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증자 가로대 내가 하루에 세 번 내 몸을 살피노니, 남을 위하여 (일을) 꾀하는데 충성되지 아니했는가?
벗과 더불어 사귐에 신실하지 않았는가? 전함을 익히지 아니했는가?
忠은 中+心 으로 ‘속마음, 가운데 마음, 中正한 마음, 진실한 마음’이라는 뜻으로 군주에 대한 충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忠·信·習은 모두 유학에서 강조하는 핵심 덕목이다. 잎서 2장의 孝·悌가 집안이나 가문내의 관계에서의 인격수양을 위한 仁의 덕목이라면 4장의 忠·信·習은 밖의 사회적 관계에서의 仁의 덕목이다. 공자는 ‘忠信所以進德也(주역 乾괘)’라 하였다.
하루에 3번 자신을 되돌아보는 ‘省’은 공자가 주역 乾괘에서 언급한 ‘終日乾乾 夕惕若厲無咎(종일토록 굳건하게 행하고 저녁에는 위태한 듯 경계하면 허물이 없음이라)’에서 ‘惕若厲’에 해당한다. 공자의 학맥을 이어받아 「중용」을 지은 자사는 이를 ‘戒愼恐懼’로 표현하였다.
증자는 어려서부터 공자의 제자인 아버지(증석)를 따라 공자문하에서 배웠는데 공자는 증자를 처음에는 노둔(魯鈍 : 선진편17장)하다고 평하였다. 이와 관련되어 나온 말이 魚魯不辨(魚자와 魯자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노둔함)이다.
그러나 증자는 다른 제자와 달리 魚魯不辨이라는 주변의 굴욕적인 기롱속에서도 평생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학문과 수양에 정진하며 후학양성에 힘썻다. 이에 논어 편찬작업에 참여한 공자의 재전제자 중에 증자 제자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증자는 특히 공자의 학맥을 이어받아 ‘守約’을 잘하는 것으로 평가받았는데 증자의 저작인 '대학'이 그것이다.
증자(曾子, 기원전 506년 ~ 기원전 436년)
이름은
삼(參), 字는 자여(子輿). 공자는 증자에 대해 “노둔하고(魯하고 / 선진편 17장)”라고 하였으나, 증자는 대학을 지어 공자의 도를 가장 충실히 후대에
전한 제자이다.
증자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인 증석의 손을 잡고 공자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처음에는 魚와 魯를 구별하지 못해 ‘魚魯不辨’이라는 말을 들었다. 송대 학자인 윤돈(尹焞)은 증자의 재주가 노둔한 까닭으로 그 학문이
확실해졌으며, 大器晩成하여 능히 깊이 도에 나아갈 수 있었다며
증자를 높이 평가하였다.
증자는
孝를 가장 잘 실천한 제자 중의 하나로 맹자는
그의 효를 ‘養志’라고 하였다. 태백편 제3장에 이러한 그의 효가 잘 나타나
있다. 증자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제자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啓予足하며 啓予手하라 詩云戰戰兢兢하야 如臨深淵하며 如履薄氷이라 하니 而今而後에아 吾知免夫와라 小子아(내 발을
열며, 내 손을
열라. 시에 이르길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며 조심하고 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하는 것같이 하며 얇은 얼음을 밟는 것같이 한다 하니 이제야 내 불효 면함을
알았노라, 제자들아!)”
공자가
孝經에서 말한 “身體髮膚는 受之父母니 不敢毀傷이라야 孝之始也라(몸과 터럭과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치 말아야 효의 시작이라)”를 잘 실천한 인물이다. |
① 朱子
盡己之謂忠이오 以實之謂信이라 傳은 謂受之於師요 習은 謂熟之於己 라 曾子 以此三者로 日省其身하여 有則改之하고 無則加勉하야 其自治誠切이 如此하시니 可謂得爲學之本矣요 而三者之序는 則又以忠信으로 爲傳習之本也
자기를 다함을 충(忠)이라 이르고 실질로써 함을 신(信)이라 이르니라. 전(傳)은 스승에게 받은 것(가르침)을 이르고, 습(習)은 (배운 것을) 자신에게 익힘을 이름이라. 증자가 이 세 가지로써 날마다 그 몸을 살펴서 반성할 바가 있으면 (不忠, 不信, 不習함을) 고치고, 반성할 바가 없으면 (해오던 바에) 더 힘써 그 스스로를 다스리는 정성의 절실함이 이와 같으니, 가히 (얻어) 배움의 근본으로 삼았다 일컬으며, 세 가지의 순서는 (곧 또한) 충신(忠信)으로써 가르침을 받고 익히는(傳習) 근본을 삼았음이라.
② 尹氏
曾子는 守約이라 故로 動必求諸身이시니라
증자는 지킴에 요점을 간략히 하셨느니라. 이에 행동함에 반드시 그 몸에서 구하셨느니라. 守約:道를 실천하는데 있어 불필요하거나, 불만이 섞이거나, 군더더기 말과 행동 없이 중요한 점만 간략히 하여 빠르게 함 諸:‘그’ ‘저’라는 뜻의 어조사는 ‘저’로 발음, ‘모두’라는 뜻일 때는 ‘제’로 읽음
③ 謝氏
諸子之學이 皆出於聖人이나 其後에 愈遠而愈失其眞이로대 獨曾子之學은 專用心於內라
故로 傳之無弊하니 觀於子思孟子면 可見矣라 惜乎라 其嘉言善行이 不盡傳於世也니 其幸存而未泯者를 學者 其可不盡心乎아
제자들의 학문이 다 성인(공자)에게서 나왔으나 그 후에 더욱 멀어지고 더욱 그 참됨을 잃었으되 유독 증자의 학문만이 오로지 안(공자의 가르침)에 마음을 썼느니라. 이에 傳함이 떨어지지 아니했으니 자사와 맹자를 관찰하면 볼 수 있느니라. 애석하도다. 그 아름다운 말과 善行이 세상에 다 전해지지 못했으니, (그) 다행히 보존되어 없어지지 않은 것을 배우는 자가 어찌 (그) 마음을 다하지 아니할 수 있으랴!
愈 더욱 유 弊 닳다, (옷이)해질 폐 泯 빠질 면, 여기서는 ‘없어질 민’
<家苑
註 3> 주자와 유학의 부흥 중국은 漢代 이후 유학이 국학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송대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도가와 불교가 매우 흥성하였다. 하지만 유학만을 정통으로 여긴 주자는 도교와 불교에 맞서 유학 경전을 사서삼경 체제로 묶고 유학을 성리학 체계로 정리하여 부흥시켰다. 이후 사서삼경은 위정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수과목이 되었다. 주자는 증자와 자사의 글인 대학과 중용을 예기에서 독립시키는 한편 이를 맹자⋅論語와 함께 四書로 묶어 集註(집주)를 달았다. 이어 시경에 집주를 달고 주역에는 本義를 달았으며, 서경은 제자인 채침(蔡沈)에게 註를 달도록 유언을 남겼다. 주자는 사서 집주 곳곳에서 공자의 학맥이 ‘더욱 멀어지고 참됨을 잃어간’ 현실을 개탄하고 있는데, 주자를 비롯한 송대의 유학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간 제자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이유이다. |
출처 : 『논어 易解』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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