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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의 세계
풀과 나무
‘꽃과 나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풀과 나무’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풀과 나무는 대비가 되는 말이지만, 나무에도 꽃이 피고 풀에도 꽃이 핀다. 그러므로 꽃과 나무는 중복되며 논리적으로는 대비가 안 된다. 풀은 곧고 단단한 줄기가 없기 때문에 가을이 되면 모두 시들어 사라진다. 나무는 가을에 잎이 모두 떨어져도 단단한 줄기는 그대로 남고, 이듬해 봄이 되면 줄기에서 새잎이 돋아나게 된다. 그러므로 초목(草木)이라는 표현은 맞지만 꽃과 나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오우가(五友歌) 중의 하나로서 대나무를 주제로 다음과 같은 시조를 남겼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그런데 대나무는 나무인가 풀인가? 대나무는 속이 텅빈 마디로 이루어져 보통 나무와는 구조가 전혀 다르다. 흔히 나무를 침엽수와 활엽수로 나누는데, 침엽수는 가도관(假導管)으로, 활엽수는 도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나무는 도관이 없이 마디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속은 텅 비어 있다. 생장점도 다른 수목은 끝부분에 있어서 계속 자라난다. 그러나 대나무는 생장점이 마디에 있어 절간생장을 하며 부피생장을 하지 못하는 특이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또한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으며 싹이 튼 후 1년에 다 자라버리는 특별한 식물이다. 죽순은 조건이 좋으면 하루에 80cm가 자라기도 하는데, 자라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는 말은 비온 뒤에 대나무순이 쑥쑥 자라는 모습을 비유하는 사자성어이다. 대나무는 한 달 정도 자라면 일생의 키가 정해지며 이후로는 매년 조금씩 두꺼워질 뿐이다. 대쪽 같다는 말은 대나무가 세로로는 잘 갈라지지만 가로로는 쪼개지지 않는 특성에서 나타내는 표현인데 심지가 곧고 타협하지 않음을 뜻한다.
대나무는 꽃을 피워 번식을 하는 것이 아니고, 땅속으로 줄기가 뻗어 나가 죽순을 만들어 번식한다. 대나무는 60년 또는 150년에 한번 일제히 꽃을 피우는데, 꽃이 피면 일대의 대나무는 모두 죽고 만다. 생식을 위해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고 죽기 위해 꽃을 피운다고 말할 수 있다. 꽃이 피는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니, 대나무는 이름은 나무이지만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신기한 식물이다.
늦봄에 화사하고 화려한 색깔로 윤기 나는 비단처럼 진한 적색의 풍성한 꽃이 피는 식물로서 작약과 목단이 있다. 작약과 목단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크기로 비슷한 색깔의 꽃이 핀다. (목단은 화투에 나오는 꽃인데, 화투판에서는 속칭 김지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마 왕년의 영화배우 김지미씨가 풍기는 인상이 목단꽃과 비슷했나 보다. 이왕 화투 이야기가 나왔으니, 화투의 5월 난초는 난초가 아니고 붓꽃이다.) 잘 관찰해 보면 목단은 단단한 줄기가 있으므로 나무로 분류하고 작약은 줄기가 없다는 점에서 풀로 분류한다. 겨울에도 줄기가 남아 있는 것이 목단이라고 단정하면 틀림이 없다.
모든 풀은 꽃을 피운다. 풀은 꽃을 만들고 수정을 해서 험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후손을 남기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겨울이 있는 추운 지역에서 살아가는 식물보다 환경이 좋은 아열대 지역이 원산지인 식물들은 오히려 꽃이 퇴화하여 종자 번식이 어렵다. (사람도 먹고 살기 편하고 어려움이 없는 상태에서는 구태여 결혼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집에서 기르는 난초는 꽃을 보기가 어렵다.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난초를 꽃피게 하려면 고생을 시키라고 한다. 최적의 상태 대신 어려운 환경을 만들어 주면, 난초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죽기 전에 자손을 남겨야 되겠다고 판단하여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꽃이 잘 피지 않는 식물을 은화식물이라고 하는데,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우리 말 속담을 알고 있는 식물인 듯하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자손을 번식하는 것이 생존본능 다음으로 큰 본능이다. 생식을 위해 꽃이 피는 시기가 삶의 절정기이다. 사람도 생물체이다. 남자나 여자나 결혼할 때가 가장 전성기이다. 결혼식장의 신랑과 신부는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꽃이 피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하락한다는 뜻이다. 꽃을 피운 후 식물은 늙어가기 시작한다. 풀의 수명은 얼마일까? 한해살이풀은 겨울이 되면 씨앗만을 남기고 죽는다. 그러나 여러해살이풀은 뿌리가 살아남아서 이듬해에 다시 싹이 트고 잎을 내어 재생을 시작한다.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도 마찬가지이다. 목련꽃은 사람과는 달리 매년 봄마다 예쁘게 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목련꽃은 매년 부활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대중가요의 가사는 그래서 심금을 울린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진다고 서러워 마라
명년 삼월에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만은
우리 인생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채식과 육식
쌀, 밀, 콩 등 우리가 먹는 곡물은 원래 자연산인 풀을 열매를 많이 맺도록 종자 개량한 한해살이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생존은 전적으로 풀에 의존하고 있다. 지구가 먹여 살릴 수 있는 최대 부양인구는 얼마나 될까? 어떤 학자는 30억 명으로서 이미 한계를 초과했다고 주장하고, 어떤 학자는 200억 명으로서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 주장이 맞는가? 해답은 인류가 선택하는 식사법에 달려 있다.
고기를 먹는 육식은 생태학적으로 보면 에너지 낭비적이다. 먹이사슬의 한 단계를 거칠 때마다 단지 10%의 에너지만이 전달된다. 빈곤 문제 전문가인 미국의 라페(Lappe)는 <작은 행성을 위한 식사>라는 책에서 인류가 채식을 할 때와 육식을 할 때에 필요한 경작지의 면적을 조사하였다. 라페에 의하면 한 사람이 온전히 곡물만을 먹고 산다면 60평(200m2)의 면적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고기와 곡물을 섞어 먹으면 4배의 면적이 필요하고, 완전히 육식만을 한다면 50배의 면적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곡물을 먹는 농경민족이 사는 국가, 예를 들면 중국, 인도, 한국, 일본 등은 유목민족인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 같은 면적의 국토에서 먹여 살릴 수 있는 인구가 많다. 즉 농경국가는 인구밀도가 높다. 최근에 이들 국가가 산업화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고기를 더 많이 먹게 되자 지금 세계는 엄청난 식량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식량위기의 해결 방법은 경작지를 늘리거나, 종자개량, 유전자조작 등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 고기 대신 곡물과 야채를 많이 먹는 예전의 식사로 되돌아가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요즘 유행인 비만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 역시 채식이라고 볼 수 있다. 육식을 금하는 불교는 이런 측면에서 매우 친환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웰빙 식사라 하여 채식위주로 되돌아가는 풍조는 생태적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미국에서 재배하는 곡물의 70%는 가축이 먹는 사료로 쓰인다. 지구의 다른 편에서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식량이 부족하여 죽어 가는데, 세계 최대의 식량 수출 국가인 미국에서는 소가 사람이 먹을 곡물을 태연히 먹고 있다. 소는 원래 풀을 뜯어먹고 사는 동물이다. 그런데 소에게 사치스럽게도 곡물을 먹이고, 심지어는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해서 다른 동료의 살과 뼈를 갈아 강제로 먹게 하였다.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이처럼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다 보니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광우병이란 인간이 소에게 동족을 먹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의 보복이라고 볼 수 있다. 소에게 원래의 식사법을 되돌려 주어야 광우병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바이오 에너지
식물에서 에탄올을 추출하여 휘발유 대신 사용하는 바이오에너지가 요즘 유행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값이 싼 바이오디젤(biodiesel: 식물성 기름이나 동물성 지방을 이용하여 만든 연료로서 경유를 대체하여 자동차에 사용할 수 있다.)을 파는 주유소가 등장하였다. 정부에서는 바이오 에너지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배럴당 유가가 100불을 넘나들면서 세계적으로 바이오에너지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바이오에너지는 폭등하는 유가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식물을 사용해서 만드는 바이오 에탄올의 대량생산이 환경보전을 위한 복음이냐, 기아 퇴치의 적신호이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붙었다. 에탄올 생산이 늘어나 원료인 옥수수, 사탕수수, 콩 등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2005년에 1부쉘(27.2kg)에 2달러 하던 옥수수 가격이 2007년에는 4달러가 되었다. 원래 가축사료로 쓰던 옥수수 가격이 폭등하면서 쇠고기를 비롯한 육류 가격이 덩달아 상승하고, 우유와 치즈 등 다른 식품가격도 따라서 상승하게 되었다. (이처럼 농산물 가격이 오르고 연쇄적으로 다른 상품 가격이 비싸져서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을 애그플레이션(agriculture + inflation)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가난한 제3세계 국민들이 곡물을 수입하여 사 먹을 수 없게 되고, 인류는 기아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인 지글러(Ziegler)씨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에서 “곡물을 연료로 전환하는 것은 종말론적이고 인간성에 반하는 일이며 전 세계적인 식량재난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미국, 카나다, 유럽 및 브라질의 바이오연료 생산협회는 지글러의 발언을 비난하고 나섰다. 지구상의 수백만 명이 바이오에너지의 개발로 혜택을 보고 있으며, 점점 고갈되어 가는 석유의 사용을 줄이고 대기오염을 줄일 수 있는 바이오에너지는 좋은 대체에너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엄청난 석유 및 석탄 소비로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몰리는 중국과 인도가 바이오에너지의 생산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식물을 이용하는 바이오에너지는 풍력이나 태양에너지 같은 대체에너지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된다. 이 문제를 생태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식물에서 알코올을 추출하여 자동차 연료로 사용한다는 것은 식물의 존재 이유와는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하여 산소를 공급하고 양분을 만들어 동물에게 제공할 때에 생태적인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볼 수 있다. 식물을 발효시켜 자동차 연료용 알코올을 만드는 것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에게는 편리할 것이나 지구 전체로 보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예상된다. 바이오에너지 문제는 “곡물을 생산하여 사람을 먹일 것이냐 자동차 연료로 사용할 것이냐”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볼 수 있는데, 해답은 분명하지 않을까? 당연히 사람이 자동차보다 더 중요하며, 식량을 연료로 만들면 부자나라 사람들은 혜택을 볼 지 몰라도 수많은 개발도상국가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식물과 음악
동물행동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침팬지를 비롯한 수많은 동물이 사람과 같은 수준은 아닐지라도 어떤 형태의 ‘생각’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동물과 달리 뇌가 없는 식물도 생각을 할까? 덴마크의 식물학자 파울젠(Paulsen)에 의하면 “식물은 볼 수 있고, 더듬을 수 있고, 맛을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중력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우리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식물도 음악에 대해서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1950년 대에 인도의 싱(Singh) 교수는 음악을 듣고 자란 식물이 더 빨리 자라고 건강하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특히 귀리와 콩은 비발디와 모차르트 음악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음악 연구자들은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시끄러운 음악보다 더 효과가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꽃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농촌진흥청의 이완주 박사가 1992년부터 식물의 생육을 촉진시키며 해충의 발생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그린음악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박사 팀은 10평 규모의 온실 3곳에 무, 배추, 당근 등 7종의 식물을 심고 1번 온실에는 그린음악, 2번 온실에는 시끄러운 록 음악, 3번 온실은 무음악 상태로 해서 3개월 동안 실험을 하였다. 실험 결과 그린음악을 듣고 자란 농작물의 성장률이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것은 시끄러운 록 음악을 듣고 자란 무는 뿌리가 갈라지고 터지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때에 사용한 그린음악은 동요풍의 경쾌한 음악에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을 삽입한 것으로서 식물이 가장 선호하는 100~200헤르츠 음역대의 소리가 담겨져 있다.
식물의 중요성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은 식물에 혼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피타고라스(Pythagoras, B.C.582~B.C.496) 학파는 콩에 혼이 머물다가 나간다고 해서 콩을 신성시하고 먹지 않았다. 피타고라스는 도망치던 중 콩밭을 만났으나 들어가 숨지 못하고 그만 잡혀 죽었다고 한다. 플라톤(Plato, B.C.427~B.C.347)은 식물이 가지고 있는 혼을 영양혼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양분을 흡수하고 대사작용을 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혼이라고 보았다.
근대 과학이 발달하면서 식물은 단순히 관찰과 실험의 대상으로서만 간주되고,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을 적용하여 설명할 수 있는 존재로 추락하였다. 식물이 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 비과학적이라고 놀림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식물은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반응을 하며 사람과 통한다고 한다. 식물은 광합성 작용을 통하여 인류를 포함한 모든 동물계에 산소와 식량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광합성을 한다는 자체만 가지고서도 인류는 식물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실리적인 측면에서도 생물 산업은 미래의 중요한 산업이다.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의약품의 80%는 식물 등 천연물질에서 추출되고 있다. 미국의 국립암연구소에서는 열대식물 7천 종으로부터 항암제, 에이즈 치료제 등 생약 성분을 추출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독일의 바이엘 회사는 조팝나무에서 감기약 아스피린을 추출하였고, 엉겅퀴의 씨앗으로부터 간장 질환 치료제를 개발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총 10만 종으로 추정되는 자생 생물이 살고 있는데, 이 중에서 30% 정도만 조사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기록되어 있는 생물은 동물이 1만8천 종, 식물은 8천7백종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자생 식물을 잘 보호하고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식물을 보관하고 연구하는 기초시설인 생물자원관이 수도권 매립지에서 2007년 10월 10일 개관한 것은 늦었지만 매우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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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천시: 풀꽃/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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