 복음전도자요, 그가 쓴 편지들은 신약성경의 절반 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위대한 종에게도 육신에 연약한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는 새로운 가르침이요 깨달음이었습니다. 자신의 질병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하여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욱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질병을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성도들에게 그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고후 12:10).
우리는 어떻게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갑니까? 바울 사도와 한나가 그 대답을 합니다. “문제와 바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 드려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시리니 당신이 구한 것보다 상상치도 못한 일들을 이루시리라.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염려하지 않으리라. 전심으로 기도하라. 전 인격을 다해 주님을 찾으라. 그러면 주님을 만나게 되며, 주님으로 사는 법을 알게 되리라. 주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리라.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끝으로 한 가지 당부를 드립니다. 일용할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를 알고 참을 알아갑니다. 그것은 성경말씀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배우는 과정은 우리의 지성뿐 아니라 전 인격을 동원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길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다하여 평생을 바쳐서 주님을 알아가리라는 결심으로 성경을 배우십시오. 그런 결단으로 설교를 들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배우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설교는 지적 사치나 유희(장난)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생명 바쳐 말씀을 듣고 온 마음을 다해 그 말씀을 받고 전 인격을 바쳐 그 말씀을 따를 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육신의 떡도 우리가 입으로 먹고 우리에게 힘이 되려면 위장과 소장 그리고 온 혈관이 일을 해야 비로소 근육에 힘이 되는 것이거늘, 하물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더 우리의 전 인격과 마음을 다해서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이런 위로를 주십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